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56화 (25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56화>

    ***

    빈청.

    “일이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후··· 이 식은땀좀 보십시오. 한겨울에 무슨 땀이 이리 나던지······.”

    빈청에 들어선 대신들은 제각각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풀썩 주저 앉았다.

    임금의 천하일주.

    이건 간담이 서늘한 일이었다.

    이제 막 귀국한 임금이었고, 1~2년 걸리는 일이라면 뭐··· 생각이라도 해볼 수 있겠지만 최소 5년이 걸리는 여정이다.

    무사히 돌아오는 기간만 5년이지 그 5년 동안 생사의 고비가 족히 50번은 넘게 닥칠 텐데 자칫 임금이 불귀의 객이라도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불충한 일이지만, 현실이 된다면 아찔한 일이었다.

    “차제에 전하께서 또 운을 떼시진 않겠지요?”

    넌씨눈 노공필에 그래도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지부사는 무슨 그런 두려운 말씀을 다 하시오?”

    “아니, 나는 그냥 혹시나 해서······.”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까 편전에서도 그냥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만 하면 될 걸, 무슨 요순시절까지 들먹이시면서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으시오? 그러다 전하께서 다시 천하일주에 나서시겠다고 했으면 어쩔 뻔 했소?”

    “크흠. 내 생각이 짧았소이다.”

    “자자. 다 끝난 일인데 모두들 웃으면서 끝냅시다. 모두들 수고 많으셨소이다. 특히 좌상.”

    “예.”

    “좌상도 수고 많으셨소. 좌상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종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뻔 했소이다.”

    “별 말씀을요. 진성대군께서 수고 하지 않으셨다면 어심을 어찌 돌릴 수 있었겠습니까.”

    허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어심을 돌리기 위해 열변(?)을 토해내던 진성대군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임사홍이 공을 진성에게 돌리면서 노공필로 인해 얼어붙은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서로에게 덕담도 주고 받고, 서로에게 공치사까지 하는, 빈청에서 언제 이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었는지 사관들이 봤다면 기겁할 만큼의 화기애애함이었다.

    그러다 화두가 천하로 옮겨졌다.

    “그런데 정말로 천하가 그리 클까요?”

    의문을 던진 건, 우의정 채수였다.

    원칙주의자인 그는 당연히 진성대군이 말한 것처럼 천하가 둥글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하늘은 동그랗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열국(列國)의 나라가 그리도 많다는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가 대국만 있는 게 아니라는 진성대군의 말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 했다.

    “무슨 말씀이시오, 우상?”

    “진성대군께서는 여태 천하가 둥글다고 주장을 하셨습니다. 뭐, 천하가 둥글다는 거야···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천하에 중화의 덕이 닿지 않는 나라가 그리 많다는 건, 영 믿음이 안 간다고 해야할까요?”

    “하지만 환관 정화가 남긴 기행문에도 보면, 난생 처음 듣는 나라가 등장하지 않소. 어쩌면 대감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채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허침은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진성대군은 기인(奇人)이오.”

    허침의 서론에 모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행동은 종친으로서의 위엄을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말을 함에 있어서는 조금의 신중함도 없으니 좋게 말하면 제 아무리 천한 사람일지라도 격의 없이 대한다 할 수 있겠지만,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천박하다 할 수 있소.”

    “음.”

    “제공들도 진성대군의 소문들은 들어서 알 거요.”

    진성대군에 대한 소문은 여러 가지였다.

    그래서 딱 하나만 꼬집을 수는 없었다.

    “천치라는 소문에서부터 천재라는 소문까지 각양각색이외다. 그런데 그 소문의 당사자인 진성대군이 발명한 물건들을 생각해보시오. 거중기랑 녹로를 예로 들어볼까요.”

    “···”

    “연변의 성벽이 벌써 준공됐다 하더이다.”

    “벌써 말입니까? 족히 1~2년은 더 걸릴 일이 아니었습니까?”

