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68화 (268/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68화>

***

“시, 신이 어찌 감히··· 신이 눈앞의 이문에 잠시 눈이 멀어 전하의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 하였나이다. 과연 생각해본다면 이를 불사르고 대외에 포고한다면, 민심의 이반을 막을 수 있을 테니 이는 일석이조······.”

“어찌 이리 아둔하단 말인고. 내 단순히 민심이 이반할까 채권문기를 모조리 불사르라 명하겠더냐! 그 이자는 백성들의 피눈물이 담긴 돈이다. 내 어찌 그 돈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당장 불사르고 채무가 있는 백성들이 모두 알게 하여라.”

“···예.”

“또 적몰한 백미 74만석과 잡곡 28만석은··· 흐음.”

너무 많은 액수라 어떻게 써야할지 역시나 감이 안 잡혔지만 무릇 돈이란 건 없어서 못 쓰는 거지, 있으면 어떻게든 쓰는 법이었다.

“어찌 하오리까?”

“백미 50만석만 서울로 운송시키도록 하고, 나머지 백미 24만석은 모두 잡곡으로 교환하라. 시중가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작년 기준으로 백미 24만석이면, 족히 잡곡 70만석과 교환 할 수 있을 터이니, 합이 100만석에 이를 것이다. 이건 팔도에 획하(劃下)하고 수령방백들에게 일러 곤궁한 백성들에게 환곡(빌려줌)케 하라. 그 이자는 5푼(5%)으로 상정하되, 환곡은 형편이 정말 곤궁한 이들에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혹 이 돈을 눈 먼 돈이라 여기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수령방백과 아전이 있다면,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나의 뜻을 훼손한 것으로 알고,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산 채로 그 가죽을 벗겨버릴 것이니 알아서 받들게 하라.”

“부, 분부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

“말이 나와서 말인데 지금 팔도의 지대가 평균 얼마이냐?”

“5할인 줄 아옵니다.”

“지대를 5할 씩이나 내니 역적 놈들이 배를 이리 불려댔지.”

“···”

“앞으로 지대는 2할 이상 받지 못 하도록 법을 제정해야겠다.”

“하, 하오나 그리 했다가는 재지사족들이 반발을······.”

쾅!

“어떤 반발 말이냐!”

“소, 송구하오나 여, 역모가 발생 할 수도 있사옵니다······.”

이번 옥사도 옥사지만, 사실 옥사란 기득권들의 이익에 해가 갔을 때 발생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물며 지대를 2할 이상 받지 못 하도록 하는 법을 마련해버리면, 놈들의 눈깔이 뒤집힐지 몰랐다.

물론 융이라고 그런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다.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언감생심, 입 밖에도 안 꺼냈겠지만······.

피식.

“이런 특지에 옥사가 일어나면 그 수가 설령 1만에 달하건 10만에 달하건 모조리 그 목을 쳐버릴 것이다. 그러니 빈청에서 논하게 하라.”

“···예.”

“백성들이 사사로이 사족들에게 돈을 빌릴 경우의 이자는 얼마인가? 5~6할이던가?”

“그러하옵니다.”

“갚지 못 하면 어찌 되는 것이냐?”

“보통 자매(스스로를 내다 팖)하기도 하지만, 슬하의 자식들로 변제하옵니다.”

“에라이, 때려죽일! 지대도 5할 씩이나 받아 쳐먹고, 이자도 5할 씩이나 받아 쳐먹으면 백성들은 뭘 먹고 산단 말이냐? 이러니 초근으로 연명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

“앞으로는 이자도 2할 이상 받지 못 하도록 법을 따로이 만들 것이니 마찬가지로 빈청에서 논하게 하라!”

“그, 그리 하겠나이다.”

“물러가라.”

잔뜩 겁 먹은 노공필이 물러가고 침전에 홀로 남게 된 융은 당초 계획한 대로 막대한 재물을 손에 넣게 되었음에도 마음 한구석이 씁쓸한 기분이었다.

이러니 너도 나도 돈놀음을 하는 모양이다.

돈이 돈을 낳고 그 돈이 또 돈을 낳으니, 이것들이 경전을 외는 것이 아니라 주판알 튕기기에 급급했던 게 아닌가.

“에라이!”

생각 할수록 열불이 뻗쳤다.

이것들은 지대를 5할씩 받아 쳐먹으면서도 소작들한테 한껏 거드럭거렸을 터였다.

이자를 5할 씩이나 받아 쳐먹으면서도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면서 빌려줬을 테고, 이제 이 지대와 채권문기를 통해 지방 백성들을 좌지우지 했을 것이다.

