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52화 (25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52화>

    ***

    오전 11시.

    수업은 끝났다.

    비도당에 바글거리던 학생들은 모두 퇴실했고, 남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형님만 빼고.

    “역시 구식례는 폐지하는 게 좋겠지?”

    “폐지하는 게 더 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볼 때 구식례는 구태다.

    구식례란 게 결국 하늘의 경고에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한 의식에 불과한데, 이게 공사천(公私賤)의 백성들에게는 이득이 될지 몰라도, 군주에게는 불리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구식례에서의 일식이 군주가 부덕해서 일어난 현상이라는 전제를 깔고 가는 거니까.

    뭐, 백성들의 마음에 안정을 주기 위한 차원이라면 굳이 폐지할 필요는 없겠다만··· 형님은 원래 껄끄러운 건 질색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경연도 폐지하신 건데, 번잡하고 스트레스만 받는 구식례를 하고 싶어 하실 리가 없다.

    “그렇겠지?”

    반신반의하며 되묻는 형님.

    답정너들이 흔히 보이는 태도다. 이럴 땐 삼자의 확신이 필요하다.

    “구식례 폐지한다고 하면 당장은 백성들이 불안해 할 수는 있겠지만, 폐지하고 나서 아무런 일도 없으면 차차 적응 할 겁니다.”

    일식 현상이 일어났다. 그런데 구식례는 폐지됐다.

    당장은 백성들이 동요하겠지만, 막상 구식례 없이도 해가 다시 떠오르고, 무탈하게 한 해가 간다면 크게 개의치는 않을 것이었다.

    “그럼 구식례랑 벽괴제도 겸사겸사 폐지해야겠다. 번거로운 건 딱 질색인데, 잘 됐다.”

    “점심이나 드시겠습니까? 시간이 벌써 밥 때 다 됐는데요.”

    “그럴까?”

    “점심은 삼겹살 어떠십니까?”

    “내빙고(얼음창고)에 삽겸살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한 번 상선에게 물어볼 테니 남아있다면 먹자꾸나.”

    삼겹살 해먹는데 수라간이 아니라 왜 내빙고냐 할 수도 있지만 여긴 냉장고가 없다. 냉장고도 없으니 냉동고는 당연히 없다.

    그래서 형님은 삼겹살을 내빙고라는 왕실 얼음창고에 얼려서 먹고 계신다.

    “네.”

    어쨌든 오랜만에 배때지에 기름칠 할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생각해보면 삼겹살 안 먹은지도 꽤 됐다.

    들뜬 마음으로 교재들을 챙기면서 형님과 잡담을 나눴다.

    오키나와에서 통 기별이 없는 게, 이놈들이 통수 치는 거 아니냐··· 사람을 보내서 오키나와에 순찰사로 상주하고 있는 이계동에게 무력시위라도 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고 보니 요새 신문사가 왕을 너무 띄우는데 낯뜨거우니 자제좀 시켜라··· 삼남에 명한 수리시설의 공사가 부진한 고을의 수령들은 파직이라도 시켜야겠다··· 등등.

    말그대로 잡담이었다.

    잡담치고는 오키나와 왕과 수령들이 들으면 기겁할 내용이긴 하지만······.

    그렇게 잡담과 함께 교재들을 다 챙긴 우린 비도당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 할 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형님이 귀를 종긋 세우시더니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귀를 기울여보니 과연 작게 소란이 들려온다.

    “백주대낮에 언놈들이 싸움질을······.”

    아무래도 우려하던 게 터진 것 같다.

    계층 간의 반목 말이다.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화가 난다.

    이 자식들이 총장님 말씀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말이지.

    씩씩거리며 형님과 함께 현장으로 향했다.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것들이 싸움질 정도가 아니라, 대여섯명이 아예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뒷차기는 기본에 공교롭게도 마침 어떤 녀석은 날라차기도 하고 있다.

    “얼씨구.”

    바닥을 보니 강냉이 몇 개가 떨어져있었다.

    보통 싸움질이 아니라 말그대로 난투극이었다.

    “모두 동작 그만!”

