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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50화 (250/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50화>

    ***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적응을 아주 잘 했다.

    “···그러니까, 결국 오염이란 것은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더러운 물을 마시면 몸속에서 아까 설명한 세균이 기를 허하게 만듭니다. 기가 허해지면 면역력이 약해지는데······.”

    보라, 매우 기계적인 이 설명을.

    “총장님, 면역력이 무엇이옵니까?”

    “쉽게 말씀드리면 세균은 공격자고, 면역력은 수비측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면역력이 약해진다는 건, 수비가 약해진다는 걸 뜻하는데 견고한 성도 수비가 약해지면 결국 함락되기 마련이니 몸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세균이라 할지라도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에 우리 몸에 침투하면 각종 질병을 일으킬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과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 것이 대관절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하옵니다.”

    젠장, 다시 원점이군.

    방금 질문한 학생은 오준이의 절친한 벗으로, 오준이랑 해남에서 함께 상경한 제우라는 녀석이다.

    “자, 손발을 왜 깨끗이 씻어야 하냐··· 이 우리가 활동을 하면서 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 잔뜩 묻게 됩니다. 이 세균 묻은 손으로 이도 쑤시고, 눈도 비비고, 코도 파고, 가끔은 귀도 파죠. 세균을 몸속으로 밀어넣는 겁니다. 그런데 손발을 깨끗이 씻으면······.

    도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냐고 묻지마라······.

    나도 지금 후회하고 있으니까.

    뭐 때문에 후회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난 팔자에도 없는 교수 노릇을 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은 보면 알겠지만 위생과 관련한 보건이다.

    확실히 지랄 맞은 팔자다.

    보건이라고는 중학교 2학년 시절에 수업 받기 싫어서 꾀병 부리고 보건실 들락날락 거린 게 전부인데, 그런 내가 보건 과목의 교수(?)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단.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진성대학에 총 8개 과목의 필수 과목을 선정했다.

    산수, 외국어, 천문학··· 아, 천문학은 과학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달리 과학이란 말이 없거든.

    좌우지간, 그 다음으로는 지리, 철학, 역사, 국어, 보건이다.

    이 8개 과목은 내가 생각할 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었다.

    사실 그렇다.

    산수는 빼놓을 수가 없다.

    사실 실생활에서 중등교육 이상의 수학은 쓰이지도 않는다지만, 최소 초중등까지의 수학은 실생활에서 간간이 쓰인다.

    개개인이 스마트폰 하나씩 들고 다니면서 계산할 일 생기면 곧바로 계산 할 수 있는 21세기에서도 수학은 필수 과목중 하나인데 여긴 주판알 튕기는 시대다.

    산수가 없으면 팥 없는 팥빵인 거지.

    외국어도 그렇다.

    여기서는 영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중국어랑 일본어, 여진어가 중요하다. 특히 중국어가 가장 중요한데 어떻게 보면 산수 과목보다 중국어 하나 배워놓는 게 학생들한텐 훨씬 실용적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천문학?

    이건 말 해, 뭐 해?

    나는 최소한 우리 진성대학의 학생들이 피뢰침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 비라는 게 기우제 뚝딱 지낸다고 내리는 것만은 아니란 걸 알게 하고 싶었다.

    덕분에 보건 과목과 천문학까지 도맡아하게 됐지만······.

    그나마 좀 덜 필요한 과목이 철학 정도인데··· 철학은 도덕이나 윤리 과목 정도로 보면 되려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떻고, 플라톤이 어쩌며, 소크라테스랑 칸트가 누구며, 슬라보예 지젝이 주장한 잉여쾌락 이론이 뭐다··· 등등.

    이런 건 당연히 설명 할 수가 없고, 말했다시피 도덕이랑 윤리 과목의 중간 지점에 있다.

    기분 더럽지만 어쩔 수 없이 공자랑 맹자도 배운다.

    물론 과목 이름처럼, 철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그리고 역사.

    신채호 선생이 그랬다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나는 이 말을 진성대군으로 살게 되며 체감하고 있다.

