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69화 (269/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69화>

***

“···”

미치겠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 뜯었다.

물론 그런다고 안 나오던 글이 뚝딱 튀어나올 리는 없었다.

‘커피··· 커피가 필요해······.’

흐느적거리며 커피를 울부짖었지만, 커피가 있을 턱이 없었다.

핑계에 불과했다.

《정여립전》이후 벌써 세 달.

글이 안 나온다.

작가의 고뇌란 이런 걸까?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에도 겪지 않았던 내적갈등을 겪는다.

또 한 번 표절 말고 모방을··· 읍읍!

“후.”

머리를 쥐어 뜯으며 장장 한시진을 더 흘려보냈다.

“대감마님.”

“어, 덕산이냐?”

“네. 승정원에서 나리들이 찾아 오셨습니다요.”

승정원에서 나리들이 찾아온 건, 패초 밖에 없다.

나는 반가운 손이라도 찾아온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선발로 방을 뛰쳐나갔다.

이건 좋은 핑곗거리다.

그래.

이제 글을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다.

안과 못의 차이는 극명한 법.

입궐해야 되는데 글을 어떻게 써?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쳐나가자, 못 보던 얼굴의 승지 한 명이 고개를 조아린다.

“대감. 전하께서 특별한 사정이 없으시다면 국사를 함께 논하셨으면 하신다 하여······.”

“얼른 갑시다!”

“예?”

“전하께서 부르신다 하지 않았소. 얼른 가야지!”

“아, 예.”

떨떠름해 하는 승지를 따라 입궐했다.

승지는 나를 편전으로 안내했고, 편전에는 이미 많은 대신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진성이 왔구나.”

모르다시피 원래 편전에는 의자가 딱 하나 있다.

어좌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지?

형님께서는 의자를 하나 더 들이셨다.

내가 편전에 입시해서 서있는 게 마음에 쓰이셨다면서 말이다.

“앉거라.”

오늘 내일 하시는 노신들도 서서 읍(揖)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형님이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형님께서는 이 의자를 통상 원좌(元座)라고 부르셨는데, 무슨 뜻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래. 정여립전 이후 소식이 뜸하던데 작문에 막힘이 있는 것이렷다?”

수십이 넘는 대신들을 병풍으로 세워놓고 한가롭게 형제 간에 회포나 풀고 있으면, 예전에는 나도 눈치가 보였지만 이제는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졌다.

사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 대신들이 외려 불편해한다.

그래서 나는 정말 편하게 원좌에 늘어지게 앉고는, 형님의 귓속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쉬운 줄 알았는데······.”

차기작은 정말 쉬울 줄 알았다.

여기 사람들 보다는 저 세상에서 풍월로 건너 들은 게 많을 테니 그걸 모티프로 집필을 할 수 있겠다고 여겼으니까.

근데 쉽긴 지랄이 쉬워?

3달째 놀고 있다.

“나도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보니, 때때로 감흥이 일면 일필을 끄적이는데 이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더구나. 하지만 막힘이 있으면 뚫림도 있는 법이니 필시 정여립전에 버금가는 글씨를 쓸 수 있을 게다.”

여담인데 여기 사람들은 집필을 종종 글씨 쓴다라고 표현한다.

“뚫리면 다행이긴 하겠는데요··· 아, 한데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네가 글에 막힘이 있듯 국사에 막힘이 있으니 불렀다.”

“말씀하십쇼.”

“들었겠다만 내 잡곡 100만석을 곤궁한 백성에게 식곡하려 한다. 한데 너도 알다시피 100만석이면 비록 잡곡이라도 적은 돈이 아니지.”

“그렇지요?”

곡식 중에서는 백미가 가장 으뜸이고 그 다음이 잡곡이다.

그래서 쌀 농사를 짓는 백성들도 일부러 잡곡으로 교환해서 한 해를 보낸다.

그게 더 싸게 먹히거든.

잡곡 100만석을 백미로 일시에 교환하면 못 해도 백미 30~35만석의 가치를 지니니까.

불과 몇 년 전 호조 예산이 80만석 정도 였던 걸 감안하면 잡곡 100만석은 겁나 많은 액수인 건 틀림이 없다.

“원래는 이 100만석을 각지의 수령방백들에게 획하하고 곤궁한 형편의 백성에게 식곡하려 했다만 너의 뜻은 어떠한가 해서 불렀다. 너는 원체 잡다한 지식을 갖고 있으니 100만석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아 말이다.”

