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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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록 닥나무 밭을 사들이고, 성균관 터에 제지소를 세우긴 했지만 종이가 바로 뚝딱하고 나오는 건, 당연히 아니다.
방금 치킨 시켰다고 5분 안에 배달 되는 걸 바라는 건, 욕심이다, 욕심.
제지소가 종이 공급에 차질 없이 원활히 작동 되기까지는 넉넉잡아 3개월이 더 소요될 터였다.
그럼 신문사 창립이 늦어지지 않냐고?
다행히 그 동안은 형님께서 도움을 주시기로 하셨다.
조지서같은 관서에서 일정 부분 셈을 치르고, 종이를 공급해주기로 말이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편집팀도 구했다.
승정원에서 조보 필사를 전문적으로 하던 전현직 기별서리(奇別書吏) 다수를 형님의 묵인 아래 스카웃했고, 신문을 각지로 배포 시킬 배달원들도 삼성 지부의 협조로 수월히 구할 수 있었다.
배달원들은 모두 491명이었다.
일단 신문사를 창립하고, 신문을 정기 구독하는 독자들이 늘어나면 좀 더 채용 할 생각으로 500명을 넘기진 않았다.
적자는 최소화해야지.
아무튼 이처럼 순조로운 신문사 창립이었지만 딱 한 가지가 걸렸다.
홍보였다.
여기에 무슨 SNS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홍보 할 매체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게 문제였다.
물론 서울권은 큰 문제가 없다.
조보는 여기서도 특권 계층만 받아 볼 수 있는 관보(官報)다.
전현직 관리라던가, 그 가족들만 암암리에 구해다 볼 수 있는 신문이란 말이지.
그런데 이걸 구독료만 내면 노비도 볼 수 있게 한다면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는 서울권에서는 금방 구독자들이 늘어날 터였다. 하지만 지방은 그게 좀 어려웠다.
지방에도 우리 중용월보의 창립을 알릴 수단이 필요했는데, 형님께 직접적으로 도와달라 할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형님은 이미 우리 중용월보의 초기 창립멤버나 다름이 없다.
그만큼 많은 도움을 주셨기 때문인데, 앞에 말한 종이 공급해주는 문제 뿐만 아니라 중용월보의 인쇄소에서 쓰일 활자도 형님이 수급해주셨다.
목활자는 그런대로 구하기도 쉽고, 장인들한테 수주줘서 만들 수도 있었지만 금속활자는 만들기도 까다롭거니와, 돈 주고 살래도 파는 사람이 없었다.
이 금속활자 일부를 형님이 대여 형식으로 빌려주셨다.
그런데 여기에 홍보까지 도와달라고 하면 사람이 염치가 없는 거지.
만, 형제끼리 그런 게 어딨어?
나는 또 형님께 SOS를 청했다.
물론 이번에 형님께 바라는 도움은 물질적인 지원이 아니다.
뭐랄까, 특종이라고나 할까나?
명색이 신문산데 홍보 방법도 기발해야지 않겠냐고.
특종 하나를 우리 중용월보에서 터뜨리는 방식으로 홍보할 생각이다.
“이걸 굳이 해야 하는 것이냐?”
도움을 청하러 찾은 강녕전.
형님은 회의적이셨다. 물론 내 도움을 거절하신 건 아니다. 그 방법에 회의적이란 것이다.
회의적인 형님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굳이··· 그런 건 서리(아전)들을 시켜도 될 일이 아니냐? 아니면 억수를 시켜도 되고······.”
“전사자들 모두 안타까우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안타깝다. 안타깝지. 한데 이 통지서라는 걸 내가 굳이 유족들한테 전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영 안 내켜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느냐?”
“형님.”
“이게 바로 특종입니다, 특종. 이보다 더한 방법이 어딨겠어요?”
“특종?”
“왕이 직접 행차해서 유족들한테 전사 통지서를 전달하고 위로한다. 이게 신문으로··· 아니, 조보로 전국 각지에 나간다고 생각해보세요.”
형님은 우리 중용월보의 신문을 조보로 인식하고 계셨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신문의 기능이 조보와 흡사하니 무리도 아니다.
