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53화 (25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53화>

    ***

    오늘은 빈청에서 당상관들끼리 회의가 있다.

    아, 말을 하고 나니까, 어감이 좀 이상하다.

    당상관들끼리 회의라니··· 없어보인다.

    다음부터는 국무회의라고 해야겠다.

    아무튼 오늘 국무회의의 안건은······.

    “뭐였더라.”

    젊은 나이에 치매도 아닌데 기억이 안 난다.

    진짜 뭐였지?

    요새 하도 벌인 일이 많아서 그런지 깜빡깜빡하는 것 같은데··· 아!

    기억났다.

    열기구랑 진성학교, 그리고 전선이다.

    열기구, 진성학교 이 두 가지가 왜 안건 씩이나 되는 거냐면······.

    “뭐였더라.”

    아, 기억났다.

    진성학교는 저번에 씹선비들하고 붙은 난투극 사건 때문이었고 열기구는 군용으로 소용이 있는지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함이었고, 마지막으로 전선은 말그대로 전투용 선박을 이른다.

    그제였나?

    형님이 벽괴제나 해괴제 기우제 같은 괴력난신들이나 신봉할 제사들은 모조리 폐지시켜버리라고 명한 뒤, 불가하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불가하다는 말만 하지 말고 이거나 검토해보라며 빈청에 던져준 안건이다.

    본인이 직접 오키나와에 가서 왜구들과 해전을 벌였는데, 가쓰히로가 만든 왜맹선은 그럭저럭 쓸만했지만, 다른 맹선들은 크기가 작아 함포를 실기 적합하지 않고 먼 바다에서는 그다지 소용이 없는 듯 하니, 앞으로 군선의 크기와 형태를 좀 키우면 어떻겠냐는 차원의 안건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대찬성이다.

    확실히 우리나라 군선들은 너무 작다.

    기존에 내가 조선의 전선하면 떠오르던 게, 판옥선하고 거북선이었는데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인가,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니 당연히 없을 수도 있다지만 판옥선도 없다.

    눈씻고 찾아봐도 판옥선은 보이지도 않고, 그나마 큰 배가 대맹선이란 배인데 여기서나 대(大)자를 붙이는 거지, 저쪽 세계에선 대 자 붙이기도 민망할 거다.

    고속정 보다도 작은 크기거든.

    대맹선에는 싣는다면, 고작 천자총통 8~10문 정도만 탑재 할 수 있는데, 확실히 비효율적이다.

    측면에 고작 4문씩 탑재해서 뭐하겠어?

    위협사격에 왜구가 퍽이나 도망가겠네.

    적어도 20문은 탑재를 해야 그 위용에 도망을 가지.

    뭐, 아무튼 이런 세 가지 안건 때문에 빈청을 찾은 건데······.

    “정말로 섭정승께서는 천하가 둥글다고 생각하고 계신 걸까요?”

    “둥글다고 생각을 하시니 진성대학에서도 그리 강론을 하고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허어, 모르겠습니다 그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천하가 어찌 둥글겠습니까? 차라리 네모나다면 이해라도 하겠습니다만······.”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했습니다. 하늘이 둥글다는(天圓) 것은 천지의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사실이고, 땅이 네모나다(地方)것 역시 산학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서 《주비산경》독(讀) 한 사람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주비산경》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사실이겠습니까? 하늘이 둥글고 땅이 네모나다는 것은 산간벽지에서 화전하는 유민들도 알 겝니다.”

    “하지만 대감의 말씀도 어찌 보면 일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좌상. 무슨 일리를 말씀하시는 거요?”

    “대감께서는 옛날 사람들의 말처럼 천하가 네모나다면 먼 바다로 조업나가는 배들이나, 하다못해 영락제 시절 정화의 함대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 했을 거라 하셨소. 남해원정에 동원된 함대는 총 30년 가까이 항해를 했소이다. 30년 동안 먼 바다를 떠돌았는데, 천하가 둥글지 않았다면 함대가 어찌 수평선 끝에서 추락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겠소?”

    “대감께서는 서역에 많은 나라가 있다 하셨소. 정화의 함대가 세상의 끝까지는 아니 갔던 모양이지.”

    “무슨 말씀이시오? 기록에 의하면 정화는 10만리 넘게 바닷길을 헤쳐나갔고, 30여 개국에 황상의 위엄을 알렸소이다. 저 먼 바다까지 나아가서 목골도속(모가디슈)에 이르렀는데, 천하가 네모나다면 어찌 세상의 끝을 못 봤겠소? 기록에도 정화가 천하의 끝을 봤다는 기록은 없소. 그리고, 천하가 네모나다면 월식때 달이 사라지는 건 어찌 설명하겠소?”