형님에게 나는 과대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실상은 개뿔 아는 거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형님이 질문하셨으니 답은 해야 한다.

‘100만석이라······.’

내가 언제 한 번 말한 적 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나는 지금 세계 부호 순위의 한 20위권에 랭크 됐을 거라고.

그런 나에게도 100만석은 적잖은 돈이다.

‘이걸 팔도에 획하하면 딱 눈 먼 돈이네.’

눈 먼 돈도 이런 눈 먼 돈이 없을 것이다.

당장 내 잔머리로도 편법 하나가 떠오른다.

아전 놈이 까막눈인 백성 몇 사람 데려다가 식곡 신청을 하는 거다.

그리고 그 돈은 아전 놈이 꿀꺽.

이게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다.

팔도에 획하한다고 해도 이걸 수령방백들이 일일이 관리 할 순 없다.

한 고을에서만 수백명이 신청을 할 텐데 이걸 어떻게 수령들이 판별하겠나.

결국 실무진, 그러니까 아전의 힘이 절실하다.

그럼 그 아전은 신청서를 작성해주는 댓가로 소정의 수수료를 요구 할 수도 있다.

식곡 받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사실 손해 볼 것도 없다.

기존의 이자는 5할인데 형님이 빌려주는 건, 그 10분의 1 수준인 5푼이다.

50%의 이자가 5%로 감해지는 건데, 거기서 조금 떼준다고 해도 손해 볼 게 전혀 없거든.

오히려 대출 승인(?) 된다는 보장만 있으면 수수료를 지불할 용의가 있을 거다.

당장 생각나는 편법만 이 정도인데, 잔머리 하나로 수령들 찜쪄 먹는 아전들이니 아마 더한 편법들을 생각해내겠지.

이렇게 되면 100만석 중에 최소 30만석에서 최대 50만석은 애꿎은 놈들 뱃속으로 들어갈 거다.

이걸 방지하려면 중앙에서 개입해야 하는데, 그럴 인력이 있겠나?

없지.

‘게다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허공에 뿌리는 거나 다름이 없고······.’

말했다시피 잡곡 100만석은 절대 적은 액수의 금액이 아니었다.

당장 이 돈을 허공에 뿌리면 1가구 5인 가족이라는 가정 하에 최소 10만에서 최대 15만 가구의 사람들이 1년 동안 놀고 먹을 수 있는 돈이니까.

‘어떤 사업 같은 거에 투자하면 딱인데.’

물론 구휼이 목적이라 그건 안 되겠지만.

골똘히 생각하는 와중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형님.”

“말하거라.”

“제가 듣기로 앞으로는 고리를 놓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2할로 영정한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맞다.”

“그 일환으로 이 100만석을 사용하는 거기도 하구요?”

“뭐, 비슷하지.”

“근데 이걸 일시에 팔도에 획하해서 뿌린다고 한다면, 2할로 영정하는 법이 10년 뒤에도 지켜지겠습니까?”

“10년 뒤?”

“네. 물론 지금 당장은 지키겠죠. 서슬 퍼런 시국이니까요. 또 이 100만석이 일시에 뿌려지면 올해는 아사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5년 뒤, 10년 뒤에는요? 결국 백성들은 또 빚을 내야 할 겁니다. 빚을 내려는 사람이 10명 밖에 없다면 너도나도 2할에 꿔주려고 하겠지만, 그 수가 100명, 1000명이라면 몰래 법을 어기고 2할 이상을 받으려 하겠죠. 솔직히 말해서 이걸 단속하는 것도 어렵구요.”

이건 진짜 어렵다.

지방은 특히 폐쇄적이다.

문기로는 이자를 2할로 적시했어도 구두로 그 이상을 받아내면 단속할 방법이 없다.

설령 단속을 했다손 치더라도 어느 고리대금업자가 문서에는 2할로 적시했는데 사실 그 이상 쳐받고 있다고 자백하겠나?

“사실 그 문제 때문에 널 부른 것이기도 하다. 아까 말했다시피 너는 잡다한 지식을 갖고 있으니 혹 묘안이 있을까 해서 말이다.”

내가 천재는 아니지만 이 문제 만큼은 확실하게 묘안을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은행이 딱입니다.”

“으, 은행?”

“네. 여러 사정을 따져보면 이 은행만한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은행이 무엇이냐?”

아, 그러고 보니까 여기선 은행이라고 안 한다.