    알다시피 이 시대의 사람들과 원활한 대화를 하기 위해 장곤 선생님께 많은 걸 사사 받았고, 그 과정에서 《자치통감(資治通鑑)》 이나, 《동국사략(東國史略)》이나, 《송사(宋史)》, 춘추《春秋》, 《구당서(舊唐書)》, 《후한서(後漢書)》 같은 역사도 배우게 됐는데 나름 공부가 많이 됐다.

    지나간 역사에서 배울 게 참 많았다고나 해야할까?

    그런데도 왜 그 모양 그 꼴이냐고 묻는다면, 우린 잠 안 자고 공부 열심히 하면 명문대에 진학 할 거란 걸 중학교 까까머리 시절부터 알았잖아?

    스펙 잘 쌓아 놓으면 훗날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게 된다는 건, 늦어도 고등학교 무렵부터는 알았고, 술담배가 해롭다는 건 초등학교 때부터 알았어도 결국 하고 있고?

    같은 거다.

    아무튼, 그 다음은 지리인데, 지리는 말 하면 입 아프니까 패스.

    그리고 국어.

    이건 사실 알기 쉽게 국어라고 말은 해 놨지만, 언문이다.

    자, 이렇게 해서 8개 과목인데, 보건은 누가 가르칠 사람이 없다.

    그래서 결국 팔자에도 없는 교사 노릇을 하게 된 거다.

    “그럼 물을 끓여 먹으라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시옵니까?”

    오준이다.

    “바로 그겁니다. 개울물이든 강물이든 우리 눈엔 보이지 않는 세균이 많습니다. 이걸 대부분의 사람들은 끓이지 않고 그냥 식수로 사용하는데 평상시에는 큰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역병이 돌게 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역병이라는 말에 학생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맺혔다.

    여기서 역병이란 말은 빈사(瀕死)와 동의어다.

    21세기에서도 전염병은 국가적인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국가는 늘 바이러스의 동태를 주시하다가, 혹시라도 환자가 발생하면 해당 환자를 즉시 격리 조치하고 최대한 추가 확산을 막는다.

    하지만 여기선 좀 다르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 즉시 격리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전염병이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버린다.

    예컨대 개성에서 역병이 창궐했다 치면, 역병은 들불처럼 번져나가서 결국 그 일대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나서야 종식이 된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조정에서 각 고을의 성문들을 틀어막으려 해도 뒤늦은 조치일 때가 많다.

    이미 바이러스 보균자가 성내에 들어와있는 상태라거나··· 아니면, 타인과 접촉을 했다던가.

    그러니 만큼 역병은 여기 사람들에게 거의 호환(虎患)과 비슷하다.

    “해당 식수 안에 역병의 세균이 있을지 모르는데 이걸 그대로 마시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병에······.”

    “맞습니다, 바로 역병에 감염 되고 맙니다. 하지만 끓인다면? 세균은 죽습니다. 대부분의 세균이 죽죠. 설령 해당 식수에 세균이 있다 할지라도요. 그러니까, 물은 모두 끓여 마시도록 하고······.”

    평균 연령이 15세는 넘는 학생들을 앞에 두고 기초 보건 위생을 설명하려니 갑자기 내가 한심해진다.

    ***

    그 시각, 강녕전.

    “···무료하군.”

    통상적으로 임금의 일과는 매우 고단한 편이었다.

    꼭두새벽부터 기상해서 정무를 보니 고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부왕이신 성종대왕 역시 꼭두새벽부터 기상하셔서 자정이 돼서야 취침에 드셨고, 얼마 전까진 융도 그랬었다.

    다만 따지고 보면 임금의 하루가 고단한 건, 경연이 6할을 차지한다.

    하루에 세 번의 경연이 있는데 이 말은 하루에 세 번의 잔소리가 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잔소리를 듣고 난 뒤에는 기분이 팍 상한채로 현안을 처리해야 하고, 지방에서 무더기처럼 올라오는 상소도 틈틈이 읽어야 한다.

    고단 할 수 밖에.

    하지만 경연을 폐지한 융에게는 해당 되지 않는 말이었다.

    경연을 폐지하고 나니 무료하기가, 이렇게 무료 할 수가 없었다.