    역시 내 편은 좌의정 아저씨 밖에 없는 건가?

    사람 자리에 없을 때 하는 뒷담화가 제일 나쁜 건데······.

    근데 뭐, 이해는 한다.

    나라도 저런 반응들을 보였을 거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우주관이 기존의 학설이고 정설이니까.

    어쩌겠어? 마음 넓은 내가 이해를 해야지.

    “흐음.”

    인기척을 내고 빈청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좌의정 아저씨게는 목례로 내 편 들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반대로 내 뒷담화를 한 노공필에게는······.

    “전하께서 말씀하신대로 신언지의 효험이 다 한 것 같습니다. 다시 예전의 지부사로 돌아가버렸으니 이거야, 원.”

    면박을 줬다.

    “하, 합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노공필.

    “나같은 괴력난신이 열기구도 만들었으니, 암요. 천하는 안 둥글죠.”

    면박에 이어 비꼬기도 해줬다.

    “그, 그게 아니오라······.”

    “눈으로만 봐야 믿습니까?”

    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나라도 눈으로 안 보면 못 믿을 것 같긴 하다.

    “그게······.”

    “천하가 네모나고 평평하다면 수평선 너머에서 오는 배는 돛이 아니라 선체 전체가 함께 보여야 하는 것인데 돛부터 보이고, 포구에서 출항 할 때 역시 모두 다 사라져야 하는데 이때는 희한하게 선체부터 사라지지 않습니까? 또, 좌상대감의 말씀처럼 월식 때 달그림자가 어찌 바뀌는지 생선눈 똑바로 뜨고 지켜만 보고 있어도, 천하가 네모나다는 말은 못 할 테고··· 아! 천하가 네모나면 전라도든 강원도든 해가 뜨는 시간은 같아야 하는데, 이것도 다르지 않습니까?”

    꿀먹은 벙어리가 된 노공필이다.

    내 말을 곰곰이 곱씹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하지만 결국 그것도 현상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 정도로 말했는데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면 과거 급제는 어떻게 했습니까? 저기, 뭐야. 음서로 출사하셨나?”

    내가 말 했나 모르겠는데 여기서는 음서로 출사 했냐고 묻는 게 대단한 모독이다.

    노공필 씨처럼 사마시(소과)에 당당히 입격하고, 문과에서는 방원랑(2등)으로 급제한 엘리트에게는 더더욱.

    물론 내가 모욕 줬다고 발끈 할 순 없을 것이다.

    이래뵈도 전 섭정승에 현 종친이니까.

    “대감. 지부사도 답답한 마음이 있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고정하십시오.”

    “많은 분들 앞에서 목소리 높인 건 죄송스럽습니다만, 증거를 대도 자꾸 증명을 해달라고 하니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억이 맞다면, 고대 그리스 학자들 조차 월식의 달그림자를 보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런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었는데도 지구는 네모나다! 외치는 건, 자존심 지키는 거라고 밖엔 설명할 길이 없는데 난 그런 사람이 제일 싫다.

    왜, 자존심 때문에 틀린 걸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

    “지부사.”

    “예, 합하······.”

    “확실한 증거를 원하십니까?”

    “···”

    무언이 곧 긍정인 법.

    “내가 확실한 증거를 대줄 테니까, 배 한 100척만 쾌척하시고, 선원들 한 5천명만 구해다주시렵니까? 그럼 내가 확실하게 증명해줄 테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 사람들 데리고 천하 한바퀴 돌아오라고 하면 간단히 증명이 되는 일 아닙니까? 근데 지구 둘레는 내 기억으로 4만 km쯤 되니까, 배 한 두척, 사람 한 두 사람가지고는 어림도 없구요. 돈도 엄청 많이 들 텐데, 그 돈이랑 사람 지원해주시면 내가 직접 증명해드릴게요. 어떻습니까?”

    홧김에 한 소리에 와탕카(?)를 외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과연 그렇게도 증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약 천하가 네모나다면 세상의 끝에서 함대가 추락해 돌아올 수 없을 것이요, 천하가 둥글다면 그대로 돌아올 테니 말입니다.”

    좌의정 아저씨였다.

    “물론이죠. 자, 그래서 지부사. 어떡하시렵니까?”

    진짜로 노공필이 지구가 둥글다는 걸 증명해 보일 함대를 편성할 지원금을 댈 걸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다. 그건 한 개인이 낼 수 있는 한계 금액을 초과한다.

    나는 지금 나 스스로 16세기 세계 부호 순위의 한 20위권 안에는 들어간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그런 내가 후원을 하거나 나라 차원에서 후원을 해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나는 그런 데 헛돈 쓰긴 싫다.