    “연변에 귀순한 오랑캐들이 도와주기도 했지만, 거중기와 녹로의 덕이 컸다더이다. 이뿐이오? 소풍대풍이랑 그 비누인지 하는 것하고 특히······.”

    꿀꺽.

    “제공들은 꽈배기를 맛 보셨소?”

    몇몇 사람들은 맛 본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대다수는 그 맛을 몰랐다.

    “그건 천상의 맛에 가까웠소. 게다가 최근에는 열기구라는 도구를 만들어 사람을 하늘로 올려보내기까지 했소. 하나부터 열까지 그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믿을 게 전혀 없겠지만 다시 생각들 해보십시다. 최근에 진성대군이 사람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도구를 만들 거라는 소문이 돌 때, 다들 뭐라고 했었소?”

    도처에서 헛기침이 터져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드디어 진성대군이 실성했다는 소문이 저잣거리는 물론이고, 궐내에서도 돌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행하지 않았소이까. 지금이야 다들 무뎌졌겠지만, 열기구가 하늘로 올랐을 때 얼마나 대단했소?”

    끄덕끄덕.

    “진성대군은 행동이 경박하고 말은 천박하게 할지 몰라도, 선비의 도를 아는 사람이오. 본인이 한 말을 증명해보이거나 책임을 졌으니, 행동과 말이 경박하고 천박하다 한들 어찌 선비의 도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겠소이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영상대감.”

    “속단하긴 이르겠소마는, 여태 본인이 한 말을 증명하거나 책임을 졌던 진성대군이니 천하의 열국이 수백개가 된다 한들 못 믿을 건 무엇이고, 천하가 둥글다는 사실을 못 믿을 건 또 무엇이겠소?”

    “하지만 천하가 둥글다면《주비산경》에서 말하는 천원지방은 어떻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주비산경》은 옛날에 쓰여진 서적이오. 생각해보면 《논어》와 《대학》같은 경서에도 옳은 말만 있는 건 아니지 않소?”

    “으음. 그럼 그 천하도도 사실일까요?”

    잠시 고민하던 허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야 처음 보는 지도였지만, 전하께서는 익숙하신 듯 했소이다. 진성대군이 거짓 지도를 진상했을 리는 없을 테니 아마 과거 전하께서 경연을 폐하시면서 진성대군에게 강론을 받았을 때, 천하의 지리도 함께 배우신 게 아니겠소?”

    “허어, 사실이면 더욱 놀랍군요. 천하가 그리 넓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우리 조선이 그리 작다니······.”

    채수는 소위 말하는 멘붕 상태에 빠졌다.

    사실 그는 편전에서 천하도에서 朝鮮이라는 글자와 영토를 봤을 때, 이견을 제시하고 싶었었다.

    무슨 천하도가 이리 허술하게 표기 된 거냐고, 우리 조선이 이리 작은 게 말이나 되냐고.

    그런데 어심을 돌려야 했기 때문에 미처 이견을 내놓을 수가 없었었다.

    “그건 나도 아직 반신반의하고 있소만, 사실이라면 천하에 대국이 중국만 있는 게 아님은 명백한 사실 아니겠소. 천하가 그리 넓은데, 대국이 중국만 있으려고.”

    “그렇다면 대감께서 말씀하신 호주와 그 러시아라는 나라도 실존하는 거겠군요.”

    “아마 그럴테지.”

    “그리 큰 땅이라면 아깝긴 하겠습니다. 아무리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 곳이라 한들 농사 지을 땅이 전혀 없겠습니까?”

    채수의 말에 허침 대신 사홍이 답했다.

    “우상대감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저 북쪽의 험준한 산맥에서 살아가는 오랑캐들도 농사를 짓는 일이 잦은데, 농사 지을 땅이 전혀 없진 않겠지요. 아깝긴 아깝습니다. 죄인들을 이주시켜서 농사만 지어도··· 아니, 혹시나 금광이나 은광이라도 있다면 대국 몰래 잠채를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잠채?”

