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59화 (259/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59화>

    ***

    지금 내 상황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나는 멘붕 상태다.

    장장 6일에 걸쳐 초고를 완성했다.

    끼니도 거를 만큼 열성적이었다. 6일 동안 고작 4끼를 먹었고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비록 모방이지만 그래도 시대를 관통할 명작이라 의심지 않고 집필한 작품이었다.

    실제로 허균의 《홍길동전》은 과거에서부터 현대를 관통한 띵작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마, 집필을 연필 대신 키보드로 하고 있었더라면, 나는 키보드를 골백번 내려친 뒤 백스페이스 키(←)를 999번은 두들겼을 거다.

    왜냐고?

    왜냐고!

    왜긴, 스바······.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었다니, 누가 알았겠냐고.

    아,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란 건, 내가 아무리 역알못이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길동 씨 고향이라는 장성에도 놀러 갔다 온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홍길동이 형님의 치세에 활동했던 도적이란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장곤 선생님 덕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실제 홍길동은 악명 높은 도적이었다.

    아직까지도 그 이름이 회자 될 정도였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지.

    ‘어떡한다.’

    나는 완성 된 초고를 내려다봤다.

    초고가 불쏘시개가 된 느낌이었다.

    악명 높은 도적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설로 출간 할 순 없었다.

    출간 하는 즉시 금서로 지정돼도 할 말이 없다.

    대도 홍길동을 두둔한 서적이라면서 말이다.

    초고를 내려다보면서 한참을 고민했다.

    태울까?

    말까?

    다시 쓸까?

    태우는 건 너무 아까웠다.

    6일을 공들여 쓴 작품이다. 이걸 태우기엔 내 영혼을 불태우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쓰자니 손이 뻐근하다. 못 해도 보름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제목만 슬쩍?’

    자고로 여자는 재치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

    전직 카사노바인 내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재치 있게 제목만 딱 바꾸면 될 것 같았는데, 뭐랄까.

    마땅한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

    어떤 소설이든 제목을 바꾸면 원작의 느낌이 안 산다.

    바꾸려면,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원작 느낌을 낼 만한 제목을 뽑아야 하는데 마땅한 제목이 없다.

    홍길동전 대신 정여립전이라고 할 수도 없······.

    ‘정여립이 누군데 갑자기 생각 난 거지?’

    근데 뭔가 괜찮다.

    입에 착착 감기기도 하고··· 이름도 뭔가 멋있고, 무엇보다 내가 모르는 어떤 위대한 인물 같다.

    그게 아니면 지금 이 상황에서 홍길동 씨를 대신해 깝툭튀 했을 리가 없잖아?

    전생의 무의식이 담고 있는 이름 같은데, 용케 지금 상황에서 기억 난 거 보면 확실히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 확실하다.

    그래, 이건 운명일지도 모른다.

    홍길동전을 대신할 정여립전.

    제목을 수정한 나는 퇴고에 들어갔다.

    퇴고는 이틀이 걸렸다. 퇴고한 원고를 정리한 나는 원고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 하다가 형님과 중용월보에 보냈다.

    형님에게 보낸 건 비밀리에 윤허를 받기 위해.

    중용월보에 보낸 건 신문에 실기 위해.

    머잖아 형님께서 글이 참 재미지다며 윤허를 해주셨다.

    윤허까지 받은 마당에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신문 기고를 앞두고 필명을 고민했다.

    고민을 이어가다가, 필명은 불교 용어에서 인상 깊게 봤던 구사(口四)로 지었다.

    그나저나 신문사 창립자가 되니, 등단하기 참 쉽다.

    ***

    한달 후, 편전.

    여태 중용월보의 형식은 간결했다.

    날짜와 내용이 기입 된 기사(記事)가 전부였고, 이따금 언문으로 된 교서가 올라갈 뿐이었다.

    이 교서를 제외하면 중용월보는 한결 같았는데 최근에 배포 된 2월자 월보는 약간 달랐다.

    신문 기사 한귀퉁이에 패설(소설)도 함께 올라온 것이었다.

