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58화 (25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58화>

    ***

    “대감. 어전입니다.”

    갑작스런 이 몸 등장에, 대신들께서 당혹스러워 한 것도 잠시.

    허침 할아버지가 가볍게 날 나무랐다.

    긁적긁적.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들뜬 마음에 나도 모르게 궁궐의 예법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말았다.

    “내 옛날부터 진성대군만은 사모(紗帽)나 조복(朝服)을 입지 않고 입궐해도 된다는 특지를 내린 바 있는데, 이는 진성대군만은 예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나무랄 필요는 없다.”

    맞아, 그런 적 있었다.

    아주 옛날에 내가 박원종의 난을 평정시켰을 때였나.

    특등공신에 제수되면서, 형님이 난 사복 차림으로 입궐해도 된다고 하셨거든.

    물론 그게 호들갑 떨면서 이 몸 등장을 해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셨겠지만······.

    아닌 게 아니라, 지금과 같은 이 몸 등장을 넌씨눈 노공필 씨가 했다면 가뜩이나 노공필을 싫어하는 형님은 노공필의 목을 열댓번은 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무안하다.

    “저도 모르게 많은 분들 앞에서 결례를 범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대감, 다음부터는 주의 하십시오. 무릇 어전에서는······.”

    노공필의 말에 형님이 손을 휘- 내저었다.

    “임금이 괜찮다는데 지부사는 왜, 자꾸 트집이냐. 내가 괜찮단 말이다, 내가.”

    “···”

    “그래, 식사는 했더냐?”

    “네, 동치미에 국수 말아서 가볍게 먹었는데···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구요. 형님, 이걸 좀 보십쇼.”

    나는 연필을 번쩍 들어올렸다.

    내가 연필을 번쩍 들어올리자, 형님은 물론 대신들의 시선도 연필에 집중됐다.

    “그게 무엇이냐? 등채도 아닌 것이··· 괴이하게 생겼구나.”

    나는 실실 웃었다.

    이제 형님과 다른 분들이 놀라실 일만 남았다.

    “이게 붓입니다, 붓.”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마 내가 말한 붓이 형님 본인이 알고 있는 그 붓(筆)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의미의 붓이 또 있는 건지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송구하오나 대감. 혹 반주를 걸치고 입궐하셨습니까?”

    형님 대신 우의정 채수가 말했다.

    “아뇨. 맨정신인데요.”

    “하오면 그게 어찌 붓이라 주장 하시는지··· 붓촉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지요. 이건 먹이 따로 필요 없는 붓이거든요.”

    백문이불여일견이라 했다.

    나는 얼른 소맷자락에서 종이를 두어장 꺼내 바닥에 곱게 깔았다.

    그리고 쓱삭-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갔다.

    잠시 후.

    가득한 여백에 朝鮮 이라는 글자가 써지자, 내가 뭘 하나··· 반신반의하며 지켜보던 대신들 사이에 탄성이 터져나왔다.

    “어, 어찌······.”

    “허어. 귀신의 조화도 이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예상한 리액션이었는데, 형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좌에서 후다닥- 뛰쳐내려오시기 까지 했다.

    그러고는 연필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이 안에 먹이 들어간 것이냐?”

    “아뇨.”

    “그런데 어찌 먹이 나온단 말이냐?”

    라고 말씀하신 형님은 연필을 받아 들고는, 연필의 끝부분을 유심히 살피셨다.

    “숯이냐?”

    얼핏 보면 확실히 연필심이 숯 같기도 하지.

    하지만 역시 아니다.

    “아뇨. 흑연이라는 광물인데, 어······.”

    흑연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광물 외에 표현할 말이 없다.

    “예, 광물입니다.”

    “광물이라면 금은과 같이 땅에서 채취하는 것이란 말이렷다?”

    “네.”

    “그런데 어찌 땅에서 나온 것이 먹처럼 글을 쓸 수 있는 조화를 일으킨단 말이냐? 신통하다. 참으로 신통해.”

    크크크.

    내가 예상한 리액션 보다 더한 리액션이다.

    사실 경덕이랑 석평이의 반응도 형님과 비슷했다.

    연필심 만드는 일을 보조하던 덕산이는 아예, 완성된 연필심으로 시험 삼아 글을 쓰자 놀라 까무러칠 정도였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귀신이다! 외치면서 걸음아 나살려라 대청 기둥으로 도망까지 쳤다.

