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38화>
***
여러모로 씁쓸해져서 입궐하기가 싫었다.
입궐하면 뭐해?
입 아프게 나라일이나 하게 될 텐데, 이런 싱숭생숭한 상태에서 정무를 보고 싶진 않단 말이지.
누가 농땡이 피운다고 섭정승인 나한테 뭐라 할 것도 아니고, 좌우지간 기분 전환이 좀 필요한 것 같아서 삼성(參星)의 본사(?)가 있는 두뭇개(두모포)를 좀 찾아왔다.
기분 전환을 왜 비누 공장이 있는 두뭇개에서 하냐고?
말하자면 좀 긴데··· 내가 말이지?
이현호로 살던 시절 발렛파킹으로 일했다는 건 기억 할 거다.
그래서 부자들이 어떤 심리로 소비를 하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천번이고 이해하지.
나라도 돈 많으면 무계획적인 소비로 기분 풀었을 테니까.
그런데 기분 전환한답시고 본인 재산 내역 살펴보는 건 이해를 못 했더랬다.
통장에 찍힌 숫자가 다시 본다고 바뀌는 것도 아닐테고, 주식계좌를 들여다본다고 본인이 산 주가가 급등 한 것도 아닐테며, 새삼 부동산 문서를 본다고 땅값이 올라있는 것도 아닐텐데 왜 쓸데없이 들여다 보나··· 하는 심정이었단 말이지.
근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틈틈이 우울할 때마다 내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체크를 한다.
꼭 소비를 안 해도 그것만 확인해도 기분이 좋아지거든.
두뭇개는 그래서 간다.
요새 덕복이를 안 본지도 좀 오래되기도 했고.
“나오셨습니까요, 대감마님.”
내가 비누 공장에 나타나자 덕복이가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말을 안 해서 그러지, 덕복이는 나 때문에 신수가 훤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 전에는 어디였지··· 내가 주는 월급이랑 인센티브 차곡차곡 모아서 운종가에 있는 건물도 한 채 매입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보면 노른자위 땅의 건물주로 자수성가 한 셈이다.
덕복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알다시피 내가 세운 이 삼성이란 회사는 매우 재벌적(?)이다.
직급도 당연히 재벌적으로 나뉘었는데 사장인 덕복의 밑으로 부사장은 거근(巨斤)이라는 사람이었다.
덕복이처럼 우리집 행랑식구로 있다가 내가 면천 시켜주면서 삼성에서 일하게 된 케이스인데 이 거근이도 내가 듣기로는 남촌 일대에 땅을 몇 마지기나 마련한 걸로 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덕복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이미 신분상으로는 양인(良人)인데도 날 대하는 게 옛날이랑 똑같다. 어떻게 보면 옛날보다 더 극진하다.
“오랜만에 좀 와봤소. 별 일은 없고?”
“아이고, 별 일은 무슨요··· 오히려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잘 됐습니다요. 언제 한 번 찾아 뵐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었소?”
삼성의 사장인 덕복이가 할 말이 있었다면 둘 중 하나다.
비누가 잘 팔려서 세를 확장 시키겠다던지.
비누재료가 모잘라서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던지.
이번엔 전자였다.
“···그래서 함경도 쪽에도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요.”
함경도는 아직 삼성의 미개척지(?)였다.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등지에는 이미 삼성의 지사라고 해야할까?
지점이 있는 상태였다.
아직 함경도만 이 지사가 없었다.
“하지만 함경도에는 비누를 소비할 만한 사람들이 많지가 않을 텐데?”
함경도에 지사가 없는 건 두 가지 이유였다.
험지라 운송비가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나올 수가 있어서.
비누라는 고가의 사치품을 소비할 계층이 부족해서.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함경도 지사의 설치는 영영 보류 상태였는데 새삼스럽게 함경도에 지사를 설치 해야겠다고 하는 걸 보면 뭔가 수가 있는 것 같다.
“웬 걸요. 오랑캐들이 제법 탐을 내지 않겠습니까요?”
“비누를?”
“예. 평안도 지사장 말로는 건주위 오랑캐들이 본인들이 사간 비누를 다시 올적합(우디케)하고 올량합(우량카이)의 야인들이 사간다고 하는데 장사치가 어찌 중개를 끼고 물건을 팔겠습니까? 1:1로 팔면 되는 걸요.”
“그 문제는 나라에서 허가를 해줘야 할 텐데.”
“그래서 대감께 이리 말씀을··· 헤헤헤.”
아무리 섭정승인 나라도 올적합이나 올량합하고 거래 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들 순 없다.
