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36화 (23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36화>

    ***

    주객전도(主客顚倒).

    흔히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뒤바뀔 때 쓰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지금 정전 뜰은 주객전도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만큼 주객이 전도돼 있었다.

    정전 뜰은 쇼신의 친군들이 아니라 창칼을 높이 빼든 봉해위가 시위하고 있었고, 정전의 기단(基壇)에 놓인 용봉문(龍鳳紋)이 새겨진 화려한 어좌에는 융이 앉아 있었다.

    그 좌우로는 김억수와 이계동 같은 장수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다시 그 밑으로는 류큐의 신하들이 읍(揖)을 한 채 시립해 있었다.

    그리고 쇼신은······.

    털썩!

    그 한가운데 부복해 있었다.

    일국의 임금이 똑같은 상국을 받드는 동등한 제후에게 부복하는 모습은 분명 이례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쇼신은 아랑곳 않는 듯 부복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오체투지 하듯 엎드려 있었다.

    사실 신하들 입장에서는 자국의 왕이 외국의 왕에게 오체투지한 이런 모습이, 굴욕도 이런 굴욕이 따로 없을 지경이겠지만 쇼신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처사(?)라고도 할 수가 있었다.

    그의 군사들은 왜구에 쩔쩔맸고, 연전연패를 당했다.

    그들이 왕도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소식에 조정에서는 몽진(피난)까지 논의가 될 지경이었다.

    시기적절하게 조선군이 당도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몽진을 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왜구는 강맹했고, 신출귀몰하기 까지 했다.

    그런 비범한 무위는 작은 나라의 왕인 쇼신으로서는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비범하기(?) 짝이 없는 왜구들을 조선군은 단번에 격파시켰다.

    왜구가 외성에 포진했다는 소식에 모두가 긴장할 때, 조선군 만큼은 별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침내 외성이 적에게 함락됐다는 소식에도 마찬가지.

    조선군은 감정이 없는 사람들 같았다.

    긴장도 하지 않았고, 얼핏 보이는 얼굴들에는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일사불란하게, 그래서 너무도 손쉽게, 너무도 손쉬워서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놈들을 내성 깊숙이 끌어들였다.

    그러고는 듣도 보도 못 한 화포를 이용해 적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혼비백산하는 왜구들에 조선의 사수(궁병)들이 일제히 화살비를 퍼부었다. 일부 군사들은 그 난리통에도 군기정연하게 끓는 기름을 날라 적들의 머리 위로 뿌려댔고 화공까지 가했다.

    좁은 길목에 모여있던 왜구들의 진영에 불이 붙자 놈들의 진영에서는 퇴각 나팔이 들려왔다. 놀란 적들이 퇴각하자 성곽에서는 효시(신호용 화살)가 쏘아졌다.

    왜구의 퇴로에 매복한 조선군이 나타났고, 퇴로가 차단 당한 왜구들에게 남은 건 일방적인 학살 밖에 없었다.

    쇼신의 군사들을 학살했던 왜구들이 반대로 조선군에게는 학살을 당한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강맹한 모습들은 글 몇 줄로 요약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군기는 정연했고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전투를 참관했던 쇼신은 그들에게서 한치의 흐트림도 발견 할 수가 없었었다.

    정예군이란 말을 그들에 부합하는 말이었다.

    그런 조선군이 아직 상주하고 있는데 조선왕의 심기를 거스른다?

    지금의 행동이 굴욕적이건 아니건, 조선군이 칼끝을 자신에게 겨누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일단은 무조건 바짝 엎드리는 게 상책이었다.

    실제로 조선이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되찾아 준 건 사실이니까.

    “왕은 말해보아라. 저 따위 놈들도 처치하지 못 해 전전긍긍하며 외세의 힘을 빌리는데 그대가 무슨 임금이란 말이냐?”

    “대왕 전하의 은혜가 참으로 망극지통하니 과연 대왕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천만 지당하시옵고 또한······.”

    통사가 부복한 쇼신의 말을 통역하자 융은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왕은 들어라.”

    “···”

    “옛 고서에서 말하기를, ‘왜구는 교사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로 하는 짓이 짐승보다 심하여 까닭없이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그 나라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며, 그 무력을 믿고 재물을 요구하니 천만번이라도 무찔러야 하는 자들이다’ 라고 하였기에 내가 친히 군사를 몰고 나와 왜구를 무찌른 것이다. 나의 백성들 또한 왜구에 신음한 적이 있었기에, 그대 나라의 백성이라고 다를 것이 없을 듯 하여, 제장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군사를 몰고 나온 것이란 말이다.”

    “과연 하해도 어쩌지 못 할 거룩한 은······.”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거늘, 그대 왕은 어찌 경솔히 입을 연단 말이냐?”

