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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65화 (26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65화>

    ***

    “헉! 헉! 전하께선 괜찮으시겠지요?”

    노구의 몸으로 아직 젊은 임금의 걸음을 고작 잰걸음으로 따라가기란 무리였다.

    임금의 뒤를 바짝 쫓지 못 한 것도 불충이라면 불충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몸이 안 따라주는 걸.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원흉(?) 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공필은 입에서 단내를 풀풀 풍기며 저만치 멀어져가는 임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헉! 헉! 괜찮으시길 바랄 수 밖에요.”

    임금이 괜찮냐는 의미는 옥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이건 옥사다.

    난옥(亂獄)도 수십명이 비명에 가는데 하물며 이번 옥사는 역옥(逆獄).

    그 수도 무려 4700명에 육박한다.

    말이 4700명이지, 공사천을 한데 아우른 4700명이 아니었다.

    사족만 4700명이었다.

    그리고 그 4700명이 모두 역적의 굴레를 쓰게 된다면, 사족의 씨가 마를지도 몰랐다.

    어쩌면 잰걸음으로 바삐 임금의 뒤를 쫓고 있는 대신들 절반 역시 역적의 가족이라는 혐의로 좌천되거나 사사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임금의 의중을 알고 있는 임사홍과 노공필이야 큰 걱정 없이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다른 대신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한가득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대신들은 땀에 절어 광화문에 도착했다.

    광화문에는 이미 임금이 도착해 있었는데 손에는 철퇴가 쥐어져있었다.

    “전하. 어찌하실 참이온지······.”

    임금의 손에 들린 철퇴에 학궁 때의 일이 떠오른 대사성 이점의 뺨에 식은 땀 한방울이 쪼로록- 흘러내렸다. 그는 미처 볼가를 간질이는 땀방울을 소매로 훑어낼 생각조차 못 하고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쓱- 돌린 임금이 씨익- 하고 웃어보였다.

    편전에서 역적 놈들이라 길길이 날뛰던 임금과는 상반 된 표정이었다.

    “대사성이 보기에 내 어쩔 것 같은가?”

    “신이 불민하여 어지가 어떠한지 헤아리지 못 하겠사옵니다.”

    퉁퉁-.

    임금은 철퇴를 바닥에 몇 번 내려찍었다.

    그 가벼운 액션만으로도 어지가 어떠한지는 짐작이 됐다.

    자연히 그려지는 참상에 이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참의!”

    임금이 병조참의로 승차한 안처직을 불렀다.

    아까 전 조회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안처직은, 웬일인지 갑주 차림으로 등장했다.

    “예, 전하!”

    “여민락을 울린 연후에 효시를 쏘아 올리도록 하라.”

    “분부 받들겠사옵니다.”

    임금의 입에서 효시란 단어가 떨어지자, 아직도 헐떡거리며 호흡을 고르던 대신들이 웅성거렸다.

    대신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져갈 무렵.

    쒸애애애액-!

    효시가 허공을 갈랐다.

    둥! 둥! 둥!

    대신들의 고개가 획- 하고 돌아갔다.

    광화문에 종고(鍾鼓)는 있어도 전고(戰鼓)는 없다.

    그런데 들려오는 북소리를 보자면 전고가 분명했다.

    효시에 북소리까지 이어지자,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수문군들과 함께 광화문을 지키고 있던 봉해위의 위사들이 한달음에 성곽으로 올랐다.

    그들은 일사분란했다. 일사분란하면서도 군기가 있었다.

    그런 그들이 성곽에 오르더니 시위에 살을 걸었다.

    비단 성곽만이 아니었다.

    광화문 아래와 경복궁 담장으로 어디서 나타난지 모를 위사 수백이 도깨비 문양이 새겨진 장방패를 들고 나타났다.

    성곽의 궁수들.

    담장의 팽배수들.

    팽배수의 뒤를 받치는 살수들.

    절로 오금이 저리는 모습에 웅성거리던 대신들의 입이 잠잠해지던 즈음.

    임금이 철퇴를 꾹 쥔 채 광화문의 층계를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느긋하게, 그리고 태연하게.

    그런 임금의 모습에 대신들이 슬로우모션이란 영화 기법을 알 리가 없지만, 대신들에게 비친 임금의 모습은 꼭 그랬다.

    대신들이 효과음이라는, 마찬가지로 미디어 매체의 기법을 알 리가 없었지만 대신들의 귀로는 장엄한 효과음이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임금이 광화문에 올랐다.