    “예. 지금 금은광을 폐쇄시킨 건, 대국 때문이 아닙니까.”

    개국초에 명은 금과 은 같은 광물을 공물로 요구한 일이 많았다.

    그런데 무슨 금은이 뚝딱하면 나오는, 돌맹이도 아닌데다 광물을 캐내는 고단함은 오롯이 백성들의 것이 되면서, 폐광 된 광산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렇지?”

    “그런데 정말 저 호주라는 곳이 존재하고, 땅이 조선팔도의 수십배에 이른다면 설마 금은광이 하나도 없으려구요. 우리 조선도 폐광된 금은광이 수십곳을 넘는데 말입니다. 금은광 하나만 탐광(探鑛)해서 대국 몰래 캐낸다면 국고에 이만큼 도움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침은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리가 있긴 하오. 하지만 가당한 일은 아니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게 자명하지 않겠소? 온갖 혜택을 줘도 백성들이 사진으로 이주하길 꺼리는데 이역만리 떨어진 호주라는 무주지에 이주하고 싶겠소.”

    이것도 맞는 말이었다.

    죄인들만 이주 시킨다고 해도, 죄인들이 무슨 연에 수백, 수천씩 쏟아져 나오는 건 아니니까.

    “그 호주라는 나라가 실존하는 나라라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뭐가 말이오, 우상?”

    “진성대군께서는 어찌 천하의 지리를 꿰뚫고 있고, 천지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그리도 잘 알고 계시는 걸까요?”

    “뭐, 서적에서 봤다고 하시긴 하오만······.”

    “어떤 책에서 그런 걸 묘사하겠습니까?”

    기이한 일이긴 했다.

    대군은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냐는 물음에 책 보면 다 나온다는 식으로 말했었지만 둘러댄 거란 건, 이제 막 출사한 신래들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연유가 있으니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시는 게 아니시겠소.”

    “흐음.”

    “자자. 호기심 충만한 건, 이 빈청에 지부사만으로 충분하니 우상까지 가세하진 마시고, 다들 퇴청하고 회포도 풀 겸 주배(酒杯)라도 돌림이 어떻겠소?”

    “주배 말입니까, 전 괜찮습니다.”

    여기저기서 괜찮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상 빈청이란 곳은 각기다른 가문과 그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 또 학파와 학연, 그리고 지연이 얽히고 설켜있다. 그래서, 노골적이진 않더라도 경계를 하기 마련인지라 서로 다 함께 술자리를 갖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바로 오늘.

    어심 돌리기 프로젝트가 그 어려운 일도 성사시켰다.

    ***

    “자네도 들 텐가?”

    “아닙니다요.”

    “괜찮아, 편히 들어.”

    나는 상대에게 꽈배기를 권했다.

    정승들한테도 잘 안 내주는 꽈배기를 권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김까불이다.

    왜, 있잖아.

    옛날에 우연히 김감 아저씨 집에서 창녕대군이랑 놀아주다가 집앞에 쓰러진 거 발견돼서 응급조치 해줬던 사람.

    알고보니 연철에서 은을 추출하는 방법을 알아내서 형님이 채용(?)했던 김까불 말이다.

    김까불은 확실히 나라에 보탬이 됐다.

    형님이 새로 만드신 광산도감에 실무자로 있으면서 다량의 연철에서 은을 추출해 국고에 큰 보탬이 됐었거든.

    그렇게 한 2년을 주구장창 은만 추출하던 김까불은 언젠가 나한테 청탁을 하나 했다.

    탐광(探鑛)을 하고 싶단다.

    그러니까, 광산을 개발하고 싶단 거지.

    그게 일생일대의 소원이라나?

    2년간 광산도감에 틀어박혀 군만두만 먹었던 김까불이기도 하고, 또 오죽하면 이런 부탁을 나한테 하는 건가 싶어 나는 흔쾌히 형님께 말씀 드려 김까불이 탐광 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적이 있다.

