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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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전.
오늘은 며칠 전, 국무회의에서 있었던 안건들을 형님께 보고 드리는 날이었다.
“···하므로 공론은 소선(小船)을 사용하는 것이 수군에 이롭다는 것이었사옵니다.”
그리고 결과 보고는 허침 할아버지께서 하고 계셨다.
“빈청의 당상들은 내 한 말이 우습단 말이냐?”
“···”
“내 직접 남해정토군을 이끌고 바다에서 싸워보니 소선은 이로운 게 전혀 없었다. 무신들도 하나같이 말하기를 소선으로 싸우면 왜구가 배에 올라타 불리하니 대선으로 하여금 적을 제압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어찌 당상들은 소선만 고집한단 말인가? 한심하다.”
그럴 거면 검토하라고 말씀이나 하지 말던가··· 라는 대신들의 분위기는 나만의 착각일 것이다.
“하오면 어찌하오리까?”
“말했다시피 소선은 적선을 빠르게 쫓기에는 용이하지만 적과 육박했을 때, 적이 기어오르기 편리하고, 심지어 화포를 실기에도 불리하니 대선으로 하여금 적을 제압하는 수 밖에 없었다. 대선은 높으니 왜구가 기어오르기도 어려울 테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국일 테니 적을 통제하기도 쉬울 것이다. 다만 소선이 아주 불필요한 것은 아니니, 특별히 하삼도의 수군영에만 대선을 건조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결과 보고는 끝이 났다.
사실 결과 보고랄 것도 없었다.
국무회의에서 진성학교에 대한 결과는, 불필요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진성학교의 학생들을 자중시키자 였지만, 형님께서는 불필요한 충돌은 씹선비들이 일으키니 씹선비들을 자중시키자로 정해진 결론을 말씀해주셨고, 지금 보다시피 대선VS소선도 원래는 소선을 유지하자는 게 국무회의의 결과였지만, 형님은 대선을 건조하도록 명하셨다.
있으나 마나한 국무회의였지만 솔직히 형님의 식견이 옳은 것 같다.
진성학교의 일은 차치하고, 대선VS소선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잠깐 삼천포로 새서, 여기 사람들은 진짜 검소한 걸 미덕으로 친다.
선비의 덕목에 검소함도 있는 셈인 거지.
문제는 그 검소함을 나라에도 강제한다는 점이다.
소선은 제작비도 저렴하고, 유지비도 저렴하지만 대선은 제작비도 비싸고 유지비도 비싸다.
당연히 상대적으로 검소한(?) 비용이 발생하는 소선론자들이 많을 수 밖에.
근데 이래 버리면 탁상행정 꼴을 못 벗어난다.
실제로 형님의 말씀처럼 왜구는 백병전이 특기인데 소선들은 구조 자체가 왜구들이 기어오르기 편리하게 돼있다.
왜선하고 크기 면에서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보니 사다리만 툭 걸쳐버리면 넘어오기 쉬운 거지.
여기 왜구들 안 봤지?
이놈들 진짜 무시무시하다. 키는 땅딸막한 것들이 눈에 살기가 한가득이다. 그런 놈들하고 면대면으로 칼 섞는다고 생각해보자.
나도 오금이 저리는데 수군들은 안 그러겠어?
근데 대선이면 그런 가능성이 줄어든다. 형님 말씀처럼 화포도 많이 실을 수가 있어서, 접근하는 왜선을 묵사발 내버릴 수도 있고.
“그리고 말인데······.”
아무래도 형님께서 더 하실 말씀이 남으신 모양이다.
있으나 마나했던 국무회의에 시무룩해진 대신들이 다시금 귀를 종긋 세웠다.
“하교하시옵소서.”
“내 중용월보의 신문을 받아본다. 경들도 보는가?”
대신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신들도 받아보옵니다.”
“내 신문을 통해 보니 지구가 구형이니 마니로 빈청에서 소란이 있었던 것 같다. 위정자란 작자들이 허구헛날 내 말이 옳네, 마네로 논쟁을 하니 백성들 보기 부끄럽다만, 지금 이르고자 하는 말이 이건 아니니 이는 나중에 논하도록 하고.”
“···”
“상선은 가져오라.”
형님께서 말씀하시자, 입실한 상선 대감께서 뭔가를 들고 오셨다.
관복이었다.
일반적인 관복과 다른 게 있다면, 보통 관복에는 문양이 새겨져있기 마련이다.
흔히 알고 있는 흉배가 바로 그것이다.
흉배가 뭐냐고?
예를 들면 내가 지냈던 대사헌의 관복에는 해태가 수놓아져 있었다.