    현대인의 사고 방식으로는 고작 연필가지고 호들갑 떤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조선에서만 거즘 5년을 살았다.

    충분히 이해한다.

    “이 역시 네가 만든 것이냐?”

    “그럼요. 저 아니면 누가 이런 귀물을 만들겠습니까?”

    자뻑이 아니다.

    진짜로 나 아니면 연필 만들어낼 사람은 적어도 지금의 조선에서는 없다.

    이게 팩트다.

    “신통하다, 신통해··· 과연 이게 있으면 먹이 웬말이냐? 굳이 먹과 벼루를 함께 챙길 필요도 없으니 휴대하기도 간편해 보이고··· 허어. 어쩌다 만들게 된 것이냐?”

    나는 연필을 만들게 된 경위를 모두 말씀드렸다.

    까불이의 방문부터, 병가 내고 안산에 다녀온 사실, 그리고 이 연필로 소설을 끄적여 볼 생각이라는 것까지··· 있는 그대로 다 말씀드렸다.

    “소설?”

    “어, 그러니까··· 삼국지연의 같은 글들 말입니다. 패설이라고 해야 되려나요?”

    “으음. 그나저나 까불이 나라에 세운 공이 가히 작지가 않구나. 까불이 아니었다면 네가 이 연필도 만들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영상.”

    “예, 전하.”

    “우리나라가 공상(工商)을 천시한다지만, 나라에 공로가 있는 공상까지 천시한다면 대관절 나라의 기강은 어디서 찾겠으며, 나라의 백년대계는 누구에게 맡기겠더냐? 하물며 까불이 비록 채방별감으로서 우연히 이런 귀중한 광물을 얻었다만, 쓰임이 전혀 없는 돌덩어리라 생각하고 진성대군에게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 연필이라는 물건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겠는가? 빈청에서 포상을 논해보도록 하라.”

    “···예.”

    갑작스럽게 까불이에 대한 포상이 진행됐지만 내가 편전에 온 목적은 하나였다.

    나는 반대쪽 소매에서 필통을 꺼냈다.

    내가 손수 제작한 필통이다. 나무로 만든 건데 일반적으로 선비들이 봇짐에 넣어 놓고 다니는 필통과는 다르게 많이 작은 편이다.

    “선물입니다.”

    “선물? 팔기 위해 만든 게 아니렷다?”

    “아뇨, 제가 쓰려고 만든 건데요.”

    “난 네가 상재가 있어 이걸 비누처럼 팔기 위해 만든 건 줄 알았다.”

    팔아?

    연필을?

    ‘잠깐만.’

    듣고 보니 그렇잖아?

    아니,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왜, 연필 팔 생각을 못 했냔 말이다.

    비누는 팔면서 연필은 못 판다?

    말이 안 되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형님께 선물하려고 가져온 연필을 반대쪽 소매에서 꺼내 건네고, 후다닥 편전을 빠져나갔다.

    ***

    나는 바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즈니스맨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역시 난 문학도 체질인가 보다.

    연필을 하나의 아이템으로 생각하기 보다, 나 편하자고 만든 도구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따지고 보면 오히려 비누보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쓰임이 있는 게 연필 일 거다.

    아니, 꼭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안 팔고 관공서에 납품 할 수만 있어도 앉아서 돈 버는 거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지방 관아에서 작성하는 서류들이 좀 많아?

    오히려 지방 관아에서는 때마다 문방구 구매하는 비용보다, 연필 하나 사놓는 게 더 이득일 거라 판단할 거다.

    ‘그럼 이게 다 얼마냐.’

    머릿속에 아라비아 숫자가 떠돌아다녔다.

    1개에 1석씩 주고 팔아도 100개 팔면 100석이 남는다.

    1000개 팔면 당연히 1000석이 남고.

    ‘원료라고 해봤자, 흑연이랑 점토 정도고······.’

    더군다나 흑연이랑 점토를 적정 비율로 반죽한 내용물을 가마에 굽는 건 대단한 공력을 요하는 일이 아니다.

    크게 전문성이 필요 없는 일이다 보니 동네 아낙네들 갖다가 만들게끔 할 수도 있는 거지.

    ‘이걸 특산품으로 내세울 수도 있을 테고 말이지?’

    이제 슬슬 중국에도 우리 삼성의 비누가 알려지고 있다 들었다.