    소리를 못 들은 건지, 싸움질이 멈추진 않았다.

    재차 소리치자, 그제야 난투극의 장본인들이 멈춰섰다. 몇몇은 날 알아보고 헛바람을 들이켰고, 또 몇몇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당장이라도 상대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상황이 조금 진정된 것 같자, 나는 난투극의 장본인들을 살펴봤다.

    역시나 모두 피떡이 돼있다.

    다만······.

    “거기, 둘.”

    나는 얼굴에 취기가 감도는 둘을 불렀다.

    “···”

    “자네들은 백주대낮에 술 쳐먹고 싸움질을······.”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둘의 복색을 살폈다.

    뭔가 이상하다.

    청금복은 청금복인데 내가 아는 청금복이 아니다.

    소매는 길고, 밑단은 늘어져있다.

    이건······.

    “뭐야, 씹선비들이었네.”

    “뉘시오.”

    확실히 날 모르는 걸 보면 우리 학교 학생들이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이 씹선비들은 이미 사라진 지 백만년은 더 지난 성균관 교복을 입고 지랄인지 모르겠다.

    “나? 여기 총장. 거기, 자네.”

    두 씹선비들을 일별한 나는 우리 학교 학생 한 명에게 다가갔다.

    보통 얻어 터진 게 아닌지, 입술이 부르터졌다.

    “어떻게 된 건가?”

    이름 모를 우리 학교 학생은 두 씹선비들을 흘긴 채 사건의 내막을 전했다.

    그리고 그 내막을 다 들었을 즈음.

    나는 참을 인(忍)자를 머릿속에 그렸다. 이것들이 감히 남의 동네에 와서 행패를 부렸다.

    행패도 보통 행패가 아니라, 감히 내 학문을 혹세무민하는 참언(讖言)이라 모독했다.

    결국 씹선비와 학생들 사이에 시비가 격화됐고, 결국 몸싸움까지 하게됐단다.

    “자네는 이름이 뭔가?”

    참을 인자를 되뇌이며, 씹선비 중 한 사람에게 말했다.

    예의 씹선비는, 내 신분 때문인지 마음에 안 내키는 표정을 잔뜩 지으면서도 고분고분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이형윤이란다.

    “이형윤.”

    “그러하옵니다.”

    “내가 알기로 논어나 맹자에 함부로 주먹질하고 다니라는 글귀는 없는 걸로 아는데, 내가 배운 논어랑 자네가 배운 논어랑은 좀 다른가?”

    “소란을 일으켜서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만, 사람을 먼저 무시한 건 저놈들입니다, 대감.”

    “논어에는 무시 당하면 주먹질부터 하라고 나와있나 보지? 역시 내가 아는 논어에는 그런 글귀는 없는데?”

    인상을 팍 구긴 씹선비 이형윤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유가 어찌됐든 송구스럽게 됐습니다.”

    “죄송하단 말로 끝날 게 아니지, 당장 포청으로 가세.”

    “이런 걸로 무슨 포청을 간다고 하십니까? 더군다나 수를 보십시오. 우린 고작 둘인데, 저들은 넷이었습니다. 맞아도 우리가 더 맞았을 텐데, 어찌 편파적으로 구십니까?”

    맞아도 저희들이 더 맞았을 거라는 말과 다르게, 이놈들 얼굴은 상대적으로 정상이고 우리 학교 학생들 얼굴은 죄다 비정상이다.

    이거, 아무래도 교과목에 무예나 체술 같은 것도 넣어야겠다.

    “그러니까, 편파적인지 아닌지는 포청가서 따지면 될 문제 아닌가?”

    “이런 일로 포청에 가면 안 되지.”

    대답은 씹선비에게서 들려온 게 아니었다.

    “형님.”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시던 형님이었다.

    청금복들 사이에 나타난 곤룡포에, 청금복들이 죄다 부복했다.

    씹선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형님은 그런 씹선비 둘을 흘겼다.

    “감히 어전에서 무례를 범했으니 이것이 과거 용포에 술잔을 엎는 불경을 저지른 이세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이런 일은 포청이 아니라 금부에서 처리해야지.”

