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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47화 (24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47화>

    ***

    청계천이 발 없는 말도 천리를 가게 하는 곳이라면 운종가는 발 없는 말도 삼천리를 가게 하는 곳이었다.

    그만큼 어지간한 소문은 모두 운종가로 시작해서 운종가로 끝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운종가의 한복판.

    “소문 들었나?”

    곡물전(穀物廛)이라 써진 포렴(일종의 간판)이 길게 늘어진 점포 앞이었다.

    오른쪽 볼에 병뚜껑만한 큼직한 점이 박혀 있는 사내가 운을 떼자, 평소처럼 가게 앞 평상에 앉아 부채질하며 소일하던 장년인들이 귀를 종긋 세웠다.

    “무슨 소문?”

    “아니, 그걸 아직도 못 들었어?”

    “뭔데?”

    “하여간, 사람들 소식이 이리 늦어서야, 원.”

    “아, 뭔데? 뜸들이지 말고 얼른 말해나 보게. 답답해서, 참.”

    “이리 좀······.”

    사내가 은근히 손짓하자, 부채질하던 장년인들이 일제히 사내에게 모여들었다.

    “내가 방금 김씨한테 들은 건데 말이지.”

    “김씨라면 어떤 김씨? 기방집에서 재산 다 탕진한 그 김씨, 아니면 진사식당(성균관에 있는 공동식당)에서 일하는 그 김씨?”

    “아, 당연히 진사식당에서 일하는 그 김씨지.”

    “그래서 진사식당에서 일하는 김씨가 뭐라는데?”

    “두시진 전인가··· 갑자기 나랏님이 행차하셨다지 뭔가?”

    “나랏님이?”

    “그래!”

    “희한하군. 나랏님이 성균관에 행차 안 하신지도 한 3년은 되지 않았었나?”

    “3년이고 나발이고··· 사람 말 좀 끊지 말게.”

    “계속하게나.”

    “성균관에 행차하신 나랏님이 위사들한테 무슨 분부를 내리셨는지들 알어?”

    “우린 모르지. 아, 좀. 뜸들이지 말고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건가?”

    “그러니까······.”

    “하, 답답하긴. 뭐, 나랏님이 학궁을 전부 때려 부수라고도 했다던가?”

    장년인2가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탕탕 두들기며 추측하자, 점박이 사내가 화들짝 놀라 장년인2를 돌아봤다.

    “앉은뱅이인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나랏님이 정말 학궁을 전부 부수라고 하셨다고?”

    “그래, 부수는 것도 위사들한테 아예 철퇴로 무장하게 해서 때려 부쉈다지 뭔가.”

    “아니, 나랏님이 학궁을 왜······.”

    “이 사람아, 왜긴. 얼마 전에 학궁에서 역모 사건 있었잖나. 그거 듣고 대노하신 모양이지.”

    “나랏님인데 그래도 되나?”

    장년인3이 볼을 긁적거리며 회의적으로 독백하자, 장년인1이 말했다.

    “나랏님이니까, 되지. 그리고 우리 나랏님이 보통 나랏님인가? 무려 하늘에 다녀 오신 분인데.”

    장년인1이 마치 제 일이라도 된다는 양, 의기양양해서 말하자 점박이 사내를 포함한 장년인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어느 나라 임금님이 감히 하늘에 머물다 오셨었나?”

    “없었지.”

    “아, 근데. 학궁을 때려 부순 건데 선비님들이 또 지랄 안 하려나?”

    “지랄?”

    “아, 눈 멀고, 귀 먼 선비님들 틈만나면 지랄병 도지잖나. 성균관을 때려 부쉈으니 지랄병 도져도 단단히 도지지 않을까 해서 말일세.”

    “설마, 도지려고··· 역모의 온상지라해서 때려 부수신 건데······.”

    “도지면?”

    “도지면? 도지면 우리라도 들고 일어서야지. 하늘에 머물다 오신 임금님 말씀 거역하면, 그게 천리를 거스르는 거지 뭔가? 선비님들이 저희들 스스로 천리를 거스르겠다는데 우리라고 가만 있어?”

    “하긴.”

    “아, 근데 하늘에 머물다 오신 거면 옥황상제하고 바둑도 두고 오셨을라나?”

    “바둑? 두고 오시지 않았겠나?”

    과연 발 없는 말도 삼천리 길을 가게 만드는 운종가의 호사가들다웠다.

    ***

    “···”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덕경》의 노자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이게 바로 놀랄 노자다! 외칠지도 몰랐다.

    도덕경 대신 놀랄 노자를 외치고 있는 내 앞에는 싱글벙글한 형님이 계셨다.