대사헌 지내기 전인 백수 대군으로 살던 시절의 관복은 기린이었고.
그런데 지금 상선대감께서 가져오신 관복의 흉배는 한 번도 보지 못 한 것이었다.
미간을 좁히고 살펴보니 뭔, 글자 같은 게 써있는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호기심을 참지 못 하고, 노공필 씨가 물었다.
노공필의 질문에 형님은 환히 웃으셨다.
“경에게 하사하는 관복이다.”
“신에게 말이옵니까? 성은이 망극하여 몸둘 바를······.”
감격해 마지 않던 노공필 씨의 인상이 굳어졌다.
노공필 씨의 인상이 왜 굳어졌는지는, 뒤늦게 알 수 있었다.
관복의 흉배.
아니, 흉배라 생각했던 부분에 새겨진 글자.
정확히 신언(愼言)이라 수놓아져 있었다.
“경에게 하사한 신언지의 효험이 다 한 듯 하여, 이 관복을 하사하는 것이다. 대전에 글자를 새긴 관복에 대한 법령은 없지만 특지가 이러한데 대전이 무슨 소용인가? 경은 입궁할 때, 무조건 이 관복을 입도록 하라.”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경들은 들으라.”
“···”
“신문을 보니 진성이 말하기를 천하가 둥글다는 사실은, 천하를 일주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하였다. 이 말이 참말인지 아닌지 가리는 것은 가한 일인가, 불가한 일인가?”
노공필 씨에게 신언복(?)을 하사하시더니 갑자기 세계일주?
뜬금없는 질문이셨다.
뜬금없어도 너무 뜬금이 없어서 말문이 막힐 정도의 뜬금포였다.
“그, 그게 어인 말씀이시온지······.”
“듣자니 세간에 진성학교에서 가르치는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던데 내 보면 위학이 아닌 듯 하다. 그런데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 것이 사람이니, 어찌 증명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천하를 일주케 한다면 천하가 구형인지 사각형인지도 알 수 있을 테고, 또한 천하만방에 우리 조선이 건재함을 알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가 생기지 않겠는가?”
“그, 그건······.”
호랑이 굴에도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나올 수 있다는 속담처럼, 얼이 나간 대신들 사이에서 그나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던 허침 할아버지가 당혹해하며 날 쳐다보신다.
그리고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전하께 바람이라도 넣으셨습니까?’
라고.
당연히 나는 바람 넣은 적 없다. 그래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뇨, 저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는데요.’
라고.
“어찌 말들이 없는고?”
“너무 갑작스러운 분부신지라······.”
“갑작스러울 것도 없다. 명의 환관 정화는 황제의 명을 받고 천하 만방을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우리 조선이라고 못 해낼 것 무엇이냐? 그리고 경들은 궁금하지 않단 말이냐? 나는 정말로 천하가 둥글어서, 탐라에서 출발하면 다시 탐라로 닿을지 그것이 무척 궁금하다.”
이건, 빈청에서 노공필이 내게 무안을 주는데도 가만 있었다고 대신들한테 하는 단순한 겁박이 아니다.
혼또니 진짜다.
“진성이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저, 저 말이십니까?”
“그래. 너는 천하를 일주하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하였다. 나는 네 말이 참으로 이치에 닿는 말이라 생각하는데 선단을 이뤄서 보내면, 네 이론이 가당하다는 걸 증명하니 이로운 것 아니겠느냐?”
그건 맞다.
맞는데······.
“하오나 신문에 나온 말은 저도 욱하는 마음에 지부사께 말씀드린 거지, 실행에 옮기기는······.”
“너는 진성학교가 실천하는 학문이 됐으면 한다고, 진성학교의 학문을 실학이라 말하지 않았더냐?”
“예, 그랬었죠··· 하지만 이건 사람도 사람이지만, 돈도 천문학적으로 들 것입니다. 게다가······.”
“임금이 간다면 나서지 않을 자가 어찌 있겠더냐?”
편전에, 쿵! 무시무시한 쇠망치라도 떨어진 것처럼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니까, 사람을 보내는 게 아니라 형님께서 직접 가신다?
이건 더더욱 안 된다.
안 되고 말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천하를 일주하는 선단을 보내는 것도 문제인데, 주장(主掌)을 전하께서 맡으려 하시니 더 큰 문제입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잠깐 시간을 벌긴 했어도 빈청에서 검토를 해보겠다고 시간을 번 게 아닙니까? 차일피일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거니와, 차일피일 한다면 오히려 전하께서 대선 문제처럼 가시겠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특단의 조치를 위해 모인 빈청.
빈청은 소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대감.”