올적합이나 올량합이나 큰 부족이다. 그 밑으로 작은 부족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셈인데, 그들 모두가 우리나라에 복종하고 있진 않다.
귀순하거나 토산물을 바치면서 무역을 하려는 자들은 있지만, 그들 부족 전체가 일심동체로 귀순하려는 의지가 있거나, 토산물을 바치면서 평화 분위기를 형성하려는 건 아니란 뜻이다.
그나마 지금은 큰 말썽을 부리지 않고 있는 걸로 알고 있긴 한데··· 이것도 내가 알기로는 선왕인 성종대왕 시절 있었던 정벌 때문이다.
지금도 때때로 함경도나 두만강 일대의 진보에서는 올량합이나 올적합의 부족민 XXX이 말이나 성내 백성의 재산을 도적질해갔다는 장계가 올라오곤 한다.
“그 문제는 전하께서 오시면 상의해보도록 하겠소.”
“알겠습니다요.”
“이번 달에 각 지사에서 매출 보고서는 올라왔소?”
팔도 각지의 지사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매출 보고서를 본사로 올린다.
비누라는 게 워낙 고가다 보니 본사에서는 이 매출 보고서와 본사에서 보낸 비누의 수효로 지사의 횡령을 조금이나마 방지 할 수 있게 한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보시겠습니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덕복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장부를 가져왔다.
아마 언젠가 나한테 보내두려고 미리 약식으로 준비한 장부 같다.
보기가 한결 편하다.
“충청도 지사에서는 매출이 좀 줄었고··· 평안도에서는 대폭 늘었네?”
충청도 지사의 발주량(?)은 비누 1250개였다.
발주량은 1250개고 판매량은 1125개니, 1250개가 팔릴 줄 알고 가져갔다가 125개의 재고만 발생한 셈이다.
게다가 충청도의 전월 발주량은 2500개에 판매량은 2466개로, 거의 완판에 가까웠던 걸 감안하면 매출이 크게 준 셈이다.
반면 평안도는 눈에 띄게 매출이 늘었다.
이번달 총 발주량은 4500개, 판매량은 4568개.
판매량이 발주량을 상회하는 걸 보면 전월의 재고를 이번달에 모두 완판 시킨 것 같았다.
“충청도는 작년에 비누 소비가 가장 컸던 지역이었습지요. 비누라는 게 한 번 쓰면 지역의 천석꾼들도 알뜰히 쓰게 되니 아무래도 올해는 매출이 저조한 것 같습니다요. 평안도는 아까 말씀드린 건주위 오랑캐들 덕분에 매출이 크게 늘었사옵구요.”
의주는 전국에서 비누를 가장 많이 발주하는 지역중 하나다.
교통의 요지기 때문이었다.
이웃한 고을을 경유하면 건주위의 여진족들과 통하기도 쉽고, 명나라 사신이나 우리나라 측에서 파견하는 사신단의 사신로(使臣路)였기 때문에, 양국 사신단들이 많이 구매를 한다.
“그럼 어디보자, 총 매출이······.”
비누는 한 개에 20석의 값어치로 판매하고 있다.
그런데, 전국팔도의 이번달 판매량이 도합······.
“와우.”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총판매량이 무려 11,445개다.
대금을 전부 백미로만 받는 건 아니긴 하지만, 백미로 환산할 시 무려 228,900만석의 매출이다.
비누는 원료값 자체는 다른 상품들에 비해 크게 드는 편은 아니다.
다만 운송비와 인건비, 부지매입비, 선박매입 및 유지비, 기타잡비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걸 제외하면 대략 매출의 60%의 순수익이 남는다.
이번달에는 13.7만석을 정도의 순익이 남은 셈이었다.
“충청도가 죽 쒔는데 어째 순익은 늘었소?”
비누는 평균적으로 봄~여름에 잘 나간다.
그래서 평균치라는 게 들쭉날쭉이긴 한데 평균적으로 5~7만석의 순익이 발생한다. 이번달은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순익을 남겨 먹었으니 고무적인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평안도에서 큰 폭의 소비가 있었사옵고, 또 경상도에서도 발주가 많았사옵니다.”
뒤늦게 보니 경상도의 발주량이 3400개고 판매량은 3455개다.
전월 재고와 함께 완판을 때렸다는 말이다.
경상도의 발주량이 다른 지역들 보다 많은 건, 평안도와 같다.
왜관 덕이다.
“남는 건 다 어떻게 했소?”
