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62화>
***
“경과 상의없이 일을 획책한 게 섭섭한가?”
모두가 퇴궐한 야심한 시각 강녕전.
임금의 물음에 임사홍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어찌나 세차게 손사래를 쳤는지, 사모까지 떨어뜨릴 뻔 했다.
“신이 어찌 감히······.”
“혹여라도 섭섭함을 갖고 있을까 이른다.”
“하교하소서.”
“만고의 충신인 경을 앞세우지 않은 것은 경이 이번 일로 고꾸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경도 알겠지만 허통은 민감한 사안이다. 오죽하면 선왕의 치세에 서얼을 잡과에 진출하게 하냐 마냐로 논쟁이 오갔겠더냐? 한데 어찌 이런 일로 경을 고꾸라 뜨릴 수 있었겠어?”
“신이 미처 깊은 어지를 헤아리지 못 하였으니 이는 신의 불찰이옵니다. 망극하고 또 망극한 일이나이다.”
“경과 상의 없이 일을 벌인 것 역시 이 때문이다. 경은 본시 충심이 깊어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면 내 아까 편전에서 허통을 논했을 때, 찬동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조보로 나갔다면 어찌 됐겠는가?”
사홍이 IF는 알 리가 없었지만 만약은 알았다.
그리고 만약 임금의 말처럼 그게 조보로 나갔다면 어찌 됐을지는 안 봐도 눈에 훤했다.
그에게는 예전부터 타이틀처럼 붙는 별명이 있었다.
간신 내지는 소인이다.
그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임금의 총애를 산 지금은 곱절로 소인이란 소릴 듣는다.
가뜩이나 소인이라 불리는데 임금의 말처럼 서얼 허통을 찬동했단 사실이 조보로 나갔다면 최악에는 집에 칼 든 불청객이 찾아 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노공필은 다르지.”
“···”
“노공필은 한심한 인사다. 내 그의 명줄을 붙여 놓은 것이 이런 날을 예견했기 때문은 아니다만, 장기판의 졸과 같은 인사이니 어찌 이런 일에 소용이 없겠느냐? 오늘 고꾸라지든 내일 고꾸라지든 상관이 없는 인사란 소리다.”
소모품 같은 존재란 뜻에 금방 수긍이 갔다.
노공필은 간에 붙고 쓸개에 붙는 자였다.
“좌상.”
“예, 전하.”
“이건 좌상만 알고 있어야 한다.”
사홍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특지가 떨어질 지도 몰랐다.
다만.
“크흠. 이건 민망한 일인데······.”
“···?”
“김구오란 사관을 기억하는가?”
기억을 더듬은 사홍이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시 세간의 화제였던 사건을 모를 리가 없었다.
사관이 기방을 들락거렸다가 모리배들과 시비가 붙어 파직 된 일이니 어찌 기억을 못 할까?
“내 예전에 김구오 그자에게 청해 선왕의 사초를 슬쩍 훔쳐 본 일이 있다.”
특지고 나발이고 화들짝 놀란 사홍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딱히 엿듣는 귀는 없었다.
상선을 빼면 말이다.
“경이 내 생모의 폐비를 반대하던 구절이 생생하다. 생모를 구함하려는 세력이 오직 경 밖에 없었으니 결국 경은 그 일로 선왕의 신임을 잃고 세간에 간신이라 불렸다. 그런데 이번 일까지 더해져 추문에 시달리게 한다면 내 어찌 마음에 개운함이 남아 경의 면상을 대하겠는가?”
“전하······.”
“좌상.”
울먹이던 사홍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미 폭군의 짓을 여러번 저질렀다. 세인들이 현달하다 말하는 선비를 여럿 고꾸러뜨렸고 유능한 재사를 때려 죽였으며, 직언을 참소(讒訴)라 일컫고 이름난 재상들을 고신하고 사사시켰다.”
“그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사옵니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내 그들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리 한가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
“나는 지금 과분하게도 경과 여러 재신들의 도움을 받아 백성들에게 성군이라 불리고 있지만, 사족들에게는 폭군이요 암군이다. 그러니 후세에 간신적자들이 권력을 잡는다면 필히 폭군이라 기록 될 테지.”
“간신적자들이 정권을 잡을 일은 추호도 없을 것이옵나이다.”
“사람의 일도 한치 앞을 내다 볼 수가 없는데 하물며 국가의 일을 내다본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니 혹여라도 간신적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필히 폭군이라 기록 될 테지.”
“···”
“물론 간신적자들이 남긴 후세의 평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오로지 충정으로서 폐비의 일을 말린 경이 간신으로 후세에 기록 된다면 내 어찌 저승에서 편히 지낼 수 있단 말인가? 이번 일로 경성의 대부와 지방의 재지사족(일종의 토호)들에게 돌을 맞을 위인은 나와 지부사로 족하다. 그러니 경은 이 일에 한치의 의심과 서운함도 갖지 말고, 경의 당여들이 알아 들을 수 있게 설명하라. 다만 내 의중대로 일이 진행 됐을 때, 그때 비로소 행동하라. 알겠는가?”
