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60화 (26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60화>

    ***

    지금 조정에서의 내 포지션은 약간 애매하다.

    형님이 오키나와에 놀러(?) 가시기 전까지의 나는 병무도감 도제조와 봉해위의 위장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섭정승이 되었다.

    형님이 돌아오신 뒤로는 섭정승 직을 반납하고, 다시 도제조와 위장직을 맡고 있었지만 이건 뭐랄까나?

    마치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던 사람이 다음 정권에서 특정 부처의 장관을 지내는 그림과 비슷했다.

    아니, 적절한 비유가 아니려나?

    아무튼, 비유하기도 애매한 포지션의 나는 실로 오래간만에 빈청을 찾았다.

    장장 1년 가까이 끌었던 대동법의 발효 시점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는데, 알다시피 요즘은 빈청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정여립전》 집필 한다고 좀 바빴어?

    그래서 진짜 빈청은 거의 한 달 만인 것 같은데······.

    “아, 글쎄. 그렇다니까요.”

    “그래요? 이 사람은 금시초문입니다. 그런 게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 구독을 했을 텐데요.”

    오래간만에 찾은 빈청이 시끌벅쩍하다.

    무슨 주제로 대화를 하시는 거지?

    구독이란 게 나온 거 보면 신문이 주제인 것 같긴 한데······.

    내가 들어왔음에도 인사는커녕 저희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대신들에 서운해하기 보다, 나는 쭈뼛거리며 자리에 가 앉고는 귀를 종긋 세웠다.

    “그 정여립전이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더군요. 내 읽어 보고 감격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허어. 종놈 매질해도 눈 하나 까닥 안 하는 영감께서 그런 감격을 느끼실 정도라면 과연 시사하는 바가 작지는 않을 듯 합니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동자(董子)는 육경(六經)의 과목(科目)에 들어있지 않은 것들은 모두 폐기하라 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동자의 말이 모두 옳겠습니까? 저 옛날의 임금과 대부들 중에서도 패관을 숭상하는 분들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문종대왕 시절 《고려사》를 지을 적에 패관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습니까?”

    “암요, 암요. 혹자는 패관을 일컬어 쓸데없는 잡록이라 일컫습니다만, 하나라도 배울 것이 있는 글이라면 어찌 잡록이겠으며, 옛말에, ‘늙은 나이에 소일하는 것은 구차한 일이다’ 하였는데 과연 노인들이 일람하면 이것이 어찌 구차한 일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감사한 일이지요.”

    “그뿐입니까? 언문으로 나왔으니 아녀자들이 읽기도 쉽고 동자동녀들이 읽기도 편리하지 않습니까? 그 구사라는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필시 식자의 한 사람일 겝니다.”

    입가에 미소가 자연히 그려진다.

    크크.

    이거, 어깨가 성층권까지 뚫고 올라 갈 것 같다.

    정여립전이 인기가 많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다.

    조 사장은 구독자 수가 수백명 증가했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정여립전 덕분이었다.

    실제로 저잣거리나 운종가에 나가도 온통 정여립전 얘기 밖에 없었고.

    그런데 빈청에서 까지 내가 쓴 책의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낯부끄러우면서도 기분 좋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아! 대감! 언제 오셨습니까? 요새 장안의 화제요, 팔도의 화제이면서도 절대 잡록이 아닌 정여립전을 논하고 있다 보니 미처 대감께서 오신 줄도 몰랐습니다.”

    “예! 오셨다면 기척이라도 내시지 않구요. 아, 대감께서도 혹시 정여립전을 들어보셨습니까?”

    “정여립전이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묻자, 노공필이 말했다.

    “아니, 정여립전을 안 보셨단 말씀입니까? 허어.”

    “예, 뭐··· 모르시다시피 제가 요즘 좀 바빴어서요.”

    “이런 안타까울 때가 있나.”

    “어떤 건데 안타까워하기 까지 하십니까?”

    “어떤 거긴요. 소인이 학식이 비루해서 뭐라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후세에 크게 평가 받을 패관이 분명합니다. 이 정여립전으로 말씀 드리자면은······.”

    노공필은 본인이 나의 분신인 구사라도 되는 양,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정여립전을 칭송했다.

    잡록은 취급하지 말라던 동자도 울고 갈 글이라는 둥··· 패설은 모두 다 이단이니 모두 금해야 한다 주장했던 노자 역시 정여립전을 읽으면 본인 말을 단번에 번복 할 거라는 둥······.

    듣는 사람 민망할 만큼의 칭송이었다.

    “커흠. 그게 그렇게 고평가 받는 책입니까?”

    “암요.”

