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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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신이 노구의 몸으로 지난 세월 쌓은 공이 하나 없음에도 감히 종사를 논해보자면 오직 아득한 마음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조종조 이래 서얼을 억압하였습니다. 태종대왕께서는 역적 정도전의 일로 서얼이 현직에 종사하는 것을 금하셨고, 선대왕께서는 《경국대전》 반포하시면서 법령으로 정하였습니다···중략. 옛말에 이르기를, ‘사족은 잡록을 인용치 말라’ 하였습니다만 지금의 세태에 이르러 신이 잡록을 인용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우연히 《정여립전》을 보니, 정여립이 정 대감에게 ‘나는 서얼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 하고 어찌 대감이라 불러야 한단 말입니까?’ 호곡(號哭)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서얼의 금고를 풍자하는 것입니다. 서얼의 금고는 분명한 선왕의 법령이므로 가벼이 여길 수 없겠습니다만 어찌 애석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신이 또 한 번 망령된 일언(逸言)으로 종사의 앞날을 걱정한다면, 우리나라는 국초 이래 적서의 분별과 그 차별이 매우 엄합니다. 그래서 일단 서얼이 되면, 그 낙인이 찍혀 제아무리 현능(賢能)한 자라도 사판(仕版)에는 끼지 못 하게 되니, 비록 선왕의 뜻은 천만번 옳다 할 수 있겠습니다만, 선왕의 시절에는 과연 명신들이 많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명신들이 과장을 들락거렸으나 지금의 세태는 오직 잡배만 과장을 들락거리니,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이는 선비의 기조가 선대왕 시절과는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무릇 선비라 함은 여러 덕을 갖추고 개중에서도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충(孝忠)하여야 하는 것인데, 지금의 선비라 불리는 잡배들은 오로지 입신양명과 사리사욕, 일시의 쾌락에 눈이 멀어 있으니 드디어 과장이 잡배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 혹자는 이 말이 아득한 말이며, 일리가 없다 하겠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성균관이 바로 그러했지 않습니까? 아아! 지금 과장은 잡배의 소굴이 되었고, 명신은 드물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재를 어디서 찾아야하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가 단조롭고 매우 박하니, 고작 열 사람에게서 인재를 찾고 있는 격입니다. 마땅히 백 사람에게서 인재를 찾아야만 합니다. 서얼을 허통하소서. 서얼을 허통한다면 백사람, 천사람의 인재가 과장을 들락거릴 것이니 어찌 그 격이 높아지지 않겠으며, 조정과 종사가 태평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노구의 몸으로 나라에 쌓은 공이 전혀 없으므로, 이 뜻만은 관철시키고자 감히 도끼를 들쳐메고(持斧) 소를 올립니다. 비답이 어려우시겠거든, 금군을 부려 이 도끼로 신의 목을 치소서.」
정여립전의 저자인 구사가 알고 보니 진성대군이었다는 사실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지부사 노공필이 올린 지부상소로 조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다른 게 아니라 지부상소는 목숨을 건 상소였다.
먼저 날이 바짝 선 도끼를 지참한다.
그 다음 승정원에 목욕재계해서 작성한 상소문을 전달하고, 광화문 같은 데서 멍석을 깔고 임금이 비답을 내려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한마디로 본인 뜻을 관철 시켜주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이 도끼로 목을 쳐 죽여 달라는 게 바로 지부상소였다.
때문에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올리지 않는 게 지부상소였다.
세인들의 공감을 사지 못 하면 오히려 비웃음을 살 수도 있었고, 임금이 이를 오히려 악용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지부상소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부사 노공필이 올렸다.
나라에 쌓은 공이 전혀 없진 않아도, 그 성격은 매우 편협하고 장사치처럼 잇속을 챙기기 급급하며, 인심은 각박하고 기회를 물색하는 일이 잦으며, 언제라도 제 말을 번복 할 위군자라는 게, 바로 노공필에 대한 세간의 평이었다.
당장 최근의 일만 생각해도 그는 기회주의적인 면이 다분했다.
역적의 조정에 기웃거렸고, 왕이 그 사실을 알자 넙쭉 엎드리며,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왕의 노여움이 가시길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런 인물이 이런 과격한 상소를 올렸다니 어떻게 보면 정여립전의 저자 구사가 알고보니 진성대군이란 사실 보다 더 충격적인 일에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서얼허통이라니······.
뜬금없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기존 노공필의 성격을 생각하면 조정에서 공론화되기 전까지는 아예 입도 뻥긋 안 했을 것이다.