    “왕이 이른다.”

    4700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나는 지금 너희를 역률로 다스릴 것이다.”

    웅성웅성.

    “전하. 신 강원도에서 상경한 강 아무개 아뢰옵나이다. 어찌 그런 두려운 말씀을 하시오는지 신들은 알 길이 없사오······.”

    “네놈이 회릉을 회묘라 칭하고 종친들 중에 아무나 택일해 옹립할 계략을 품었던 강범경이란 말이렷다?”

    강범경의 안색이 사색으로 질려갔다.

    “그, 그게 어인 말씀······.”

    “금군갑사와 위사들은 들어라!”

    "···"

    “저 역적 수괴는 필히 생포해라! 내 직접 국문할 것이다! 또한 나머지 잡것들도 모조리 추포하라! 저놈들이 지금 반역을 일으킬 적당한 때를 노리고 있다가, 갑자기 일을 당했음에 발작을 할지 모르니 저항하는 자는 참해도 좋다!”

    라고 말한 융은 안처직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안처직이 크게 소리쳤다.

    “역적도당들을 한놈도 빠짐없이 추포하라!”

    둥! 둥! 둥!

    전고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지자, 광화문과 육조거리 일대가 곧 아비규환으로 물들어갔다.

    ***

    “야.”

    “상병 김말동!”

    “너는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상병이냐? 몇 살이야?”

    “열 일곱입니다!”

    “엑? 열 일곱?”

    나는 잠시 입대 시기를 계산 해봤다.

    최소 15~6살 때 입영 열차··· 아니, 입대를 한 거다.

    “열일곱이면 저 세상(?) 나이로는 고2네. 와.”

    “예?”

    “아, 혼잣말.”

    “예!”

    “특진 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15~6살에 입대해서는 상병을 달 수 없다.

    아,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면 내 앞에 있는 이 녀석 위사다.

    봉해위 위사.

    내가 만들고 내가 훈육한 봉해위.

    그런데 봉해위는 그 수만 자그마치 1000명이 넘는다.

    내가 아무리 이들을 훈육했어도 일일이 기억 할 수는 없단 말이지.

    아무튼, 특진 빼고 이 녀석이 상병 달 수 있는 근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예!”

    “무슨 공 세웠는데?”

    “궁고도에서 적추(賊酋)를 생포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와, 이 자식 지금 보니까 베테랑이었네. 상도 받았겠네?”

    “전하께오서 백미 10석을 하사해주셨습니다!”

    끄덕끄덕.

    “제대는 언제냐?”

    봉해위의 위사들은 별충위와는 조금 다르다.

    별충위는 애당초 사족의 자제들로 구성이 돼서, 난리가 끝나고 난 뒤에는 그들을 묶어 둘 구심점이 없어서 소수만 남게 되었지만 봉해위는 전부 다 남게 되었다.

    애당초 봉해위 자체가 별충위랑은 다르게 상비군으로 조직 된 군부대였으니까.

    의무 복무 기간도 당연히 존재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총 72개월, 그러니까 6년을 복무 해야한다.

    고작(?) 21개월 복무하는 대한민국 예비역이 본다면 기함할 노릇이지만 여기서는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다.

    6년의 복무를 끝내면 부역에 동원되지 않는 면역과 면세 혜택이 주어지고, 삼성에서 다달이 0.5석씩 연금을 지원하거든.

    이런 혜택들 때문에 사실 봉해위는 금군들 보다 충성심이 더 깊기도 하다.

    좌우지간.

    “이제 40개월 남았습니다!”

    2년 약간 못 되게 복무한 모양이었다.

    나는 갈 길이 구만리인 말동의 어깨를 토닥거려줬다.

    그리고 그때.

    쒸에에에엑-!

    창졸간에 들려온 효시음이 귓전을 파고 들었다.

    형님께서 말씀하신 그 효시음이다.

    “덕산아!”

    “예, 대감마님!”

    “문 걸어잠궈라.”

    “예!”

    효시음이 들려오자 나이 때문인지 어리숙해 보이던 말동도 눈을 빛낸다.

    봉해위의 위사인 말동이 우리집에 있는 건, 내 신변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형님께서는 사전에, 광화문에 모여있는 씹선비들이 역모를 일으킬 거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효시음을 신호로 광화문 일대가 혼란스러워질 테니 절대 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씀도 해주셨었다.