수 틀리면 지대를 올려버리고, 고분고분 제놈들 말을 듣지 않으면 저놈이 돈을 떼먹었다 관에 고발하고.

아주 갖은 방법으로 괴롭혔겠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성현의 말씀은 니미럴!”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상선! 상선 밖에 있느냐!”

“예, 전하. 불러 계시옵니까.”

“나석수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내수사의 노비로 삼은 뒤, 아직 특별한 분부가 없으셔서 지금은 금부 남간에 있는 줄 아옵니다.”

“금부로 갈 것이다, 채비하라!”

“이, 이 시간에 말이옵니까?”

“얼른!”

“예!”

부랴부랴 상선이 채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융은 금부에 행차했다.

금부를 지키는 나장과 군사들이 임금의 행차에 깜짝 놀라 부복했지만, 그는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나석수를 불러 오라고 한 뒤 뜰에 앉혔다.

“너는 나주 백성들에게 얼마의 돈을 꿔줬느냐?”

그리고 다짜고짜 물었다.

야밤에 다짜고짜 불려온 나석수는 다짜고짜 묻는 임금에 황당해하다가, 곧 본인의 처지를 떠올리곤 있는 그대로 말했다.

“6, 64석이옵니다.”

“백미만 64석을 빌려준 것인가, 잡곡을 64석 빌려준 것인가?”

“자, 잡곡이옵니다.”

“너는 이자를 얼마나 받기로 했더냐?”

“6, 6할이, 이옵니다······.”

“6할?”

“그, 그러하옵니다.”

열불이 뻗친 융은 한차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몇 명에게 빌려 준 것이냐?”

“기, 기억이 맞다면 스물 네명이었을 것이옵니다.”

“기억이 온전치 못 한 듯 하니 네 명을 감하고 스물에게 빌려줬다고 치자.”

“예? 아, 예.”

“6할이니 얼마인가, 120이구만.”

“···?”

영문을 몰라하는 나석수에, 융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상선에게 손을 내뻗었다.

상선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품안에서 육모방망이 하나를 꺼내 건넸다.

그리고 육모방망이를 손에 쥔 융은 그 이후에······.

퉤!

“그 이자는 내가 대신 갚으마.”

퍽! 퍽! 퍽!

***

나석수가 전날에 120대를 난장 맞고 앓아 누운 다음 날, 빈청.

“그게 참말입니까?”

허침의 물음에 의금부지사 김응기(金應箕)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말이고 말고요. 나장들도 벌벌 떨 정도였다 하니 말 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나장들은 볼 꼴, 못 볼 꼴을 다른 이들 보다 더 생생히 겪는다.

그런 나장들이 질릴 정도면 과연 말 다 한 셈이었다.

“나석수는 어찌 됐답니까?”

“명줄이 붙어 있기는 한데··· 글쎄요. 그 정도면 병신불구더라도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 아니겠습니까?”

“《서경(書經)》의 익직(益稷)편이 떠오르는군요. 면종후언(面從後言)이라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이는 작태가 이 고사와 다를 게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는 복종하는 척 하지만, 뒤에서는 속된 말로 뒷담화를 늘어 놓는다는 사자성어중 하나였다.

“면종후언이라 할 것 까지 있겠습니까. 다들 놀란 마음에 황망하여 화두에 올린 걸요.”

“그쯤하면 된 듯 하니 전하께서 하교하신 일이나 논하십시다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축에도 못 끼는 노공필은, 한차례 박수로 분위기까지 환기시키며 지금 빈청에 모인 목적이 후언에 있지 않음을 상기시켰다.

“전하께서 하교하신 일이니 봉행하는 것이 신하로서 온당한 처사겠습니다만 갑자기 나라법을 고쳐서 소작료와 이자를 영정(永定)해버린다면은 복심에 원한을 갚는 자들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지부사, 정말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는 말이지요?”

“비망기(備忘記)가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제가 어찌 감히 있지도 않은 어명을 사사롭게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허침이 침음을 흘리자 대사간 김굉필이 끼어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자가 높은 건 사실입니다.”

김굉필의 말을 받은 건, 대사헌 김전이었다.

“대사간의 말대로 높긴 하지요. 백성들이 고리(高利)에 신음 한다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고금에도 장리로 식곡(대출)하여 화식(재산 증식)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국초에도 이게 문제가 되긴 했지만 지금까지 폐하지 못 한 게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이걸 영정하게 되면 필시 악감정을 품는 자들이 속출할 겝니다.”

“우상. 하지만 전하의 뜻이 완강하시다지 않소이까?”

“청묘법은 어떻습니까?”

청묘법은 송나라 시절 시행된 법이었다.