“크흑! 전하의 치세에 있었던 태평성대는 만세에 이르도록 회자 될 것이나이다!”
“그럴 것이다. 그리 만들 것이다.”
***
전라도 나주.
사정터(활쏘기터)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과거에 뜻이 있는 사람도 취미로나마 익히는 게 활쏘기였으니 사정터란 사실 팔도 어딜가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유일무이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 사정터에 나주의 재지사족들이 한가로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개중에, 부쩍 추워진 날씨에 귀를 귀마개로 꽁꽁 싸맨 장년인이 시위를 당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문제인 게지.”
퉁-!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곧 과녁에 꽃혔다. 장년인의 노비로 보이는 이가 멀찍이 떨어져있다가, 화살이 과녁에 꽃히자 후다닥 달려가 깃발 하나를 올려보였다.
관중(貫中)이라 써진 깃발이었다.
과녁에 관중시켰다는 점에 어깨를 으쓱거린 것도 잠시.
예의 장년인은 몸을 돌려, 다른 구간에서 시위를 당기고 있는 자들을 흘겼다.
모두 서자와 얼자들로 구성 된 무리들이었다.
“저것들 좀 보게. 평소에는 우리가 사정터에 있으면 알아서 내빼더니 주상의 특지가 전해지자마자 보란 듯이 사정터를 지키고 있지 않은가? 무엄하기 짝이 없는 놈들. 저것들을 허통시킨다니 주상이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했겠나?”
“흐읍. 입조심하게, 조정에는 주상에 교언하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니라던데, 여기도 혹시 모르지 않은가.”
장년인은 벗의 농에 피식거리며 느긋하게 시위에 살을 걸었다.
“차라리 들으라지. 말이 나와서 말이네만 주상의 기행이 한 두 번이었나? 아니, 기행은 차라리 이해라도 하지. 하지만 주상의 폭정이 극에 달했음일세. 직언은 멀리하고 구언은 아예 구하지도 않으니 파륜한 놈들(스님)이 말하는 말법시(종말)도 이와 같진 않을 걸세.”
“그건 동감하네. 주상이 보위에 오른 뒤로 비명에 간 선비들이 어디 한 둘이겠나? 족히 수백은 될 걸세.”
“수백이 뭔가? 수천은 될 테지.”
끄덕끄덕.
“지금 보면 현달한 선비는 주상이 모조리 잡아 족치고 있네. 그래야 폭정에 명분이 서기 때문인 게지. 당장 지난 번 일을 상고해보게나. 친정에 나가는 재물을 구하겠답시고 사족들을 때려잡더니 하다못해, 제 손으로 종친들까지 때려잡았네. 이게 제정신인 임금이 할 짓인가?”
“그뿐인가? 당장 중요월보를 보게. 그걸 주상이 어찌 윤허했는지··· 허, 참. 요새 상것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신문을 돌려 본다지 않은가?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것들이 세상물정을 알게 되었으니 말법시는 말법시지.”
예의 귀마개 사내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모두 다 차치하고, 학궁을 철폐한 건 어쨌던가. 임금이 제 손으로 학교흥(學校興)을 폐했으니 이는 경연을 폐지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말이네.”
“그때 들고 일어났어야 함일세. 현달한 선비를 주상이 모조리 족쳐버리니 구심점이 없어 들고 일어나지 못 한 게 한이지.”
역옥(逆獄)과 난옥(亂獄)이 일었을 때, 그 화마는 나주라고 비껴가지 않았다.
명부에 이름 올린 자들의 친인척들도 줄줄이 엮여서 귀양가거나 목숨을 잃었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내 학풍을 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무함인 줄 알았고 나중에는 필시 뜻있는 선비가 나타나 주상께 간언 한 줄 알았네. 한데 간언은 무슨······.”
“임금의 폭정에 뜻있는 선비들도 죄 사라진 게지. 이런저런 죄목으로 죄다 잡아 족치니 어찌 두려움이 없겠어? 선왕 때가 그립네. 선왕께서는 성군이셨거늘 호부견자라더니 그 말이 딱 아닌가?”
한 번 불평불만이 나오자, 곧 시국에 대한 불평이 봇물 터진 듯 터져나왔다.
그렇게 사정터의 한량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임금을 씹었다(?)
***
갑작스럽게 내려진 서얼 허통에 대한 특지.
이를 임금의 폭정으로 인식하면서 학을 떼고 있는 건, 나주의 재지사족들 뿐만이 아니었다.
경상도 대구의 한 사정터.
“명중이구만!”
육포를 질겅질겅 씹던 사내가 명중을 외치자, 활을 회수하던 청년이 멋쩍은 듯 피식 웃었다.
“이번에 새로 장만한 건데 과연 쓸만하구만.”