    정여립전인 희대의 띵작이 될 거란 예상은 했지만, 서민들 위주로 유통이 될줄 알았다.

    그러니까, 고상한 씹선비들이나 경전을 공부하는 유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을 줄 알았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빈청 대신들의 반응을 보니 이건 뭐··· 내가 천상의 글을 뽑아내버린 모양이다.

    유자들까지 현혹시켜 버린 거니까.

    ‘이러면 진짜 곤란한데······.’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와 별개로 입은 찢어질 것 같다.

    입이 귀에까지 걸릴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신색을 가다듬었다.

    티 내선 안 된다.

    나는 절대 구사가 아니다.

    “뭐, 지부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한 번 일람이나 해보겠습니다만 패설이 패설이지, 무슨 큰 의미를 두면서 까지 읽을 필요가 있는 글이겠습니까?”

    라는 말에 지부사 노공필 씨는 이상하리만치 격한 반응으로 부정하더니, 희대의 명작을 폄하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만큼 감명 깊게 읽으셨나?

    뭐, 나야 기분 좋지만.

    ***

    임금께 특지까지 받은 진성대군에 대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다른 대신들과 함께 티 내지 않고 행한 채수는 퇴청한 뒤, 두모포를 찾았다.

    스스로 보독정(保讀亭)이라 이름 지은 정자가 바로 이곳에 있었는데, 과거 공신에 봉해지면서 임금께 하사 받은 정자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남들에겐 말 못 할 취미가 하나 있었다.

    바로 패관 일람이었다.

    무릇 경전을 공부하는 학자일수록 패관은 멀리하란 말이 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패관의 문장을 인용 할 수도 있기 때문인데 무의식 중에 패관을 인용하는 순간.

    팔푼이로 인식된다.

    특히 풍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초사(初士)가 과장에서 패관의 문장을 인용할 시에는 더 큰 문제가 된다. 경중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입격을 했더라도, 패관을 인용한 게 드러나면 낙과한다.

    그래서 식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일수록 패관은 멀리하지만 채수는 달랐다.

    그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과거 급제를 했다.

    남들은 이립(30살)이 돼도 못 하는 입격을 약관의 나이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 했으니 이른 나이에 출세한 셈이었다.

    어릴 적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남들 뛰어놀 때, 사랑방에 틀어박혀 경전을 외웠던 기억 밖에 없었다.

    급제한 뒤에는 이래저래 바빴어도, 학생 시절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는 어릴 적 놀지 못 했던 후회를 패관으로 풀었다.

    패관이라 할지라도 글은 글이니 남들처럼 기방을 전전하거나 배 띄우고 노는 것보다는 유익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접한 첫 패관은 수호전이었다.

    읽어보니 과연 큰 뜻을 두고 읽을 만한 것들은 아니었지만 소일하기에는 제격이었다.

    그 뒤로 채수는 남몰래 패관을 구해다가 읽었다.

    대국에 사신으로 갈 일이 생기거나, 친인척 중에 대국에 갈 이가 있으면 부탁해서라도 패관을 구해 읽었다.

    이런 노력(?)으로 김시습이 쓴《금오신화》는 말할 것도 없고, 서거정의 《필원잡기》, 명나라의 《수호전》, 《삼국지연의》, 《수신기》, 《정환혼기》, 《홍월전》, 《초한지》, 《투신전》, 《수상회도재생연》··· 등등.

    종류를 막론하고 수십, 수백종의 패관을 읽었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40여년이었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글을 읽다 보면, 글을 쓰고 싶어지기도 한다.

    소싯적에는 잠깐 끄적여보기도 했지만 두려운 마음에 바로 불태워버렸다.

    하지만 쏜살같은 시간이 흐르고 나니, 두려울 게 무에 있겠나 싶었다.

    그 마음에 불을 지핀 건, 최근에 접한 패관 정여립전이었다.

    정여립전은 여느 날처럼 신문을 받아 보다가 접하게 됐다.

    재미도 있었지만 해학 넘치는 재담도 담겨 있었으며, 현 세태를 풍자하는 내용도 있었다.

    무엇보다, 술술 읽혔다.

    어제 편전에서 김굉필이 말한 것처럼, 문체는 경박하고 촉급했지만 오히려 경박하고 간결한 문체 덕에 읽기가 편했다.

    앞뒤가 짜임이 있었고, 특히 주인공 정여립이, 왕후장상의 종자가 따로 있단 말인가(王侯將相寧有種乎) 다짐하는 장면에서는 전율마저 일 정도였다.

    그 전율과 함께 아련한 기억이 스쳤다.

    그래, 나도 이런 글을 한 번 써보고 싶었지.

    하는, 어쩌면 못 다 이룬 한이 된 기억이었다.