은행을 대체할 말은 금방 떠올랐다.

“전점(錢店) 말입니다.”

“전점을 만들라?”

“네. 이 전점을 각 도마다 하나씩 놓는다면 어지간한 산간벽지에 사는 백성이 아니고서, 어찌 고리대금업자 한테 돈을 빌리려 하겠습니까? 지금 빚이 있는 사람도 전점에서 빌려서 저리로 갈아 탈 수도 있을 테구요. 그러면 이자 문제는 가볍게 해결 되지 않겠습니까?”

머리에 총 맞지 않고는 50%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이율을 제시하는 사채업자보다 5%에 불과한 국립은행에서 빌려가려 하겠지.

채무자들이 너도나도 국립은행에서 돈을 빌려가면, 사채업자들도 울며겨자 먹기로 이율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거고.

“하지만 보통 백성들이 돈을 꾼다 함은 식곡을 의미하는데 그 전점이란 것을 도의 감영(관찰사가 있던 관아)에 놓는다면 감영과 멀리 떨어진 고을의 백성은 전점이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되지 않겠더냐?”

운송을 염려하신 것 같았다.

경기도를 예로 들자면 감영은 서대문과 지척에 있지만 이천 같은 데서 돈을 빌리려면 결국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이런 문제까지 생각하면 화폐가 딱인데 지금 화페 만들면 쫄딱 망하기 십상일 거다.

“각 고을에서 식곡 대상자의 신청을 받고, 한 번에 그 고을로 옮겨준다면 조금은 쉬워지지 않겠습니까?”

“한번에?”

“네. 예를 들면··· 이천현(利川縣)에서 식곡을 받는 사람의 신청을 받고, 이걸 경기감영에 올려보냅니다. 이천현에서 원하는 곡식이 모두 200석이라면, 이걸 경기감영에서는 관군을 부려서 한번에 운반을 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건 다시 이천에서 분배를 하도록 하고?”

“네. 이렇게 하면 좀 더 장기적인 측면에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럴 듯 하다. 네게 묻길 잘 했다. 경들은 들으라!”

“···”

“내 전점이란 것을 만들 것이니 속히 논하여 계달하라.”

진성 솔루션이 제법 도움이 된 것 같아 흐뭇하다.

***

一.

<장리로 식곡하지 못 하게 하다>

「···하니 식곡은 곧 민가의 폐해가 된 지 오래였다. 이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많으니 전하께서 특지를 내리시기를,

“앞으로 장리를 놓아 백성의 고혈로 화식하는 자는 장리(贓吏)라 여기고 그 자손들은 금고(禁錮)에 처하고, 당사자는 목을 베어 그 고을의 관아에 효수하리라. 또한 주변에 아무개가 장리를 놓는다는 사실을 듣고 알게 되었는데도 이를 관에 고발하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에 의거하여 장 1백대로 다스릴 것이다. 이자는 2할을 넘지 않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장리 때문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정덕(正德) 2년 5월 7일 중용월보 주필 김구오.

二.

<지대를 2할로 영정하다>

「전교하시기를,

“우리나라의 폐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릇 지대만큼 더한 폐해가 없다.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빌려준 이에게 그 댓가를 지불하는 것은 지극한 도리겠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를 악용하는 자들이 많으니 지대는 소출의 2할로 영정한다. 이를 어긴 자는 위와 같이 다스린다.”

하셨다.

이 역시 장리처럼 폐단이 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내려진 분부였는데 전하의 은혜가 과연 하해로도 부족하다.」

정덕 2년 5월 9일 중용월보 주필 김구오.

三.

<내탕고에 있는 돈으로 사은원(賜恩院)을 만들다>

「···하므로 내탕고에 있는 잡곡이 모두 102만석이었는데 전하께서 이를 모두 팔도에 획하하시려다가 사은원【사은원은 곧 송나라의 전점인데 관아의 이름에 돈 전(錢)자를 붙일 수 없으므로 고심하다 임금의 은혜를 받는다 하여 사은원으로 결정이 되었다】을 만들어 곤궁한 백성을 구제하기로 하셨다. 사은원은 팔도에 지원(支院)을 두고 5푼의 이자를 받고 식곡하니 사가의 고리에 비할 바가 아니며, 이달 말 각 도에 설치를 시작해 준공되는 즉시 구휼을 펼친다고 한다」

정덕 2년 5월 10일 중용월보 편집장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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