조보를 받아보는 사람들의 범위가 넓어진 게 신문이니까.
“진성아.”
“네.”
“무릇 임금의 호령이란 것은 권위와 경외에서 나오는 법이다. 권위와 경외가 없는 임금에게 호령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하물며 만기(萬機)를 처결하는 임금이 고작 이런 인편부 따위의 역할이나 하고 있으면 이 일을 두고 사족들이 얼마나 비웃겠더냐?”
여담인데 형님은 가끔 과민하리만치 권위에 집착하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위엄이라던가?
뭐, 왕으로서 마이너스 요인은 아니지만 지금은 마이너스 요인이다.
권위가 깎일까봐 못 하시겠다는 거니까.
“사족들이 비웃긴요, 형님. 그런 걸로다가 비웃는 놈들은 멍석을 말아도 시원찮습니다. 이건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 차원이예요, 예우 차원.”
“으음.”
“오히려 권위가 높아질 걸요?”
“높아져?”
“임금이 군사들을 사열하는 게 뭐 때문입니까? 내가 너희의 고단함을 알고 있고, 너희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너희는 조금도 겁내지 말라는 어떤, 무언의 시그널··· 이 아니라, 신호를 주기 위함이 아닙니까?”
흥분하면 아직도 현호로 살 때 쓰던 말이 튀어나온다.
안 고쳐져, 이거.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내 말투가 아니지.
“이것도 비슷합니다. 무언의 신호를 주는 거죠.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임금한테 충성한 사람들을 임금은 절대 잊지 않는다. 오히려, 임금이 고작 인편부 역할을 자처할 정도로 그들을 생각하고 있다. 그 파급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긁적긁적.
“하지만 마음이 내키지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부모의 죽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죽음을 부모에게 알리는 것 만큼 비참하고 우울한 일이 어디 있더냐? 그 가슴 아픈 일을 어찌 하겠더냐?”
음, 꼭 권위 때문만은 아니셨던 것 같다.
“맞는 말씀이시긴 한데··· 결국 형님의 휘하에서 호령을 받았던 자들이니 마지막 길도 호령으로 배웅해주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호령으로?”
“네.”
내 말에 형님은 말이 없어지셨다.
어떤 선택을 하던, 죽음을 통보하는 게 꺼려져서라면 강권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무리 특종을 위해서라도 말이지.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네 말이 맞다. 내 호령으로 산화하였으니 내 호령으로 배웅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그들을 위한 제도 지내는 것이 좋겠다.”
“예? 제사요?”
이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다.
***
“여기냐?”
임금의 질문은 벌써 7번째 똑같았다.
여기냐?
묻고는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다가, 또 한참이 지나서 다시 여기냐? 물으신다.
상선은 대략 임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이미 망자의 가족들은 충훈부를 통해 망자의 전사를 통보 받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다시금 통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여러모로 마음이 싱숭생숭 하실 터였다.
그래서 그는 똑같은 7번째 질문에 똑같은 7번째 답변을 내놓았다.
“그렇사옵니다. 도치의 집이옵니다.”
임금은 역시나 말씀이 없으셨다.
또 똑같은 8번째 질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전하께서 발을 내딛었다.
상선은 황급히 목청을 가다듬고 가갈을 준비했다. 그런 가갈을 제지한 건 융이었다.
“됐다.”
“하오나······.”
“나는 임금으로 여기 온 것이 아니라 남해정토 대장군으로 찾은 것이다.”
“···”
“안에 도치의 어미 있느냐.”
잠시 후.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군복을 착용한 융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부복을 했다.
아무리 무지몽매한 노파라 할지라도 임금의 군복을 못 알아 볼 정도의 무지몽매함은 아니었다.
“나, 나랏님이 아니십니까요?”
“네가 도치의 어미냐?”
“그, 그렇습니다요.”
융은 잠시 망자의 집을 훑어봤다.
여기까지 발을 떼기가 어려웠지, 한 번 발을 떼니 거리낄 게 별로 없는 느낌이었다.
“충훈부에서는 다녀갔고?”