    《정여립전》이라는 제목의 패설이 말이다.

    이 패설은 중용월보의 기존 형식을 깨뜨리는 첫 패설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만한 재미가 있었기 때문인지, 신문이 배포 된 지 고작 한 달도 채 안 됐음에도 큰 호응이 있었다.

    그리고 이로인해 편전은 아주 오래간만에 시끌벅쩍해졌다.

    “당장 중용월보 편집장 조광조를 문책하는 한 편, 천하의 질서를 까뭉개고, 천하의 교화를 무너뜨리고 있는 패설을 기고(寄稿)한 구사라는 자를 잡아들여 정도(正道)를 일으켜 세우셔야 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신이 듣건대 근래에 중용월보에서 입에도 담기 망뜩한 정여립전이라는 패설을 기사 대신 넣었는데 그 정여립전이라는 것이 참으로 망측한 것들이니 속히 폐하시옵고, 패설을 기고한 구사를 벌주소서.”

    “신이 중용월보를 받아보매, 정여립전을 문득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사온데 정여립전이란 패설이야 말로 노자가 말한 이단에 속하는 것이옵니다.”

    “더군다나 이 잡서는 효잡하기 짝이 없고, 나라의 기강을 온통 무시하오며, 근간이 되는 오상(五常)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만필(생각없이 쓴 글)하였사옵니다. 이러한 패설은 세도(世道)에는 특히나 해로운 것이온데 이 정여립전이란 패설은 더더욱 그러하옵니다. 통상 패설이라 하여도 문체가 경박하고 촉급(促急)하며 난잡하진 않은데, 지금 정여립전이란 패설은 문체가 경박하고 촉급하며 또한 난잡하기 짝이 없으니 이것을 용납하는 것은 과연 이롭지 못 한 일이라 사료되옵니다. 만천하에 드러나게 엄금하소서.”

    “엄금하소서.”

    이구동성으로 이 잡서를 엄금해달라 외치는 대신들에 융은 난감한 표정으로 코를 긁적거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중용월보의 2월자 신문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래도 굳이 금할 까닭이 있겠는가?”

    “본시 책이라 함은 지식을 전승하기 위한 까닭이요, 경험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는데 패설은 어떠한 이로움이 있겠사옵니까? 더군다나 이 정여립전은 입에 담기도 망측하옵게도 감히 강상을 논하고 있사옵니다. 서얼을 금고(禁錮)케 한 것은 선왕께서 정하신 법령인데 글에 나온 정여립전을 보소서. 감히 사특(私慝)하기 짝이 없게도, 서얼을 비호하고 있고 그 처우를 부당하다 묘사하였으니 선왕의 법령이 얼마나 우스워졌겠사옵니까?”

    “그뿐이 아니옵니다. 전하께오서도 이 패설을 보셨는지 모르겠사옵니다만, 이 패설에는 정여립이란 인물 율도국을 세우기 위해 다짐하면서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라 말하는 부분이 명백히 있사온데, 나라의 근간을 흔들기 위한 글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글이 세간에 나올 수 있겠으며, 이것이 김씨부참과 다를 게 무에 있겠사옵니까?”

    “패설인데 진지하게 받아 들일 필요가 있겠는가?”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벌써 몇 년 전일까?

    이세좌와 같은 자들을 쓸어버린 뒤로, 더욱이 박원종과 같은 역신들을 쓸어버린 뒤로, 편전에서 중신들이 이렇게 완강한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다.

    당혹스러울 정도의 완강함이었다.

    긁적긁적.

    “그래도 백성들은 크게 즐거워하는 것 같은데 내 지금 정여립전에 대한 금령을 내린다면, 백성들이 서운해하는 바가 매우 클 것 같다.”

    “백성이 서운해한다 하여 국법을 문란하게 하는 글을 어찌 좌시 할 수 있겠사옵니까? 속히 조광조를 문책하고, 구사라는 자를 압송하여 추문케 하소서. 혹 배후가 있을지도 모르옵니다.”

    “배, 배후까지 있을 리가 있나······.”