민간의 고리대금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많아지자, 조정에서 백성에게 저리로 곡식을 빌려주던 제도였었다.

“하지만 청묘법을 팔도에 시행 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송나라도 잠시 섬서 등지에서만 시행하다가 폐지했구요.”

“그럼 결국 남은 수는 전하의 말씀처럼 영정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다 민란이라도 발생하면······.”

허침은 생각만으로도 아찔한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 허침에 임사홍이 말했다.

“민란이 우려스럽긴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잠 못 담그는 것도 아니고 전하께서 깊은 뜻으로 빈청에서 의논하라 한 듯 하니 따름이 온당할 듯 합니다. 더군다나 이자를 낮추면 그 혜택은 고스란히 백성이 입게 되고, 백성의 삶이 윤택해지면 국고도 그만큼 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 그런 게지요. 송나라에서는 왜 고리업자들을 박멸하지 않고 교묘히 청묘법을 시행했겠습니까? 민심이 이반하면 그만한 악재가 없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좌참찬(안윤덕)께서 말씀하시는 민심은 어떤 민심이오? 좌참참찬도 당연히 충정 어린 마음 때문에 이같은 말을 한 거겠지만은, 사실 전하의 특지에 명분이 없는 건 아니지 않소이까.”

“그렇긴 합니다만 소인은 그저 모반이 일어나면 전하께 해가 될까 하는 마음에······.”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를 빼먹었습니다 그려.”

노공필이었다.

“뭘 말입니까?”

“이 사람도 이자를 영정하면 민심이 이반해 자칫 역모가 발생 할 수도 있다고 간언했는데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말씀하시길?”

“역모가 일어나건 말건 개의치 않는 눈치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입에 담기도 두렵습니다만, 옥사의 관계자가 1만이건 10만이건 모조리 그 목을 쳐버릴 거라 하셨습니다.”

“···”

“그리고 지금 같은 시국에 설마 역모가 일어나겠습니까? 지방의 사족이란 사족은 전부 다 옥사에 연루가 됐는데요. 그들에게 적몰한 노비만 3만에 가깝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무슨 힘이 있어 역란을 획책하겠습니까?”

노공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방에서 역모를 계획 한다는 건, 대단히 어렵다.

대단히 어려운 와중에도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있는 건, 지방의 절도사들과 손을 잡고 또 노비들을 훈련시켜서 한달음에 상경해 왕을 사로 잡는 정도인데 이번에 역적들에게 적몰한 노비가 정확히 26,771구였다.

역적의 조부와 부친들이 속전으로 내겠다는 노비도 4천 구가 넘었으니 3만구를 살짝 웃도는 수였다.

지금 당장은 역모를 획책하려 해도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흠.”

“어차피 전하께서는 이자를 영정하는 것에 대해 확고한 뜻을 가지고 계신 듯 하니 언제고 시행 될 법입니다. 그렇다면 재지사족의 힘이 빠진 지금이 적기 아니겠습니까?”

“지부사의 말이 일리가 있소이다.”

여기저기서 노공필의 의견을 지지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공론이 이런 듯 하니 내 무슨 힘으로 막겠습니까. 이자 문제는 이리 전하께 계달드리도록 하고, 지대는······.”

“지대는 오히려 이자 문제 보다 더 문제 될 게 없을 겝니다.”

“무슨 말씀이신가, 제예?”

“재지사족들의 근간은 본시 땅과 노비에 있습니다. 이들은 땅과 노비로 위세를 부렸지요. 하지만 지부사의 말씀처럼 적몰된 노비만 3만이니 그들은 어떻게든 소작을 구하기 급급할 겝니다.”

이 역시 일리 있는 추론이었다.

비록 역적들에게 8만결이 넘는 전토가 적몰 됐다지만, 역적의 가족들이 소유한 모든 전토가 적몰 된 건 아니었다. 반면 노비는 꽤 많은 수가 적몰되거나 속전으로 바쳐졌으니 싫든 좋든 소작을 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소작을 일시에 구하려는 자들이 수천에서 수만은 될 텐데 그들이 이전처럼 지대를 5할로 바치게 하라면 어느 누가 그 땅을 소작 지으려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내수사전으로 편입 된 전토만 10만 결입니다. 너도나도 내수사전의 전토를 농사 지으려 할 테니, 그들로서도 땅을 놀리거나 본인들이 농사 지을 게 아니라면 지대를 낮출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니 지대를 2할로 영정한다고 해서 어떤 반발이 있겠습니까?”

“과연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네.”

어차피 이자와 지대를 2할로 영정하는 건, 답이 정해진 정책이었다.

그저 오늘 당장 시행하느냐 내일 시행하느냐의 문제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