    그 모습이 마치 칭찬을 갈구하는 초등학생··· 같다고 하면 안 되겠지?

    명색이 임금이신데 말이야.

    “···오키나와 왕이 그걸 그대로 받아 들였단 말이죠?”

    놀랄 노자를 한참 외던 나는 한참이 지나 입을 열었다.

    “제놈이 안 받아들이면?”

    하기사······.

    오키나와에 따라 가진 않았지만 듣기로 오키나와는 나라가 망하냐 마냐 하는 갈림길에 서있었다고 들었다.

    그걸 형님이 구해주신 거니까, 오키나와 왕 입장에서는 루시퍼에게 영혼인들 못 팔겠냐마는··· 그래도 놀랄 일인 건 분명하다.

    도대체 오키나와 왕이 형님께 무슨 약조를 했길래 도덕경 대신 놀랄 노자냐고?

    아, 글쎄.

    오키나와에서 할양을 약조 받으셨다지 뭔가?

    할양!

    이게 대박이다.

    할양을 받은 곳이 다름 아니라 도미구스쿠라는 지역이었거든.

    아, 도미구스쿠는 오키나와의 수도랑 지척인 곳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음.

    아! 서울 바로 옆에 있는 구리시나 광명시 정도로 보면 되겠다.

    그만큼 가깝다.

    조차지라면 이해라도 가련만 무려 할양이었다.

    땅을 떼주겠단 말이지, 수도랑 지척인 곳에.

    이건 오키나와의 목줄을 오키나와 왕이 고스란히 형님께 갖다 바쳤다는 소리나 진배가 없다.

    퀘스트 보상치고는 과하긴 한데··· 이게 놀랄 일의 전부는 아니었다.

    “또, 다른 것도 약조했다.”

    “뭘요?”

    “세자를 조선에 보내겠다더구나.”

    이번에야 말로 나는 진짜 할 말을 잃었다.

    세자를 보내겠다······.

    당연히 황이가 오키나와로 가는 건 아닐 테니, 오키나와의 세자가 조선으로 오는 걸 거다.

    말이 보내는 거지, 그 앞에 볼모라는 말이 빠졌다.

    “그리고······.”

    “또 있습니까?”

    “정군 예순명이 상했다. 그뿐이냐? 기껏 정벌한 궁고도(미야코)를 포기하게 생겼는데 이 정도는 오히려 약과지.”

    “그래서 다른 건 또 뭘 요구하셨었습니까?”

    씨익-.

    “교역권이다.”

    교역권?

    선뜻 이해가 안 갔다.

    “교역권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오키나와에 다녀와보니 서이인지 남만인지 모를 오랑캐들의 작은 주거지가 따로 있더구나. 내 그걸 보고 왕에게 ‘표류한 자들이냐?’ 물으니 ‘교역을 하러 온 자들입니다.’ 라고 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갔을 때도 그런 주거지가 있긴 했다.

    인천 차이나 타운처럼 큰 주거지는 아니었지만, 대략 십수호~수십호 정도의 동남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였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말씀이시지?

    의문문만 가득 띄우고 있자, 형님이 재차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들을 목포나 부산진으로 보내겠다는 약조를 받았다.”

    “그게 무슨 말씀······.”

    “네가 교역의 중요성을 내게 늘 말하지 않았더냐?”

    그랬지.

    옛날에 형님께 강의를 하던 시절에 교역의 중요성을 설파한 적이 있었지.

    “그랬죠?”

    “그런데 오키나와 같은 작은 나라에도 이국의 상인들이 와서 장사를 하는데, 우리 나라는 어떻더냐? 고작 여진족과 왜인들이 전부 아니냐? 왕에게 그들을 전부 우리나라로 보내 상행위를 하도록 만들었단 말이다.”

    “그걸 왕이 받아들여요?”

    내가 가 본 오키나와는 전형적인 해상 왕국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 무역이 국가 GDP의 절반은 차지하는 나라였단 말이다.

    그걸 우리나라 한테 인계하겠다는 건, GDP 절반을 포기하겠단 소리나 다름이 없다.

    아니, 자멸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 거지.

    이건 할양이나 볼모를 보내는 거랑은 또 차원이 다르다.

    어느 나라 왕도 제 나라가 망하길 원하는 왕은 없으니 의아함에 물었던 건데, 형님은 고개를 가로젓는 모순을 보여주셨다.

    “당연히 아니지.”

    “그런데 방금 교역권을 인계 받으셨다면서요?”

    “처음에는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말하더구나.”

    “그럴 테죠.”

    “그래서 약간의··· 뭐랄까, 협상을 좀 했다.”

    바로 한시진 전까지 성균관을 때려 부수고 계셨던 형님의 말씀인지라, 대충 무슨 협상인지는 감이 갔다.