    뜨끔한 채 묻자, 김굉필이 완강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옵니다. 지금 이 정여립전은 사특하기 짝이 없사옵고, 서얼을 아름답게 미화하고 있으니 백성을 혹세무민하기에는 이만한 글이 없사옵니다. 백성을 혹세무민하는 글의 저자가 어찌 혼자서 이런 큰 일을 벌였겠사옵니까? 필시 그 배후가 있을 것이오니, 밝혀내어 벌하시옵소서.”

    “벌하시옵소서!”

    “만약 배후를 밝혀 낸다면 큰 화가 일어날지 모르니 벌써 나의 치세에 몇 번의 화가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도 누가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계속 밝혀내라고만 하니 당혹스럽고 두렵기 그지 없다.”

    난감해진 융은 은근슬쩍 사화를 암시할 만한 시그널을 보냈다.

    이미 수차례의 숙청이 있었으니, 사화라면 대신들 역시 넌덜머리를 낼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오산이었다.

    “전하의 치세에 있었던 화는 화가 아니오라 복력(福力)이었사옵니다. 그 일들이 있고 난 연후에 드디어 나라의 살림이 크게 피고, 백성의 삶은 윤택해졌으니 당시에는 두려워하는 자들이 태반이었지만, 지금에야 어찌 그 일을 두려워 할 수 있겠사옵니까?”

    “어찌 망설이시는지 신들은 영문을 모르겠나이다.”

    허침의 말에 융은 황급히 답했다.

    “호, 혹시 종친이 관계돼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종친이 관계돼 있다면 더더욱 엄벌해야 하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작전 변경이다.

    융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어좌를 강하게 내려쳤다.

    쾅!

    “지금 처리할 현안들이 무수히 산재해 있는데 경들은 어찌 그깟 패설 하나에 연연한단 말인가! 지부사!”

    “예, 전하.”

    “내 북해국을 어찌 구호할지 경의 소견을 아뢰라고 하였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북해국을 구호하는 신의 소견은 승정원을 통해 주달(奏達)하였나이다.”

    끔뻑끔뻑.

    “그, 그럼 영상!”

    “하교하시옵소서.”

    “지금 공물을 균등하게 조세하라는 대동법은 어찌 되어 가는가? 벌써 1년을 넘기지 않았던가?”

    대동법은 일전에 김전이 대사성인 시절에 발의한 법안이었다.

    다만 제도의 하나를 뜯어 고치는 일이기 때문인지 논의가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대동법에 대한 안 역시 승정원을 통해 주달 하였나이다.”

    “그럼 내 당장 삼남에 대동법을 포고 할 것이다!”

    밑도끝도 없이 포고하겠다는 말에, 반대가 나올 줄 알았건만 웬 걸.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대, 대동법은 그렇다 치고··· 삼남의 치수는 어찌 되어가는가?”

    “삼남 전역에 치수가 마련 되는 것은 시일이 제법 걸리겠사오나 부민을 동원하기 용이한 큰 고을들은 대개 절반 이상의 성과를 보이고 있으니, 성급히 생각할 문제가 못 되옵니다.”

    그 외에도 밀린 현안들을 언급했지만 모두 잘 진행되고 있거나, 완료된 것들이었다.

    ‘젠장.’

    일처리가 잘 되고 있다는 게 이리 걸림돌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하나라도 딱 걸린다면 그걸로 화제를 돌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봤지만 씨알도 안 먹힌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정공법이었다.

    다른 말로는 이실직고······.

    이실직고(?) 하기 전에 융은 한 달 전쯤 강녕전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한데 왜 필명이란 것을 구사로 지은 것이냐?

    -제 이름으로 낼 수도 없을뿐더러 제 이름으로 내면 형평성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형평성? 무슨 형평성 말이냐?

    -저는 객관적인 독자들의 평가를 원하거든요. 제 이름으로 내면 사람들이 교언(아첨)한답시고 죄다 환호하지 않겠습니까?

    -음,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내 읽어 보니 아주 재미난 글이었다. 필시 큰 호응이 있을 것이니라.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 이거 제가 썼다는 건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비밀까지?

