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57화 (25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57화>

    ***

    내가 대학교 시절 졸면서 들었던 <문학사> 수업에서,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연필의 발명은, 위대한 발명에 가까웠다.

    아, 이건 내 주견이 아니라 당시 <문학사>를 강의하시던 교수님의 말씀이셨다.

    지도 교수님이기도 했던 이 교수님은 괴짜 교수로 불리기도 했는데 사실 내가 까불이 가져온 검은 돌을 보고 단번에 흑연임을 알아챈 것도, 이 괴짜 교수님 덕이었다.

    교수님은 <문학사>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연필이 세계 역사 흐름을 뒤바꿔놓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희한하지?

    따지고 보면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꾼 건 산업 혁명인데, 갑자기 연필이라니··· 그런데 교수님 말씀을 듣고 보면 어쩐지 수긍이 갔다.

    이 연필과 문자가 없었다면 과학자들이 스케치를 어떻게 했고, 연구 기록은 또 어떻게 남겼겠냐고 하셨거든.

    틀린 말은 아니잖아?

    그러면서 연필이야 말로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란 첨언을 다셨고, 이제 그 다음이 중요하다.

    우리 과는 전통적으로 10월에 학술답사라는 걸 갔다.

    일종의 문학 기행(紀行)인 셈인데 문인들의 생가나 작업실, 그리고 작품의 배경이 된 장소들을 직접 둘러보는 일이다.

    말했다시피 이건 문학 기행이다. 그래서 보통의 학술답사는 문인들의 생가를 방문하는 스케줄로 기획이 되는데, 내가 대학교 2학년 시절 갔던 학술답사는 조금 달랐다.

    분명 1학년 때 학술답사 때는 춘천에 있는 김유정 선생의 생가를 방문하고, 그 날 바로 평창에 있는 이효석 문학관을 들르고, 다음날 영월에 있는 김삿갓 문학관을 방문했었는데 2학년 때 학술답사에는 뜬금없이 강원도의 모 탄광을 방문했거든.

    왜, 탄광을 방문했는지는 대강 알겠지?

    그래, 연필 때문이다.

    교수님은 이 탄광이 연필심의 원료가 되는 흑연을 채광하는 광산이며, 지금은 광산업이 사양업에 빠진 지 오래라 국내에 얼마 안 남은 흑연 탄광중 하나라는 말씀과 함께 엄청 안타까워 하셨었다.

    눈시울까지 붉어진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는 확실히 괴짜가 맞다고 낄낄거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감사한 분이다.

    그 교수님이 우릴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강원도 모처의 탄광으로 인솔해주지 않으셨다면 내가 지금 이 검은 돌이 연필의 원료가 되는 흑연인지, 그냥 돌덩이인지 알 게 뭐였겠어?

    이런 더러운 거 왜 갖고 오냐고 내 던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 검은 돌로 연필만 뚝딱 만들면······.’

    입가에 자연히 미소가 지어진다.

    연필만 만들어내면 이제 덕산이도 귀찮게 내가 글 쓸 일 있을 때 마다, 먹 안 갈아도 되고, 나도 소맷자락에 먹 묻을까봐 조심, 조심 붓을 놀릴 일도 없어진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글 쓸 때마다 소매 신경 쓴다는 게 말이 돼?

    이거 엄청 귀찮고 고단한 일이다.

    한글처럼 글을 뚝딱 쓸 수 있는 거면 그나마 고단함이 적겠지만, 한자의 소용이 큰 여기서는 문장 하나 만드는 데만도 한세월 걸리거든.

    한세월 걸리는 동안 한 손으로는 소매 잡고, 한 손으로 붓을 놀린다고 생각해봐라.

    이거 은근히 고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다.

    난 아직도 문학도의 소울을 갖고 있다.

    그걸 잠깐 동안 망각하고 지냈던 셈인데, 확실히 난 비즈니스맨 체질이 아니라 문학도 체질이라고.

    그런 내가 사업이나 하고 있었으니 이건 재능을 낭비한 셈이다.

    도깨비 방망이 휘둘러서 뚝딱 연필 만들어 내고, 쓰기 어려운 붓 대신 연필로 나만의 소설을 만들 거다.

    나만의 시도 몇 수 지을 거고, 문집도 낼 거다.

    아마,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띵작으로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지겠지.

    “크크큭.”

    “대, 대감?”

    아, 너무 들떠서 앞에 아직 까불이 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체신머리 없이 너무 실실 거렸던 모양이다. 까불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다.

    “자네!”

    “예?”

    “자넨 위대한 발명을··· 아니, 탐광을 한 걸세! 위대한 탐광을!”

    끔뻑끔뻑.

    “이 거, 검은 돌이 그렇게나 대단한 겁니까요?”

    “암! 대단하고 말고! 자네 혹시 뭐 필요한 거 없나?”

    까불의 시선이 묘하게 꽈배기로 향한다.

    “밖에 덕산이 있냐!”

    “예, 대감마님.”

    “꽈배기 몇 개 남았냐?”

    “엊그제 만들어 두신 거, 한 서른 개 남았습죠.”

