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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45화 (24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45화>

    ***

    남해정토군(南海征討軍).

    높이 올라간 기치가 바람에 펄럭였다.

    그 가운데 우뚝 솟아난 용기(임금의 깃발) 역시 바람에 펄럭거렸다.

    기치 아래 엄정히 대오를 맞춰 나아가는 남해정토군은 위풍당당했다.

    난생처음 남해정토군의 모습을 보는 지방민들은 아예 장엄함마저 느낄 정도였다.

    위풍당당하기는, 임금을 호위하는 시위군(侍衛軍)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위군들 모두 봉해위에서 차출 된 건지, 하나같이 범강장달이처럼 건장했다.

    안 그래도 우락부락한 시위군들은, 입고 있는 붉은 철릭 탓인지 위압감마저 주고 있었는데 압권은 시위군들이 입은 철릭이 바람에 휘라락- 휘날릴 때였다.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시위군들의 철릭 역시 바람에 휘날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군들은 한치의 떨림도 없었다.

    그저 매서운 눈빛으로 인파를 훑어볼 뿐이었다.

    그리고 최선두.

    최선두에서는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임금의 환궁을 구경나온 백성들을 둘러보는 인물이 있었다.

    융이었다.

    그는 모여든 인파에 흡족한 듯,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임금이 행차할 때면 먼발치에서 용안이라도 한 번 보려 구름떼처럼 모여드는 게 백성들이라지만, 이리 많은 인파가 모여들진 않는다.

    마포나루에서 숭례문까지.

    어림잡아 수만명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한양의 인구가 10만이니, 어지간한 한양 사람들 전부가 나온 데 모자라 경기도 사람들까지 마중을 나왔다는 소리가 된다.

    폭군이나 암군의 행차였다면 이만한 백성들이 모이진 않았을 테니, 흡족하다 못 해 대소를 터뜨려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지금도 융은 간신히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생전 이만큼 기쁜 적이 언제 또 있었을까?

    백성을 자식처럼 대하는 임금.

    임금을 경외하는 백성들.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이지만, 그 상식적인 일들은 의외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지가 않다.

    그런데 지금 그의 백성들은 어떻단 말인가?

    임금을 경외하고 있다.

    설령 천자라도 이런 기쁨은 누리지 못 했을 터였다.

    그런 기쁨을 주는 백성들에게, 팬서비스(?) 한 번을 못 할까.

    “워워.”

    “어찌 그러시옵니까, 전하?”

    “백성들이 이리 정성을 보이는데 임금 된 몸으로 어찌 마다하랴?”

    “···”

    통상 임금이 말을 하면 그게 속된 말로 개소리건 잡소리건 대꾸를 하는 게, 모가지 잘 간수하는 방법중 하나다.

    이건 대립질하며 구중궁궐의 법도는 둘째치고 반가의 법도도 모르는 억수도 알 만한 것이었지만, 벌써 임금을 일선에서 호종한 지 반년이었다.

    임금의 기행은 당최 종잡을 수가 없다.

    억수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왕이 전한다!”

    “···”

    “내 제위에 올라 이만큼 호기가 충만한 적이 없었는데 너희들을 보니 어찌 백성을 어여삐 여기라는 선왕들의 말씀이 있었는지 알겠도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내 제위에 있으면서 부덕한 점이 많아 혼군의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만, 이렇듯 너희가 나를 반기니 내 하늘에 맹세컨대 너희의 삶을 더욱 이롭게 만드리라! 외적이 쳐들어오면 내 손수 고삐를 쥐고 달려나갈 것이요, 너희중 한 사람이라도 외적과 왜구에 끌려간다면, 내 직접 부월을 들고 뛰쳐나가 너희를 구해올 것이다! 그러니······.”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도 아닐 텐데 중2병스러운 대사가 마구 튀어나왔다.

    21세기에서 타임슬립한 누군가가 들었다면 오그라드니 그만하라 면박을 줬을 멘트였지만, 융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이어나가려 할 때였다.

    “괴조다!”

    시위군들 사이에서 울려퍼진 단말마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다급하면서도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융을 호종하는 모두가 창칼을 빼들었다.

    억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금의 기행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불충을 저지르던 억수는 “괴조다!”라는 외침에 칼을 빼들고 융에게 말을 달려나갔다.

    “전하를 보위하라!”

    그의 외침에 시위군들이 움직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일사분란한 움직임이었다.