그런 와중에 임사홍 아저씨가 날 부르셨다.
“예?”
“천하를 일주하는 데에는 보통 얼마의 시간이 걸리옵니까?”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됐다.
근데, 천하 일주를 해봤어야 알지.
나도 잘 모른다.
다만 기억이 맞다면······.
“여기서 아주 먼 서역의 마젤란이란 사람이 지휘하던 선단이 3년만엔가 성공하긴 했던 것 같은데, 이건 해로 일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살아 돌아온 사람도 절반도 안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내 기억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다.
맞으면 어떻고, 안 맞으면 어떤가.
어마무시한 시간이 걸린다는 건 똑같은데.
“그럼, 해로를 모르고 있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나도 뱃사람이 아니라 그것까진 잘 모르겠지만 최소 6~7년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건 단순한 세계일주에 대한 소요 시간이다.
배 만드는 시간.
정보 수집하는 시간.
사람 구하는 시간.
등등은 제외한, 단순 세계일주에 소요되는 시간 말이다.
이걸 다 합하면 10년은 걸리려나?
“7년··· 7년 동안 전하께서 아니 계시게 할 순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옳소라는 말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선 나도 동감이다.
“맞습니다. 바다라는 게 변화무쌍하기 짝이 없는데 자칫 전하께서 타신 배가 침몰이라도 한다면 끔찍하고, 또 호전적인 원주민들을 만나기라도 한다면······.”
이건 확실히 기억한다.
마젤란이 그렇게 죽었잖아?
아니, 마젤란은 시비 걸어서 죽었던가?
제길. 세계사 공부좀 열심히 해둘 걸.
“전하께 천하일주를 하는데 드는 시간이 꼬박 20년은 걸린다고 말씀 아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좌상. 그건 전하를 기만하는 일이오, 어찌 신하된 자로 거짓을 고할 수 있겠소?”
우의정 아저씨다.
21세기 현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지만 16세기 사람들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기군망상이다.
“그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전하께선 한다면 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러니 문제지요. 한다면 하시는 분이니······.”
빈청 곳곳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형님의 기행에 이미 적응이 될 만큼 된 대신들이지만, 그럼에도 이번 기행 만큼은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게 다 지부사 때문 아닙니까, 천하가 둥글다면 둥근 것이지 뭔 토를 그리 달아서··· 쯧.”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남탓을 하기 마련.
좌의정 아저씨가 신언복을 만지작거리는 노공필 씨를 질책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원인 제공은 나지만, 차마 날 탓할 수는 없었겠지.
“···갑자기 왜 절 문제 삼으십니까. 저라고 설마 신문에 실릴 줄 알았겠습니까. 아니, 그걸 전하께서 보실 줄 알았겠습니까?”
“그 신언지를 받았을 때는 어딜가든 말조심하라는 뜻이 아니었겠소! 제발 그 입좀 조심하십시다, 입좀!”
“···”
이러다가는 기껏 번 시간만 흘러갈지도 몰랐다고 생각했는지, 허침 할아버지께선 짝짝-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지금은 누굴 탓 할 때가 아닌 듯 합니다. 모두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대감.”
“예.”
“수가 없겠습니까?”
“저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지요.”
“하아. 어쩐다.”
빈청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골이 빠개지도록 골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참 후.
“아!”
누군가 와탕카(?)를 외쳤다.
임사홍 아저씨였다.
“좌상, 묘안이 있으시오?”
“지금 전하께서는 천하일주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전하께선 어디, 천하일주에만 관심을 두셨었습니까? 예전에는 사냥에 관심을 두셨고, 그 이후에는 축구에 관심을 두셨고, 또 그 이후에는 꽈배기와 진성학교, 신문에 관심을 두셨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천하일주에 관심을 두신 게 아니십니까?”
“그렇지.”
“한데 전하께 천하일주에 소요되는 시간이 수십년이 걸린다 거짓을 고하는 것은 기만이니 진퇴양난인 셈이구요.”
“이를 말이겠소이까.”
“그러니, 전하의 관심사를 좀 이렇게, 예? 좀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하의 관심사를 이렇게라니?”
“관심사를 돌려보자는 것이지요.”
“오, 그것 참 묘안이오이다. 과연 전하의 관심사를 돌리는 것은 기군망상도 아니거니와 천하일주에 대한 어심을 돌릴 수 있으니 이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겠소. 그래, 하면 어심을 어떻게 돌리는 게 좋겠소?”
“···”
“좌상?”
“그것까진 아직······.”
빈청이 다시금 침묵으로 물들 무렵.
“아!”
이번에는 내가 와탕카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