    “서른 개 다 싸서 별감 나리한테 다 드려라!”

    “벼, 별감 나리라굽쇼?”

    “그럼 별감 나리지, 개나리냐?”

    “···송구한데 제 기억이 맞다면 서른 개 중에 열 다섯 개는 안방마님 친정에 가져다 드리기로 한 걸로 기억하고 있는뎁쇼.”

    “꽈배기야 다시 만들면 되니까, 위대한 탐광꾼한테 다 드려!”

    “아, 예······.”

    덕산이 물러가고 나서도 들뜬 마음이 진정 되지 않았다.

    나만의 소설.

    나만의 시.

    그리고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질 띵작.

    아마 후세의 문인들은 날 갓성대군이라고 찬양하지 않을까?

    갓성대군··· 그래, 듣기도 좋다. 큭큭.

    아, 근데 그러자면 먼저 해결할 일이 있겠다.

    “자네!”

    “에? 아, 예, 대감.”

    “이거 어디서 발견한 건가?”

    “안산군에서 발견했습지요?”

    “안산군?”

    아, 안산시.

    “예.”

    “안산군 어디?”

    “대월면(지금의 단원구)에 선부동리(지금의 선부동)라고 있사온데 그 근방에서 발견했습니다요.”

    대월면 선부동리는 또 어디야?

    뭐, 어디건 나발이건 백문이불여일견이라 했다.

    “앞장 서게!”

    “드, 등청 하셔야지 않으시온지······.”

    “내가 이래뵈도 대군일세, 대군! 하루쯤 빠진다고 욕할 사람 없어.”

    특히 연필을 만들어 낼 대군을 욕할 사람은 더 없겠지.

    ‘크크큭.’

    ***

    바로 채비해서 흑연탄광이 발견 된 안산군으로 갔다.

    돌아오는 데까지는 총 사흘이 걸렸다.

    사흘이나 걸린 건, 안산이 한양과 지척이긴 하지만 처리할 일들이 좀 있었기 때문이다.

    처리할 일들은 다름 아닌 매입이다.

    무슨 매입이냐고?

    까불이와 함께 간 그 탄광은 야트마한 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 야트마한 산이 안산에 세거하고 있던 장 씨 문중들의 문중땅이라는 점이었고,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장 씨 문중들이 장차 그 땅을, 아니 산을 선산으로 사용할 계획으로 4년 전에 매입했다는 점이었다.

    장 씨 문중을 설득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내가 제 아무리 대군이라지만, 문중 소유의 선산을 대놓고 달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인데, 설득은 의외로 쉽게 먹혔다.

    바로 돈이다.

    시가의 열 배를 주고 사겠다니 장 씨 문중에서는 생각해보니 그곳이 터가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다며 냉큼 팔아 넘긴 것이다. 대금처리는 삼성 지점이 있는 수원에서 대신 해줬고, 관아에 동산 매입 문기를 작성한답시고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서 집에 돌아왔다.

    갈 때는 빈손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문기와 흑연탄이 들려있었다.

    엄청 감사하게도 내가 매입한 흑연탄광 노천광산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곡괭이 질을 하고 땅을 파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슬슬 땅을 긁으면 흑연이 온천수 터지듯 새어나왔다.

    나는 수원의 삼성 지점을 이용해서 흑연탄을 한 수레 정도 채굴 한 뒤 돌아왔다.

    그리고 채굴한 흑연탄을 창고에 고이 모셔뒀다.

    이제 이걸 이용해 연필심을 만들면 된다.

    일개 문돌이인 네가 어떻게 연필심을 만들 거냐고 묻는다면··· 다시 한 번 괴짜 교수님께 감사드려야겠다.

    당시 흑연탄광에 가서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전통(?) 방식으로 연필심 만드는 체험이었는데, 말이 전통 방식이지 얼굴이며 손이며 흑연을 잔뜩 묻히는 체험에 가까웠다.

    그때는 괴짜 중에 상괴짜가 따로 없다며 동기들과 투덜거렸었지만, 지금은 진짜 그 교수님이 앞에 있다면 오체투지하면서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자, 좌우지간.

    “뭐 하십니까, 스승님?”

    연필심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궁이에 쪼그려 앉는 수고 정도는 필요하다.

    내가 제대로 배운 게 맞다면, 흑연과 점토를 일정 비율로 섞어서 구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래도 튼실하다 못 해 바지춤 뚫고 나올 것 같은 고추 달고 있는 남자가 부엌간에 들락거리는 건 16세기에는 낯선 광경이다.

    경덕이가 아궁이에 쪼그려 앉아 불 피우고 있는 날 이상한 놈 바라보듯 쳐다보며 물었다.

    “뱁새가 왜 자꾸 봉황의 깊은 뜻을 알려고 하냐.”

    “아궁이에 쪼그려 앉아 있는 봉황은 없습니다.”

    “있다, 여기.”

    “···”

    “온 김에 저거나 갖고 와봐라.”

    “이 진흙들 말입니까?”

    “진흙이라니 내가 간밤에 정성들여 반죽한 것들인데.”

    경덕이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고분고분 반죽들을 가져왔다.