    물론, 이런 패관은 김굉필의 말대로 오상을 어지럽히는 난잡한 글이다.

    주인공인 얼자가 결국 임금과 나라를 버리고, 나라를 개창하는 일이니 역적 정도전을 비호한 글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시에 국가의 기강을 문란히 하는 데 일조한 글이라 해서 불태워져도 할 말이 없는 글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상은 불문에 부쳤다.

    선대왕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주상은 예악을 아는 군주였다. 아마, 그래서 불문에 부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굳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일국의 정승이 패관을 썼다는 지탄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꼭 써보고 싶었다.

    이미 예전부터 꼭 써보고 싶었던 소재도 있었다.

    결국 채수는 봇을 둘었다.

    보독정에 그 말고는 누가 있을 리가 없는데도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린 그는 기대반 두려움반으로 일필을 끄적거렸다.

    《설공찬전》

    ***

    채수가 정여립전으로 용기를 얻고 보독정에서 일필의 희열을 누리던 그 시각, 강녕전.

    “진성이는 확실히 눈치 못 챘겠지?”

    “예, 걱정 마시옵소서.”

    호언장담하는 노공필이에 융은 안석(案席)에 기대누웠다.

    박대하는 노공필이라지만, 노공필도 재상은 재상이다.

    아무리 임금이라도 재상을 면대면 하는 것 치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요 몇 년 간 왕의 권위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노공필은 감히 왕의 무례가 무례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안석에 기댄 채, 뭔가를 골몰하던 융은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이 호언장담하니 내 마음을 놓겠다만, 혹여라도 진성이 나의 배려를 알아챈다면 그것은 나의 부덕이 아니라 경의 부덕이다. 경은 일찍이 역적의 조정에 기웃거린 바가 있어도, 내 진성의 부탁을 받아 죄를 사해준 것인데 이런 자잘한 명까지 수행하지 못 한다면 마땅히 도태 시킬 것이다.”

    궁중에서의 도태란, 통상 무능한 인사를 고꾸라뜨린다는 표현이었지만, 노공필이 받아 들이는 의미는 달랐다.

    그는 목을 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꿀꺽.

    “여, 여부가 있겠나이까.”

    “그래, 빈청에서 정여립전을 어찌 논평하여 진성을 흡족케 하였는가?”

    공필은 혹 융에게 트집 잡힐까, 사실 그대로를 가감없이 말했다.

    그리고 한참 후.

    “진성이는 흡족해하던가?”

    “겉으로는 내색이 없으셨으나 퇴청하시면서 생글거리는 것이 꼭 장가 든 소년의 그것과 같았으니 어찌 흡족한 마음이 없으셨겠사옵니까?”

    “대군 더러 장가 든 소년의 그것과 같다니, 지금 대군을 능멸하는 것이냐?”

    털썩!

    “소, 소신이 어찌 대군을 능멸할 마음이나 품었겠나이까? 소, 소신은 그저······.”

    “푸핫. 농이다, 농. 과연 신언복이 효험이 있는 모양이다. 신언복을 입은 뒤로, 경이 말을 함에 있어 신중해지지 않았는가? 그러하지 않은가?”

    “과, 과연 지당하신 말씀이시나이다.”

    “경의 나이가 이제 지긋하니 언제 석회를 둘러도(무덤에 들어가도) 이상할 게 없다. 당장 내일 석회를 두를 일이 생긴다면 저승에 가서도 입방정을 떨어댈 게 자명하니 수의로는 신언복이 제격이겠다.”

    “···백번천번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뭐, 좌우지간 내 경을 긴히 부른 것은 진성의 일도 일이다만 경이 승정원을 통해 올린 북해국에 대한 소견 말인데.”

    “예.”

    “아무래도 군사를 3천만 동원하는 것은 적지 않을까 싶다.”

    “하오나 그 이상 동원했다가는 백성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사옵니다.”

    “내 그래서 경을 부른 것이다.”

    “···예?”

    융은 잠시 말이 없다가 멀찍이 떨어져 눈을 끔뻑거리는 사관을 흘겼다.

    “사관은 나가보아라.”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아니되옵니다를 외쳤을 사관이지만, 벌써 금상의 치세에 몇 번이나 쫓겨 났는지 모른다.

    이제는 아예 입바른 소리도 않고,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사관들이었다.

    그리고 둘만 남게 된 침소.

    “내 일찍이 역적과 난적들에게 적몰한 재산이 제법 된다.”

    “아, 예.”

    “여기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지.”

    “하문하소서.”

    “역적과 난적은 때를 맞춰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그게 어인 말씀이시온지······.”

    “경이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을 상소 하나만 올려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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