    ***

    편전.

    대사성 이점의 표정은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져있었다.

    다른 대신들의 표정도, 이점처럼 노골적으로 일그러지진 않았어도 당혹을 금치 못 하는 표정들이었다.

    “어찌 죄다 말이 없는가?”

    “그게······.”

    “신들이 미욱하고 또한 불민하여 어떤 분부인지 잘 알지 못 하겠나이다.”

    “내가 불경이라도 외웠단 말인가? 그 두 놈들이 지금 과거 이세좌처럼 불경죄를 저질렀으니 어떤 벌을 내림이 좋겠냐고 묻지 않았는가 말이다.”

    “···”

    쾅!

    “어찌 말들이 없어!”

    꿀꺽.

    재촉하는 임금이었지만, 그 누군들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일이었다.

    성균관의 태학생들과 진성대학의 학생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그걸 우연찮게 임금이 목도했는데, 이걸 불경죄로 다스리겠다니······.

    아니, 다스린다면 다스릴 순 있겠지만 석연찮은 건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성균관을 폐지하면서 지방의 선비들이란 선비들은, 조정에 간신 밖에 없다며 수군거리고 있는데 여기에 억지에 가까운 죄목으로 두 태학생들을 처벌한다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석연찮게 느끼건 곤란해 하건.

    융이 느끼고 있는 분노는 가짜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마음에 안 들었던 성균관 놈들이다. 마음에 안 들던 놈들이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리고 역모를 일으켰다.

    사전에 발각돼서 소요는 없었다지만, 만약 발각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많은 수의 사족들이 호응을 했었더라면?

    어찌 됐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분노와 상실감에 폐지를 했던 것인데 아직도 제놈들이 청금복 시절 유생인 줄 알면서 거들먹거린다.

    나라에서 작은 잘못 정도는, 훗날 간성이 될 자들이니 눈 감고 넘어가거나 묵인해주며 우대해주던 그 유생인 줄 착각하고 있단 말이다.

    그뿐인가?

    진성의 학문을 근거 없이 모독했다. 혹세무민이라니··· 당장 불경죄가 아니라, 종친을 모독한 죄로 잡아 족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오나 역률로 다스리시겠다는 말씀은 조금은 과한 처사가 아닌지 하여······.”

    꿀먹은 벙어리가 된 대신들 사이에서 이점이 조심스레 의견을 피력했다.

    가뜩이나 성균관 대사성으로, 성균관을 지키지 못 했다고 욕이란 욕은 잔뜩 먹고 있는 요즘인데 단순 폭행 사건에 연루 된 두 태학생들 마저 지키지 못 한다면, 이건 부모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격에 가까웠다.

    게다가 역률로 다스리겠다니······.

    “과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황송한 말을 하려거든, 안 하면 되지 않는가.”

    “···”

    “절대 과하지 않다. 이놈들이 어전에서 무례를 범한 게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이세좌는 재상의 위치에서 무례를 범했어도 목숨을 간수하지 못 했는데, 하물며 일개 사족이 임금을 기만하였으니 생각들 해보아라. 그놈들이 임금 알기를, 논어 대하듯 했다면 과연 이런 불상사가 있었겠는가? 이놈들은 어진(御眞)과 논어가 불에 타고 있으면 논어부터 구할 놈들이다!”

    “···”

    “전하.”

    “오, 좌상. 말해보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대사성의 말씀처럼 역률로써 처벌하는 것은 분명 안 좋은 선례를 남기는 일이 될 것 같사옵니다.”

    대사성 이점 때와는 다르게, 융은 콧등만 씰룩거렸다.

    “그런가?”

    “···예. 유형(流刑) 정도면 어떻겠사옵니까?”

    “유형이라······.”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는 융에, 허침도 가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벼운 사건을 역률로 다스리는 건, 다른 걸 다 떠나서 임금에게도 이로운 일이 아니라 판단됐다.

    “그렇사옵니다. 역률은 분명 과한 처사라 수군거리는 호사가들이 있을 테지만, 유형은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겠사옵니까?”