    “···자로편에 보면,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 하였으니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곧 선비의 덕목입니다. 내 어찌 다름을 인정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깔끔히 물러서는 건 아니지만, 얼추 물러서는 노공필이다.

    나도 더 압박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신언지 효험 다 하신 것 같으면 말씀하세요. 내가 형님께 말씀 드릴 테니까.”

    “···”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안건이나 논하시죠. 영상대감.”

    “에? 아, 예. 합하.”

    “열기구를 군용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한 게······.”

    “이장곤이옵니다.”

    “스승님이요?”

    “예. 이장곤이 말하기를······.”

    ***

    며칠 후.

    알다시피 중용월보는 중립적인 신문사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임금의 덕을 과하게 포장시킨다는 점에서, 어용신문사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팩트 전달에 소홀한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용신문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검수도 당연히 이뤄진다.

    이 검수는 보통 승정원과 춘추관에서 도맡는데, 승정원에서는 본의 아니게 기사(기자)가 임금이나 왕실을 비하하는 문장이나 단어를 잡아내고, 춘추관에서는 궐에서 일어난 사건이 사실과 달랐을 때, 이를 보정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승정원의 검수는 몰라도, 춘추관의 검수는 배려의 일환이라 볼 수 있었다.

    정부기관이 민간기업의 일을 돕는 셈이니까.

    검수 작업은 통상 달에 두차례에 걸쳐 이뤄진다.

    5일과 20일에, 중용월보에서는 그간 작성한 기사들을 승정원과 춘추관에 보내 검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공교롭게도 20일이었다.

    평소라면, 중용월보에서 작성된 기사 초안들이 춘추관과 승정원으로 밀려들어 왔을 테지만 오늘은 약간 달랐다.

    필사 된 초안들이 춘추관과 승정원이 아니라 강녕전으로 밀려들어 온 것이다.

    어명 때문이었다.

    이달 검수는 본인이 하겠다는 왕명.

    승정원에서 요새 검수를 게을리 하는 것 같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검수를 본인이 하겠다고 한 융이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경연을 폐지한 이후, 무료함을 때울 만한 게 마땅치가 않았다.

    그나마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건, 중용월보의 신문들을 읽어보는 것이 전부인데 한 달에 한 부씩 나오다 보니 이마저도 매일 누릴 수 있는 낙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검수 작업에 들어간다길래 모두 빼돌렸다.

    “어디보자······.”

    이미 오늘 하루 일과는 모두 끝이 났다.

    대비전에 문안 인사 드리는 걸 시작으로 윤대(보고)도 받았고, 편전에도 행차했고, 상소도 읽었으며, 한시진 전에는 매화틀도 대령시켜 일도 봤다.

    거리낄 것 없이 신문 초안을 읽으면 되는 것이다.

    六.

    <황해도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다>

    「···하여 아직 범인의 행방은 묘연하다. 조정에서는······.」

    정덕(正德) 1년 12월 7일 중용월보 최 기사

    七.

    <주상전하께서 벽괴제와 기우제를 폐하라는 어명을 내리시다>

    「···하므로 이는 괴력난신들이나 할 만한 일이라면서 모조리 폐지를 명하셨다. 다만 고을과 마을에서, 고을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지내는 것까지는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시었다.」

    정덕(正德) 1년 12월 8일 중용월보 최 기사

    융은 흐뭇하게 초안을 읽어내려갔다.

    별로 검수할 것도 없어보였다.

    알아서 잘들 작성하는 것 같다.

    사실 임금이라고 해서 각지에서 일어난 사실 모두를 알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 신문이란 걸 보면 모두 알게 된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디에서 산송이 일어났는지.

    어디의 누구와 누가 시비가 붙었는지.

    섬뜩한 내용도 있고, 재미난 글들도 있으며, 감동 있는 글들도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초안을 읽어 내려가던 융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三十四.

    <빈청에서 진성대군이 천하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하다>

    「···하므로 진성대군께서는 노공필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하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으니 이를 위해 헌금을 한다면 내 능히 이를 증명해보이리다.”

    하였다. 이 방법이란 것은 아주 간단했다. 천하가 네모나다면, 예컨대 제주도에서 서쪽을 목표로 항해한 함대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이요, 만약 둥글다면 서쪽을 목표로 항해한 함대가 다시 제주도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를 제외하고도 대군은 천하가 둥글다는 증거로······.」

    융은 기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것이야 말로 천하의 어떤 왕들도 해내지 못 한 왕업이 아닐까?

    뭔가 짜릿한 쾌감 같은 것이 온몸을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