    장방패 든 팽배수들은, 어디서 나타난 건지 귀신 같이 나타나서 융을 에워쌌고 후위에 있던 궁수들은 일제히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그 기세는 령만 떨어지면 염라대왕에게라도 시위를 놓을 만큼 매서웠다.

    “무, 무슨 일이란 말이냐!”

    물론, 중2병스러운 본인의 대사에 본인이 감탄하며 만족해하던 융으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황급히 하마한 채 억수에게 다가가 물었다.

    “괴조이옵니다, 전하!”

    “괴조?”

    “저길 보시옵소서!”

    억수가 가리킨 곳에는 과연 괴조가 있었다.

    생김새는 둥근 것이 하늘에 두둥실- 떠있었다. 두둥실 떠있는 것만 아니라 뭔가를 게워내고 있는 모양새였는데, 그것이 마치······.

    “응?”

    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자?”

    희한했다.

    괴조가 게워내고 있는 게, 글자였기 때문이었다.

    순간 붕새가 아닌가 했지만, 붕새는 그 크기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신화 속의 새였다.

    신화 속의 새가 현세에 나타났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붕새가 무슨 공자나 맹자 같은 성인들이 기르던 새도 아니고 문자를 게워내는 건 더더욱 어불성설이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시위군들을 멈춰세운 융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금 괴조를 유심히 바라봤다.

    어떻게 봐도 괴조라기엔 수상쩍었다.

    “혹, 저게······.”

    그런 융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융은 귀경일을 앞당겼다는 소식을 일찍이 조정에 전했다.

    조정에서는, 정확히 진성이는 형님이 생각지 못 한 환영식이 있을 거란 답장을 보냈었는데 그게 저게 아닌가 싶었다.

    그 생각에 쐐기를 박아주는 말이 곧 들려왔다.

    “열기구다!”

    한차례 열기구를 목격한 백성의 외침이었다.

    저게 괴조가 아니라, 진성이 만든 ‘그’ 열기구란 말에 행렬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융의 표정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저, 정말로 떠있지 않은가?”

    놀람 이후 찾아온 감정은 희열이었다.

    그는 말허리를 걷어찼다.

    “전하!”

    융의 갑작스런 행동에 호위를 책임진 억수가 당황하며 그를 뒤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점점 열기구와 거리가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괴조가 게워내는 글자라고 생각했던 건, 정말로 글자였다.

    -승전과 환궁을 경하드립니다, 주상전하.

    기특한 문구가 적힌 글자 말이다.

    ***

    환영식은 약식으로 치러졌다.

    기껏 준비한 환영식이 약식으로 치러져서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형님이 관심 없다는데 환영식이 무슨 대수겠어?

    대신, 형님이 관심을 갖는 건 따로 있었다.

    내가 만든 열기구였다.

    형님께서 귀경하신지 벌써 네 시진이 지났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약식으로 치른 환영식 한 시진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시진을 숭례문에 머물면서 열기구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기이하도다··· 참으로 기이해.”

    라는 말을 끝없이 되풀이하시면서 말이다.

    “경들은 아니 그런가?”

    “신들 역시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컸사옵니다.”

    그러셨었지들.

    까무러치는 사람들도 몇 사람 있었으니까.

    “참으로 기상천외한 물건이다. 참으로 기상 천외한 물건이야··· 아!”

    이번에는 기이하다는 말 대신 기상천외하다는 말을 되풀이하시던 형님의 얼굴이 별안간 붉게 달아올랐다.

    변화를 먼저 캐치한 건, 허침 할아버지였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용안이··· 어의를 부르오리까?”

    “괜찮다. 그보다 영상.”

    “예, 전하.”

    “내 귀국할 때 보니 부산진의 방비가 참으로 훌륭했다. 이런 무장은 후대함이 옳은데 하물며 첨사 윤성경이야 말 해 뭣 하겠는가? 전임인 신공과는 다르게 일처리도 잘 하는 듯 하고, 무장으로서 소임도 큰 듯 하니 가자(加資)하여 군문의 중핵으로 삼았으면 하는데······.”

    “빈청에서 논의한 연후 계달하겠나이다.”

    그제야 붉게 달아올랐던 형님의 안색이 다시 밝아졌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말씀하시옵소서.”

    “내 부산진에 잠깐 머물면서 첨사에게 실수를 한 게 좀 있었다.”

    “실수 말이옵니까?”

    “뭐, 아주 작은 실수라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다만··· 어쨌건 첨사로서는 무안한 일이었을 테니 물품을 내려 위무를 했으면 한다만.”

    “···그 역시 빈청에서 논의하고 계달하겠사옵니다.”