    “이걸로 뭘 하시는 건데요?”

    “말하면 아냐?”

    “알지도 모르지요?”

    “연필이라는 거다.”

    아리송한 표정을 보니 모르는 게 확실하다.

    당연히 모를 수 밖에 없지.

    괴짜 교수님이 강의를 제대로 해주신 게 맞다면, 우리나라에 연필이 생산 된 건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때였으니까.

    “모르면 나중에 이 스승님이 직접 보여줄 테니까, 저리 가 있어라. 방해 되니까.”

    경덕이를 쫓아낸 나는 잘 반죽한 내용물들을 가마 안에 집어넣었다.

    이제 반죽한 것들이 구워지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럼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세계사적인 발명품이 갓성대군에 의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

    편전.

    “그래서 말인데.”

    대신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요즘 들어 임금은 그래서 말인데라는 말을 자주 쓰곤 했다.

    그리고 늘상 그래서 말인데라는 말을 이어서 나온 말들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말들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어찌 경들은 북해국의 북 자도 꺼내지 않는단 말이냐? 왜, 임금이 직접 북해국의 일을 꺼내게 하느냐 이 말이다.”

    “···그게 송구하오나 아직 논의가······.”

    “지난 엿새 동안 논의가 아니 끝났다는 건, 경들이 무능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어명이 우습기 때문인가?”

    털썩!

    “신들은 결단코 어명을 가벼이 여긴 적이 없사옵니다, 전하.”

    허침의 말에 이어 노공필이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다만 북해국의 일을 논하려 해도 진성대군이 자리를 비워, 논할 수가 없었음이옵니다.”

    “지금 지부사는 감히 진성대군을 탓하는 것이냐?”

    “그, 그것이 아니오라 신들은 북해국이 어떤 나라인지 자세히 아는 바가 없사온데 진성대군은 그 나라의 실정에 해박하니 과연 북해국을 구원하는 일을 논하는 일에는 진성대군을 빼놓고서는 할 수가······.”

    노공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다.

    하지만.

    “음. 지부사의 말도 일리가 있겠군. 상선.”

    “예, 전하.”

    “진성대군은 뭘 하고 있는 것이라던가? 엿새 전에 어딜 좀 다녀오겠다는 기별 이후로 연통이 없었는데.”

    “2~3일 전 쯤 돌아오셔서 뭔가를 만들고 계시다 하옵니다.”

    “뭘 말인가?”

    “그건 소신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또 꽈배기 같은 걸 만드려는 건가?”

    금세 꽈배기의 천상의 맛이 떠올랐다.

    그런 음식을 만들기 위한 거라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천상의 음식을 하루, 이틀 새에 만들어 낼 순 없을 테니까.

    “뭐, 아무튼 간에 북해국의 구원에는 내 직접 나서는 것이 좋겠는가, 아니면 대리를 내세우는 것이 좋겠는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대신들이었다.

    기껏 임금의 관심사를 돌려놨더니, 또 친히 나서시겠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들이 듣건대 북해국은 아주 작은 나라라고 하옵니다. 신민도 적은데다, 군왕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나라라 하니 어찌 그런 나라에 대국의 임금이 나설 수 있겠사옵니까? 이는 이치상 옳지 않을뿐더러, 체통에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 마땅한 적임을 뽑아 대신 보내소서.”

    “흐음. 하긴 오랑캐들을 교화하는 일에 내 직접 나설 필요까진 없겠지.”

    “그, 그렇사옵니다!”

    “하면 적임은 누가 좋겠는고?”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누군들 듣도 보도 못 한 북해국이라는 나라에 가보고 싶을 리가 없었다.

    눈알만 굴리는 대신들을 일별하던 융의 눈에 노공필이 들어왔다.

    “지부사.”

    “에? 예! 전하!”

    “지부사가 가는 것이 어떠냐?”

    “하, 하오나 신은······.”

    “지부사는 지금 마땅한 소임도 없이 녹만 타고 있는데 내 보기에 경이 제격인 듯 하다. 품행이 천박한 바가 있어서 오랑캐들을 잘 교화해내지는 못 하겠지만, 천박한 품행 덕에 오랑캐들과 잘 어울릴 수 있지 않겠느냐?”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씀이셨다.

    “신하 된 자가 어찌 어명을 받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만, 신은 노쇠······.”

    “그럼 경을 책임자로 삼아야겠다.”

    노공필이 울상을 짓던 그때였다.

    우당탕탕-!

    밖에서 소란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누군가 편전 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이건 무례 정도가 아니었다.

    왕이 집행하고 있는 조회였고, 난다 긴다하는 대신들이 모여있는 편전이었다.

    어지간한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면, 당장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처사의 행동이지만, 원래 범죄란 것도 누가 저질렀냐에 따라 다른 법이다.

    “진성이 아니냐?”

    “형님!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제가 만들었습니다!”

    끔뻑끔뻑.

    “뭐, 뭘 만들었길래 이리 호들갑인 것이냐?”

    들뜬 모습의 진성에 오히려 당혹스러운 융이 묻자, 진성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는 웬 막대기 같은 게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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