    “그러더니 흔쾌히 응하더구나.”

    나는 굳이 무슨 협상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대충 감이 갔거든.

    모르긴 몰라도 아마··· 내 입으로 말하기 껄끄럽지만 협상이 아니라 협박을 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불쌍한 오키나와 왕.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말거라. 내 아무리 부덕하다 할지라도 남의 나라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오겠더냐? 특별히 왕의 사람들이 보낸 상인들에게는 내탕고(內帑庫)로 하여금 후하게 값을 쳐주기로 했다.”

    그나마 약간의 손해는 만회하게 배려(?)를 해줬다는 말씀이신데, 글쎄다.

    “아, 그런데 진성이 네가 왜 찾아왔지? 내 너무 내 할 말만 하느라 깜빡했구나.”

    뭐, 오키나와 왕이 손해를 보건 말건 어쨌건 나랑은 크게 상관 없는 일이고, 내가 찾아온 목적은······.

    “신문사라는 걸 좀 만들어볼까 하는데 형님의 윤허가 필요합니다.”

    “윤허하마.”

    형님께 허락 받는 일이 어렵진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너무 쉬운데?

    ***

    이순재 할아버지도 울고 갈,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윤허를 받은 이상 망설일 게 더 있을까?

    없다.

    나는 신문사 창립에 박차를 가했다.

    이름부터 정했다.

    이름하야 중용월보 되시겠다.

    어용신문사라 좀 모순적이긴 하다만 명색이 신문사이니 만큼 치우침 없이 보도를 하라는 차원에서 중용월보다.

    일보가 아니고 월보인 건, 당연히 매일 신문을 발간 할 순 없어서고.

    부지도 구했다.

    형님은 선윤허(?)를 내려주시고 후설명(?)을 들으셨다.

    설명을 들은 형님의 반응은 내 예상대로였다.

    그거 참, 재밌는 기관이라면서 전폭적인 지원까지 약속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지는 어디로 구했냐고?

    그 전폭적인 지지 아래 형님이 직접 때려 부순 성균관에 지으라 명하셨다.

    그래도 빈 터가 될 성균관에 짓는 건, 씹선비들한테 욕 먹을 짓 같기도 하고, 상도덕이 아닌 것 같아서 누차 다른 곳에 부지를 구하겠다고 말씀 드렸지만, 형님이 절대 성균관에 지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역적의 소굴 터를 기별(조보)의 기운으로 억눌러야 하신다나 뭐라나.

    이렇게 부지는 공짜로 득했고, 남은 건 종이였는데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종이를 공급 할 수단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초등학교 과학 시절 배운 코끼리 똥 종이가 불현 듯 떠올랐지만, 어디가서 코끼리를 구해오겠나?

    인도가서?

    구해 온다고 해도 그 먹이는 어떻게 마련하고 운반할 것이며, 어디서 키울 텐가?

    마땅한 사육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런저런 거, 다 감안하면 신문사를 적자 감수하고 차리는 거긴 해도, 막대한 손해가 발생할 것 같았다.

    오히려 신경 쓸 일만 더 늘어날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결국, 괴상한 테크놀로지 생각한답시고 기운 낭비, 시간 낭비하지 말고 16세기에 맞는 방법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닥나무 밭을 사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내가 대학시절, 수업 시간에 교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19세기 말에 서양의 종이가 들어왔지만 그 이후에도 꾸준히 닥나무 재배를 정부에서 장려했다고 배웠다.

    그 기조는 일제강점기 후반까지 이어졌고 말이다.

    물론 내가 소유한 밭 중에 저전(닥나무밭)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모두 지방에 있는 밭들이었다.

    나는 경기도 일대에 있는 닥나무 밭을 모조리 사들였다.

    닥나무 농사를 짓는 사람이 의외로 없고 팔겠다는 사람은 더더욱 없어서, 따따블을 외칠 수 밖에 뭐 어쩌겠나?

    밭을 사들였다고 해서 끝은 아니었다.

    제지장인들이 필요했는데, 이 제지장인들은 형님의 도움으로 구할 수 있었다.

    조지서(종이 만드는 일을 맡던 관아)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사람들의 명단을 공수해 스카웃 제의를 한 거다.

    형님의 도움 덕인지 저전 구하는 것보다 제지장인 구하는 게 오히려 더 쉬울 정도였다.

    제지공장과 인쇄소 역시, 형님께 받은 성균관 터에 만들었다.

    아무래도 신문사-인쇄소-제지소가 가까워야 신경 쓸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 들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두달 뒤인 11월.

    얼추 구색은 갖춘 신문사-인쇄소-제지소가 성균관 터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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