“각궁이랬던가?”
벗이 묻자 청년은 각궁을 들어보이며 끄덕거렸다.
“거금 들였겠구만.”
“거금이 웬 말인가? 소작 놈들 지금쯤 피똥 싸고 있을 걸세.”
청년의 농에 주변의 벗들이 낄낄 웃어제꼈다.
“천자문의 천(天)자도 제대로 못 쓰는 것들이 조보(신문)를 돌려보니 그런 사달이 난 게지. 다 자업자득인 걸세.”
“암. 내 놈들을 친히 불러다가 친철하게 조보를 돌려 보는 자들은 지대(소작료)를 올릴 거라 단언을 했는데도 몰래 보다 걸렸으니 자업자득은, 자업자득이지.”
청년이 주변의 벗들과 함께 낄낄 웃어 제끼기도 잠시.
별안간 불쾌한 일이라도 떠올랐는지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닐세. 자네들도 조보를 받아 보니 알겠네만 서얼 허통이라니··· 미천한 것들이 출사 하는 게 무지몽매한 소작 놈들이 조보를 돌려 보는 것과 무에 다르겠나?”
“암. 그렇고 말고! 임금이 아니라 백정이 따로 없네. 틈만나면 사람을 족쳐대더니 이제는 나라법까지 족쳐대려 하지 않은가? 패륜도 그런 패륜이 없지, 서얼금고에 대한 법령을 제정한 게 선왕 아니신가. 그런데 그 자식이란 사람이··· 쯧쯧.”
차마 임금더러 상놈의 새끼란 말을 할 순 없었는지 청년의 벗은 쯧쯧 혀를 차며 말끝을 흐렸다.
다만 어딜가나 담력이 월등한 사람은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 《정여립전》을 보아하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 해 호곡하는 장면이 있지 않던가. 자네는 왜 상놈의 새끼를 상놈의 새끼라 부르지 못 하나?”
피식.
“이거, 임금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하네.”
“임금이 실성한 거야 무오년에 멀쩡한 사람들 족쳤을 때부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 않았던가.”
“그때는 이렇게 실성하진 않지 않았는가? 무릇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법인데 임금 다운 임금이 없으니 신하가 웬 말인가?”
끄덕끄덕.
벗들이 불평불만 토로하던 즈음.
새로 장만했던 각궁을 자랑한 예의 청년이 마침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왜 그러나?”
“내 처가 나주에 있지 않던가.”
“그런데?”
“내 얼마 전, 처남에게 서간을 하나 받았는데 글쎄, 나주에서는 사족들이 똘똘 뭉쳐 상경할 거라더구만?”
상경이란 말에 벗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사, 상경? 그러다 그 상놈의 새끼가 철퇴라도 휘두르면 어쩌려고?”
“그 백정이 기십 정도 때려 잡는 거야, 파리 목숨처럼 여기겠네만 그 파리가 일천이 된다면 어쩌겠는가?”
“일천?”
“상경해서 천인소(天人疏)를 올릴 거라더군.”
“천인소가 뭔가?”
생경한 말인지 벗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그대로 유생들 천 명이 연명해서 소를 올린다는 게지.”
“호오··· 과연 기발한 생각이긴 하네. 제아무리 사람 잡길 파리 잡듯 하는 임금이래도 천여명이 상경해서 상소하면 어쩔 텐가?”
“맞네. 내 처남의 서간을 받고 나서 처음에는 깜짝 놀랐네만 과연 자네와 같은 생각이 들었네. 게다가 천인소라니··· 여태 이런 적은 없었으니 필히 임금도 당황하고 특지를 거두겠지. 학궁이 철폐 됐을 때 움직였다면 더 좋았을테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듯 보여 나는 나주 사족들과 뜻을 함께 하려하네만··· 어떤가, 자네들도 동참할 텐가?”
청년의 벗들은 잠시 골몰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랏님 뒷담화는 아낙들도 한다.
물론, 오늘은 좀 과하긴 했지만 연명소를 올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뒷담화의 실천이니까.
선왕의 시절이었다면 이름 한 줄이라도 남길 수 있는 일이니 어찌 망설이겠냐만, 금상은 수 틀리면 때려 족치고 보니 그게 신경쓰일 수 밖에 없었다.
벗들이 망설이자 청년은 쯧쯧 혀를 찼다.
“아까 그 기백은 다 어디로들 갔는가?”
“확실히 천명이 동참하는 건 맞는가?”
“말이 천인소지, 처남 말론 교분이 있는 의사들한테는 모조리 서간을 돌렸다고 하네. 어쩌면 만인소가 될 지도 모르지.”
“상경은 언제쯤 예상한다던가?”
“조정이 한참 바쁠 때가 언제겠나, 파종할 때 아니겠나?”
“4월?”
끄덕.
구미가 당기는지 이곳저곳에서 ‘그럼 우리도 빠질 순 없지’ 라는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