    -네. 앞으로도 이 필명으로 다른 글들 쓰려구요.

    -음. 네 뜻이 그러하니 내 발설하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구사가 진성이라는 비밀을 엄수하겠다는 약조였다.

    진성이에겐 미안하지만 그 약조를 지킬 수가 없게 됐다.

    “크흠. 경들은 들어라.”

    “하교하소서.”

    “···이다.”

    “···?”

    “그 정여립전은···이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교가 분명하지 않나이다.”

    “아, 글쎄! 정여립전은··· 이라니까?”

    “전하. 옛 말에 이르기를, 군왕의 옥음이 여느 때만 못 하다면 그 기후를 헤아리는 것 역시 신하의 도리라 하였사옵니다. 지금 전하의 옥음이 낭랑하지 못 하니, 혹 불편함이 계시옵니까?”

    “딱히 불편함은 없다.”

    “하면 하교해주소서.”

    “정여립전은··· 이다.”

    “전하.”

    제기랄.

    “정여립전은! 진성이 집필한 글이라지 않은가! 가는 귀가 먹기라도 했단 말이냐!”

    청천벽력.

    대신들에겐 청천벽력에 다름 없는 소리였고,

    쓱- 쓱싹싹-.

    사관들에겐 특종에 다름 없는 소리였다.

    사관들이 붓 놀리는 소리에 융은 획- 고개를 돌렸다.

    “사관은 들어라!”

    “···”

    “오늘 있었던 일은 사초에 남기지 말라. 기별(조보)로도 나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알아 듣겠는가!”

    “···예.”

    쓰윽-.

    “알아 들었다면서 어찌 붓이 움직인단 말인가?”

    “···”

    “그리고 경들은······.”

    구사=진성대군.

    이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서 헤어나오지 못 한 대신들은 뒤늦게 응답을 했다.

    “내 진성과 약조한 것이 있다. 진성이 이 글을 신문에 기고하매, 필명으로 구사라고 지었다는 사실을 발설치 않겠다고 한 약조였는데 지금 상황이 이에 이른 즉, 약조를 저버린 것이 되었으니 경들에게 특별히 이르건대 내 발설한 사실을 진성이 모르게끔 하라. 알아 듣겠는가?”

    “···”

    “알아 듣겠는가 말이다!”

    “에, 예, 전하. 명심하겠나이다.”

    “또한 추후에 정여립전을 천하의 교화를 무너뜨리는 글이라느니.”

    흠칫.

    “망측한 것들이라느니.”

    흠칫.

    “문체가 경박하고 촉급하여 잡서 축에도 못 끼는 글이라느니.”

    흠칫.

    “선왕의 법령을 기만하는 것이라느니.”

    흠칫.

    “한다는 따위의 말들이 나온다면 내 그때는 이세좌 때처럼 불경죄로 그 죄를 물을 것이다. 하니 모두 유념하라.”

    《무종실록(武宗實錄) 1508년 2월 25일 기사》

    「···하므로 상께서 옥음을 발하여 말씀하시기를,

    “정여립전은 진성이 집필한 글이라지 않은가.”

    하였다. 이 옥음 이후에도,

    "가는 귀가 먹기라도 했단 말이냐!”

    라는 옥음을 발하셨으나 사초에 남기기는 대단히 민망하다.

    또한 하교하시기를,

    “오늘 있었던 일은 사초에 남기지 말라. 기별로도 나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충분히 알아 듣겠는가?”

    하였다.

    .

    .

    .

    사신은 논한다.

    무릇 형제의 우애하는 정리(情理)는 천성에서 나오니 이를 해하는 것은 나라의 법으로도 금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 사이에 우애가 사라진다면 이는 인도(人道)가 없어진 것이니 덕이 웬 말이겠고, 인이 웬 말이겠는가? 따라서 진성대군을 비호하는 상의 우애는 지극하다 할 수 있겠다. 다만 《정여립전》은 풍속을 문란케 하고 문체는 경박하며, 촉급하니 크게 뜻을 두고 읽을만 하지는 않으나 소일하기에는 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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