왕에게서 입방정을 자주 떤다며 신언복까지 하사받았던 그지만, 평소의 노공필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한다.
그런데 서얼허통은 민감한 사안 정도가 아니었다.
이미 선왕이 법제화했고, 지금까지 잘 지켜져온 법령이었다.
그런 화두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노공필이 지부상소로 하여금 공론화시켰으니 대신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애석하게도 대신들에겐 충격에서 헤어나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편전.
“내 지부사가 설마 도끼를 지참하고 상소를 올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만, 기신(노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서둘러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얼허통은 가(可)한가?”
서얼허통 어떠냐?
물었음에도 대신들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쉬이 충격에서 헤어나오기가 어려운 것이리라.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허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들도 지부사가 갑자기 과격하게 상소하여 조정에 분란을 일으킬 줄은 몰랐사옵니다. 다만 전하께서 하문하시니 답하건대 《대전》에 서얼은 ‘문무관과 생원진사과의 시험에 참예하는 자격이 없다’ 라고 하였으니, 가부 자체만 가리자면 불가한 줄로 아뢰옵나이다.”
라고 말한 허침에 융의 표정은 뜨뜻미지근했다.
그러자 용안을 살핀 사홍이 말했다.
“영상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조정과 산천을 호령하는 것은 전하이시니, 그 의중이 우선인 듯 하옵니다.”
“노공필이 비답이 없다면 마땅히 금군을 부려 제 목을 쳐달라고까지 하였는데, 이는 그만큼 급박하고, 노공필이 서얼에 대한 생각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또, 생각해보면 서얼을 금고하는 것이 오랜 기조였긴 했다만 전례에 아주 없지도 않은데다 영상이 그리 말하면 좌찬성(유자광)이 얼마나 무안하겠는가?”
아닌 게 아니라, 무령군으로 봉군(封君)까지 받은 유자광이 서얼 출신이었다.
허침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터뜨렸다.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이 남면(임금이 앉던 자리)하여 정치를 듣는데 이를 믿고 따를 것은 오직 정승이다’ 하였사옵니다. 지금 전하께오서 정승과 재상들을 의중(믿고 신뢰함)하여 이같은 하문을 하시니 재상의 한 사람으로서 몸둘 바를 모르는 감격이옵니다만, 좌상의 말처럼 조정과 산천을 호령하시는 것은 오직 전하이시니, 오직 전하의 뜻에 달렸사옵니다.”
“언사의 으뜸인 홍문관의 장관인 대제학(김감)이 그리 말하니 교(敎)하자면, 나는 불가한 일은 아닌 듯 하다.”
불가한 일은 아니란 말에 편전이 장터처럼 시끌벅쩍해지진 않았지만, 대신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느낌표가 떠올랐다.
왕당파의 주축이랄 수 있는 임사홍과 김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금상은 확실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임금의 치세에 옥사는 수차례 일어났고, 이 모두를 평정시켰다.
거기에 더해 금군정예들이 항상 임금을 숙위하고, 궐과 지척인 곳에는 봉해위와 별시위가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반정이 일어날 수도 없는 구조지만, 설령 일어난다 한들 조기에 진압 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얼 허통은 민감한 화두다.
왕이 일부러 조정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까닭이 아니라면, 노공필의 지부상소는 얼렁뚱땅 넘어가야 맞는 것이었다.
한데 서얼 허통이 불가하진 않다니······.
역시나 충격의 도가니탕에 빠져버린 대신들이었지만, 대신들에겐 충격에서 헤어나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지부사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본다면, 공신의 자제라고 현달하고 정승의 자제라 하여 현능하겠는가? 아니다. 내 대국의 일을 언급하기 싫다만, 중국에서는 비록 노비의 신분이라도 과거에 급제하면 크게 쓰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노비는 둘째치고 서얼들을 모두 억압하니 국초에는 온당한 일이었으나 이것이 지금은 가한 일이란 말이냐?”
“···”
“물론 경들의 우려를 안다. 노공필의 말처럼 허통을 하여, 서얼들이 출사할 길이 열리게 된다면 장래에 기율(紀律)이 문란해지는 폐단이 있을 수 있고, 사대부와 서얼을 혼용하여 기용한다면 장차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만백성의 어버이다. 너희도 모두 자식이 있으니 알겠지만, 열손가락을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으며, 자식의 몸에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다 하여 내치는 부모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다더냐? 국가의 일도 이와 같다. 백성이 옥(玉)의 재능을 갖고 있다 하여 귀히 여기고, 백성이 돌(石)만도 못 한 재능을 갖고 있다 하여 내친다면, 이게 무슨 나라더냐? 짐승의 의리도 이와 같진 않을 것이다.”