    황제에게 공물로 바치는 진상품목에 비누가 포함되기도 한 데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수행원들이 일부러 비누를 대량으로 구매해 놓고 중국에서 사재기 형식으로 팔고 있기 때문이다.

    비누가 조선의 특산품으로 인정 받기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연필까지 인정 받으면?

    ‘돈방석 앉는 거 시간 문제네.’

    지금도 이미 돈방석에 앉아 있지만, 더 큰 돈방석에 앉게 될 거다.

    흔히 봇물 터진다고 한다.

    봇물이 한 번 터지기가 어렵지, 한 번 터지고 나면 두 손으로는 막아낼 수가 없다.

    구상도 같았다.

    한 번 연필로 인한 사업 구상에 대한 봇물이 터지자, 구체적인 사업 내용이 떠올랐다.

    이미 흑연이 나오는 탄광은 매입해뒀으니 원료 걱정은 없다.

    그저 그 탄광 옆에 공장을 하나 세우면 된다.

    인건비는 최대한 후하게 쳐주고, 사람을 고용해 공장을 가동시킨다.

    판매는 삼성의 각 지점들에서 맡도록 하고, 홍보는······.

    “아!”

    홍보는 형님의 입을 빌린다.

    중용월보라는 아주 좋은 홍보수단이 있으니, 여기에 기사를 실는 거지.

    전하께서 사용한 연필!

    이라면서.

    ‘간단한데?’

    오히려 비누 때 보다 더 쉬울 것 같다.

    ***

    쇠뿔도 단김에 빼란 말이 있다.

    명색이 실학의 대가인 내가 귀차니즘 때문에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서야 되겠나?

    바로 사업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다만 연필을 팔려면 공장부터 가동시켜야 했다.

    공장 부지는 운송비 조금 아끼기 위해 안산에 구하려다가, 서울에 구했다.

    생각해보면 완성품을 삼성 지점으로 딸려 보내서 파는 건 서울에서나 안산에서나 매한가지다.

    근데 안산에서 전국 각지로 보내는 것보다는, 그나마 배를 이용 할 수 있는 서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로로 나를 거, 배로 나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운송비를 더 절감 할 수 있는 셈인 거지.

    부지는 마포나루 근처에 구했다.

    배로 운송하기 쉽게 말이다.

    물론 강원도나 함경도 같은 벽지(?)는 육로로 날라야겠지만.

    매입한 부지의 건설은 진성학교 건물을 올렸던 목수들한테 맡겼다.

    보니까, 일처리를 똑부러지게 잘 하더라고.

    예상 준공일은 6개월이었다. 내년 여름에나 실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6개월의 기간을 허송세월할 실학의 대가가 아니시다.

    6개월 동안 뭘 할 거냐고?

    애당초 연필 만든 계기가 뭔데?

    띵작 때문 아니던가. 띵작을 남길 거다.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띵작을.

    다만 문제가 있었다.

    “흐음.”

    전생에도 안 쓰던 글을 쓰겠답시고 골방에 틀어박힌 지 어언 열흘.

    영감이 도저히 안 떠오른다.

    명색이 나만의 소설을 쓰려는 건데, 남의 것 베껴다가 쓸 수도 없고······.

    “흐음!”

    환경 탓인가 싶어서 내 방에서 나와 거리도 거닐어 보고, 저잣거리도 가보고, 목욕물 받고 뜨뜻하게 등도 지져봤으며, 이룩과 벼가 들끓는 행랑에서 눈 감고 명상도 해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다만 스님들이 고행을 하는 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본의 아니게 이룩과 벼가 들끓는 행랑에서 고행을 하다 보니 그런 깨달음이 들었다.

    “무릇 창작은 모방에서부터 오는 것이거늘······.”

    순수한 창작 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괴짜 교수님도 그러셨었다.

    순수한 창작은 존재 하지 않는다고.

    다 알 게 모르게, 너희가 직간접적으로 보고, 느낀 것에서부터 오는 거라고.

    그렇다면 굳이 골머리 싸매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도 없고 말이지.”

    그러다가 급체한다.

    일단 첫 작품은 가볍게 생각하자, 가볍게.

    엄밀히 말하면 내가 알고 있는 어지간한 소설들은 세상 밖에 나오지도 않은 것들이니 표절도 아니다.

    그냥 모방이다, 모방.

    깨달음을 얻자 글을 쓰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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