    그러면서 보내주신 게 말동을 포함한 위사 50명과 금군 40명이다.

    거기에 행랑 식구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150명에 이르는 장정들이 우리집을 지키는 셈인 거지.

    “하여간 이것들은 만족이란 걸 몰라요, 만족이란 걸. 툭하면 역적질이나 하고 말이야.”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그러겠어?

    지금은 4월로, 파종 시기다.

    21세기 대한민국이야 4월이건 7월이건 딱히 어느 때를 꼬집어 국정이 바빠진다고 할 순 없겠지만, 여기는 파종 시기가 곧 국정이 제일 바빠질 때다.

    농부들만 바빠지는 게 아니라 위정자들도 바빠진단 말이지.

    특히 삼남에 수리시설 확충 공사를 하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바빠 질 수 밖에 없다.

    이 4월 한 달 간은 위로는 정승에서부터 아래로는 말단 서리까지 눈코뜰새 없이 바빠지는 거다.

    근데 그런 4월에 상경했다.

    이거 분명히 노림수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4월에 상경해서 생떼쓰면 조정에서 가뜩이나 바쁜데 씹선비들이 떼거지로 몰려와서 떼를 쓰니 들어줄 거라 생각한 거지.

    국정을 담보로 한 시위랄까.

    좌우지간, 이것도 배때지가 불러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일반 농민들은 뼈 빠지게 일 하고 있을 시기에 상경한 거 보면 말이지.

    여러모로 절레절레인데, 가장 화가 나는 건 이놈들 때문에 여울이랑 데이트도 못 했다.

    원래는 오늘 할 생각이었다.

    여울이는 열기구가 재밌었는지, 지금까지 데이트 코스에 빼놓지 않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오늘도 탔어야 했는데 이 역적 놈들 때문에 여울이가 고대해 마지 않던 열기구를 못 타게 됐으니··· 아니, 그건 둘째치고.

    모처럼 쉬는 날인데 신배 얼굴도 못 보고 있다.

    여울이랑 신배는 지금 입궐한 상태다. 혹시 씹선비들이 우리 집에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형님께서 불러 들이셨거든.

    꼭 씹선비들이라서가 아니라 여러모로 개새끼······.

    쾅쾅!

    씹선비들을 씹고 있는 그때.

    밖에서 대문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뭐야?”

    문틈 구멍으로 바깥을 살펴본 덕산이 말했다.

    “도망친 역적들 같은뎁쇼.”

    “얼마나 모여 있는데?”

    “대여섯 명 되는 것 같습니다요.”

    쾅쾅!

    “대감! 진성대군 대감! 소인들 좀 살려주십시오!”

    “제발 소인들 좀 살려주십시오, 대감!”

    “대감! 대감! 제발!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간곡하게 청하옵니다!”

    후.

    살려달란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의 우려대로 해코지를 하러 온 씹선비들인가 했는데 구명 받기 위해서 찾아온 씹선비들 같다.

    울먹이는 목소리에 나도 사람인지라 살짝 동정심이 일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괘씸하네?

    역적질 하다가 난리가 일어나니까, 결국 도망친다는 곳이 우리집 아냐?

    여기가 무슨 삼한시대 때 죄지은 사람들이 도망쳐도 못 잡았다던 소도야 뭐야?

    괘씸하잖아, 일단 형님이 날 총애한다는 사실에 우리집만 들어오면 살 거라는 생각 한 거 아냐.

    “어떡할깝쇼?”

    “어떡하긴. 대꾸하지 마라.”

    잔인하지만 다 자업자득이다.

    ***

    보통 위관(委官)은 의정대신들 중 한 사람이 임명된다.

    원래대로였다면 허침, 채수, 임사홍 이 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임명 됐어야 맞는 일이지만 이번 옥사에서는 달랐다.

    “크흠.”

    의금부.

    노공필은 무릎 꿇려진 죄인들을 바라보며 한껏 거드럭거렸다.

    죄인의 생사여탈권을 본인이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디 보자······.”

    거드럭거린 것도 잠시.

    공필은 추안을 들여다봤다.

    추안에는 죄인의 본관은 물론이고 부친~증조의 성명과 이력, 그리고 죄목과 공초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나석수라. 아, 그치로구만.”

    “소, 소인을 아시옵니까?”

    “알다마다.”

    나석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한줄기 빛이라도 발견한 것 마냥, 포승줄에 꽁꽁 묶여 있음에도 팔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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