“보훈청이란 곳에서 왔다 가셨습니다요.”
“아, 그랬겠구나.”
“한데 귀한 분께서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엘······.”
융은 다시 한 번 망자의 집을 돌아봤다.
확실히 누추하긴 하다.
“도치는 용감했다.”
“···”
“적의 퇴로를 아주 용감무쌍하게 막아섰고, 적들의 기세에도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노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 아들은 어찌 죽은 것입니까요?”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와중에, 적의 본대가 도치가 있는 진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퇴로를 확보하기 위함이었지. 팽배수인 도치는 적과 일선에서 싸우다······.”
융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받은 보고서에 의하면 도치의 몸에는 아군의 화살촉이 박혀 있었다.
유시(눈먼 화살)가 피아를 구분하지 못 하고, 도치의 몸에 박힌 셈이었다.
하도 긴박한 상황이었고, 전장터에서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새삼 허무한 죽음이란 걸 각인시킬 필요는 없겠지만, 차마 아군의 화살에 죽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고로.
“팽배수인 도치는 적과 일선에서 싸우다가 적이 아군 셋을 해하려 하자, 한치 망설임도 없이 달려나갔다. 달려나가서, 왜적을 베어넘기고 아군 셋을 구했지만, 정작 본인의 목숨은 구하지 못 했다.”
“흑흑흑.”
“이미 아들을 잃은 심정이니 내 무슨 말을 한다 한들, 네게 위로가 되겠더냐? 내 비록 임금이라 한들 너 하나 위로하지 못 하니 하물며 죽은 자는 어찌 위로하겠더냐? 그러나 도치의 죽음은 결단코 헛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조정의 문무백관들과 팔도의 신민 모두와······.”
문득 융의 시선이 돌아갔다.
인기척에 부엌에서 나온 아낙의 품에 아기가 보였다.
“너의 손자 역시 알게 할 것이다.”
***
나는 형님이 말씀하신 제사가 뭘 뜻하는 건지 잘 몰랐다.
그 제사를 알게 된 건 바로 어제였다.
어제.
편전에서 형님은 갑자기 제사 준비를 하명하셨다. 사실 제사라기보다는 추념식에 가까운 형태였는데, 이 추념식은 보훈청 앞에서 이뤄졌다.
아마, 형님께서도 유족들을 만나고 뭔가 느끼신 게 있지 않을까 싶다.
표정은 침울하고, 말씀은 없으시다.
왕이 우울한데, 신하들이 깨방정 떨 리는 만무하므로, 분위기는 자연스레 숙연해졌다.
미처 추념식이 있을 거란 사실을 듣지 못 한 백성들은, 그저 임금이 행차한단 소식에 용안이라도 보려고 보훈청을 찾았다가 그 숙연한 분위기에 압도 된 것인지, 모두들 말이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형성된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추념식이 시작됐다.
추념식은 간단한 편이었다.
예관들이 향을 피우자, 곧이어 무거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음악이 연주됐다.
그리고 잠시 후.
형님은 전사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셨다.
“···마지막으로 봉해위 1대대 3중대 3소대, 팽배수 이등병 도치. 이 스물 셋은 전사(戰士)였고, 동시에 충사(忠士)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충의를 위해 죽었다. 생각건대, 어떤 죽음인들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진실로 안타깝다.”
“···”
“들으라. 나는 남해정토 대장군으로서 이들을 이끌고 이역만리에 가서 이들을 호령했다. 그래서 이들이 떨친 용맹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대장군으로서 이들을 호령하며 내린 마지막 명은 성문을 열어라와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였다. 또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였고, 속히 효시를 쏘아올려 1대대가 퇴로를 차단 할 수 있도록 하란 것이었다.”
“···”
“그 과정에서 스물 셋의 군사들이 전사했다. 이들의 넋과 혼이 원통함과 이역만리에서의 죽음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 할 수 있으니 내 그들에게 진격의 명을 내린 것처럼, 귀환령을 내리고자 한다.
"···"
“···석우, 그리고 도치. 너희 스물 셋의 혼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오라.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와 평온한 안식을 맞으라. 남해정토 대장군으로서 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