    해프닝 축에도 못 끼는 갑작스러운 포상이 있고, 다시 한참이 흘렀다.

    체감상 일다경 정도 흘렀을까?

    “진성아.”

    “네, 형님.”

    “저기에 정말로 사람이 탈 수 있는 것이냐?”

    “그럼요, 사실 지금도 탄다면 탈 순 있거든요.”

    지금도라는 말에 형님은 깜짝 놀라셨는지 헛바람까지 들이키셨다.

    “지금도?”

    “네. 안정성을 장담 할 수가 없어서 사람이 탈 수가 없다는 건데··· 지금은 보다시피 밧줄로 묶어 두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열기구에 사람이 타지 못 하는 건, 형님께 말씀드린대로 안정성 때문이다.

    열기구는 한 번 추락하면 바로 인명사고로 이어진다.

    실험 한 번 하자고 사람 목숨을 담보로 잡을 순 없었다.

    단, 밧줄로 묶어둔 지금은 안정성이 확보 된 상태기 때문에 불가능하진 않다.

    밧줄로 묶어 뒀는데 너는 왜 안타고 있냐고?

    밧줄로 묶어 뒀기 때문에 그 높이라고 해봤자, 지상에서 고작 30~35m 정도 올라간 수준이다.

    그 정도면 10~12층 높이인데 고층빌딩 숲에 둘러싸여 살았던 나한테는 감흥도 안 일어나는 높이에 불과하다.

    그런 걸 뭐하러 타?

    당장 전생에서는 어지간한 아파트 베란다만 나가도 그 정도 높이인데.

    “그런데?”

    “밧줄에 묶어 뒀으니 바람에 날아가버릴 일도 없어서 사람이 탈 수는 있죠.”

    “한데 왜 너나 다른 사람들은 안 탔던 것이냐?”

    나는 말했다시피 별 감흥도 안 일어나는 높이라 굳이 올라갈 필요성을 못 느꼈고, 다른 사람들은······.

    “무서워서 안 타겠다던데요?”

    “무서워서?”

    “네. 천리를 역행한 일이라서 천형을 받을 거라나 뭐라나.”

    라고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다들 그걸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나저나.

    형님께서 관심있어 보이신다.

    “타보시렵니까?”

    “타도 되는 것이냐?”

    열기구를 만든 게 여울이 때문이라서, 가장 먼저 여울이를 태워주고 싶었지만 뭐, 어쩌겠나.

    “물론이죠.”

    “그럼 타보마! 내 얼른 타보마!”

    ***

    저 멀리 남산이 보였다.

    남산 근처로는 남촌이 보였고, 그 너머로 한강이 보였다.

    가슴이 확 트이는 광경이었다.

    몸을 돌렸다.

    종각과 청계천이 보였고, 그 너머에는 경복궁이 보였다.

    “정말이지······.”

    말로 형용 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서울이 한 눈에 다 보이는 것 같았고, 저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하나의 점과 같았다.

    하늘을 날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하늘에 매달린 수준이지만, 적어도 융은 그렇게 느꼈다.

    새가 되면 어떤 기분일까 늘 생각했는데 이런 기분일 듯 했다.

    아름답다.

    세상이 너무도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꼭 신선이 된 것 같았다. 이곳이 마치 천상계 같았고, 저기 흐르는 청계천과 한강은 천상천 같았으며, 그의 거처인 경복궁은 천궁 같았다.

    경복궁.

    저 멀리 보이는 종묘.

    북촌과 한강.

    모두 낯익은 것들이지만 하늘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또 달랐다.

    모두 낯설었다.

    “진성아.”

    융은 넋이 나간 채로 풍경을 바라보다, 함께 열기구에 탑승한 진성을 불렀다. 고소공포증인지 뭔가가 있다던 진성은 난간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예?”

    “너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재주를 갖고 있는 것이냐?”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없다. 그래서 더 옛 사람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하늘을 날고 싶어했다.

    자연스러운 욕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사람도 이루지 못 한 게, 하늘이었다.

    그런데 진성은 이루었다.

    아우인 진성에게 경의가 다 생길 지경이었다.

    “재주는 뭘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이게 어렵지 않다니······.

    “그보다, 어떠십니까? 처음으로 열기구에 탑승해보신 소감이?”

    “놀랍다. 놀랍고 경이롭다. 또, 경이롭고 감격스럽다.”

    융은 지그시 눈을 감고 바람에서 불어오는 하늘을 만끽했다.

    지상의 바람과는 또 다른 산뜻한 느낌이 있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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