“···”
“하물며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난리와 옥사를 당해 인재가 시급한 실정이 아니냐? 그런데 저 사람은 돌 같은 신분이라 하여 내치고, 저 사람은 옥의 신분이라 하여 귀히 여긴다면 장차 이 나라의 백년대계는 누구에게 맡긴단 말이냐? 나는 본시 덕이 없어 패악을 일삼는 일이 많았다. 다행히 그대들 같은 명신들을 만나, 어찌 어찌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만 세자의 치세에는 간신이 발호할지 모르니 옥석을 가릴 형편이 아닌 것이다. 나의 뜻이 이러한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고?”
끔뻑끔뻑.
누군들 입을 열 수가 있을까.
왕당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도파 대신들도 눈만 끔뻑거렸다.
다만.
“대사간 김굉필 아뢰옵나이다.”
“말하라.”
“서얼을 허통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선왕께서 법령으로 지정하신 지엄한 영(令)이셨사옵니다. 그런데 여러 세대가 흐른 것도 아니고 작금에 그 령을 거둔다면은······.”
“나는 경에게 태사의 칭호를 내렸다. 경이 지은 죄가 여럿 있음에도 제자를 잘 육성하였기에 태사의 칭호를 내린 것이다. 그러니 경에게 묻겠다.”
“하문하소서.”
“경은 지금 나의 신하인가, 선왕의 신하인가?”
꿀꺽.
“나의 신하인가, 선왕의 신하인가!”
“두 임금에게 성은을 받자왔으니 어찌 선왕에게 더 충심이 있고, 성상께 충심이 더 있다 단언 할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은혜로 치면 내가 선왕보다 더 한 은혜를 내렸을 것이다.”
“···”
무언이 곧 긍정이었다.
실제로 죽을 위기에서 구사일생 시켜준 건, 금상이 맞으니까.
“자, 경들은 허통을 가감없이 말해보아라. 내 이를 구언(바른 말을 구하던 일)이라 여기고 벌하지 않을 것이다.”
구언이라 여기고 벌하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이미 김굉필도 무안을 당한 일이었다.
허침마저 침묵하던 그때.
임숭재가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왔다.
“신 예흥청 제예 임숭재 아뢰옵나이다. 신이 찬찬히 우리나라의 실정을 살펴보면, 대부란 족속들은 물론이거니와 장사치로서 조금의 부를 얻은 자들일지라도, 첩실을 두고 있는 이가 열에 여섯은 되옵니다. 이 말은 즉슨 열에 여섯은 서자와 얼자를 슬하에 두고 있다는 말이 되옵니다.”
“맞다. 경의 말이 참으로 맞다.”
“그런데도 국초에 서얼의 허통이 문제 된 것과, 선왕께서 서얼을 금고케 한다는 법령을 정하신 것은 역적 정도전 때문이옵니다. 만약 역적 정도전의 일이 없었다면 어찌 선대왕들께서 이같은 논의를 하셨겠으며 대부들이 따랐겠사옵니까? 그러나 지금은 진실로 전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인재가 간절한 형편이니 옥석을 가릴 처지가 아니옵니다. 다만 서얼을 모조리 출사 할 수 있게 한다면 장차 폐단이 생길 듯 하니 조금의 속을 바치게 하여 과거를 치를 수 있게 함은 어떻겠사옵니까?”
끔뻑끔뻑.
이번엔 반대로 융이 눈을 끔뻑거렸다.
“속?”
“예. 비록 서얼들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니옵니다만, 이렇게 한다면 조금의 형평성이 생길 듯 하니 어찌 허통이 아주 불가한 일이라 하겠사옵니까?”
잠시 고민하던 융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예의 제안은 일석삼조였다.
이제 서얼허통 문제가 팔도에 알려지면, 대부들이 들고 일어 날 거다.
여기서 왕에게 반대한 자들은 모두 난신적자들로 쓸어버려서, 재산을 몰수 시키는 게 일조요, 서얼들의 지지를 받아내는 게 이조요, 그 서얼들에게 또 조금의 돈이나마 받는 게 삼조다.
“경의 말이 참으로 이치에 닿지 않은가? 경들은 속히 빈청에서 서얼허통과 서얼이 출사 할 때 속을 바치는 문제를 논하여 주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