    하루 24시간 기준으로,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16시간 중노동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가 5~6시간 정도의 노동으로 바뀌었으니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차라리 경연이 있을 때는 아침에 잔소리 듣고, 낮에 잔소리 듣고, 저녁에 잔소리를 들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폐지 된 지금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축구를 준비하오리까?”

    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는 것도 하루이틀이다.

    특히 축구처럼 체력 소모가 큰 놀이는 매일 할 수가 없다.

    “뭘 한다.”

    책이라도 좀 읽어볼까 싶었지만 관뒀다.

    바로 일다경 전까지 구당서를 읽고 있었다.

    ‘유구국에서는 무료할 틈이 없었거늘.’

    거기서는 분명 그랬다.

    경치를 감상하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으니까.

    “흐음.”

    한참을 고민하던 그때.

    “상선.”

    “예, 전하.”

    “진성이는 지금 뭘 한다던가?”

    “대학에서 강론을 하고 계신 줄로 아옵니다.”

    “천문과 보건?”

    “그렇사옵니다.”

    “그거면 되겠구만.”

    “···?”

    어리둥절해 하는 상선을 뒤로한 채, 융은 잠행 준비를 서둘렀다.

    준비를 다 하고 난 뒤는 곧장 진성대학으로 향했다.

    이미 한차례 와 본 적이 있는 진성대학이었기에, 내부 지리는 머릿속에 훤했다.

    그는 걸음을 바삐 놀려 비도당으로 향했다.

    非道堂.

    그가 휘갈겨 쓴 비도당의 현판이 보였다.

    “다시봐도 참 마음에 든단 말이지.”

    피식 거린 융은 비도당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안에서는 수업이 한창인지, 진성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주상전······.”

    “쉿.”

    가갈하는 상선의 입을 틀어막은 융은 마루에 주저앉아 수업을 엿들었다.

    -지진?

    -예, 보통 지진은 재변으로 일컫는데 총장님의 말씀대로라면 재변이 아닌 것입니까?

    융은 귀를 종긋 세웠다.

    이건 융이 진성에게 1:1로 강론 받던 때에도 듣지 못 한 내용이다.

    보통의 신하들에게 지진을 묻는다면 피전감선(避殿減膳)이라 해서, 임금의 부덕을 탓하면서 공구수성(恐懼修省)하라 했겠지만 진성은 왠지 다를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하, 우리 오준 학생이 질문 하나는 기똥차게 잘 했네. 지진은 절대적으로다가 하늘의 노여움을 산 일이 아닙니다. 꼭 씹선비들이 지진이 하늘이 내린 재앙이라고 하거나, 재변이라고 말하는데··· 뭐, 이해는 합니다. 지진이라는 현상을 설명할 이론이 없으니까, 하늘이랑 임금이라도 운운해야 면이 서거든. 자, 그런의미에서 재변이 발생했습니다. 뭐, 우박이 내렸건 가뭄이 발생했건··· 홍수가 발생했건, 재변이 발생했어요. 전하께서 몸을 사린다고 재변이 그칩니까?

    -그건 아닌 듯 하옵니다.

    -그렇죠. 비 안올 때 기우제 지낸다고 비가 옵니까? 아, 오죠.

    융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올 때까지 지내니 안 올 수가 없지.”

    -기우제를 무슨 올 때까지 지내는데 비가 어떻게 안 와? 오긴 옵니다. 근데 그게 기우제 때문은 아닌 겁니다. 지진도 마찬가지예요. 지진 같은 재변만 일어나면 씹선비들은 임금이 피전감선해야 하고 정도가 심하면 벽괴제(잇따른 지진 재변에 대한 제사)도 지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다고 지진은 안 없어집니다.

    -하오면 지진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이옵니까?

    -지진의 원인은 사실 복합적이라 딱 이거다,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밞고 있는 땅밑에는 지층이라는 게 있는데··· 아, 이건 그림으로 설명하는 게 빠르겠네. 자, 보면······.

    그림으로 설명한다면 더 이상은 엿듣는 게 무의미해진다.

    융은 멋쩍게 비도당 문을 열어제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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