    “으음.”

    “지금 전하께서 노하신 까닭은 신이 짐작하기로, 어전에서 무례를 범한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진성대군을 모욕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종친을 모욕하였으니 당장 난장을 친다 한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마는, 역률을 남발한다면 외려 역률이 가벼워질 수도 있사옵니다. 청컨대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떼창하는 대신들에 융은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러고 보면 경들의 말도 맞는 듯 하다. 내 너무 예민하게 군 것이 아닌가 하다.”

    “···”

    “그럼 두 놈들은 사진에 유배토록 하겠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진이라니··· 가서 뒤지라는 말과 다름이 없지만 어쨌든 유형은 유형이다.

    “대신, 앞으로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때는 무조건 역률로 다스릴 것이니 그리알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하교하시옵소서.”

    그래도 태학생들의 목숨은 살렸다는 생각에 들뜬 건지, 이점이 들뜬 표정으로 말을 가로챘다.

    “하교하려고 하지 않는가!”

    “···”

    “그, 구식례와 벽괴제 같은 제사는 모두 폐지하는 것이 좋겠다.”

    “···?”

    “원래는 빈청에 문의토록 하려 했는데, 굳이 일을 번거롭게 처리할 까닭이 없어 보인다. 앞으로 구식례와 벽괴제와 같은 제사는 모두 폐지할 것이니 그리 알라.”

    “하오나 구식례를 폐하시오면······.”

    노공필이었다.

    그의 목에는 예전에 융이 하사한 신언지가 매달려 있었는데, 조정에 나올 때마다 신언지를 차고 나오라는 융의 특별 분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언지의 효험이 다한 것이냐?”

    “···”

    “구식례와 벽괴제가 무엇이냐. 일식에 해를 구하고, 지진과 같은 재변에 지진을 막아달라 하는 의식이다.”

    “그렇사옵니다. 하온데 구식례와 벽괴제를 폐하신다 하오시면······.”

    “그런데 생각해보아라. 이미 서운관에서는 저 옛날 이순지가 만든 칠정력(七政曆)으로 하여금 일식이 일어나기 석달 전에 예보한다. 일식이 진실로 제왕의 부덕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서운관은 무슨 점술이라도 친단 말이냐? 결국 구식례는 괴력난신들이나 신봉할 만한 예다.”

    “···”

    “또한 지진 같은 재변이 있으면 벽괴제나 해괴제(解怪祭)를 지내는데 이는 선왕 때도 같았다.”

    “그렇사옵니다. 선왕 때 특히 지진 재변이 많아, 선왕께서는 대신들을 불러 하문하시기를, ‘내가 부덕하였는가? 내가 사람을 적재적소에 쓰지 못 했는가? 내가 형벌을 남용하였는가?’ 거듭 물으시며 괴로워하셨사오니 이는······.”

    융은 김전을 흘겼다.

    “궤변이다.”

    “···”

    “《춘추》에 말하기를, 지진과 성변(星變)과 천변(天變)은 음기가 성하고 양기가 쇠약해서 발생하는 현상이라 하였는데 이게 진실이라면 측천무후가 집권하던 당시에는 천변과 같은 재변이 끊이지 않았더냐?”

    “···”

    “역시《시경》에서는 임금의 덕이 부족하기 때문에 천변이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세종대왕 때는 어찌 그리 많은 천변이 일어났단 말이냐? 위와 같은 재변은 결국 임금의 덕이 부족하거나, 음기가 성하고 양기가 쇠약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의 조화다. 이를 두고 하늘의 경고니 응징이니 떠드는 것이야말로 괴력난신들이나 할 소리니, 나는 후세에 괴력난신이라 불릴 순 없겠다. 모든 제사를 폐하라.”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부은 융은, 어안이 벙벙한 채 눈만 끔뻑거리는 대신들을 일별한 편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경들이 지금 발을 딛고 무사히 숨 쉴 수 있는 것은 모두 중력의 이치 덕이니 중력의 고마움을 알도록 하라.”

    라는 말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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