    그게 약 1년 6개월 전쯤의 일이다.

    그 뒤, 김까불은 채방별감(採訪別監)이 됐다.

    일개 철간에서 그 뒤에는 광산도감의 계약직 실무자로 있다가, 다시 몇 년도 안 돼서 채방별감이라는 직책을 달게 됐으니 사실 그에게는 이만한 출세도 없었을 터였다.

    아, 채방별감이 뭐냐면 금은 광산을 탐사하는 임시 관직이다.

    21세기에서도 광맥을 찾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16세기에서는 더더욱 어렵기 짝이 없는 게 채방별감이 하는 일이다.

    그 과정이 엄청 험난하거든.

    일단 수소문을 한다.

    어디 고을 노천에서 광물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접수되면, 그 길로 달려가 일단 밑도끝도 없이 땅을 파고 본다.

    광산이 발견되면 탐광 성공인 거고, 아니면 죽 쓴 거고.

    거의 맨 땅에 헤딩하기에 가까운 게 채방별감이 하는 일이다 보니 사실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았다.

    실제로 김까불도 채방별감직을 제수 받은지 1년 6개월이 지났지만, 단 한 곳의 광산도 발굴하지 못 했고 말이다.

    “감사하옵니다, 대감.”

    “감사는 무슨. 아, 근데 어디서 오는 길인가?”

    “삼척에 광물이 채집됐다는 소문이 있어서, 삼척에 다녀오는 길이었사옵니다.”

    발견했나?

    라고 굳이 묻지 않았다.

    발견을 했으면 나한테 올 게 아니라 광산도감에 들렀을 테니까.

    “그래, 그래. 광산 찾는 게 어디 쉬운 일도 아니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 내가 물심양면 후원해줄 테니까.”

    “아니옵니다, 지금 해주시는 것만도 부족함이 없사온데 성과가 없으니 오히려 송구할 지경이옵니다.”

    말했다시피 광산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차라리 폐광들부터 발굴 하는 게 어떤가?”

    “그건 나라법으로 금지가 돼서······.”

    아차.

    깜빡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되놈들 때문이다. 하도 금은을 공물로 요구하는 일이 많다 보니 선대왕들이 멀쩡한 광산들 죄다 폐광 조치 시켜버렸는데 이걸 찾는 건 일이 아니지만 그 소문이 중국 사신들 귀에 들어가면 뭔 지랄을 해댈지 몰랐다.

    “음.”

    “하옵고 오늘 찾은 건 광산 때문이 아니옵니다.”

    “응? 아니면 뭔가? 꽈배기 얻어 먹으러 온 건 아닐 테고.”

    “실은 여쭤 볼 게 좀 있어서 말이옵니다.”

    “여쭤볼 거? 여쭤보게.”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김까불은 아까부터 메고있던 봇짐을 풀었다.

    봇짐을 풀자, 보에 싸인 목함이 하나 나왔다. 그리고 다시 목함을 열자, 무슨 검은 돌 같은 게 나왔다.

    “뭔가 이게?”

    “그걸 여쭤보려고 가져왔사옵니다. 대감께서는 천지만물에 해박하시지 않으십니까?”

    알다시피 난 문돌이다.

    근데 그런 나라도 16세기 사람들 기준에선 천지만물에 해박한 편이긴 하다.

    김까불을 실망시키고 싶진 않아서 예의 검은 돈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검댕이 같은 게 묻어나왔다.

    “연탄인가? 아니면 석탄?”

    “연탄··· 석탄이요?”

    “그런 게 있네.”

    나는 예의 검은 돌을 앞뒤로 자세히 살펴봤다.

    검지로 쓰윽- 문질러도 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보고, 검은돌의 끄트머리를 살짝 쪼개서 종이에 쓱싹 문대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전까진 잘 몰랐지만 종이에 문대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연필인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