“대감께서 말씀하신대로 모두 금이나 은으로 바꾸고 있긴 하온데··· 이게, 아무래도 금은이 괜히 금은이 아닌지라 모두 바꾸지는 못 하고 있사옵니다. 창고를 좀 더 늘려야 할 듯 하옵니다.”
“창고는 뭐, 사장님이 알아서 늘린 뒤에 보고만 하시고······.”
이 정도면 다른 사업 진행해도 될 것 같다.
내가 삼성에서 비누 말고 다른 대체 상품으로 사업을 진행하지 않은 건, 안정성 때문이다.
적어도 비누라는 상품이 시장에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판매가 될 때 다른 사업을 진행하고 싶었다. 그래야 다른 사업을 죽 쒀도, 비누라는 분야로 밑빠진 독을 채울 수라도 있을 테니까.
근데 이만하면 된 것 같다.
사업을 시작한 지 벌써 3년차.
이번달은 그 3년차 사업중 최고 매출을 기록한 달이긴 해도, 1년차 순익이 15만석, 2년차인 작년 순익이 63만석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고작 2분기 순익이 이번달을 포함해 55만석이다.
가을~겨울은 죽 쑨다는 걸 감안해도 최소 80만석의 순익은 남겨먹을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꾸준히 늘고 있는 매출, 안정성 있는 순수익.
굳이 다른 사업 진행을 보류 할 까닭이 없다.
‘뭘로 하지.’
이미 생각해둔 것도 많다. 일이 바쁘고, 비누 판매에 집중하느라 진행을 못 했던 것 뿐이지.
그런 의미에서 비누를 뒤이어 내가 생각한 다음 성공신화는······.
***
“푸하하하하!”
“스승의 그림자도 밞지 말라 했는데, 경덕이 넌 스승의 말을 비웃냐?”
“아니··· 크흐흐, 아니 송구하옵니다. 다만 말씀이 너무 웃겨서······.”
“뭐가 웃겨? 어? 뭐가 웃겨 이 자식아!”
“스승님은 이 나라의 대군이십니다. 성종대왕의 적자시고 또··· 이 나라 지존이신 금상전하의 아우이시며, 거기다가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지금은 섭정승으로 계시면서 뭇 사람들에게 합하(閤下)라 불리십니다. 그런데, 큭큭. 그런데 그런 분이 주막을 하시겠다니 어찌 안 웃기겠습니까?”
“이 자식아! 누가 주막한대? 후추랑 설탕 팔거라니까?”
“향신료도 음식의 일종이 아니겠습니까. 주모가 탕반 파는 것과 무에 다르겠··· 악!”
퍽!
나는 책 모서리로 경덕이의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
스승의 말에 비웃은 대가다.
내가 생각한 다음 사업.
경덕이 말한 것처럼 주막··· 아니, 요식업은 아니다.
사업 안 해도 잘 먹고 잘 살 내가 굳이 사업을 한 이유가 뭔데?
돈 더 벌려고?
천만에 말씀이다.
애당초 내가 사업을 벌인 건, 나라에 사치를 장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비누가격도 21세기 사람들이 와서 보면 말도 안 되게 바가지라 욕할 만큼 비쌌던 거고.
근데 이제와서 굳이 요식업을 할 이유가 없다.
나 같은 큰 손(?)이 요식업을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하지만 후추나 설탕을 판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일례로 설탕은 여기서 엄청 귀하다. 그래서 형님도 내가 설탕 묻힌 꽈배기를 벌벌 떨면서 잡수실 정도였다.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게 설탕이란 말이지.
그런데 그걸 떼다가 판다고 생각해보자고.
애당초 오키나와도 그래서 자원해서 간 게 아니던가.
어마무시하게 남을 거다.
‘그 일환으로 오키나와 왕한테 땅도 받았으니까,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
설탕은 사탕수수가 원료다.
사탕수수가 제주도에서 자랄지는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제주도에는 내 명의의 땅이 없다. 시범적으로라도 길러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뭐, 하려면 어떻게든 할 수야 있겠지만, 권력남용해서까지 시범적으로 길러 보긴 싫고, 게다가 100% 자란다는 확신이 있는 오키나와에 내 땅이 있는데 뭐하러 그래?
“화담(서경덕의 호). 스승님께서는 이미 조선제일의 거부이실세. 수완이 있으시단 말씀인데, 그런 분이 뜻없이 사업을 구상하셨을 리가 없네.”
“아니, 누가 모르나··· 그냥 웃겨서 그렇지. 그나저나 나 머리에 혹 안 났지?”
“···안 났네.”
두 제자들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잠시.
“그래서 말인데 너네둘 중에 누가 자원할래? 아니면 누구 추천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