    “···”

    “나는 본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그대 왕의 백성이라고 다르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수들이 반대하여도 내 이를 무찌르고 먼 길을 달려온 것인데, 남의 나라 백성을 구하는 일은 성공했지만, 남의 나라 백성을 구하고자 나의 충직한 군사들을 지키지 못 해, 군사 예순명이 사상을 당하였으니 나의 슬픈 마음을 그대 왕이 짐작이나 하겠느냐?”

    “소방(자기 나라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 재생 한 것은 진실로 대왕 전하의 덕택이옵고, 대왕 전하의 날랜 군사들 덕이니 부덕한 소인이 어찌 대왕 전하의 심정을 헤아릴 수나 있겠습니까? 라고 하시옵니다.”

    “맞다. 그대 왕은 부덕하다. 진실로 부덕하고 부덕하니 국란 역시 외세의 도움을 받아 극복한 것이 아니냐? 그대 왕은 나의 슬픈 마음을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더욱이 내 궁고도를 정토하였음에도 왕의 구원에 다시금 뱃머리를 돌릴 수 밖에 없었으니, 이는 어찌 할 수 있단 말이냐?”

    순간적으로 쇼신은 인상을 구겼다.

    속된 말로 보상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쇼신은 뭐라고 답해야 어물쩡 넘어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아니, 고민하려던 그때였다.

    “어허, 여봐라!”

    “예, 전하.”

    “저 왜구 놈의 이름이 왕성진이라고 했던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저놈이 지금 눈알을 부라리고 날 노려보고 있는 것이 범상치가 않다. 왜구는 본시 백해무익하고, 어느 나라에 정착하든 해를 끼치는 종자들인데 이국에 와서까지 형률을 운운할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하물며 적심을 품은 왜종에게 절차를 따져 무엇하겠단 말이냐? 저놈은 지금 당장 목을 베어라!”

    “지, 지금 말이옵니까?”

    병조판서 이계동이 분기탱천한 융에 쩔쩔매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긴 허허벌판도 아니고 군영도 아니었다.

    류큐의 법궁이었다.

    자신들은 엄밀히 말하면 이방인.

    이방인이 당사국의 양해도 없이 법궁에서 죄인의 목을 치는 건 월권 정도가 아니었다.

    이계동이 난처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지만······.

    융이라고 해서 정말 왕성진이 본인을 노려봤기 때문에 감정이 상해 목을 베라 역정을 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왕성진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눈알을 굴린 건 왕성진이 아니라 외려 류큐의 임금이었다.

    어떻게든 보상 문제를 피해가려 하는 게 분명했다.

    이럴 땐 무력 시위(?)만한 게 없다.

    “어서!”

    "명을 받드옵니다!"

    임금의 명을 수행한 건, 억수였다.

    오히려 예법에 밝아서, 외국의 법궁에서 무례를 저지를 수 없단 생각에 임금의 명을 받고도 망설이던 이계동을 대신해 억수가 나서서 왕성진의 목을 단번에 베어 넘긴 것이다.

    왕성진의 목이 허공에 붕- 떠오르자 쇼신과 류큐의 신하들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물론, 융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융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쇼신을 바라봤다.

    “어차피 저 왜구 두령 놈은 언제든 목을 쳐야 했을 죄인인데, 그대 나라의 군사들이 쓰는 칼은 무뎌서 지금껏 왜구에 농락을 당한 게 아닌가? 이미 왜구의 피를 묻힌 나의 군사가 대신 목을 쳐준 것이니 따로 감사해 할 필요는 없다. 자, 아무튼······.”

    꿀꺽.

    “···”

    “나의 군사 예순명이 죽거나 다쳤다. 나의 슬픔이 지극하니, 이를 무엇으로 어루만질 수 있을지 그대 왕은 떠오르는 것이 없는가?”

    “···”

    충격 때문인 건지, 아니면 앞전처럼 계산을 하는 건지.

    쇼신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그러자.

    “어허, 여봐라!”

    “에, 예, 전하.”

    “저기 저 왜구 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도아(미차마사)라는 자이옵니다.”

    “내 듣기를 저놈이 선봉에서 봉해위의 군사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들었는데 사실이냐?”

    “그러하옵니다.”

    “어허! 저런 쳐죽일 놈을 어찌 지금까지 살려뒀단 말이냐! 지금 당장 사지를 찢어 죽여라!”

    망설이는 이계동을 대신해 나선 것은 이번에도 김억수였다.

    다만 사지를 찢어 죽일 여건이 안 됐기 때문에, 억수는 미치마사의 팔을 자른 뒤 고통에 몸부림 치는 미치마사의 목을 쳤다.

    정전 뜰이 왜구도 아닌 구원군에 의해 시뻘건 피로 물들어갔다.

    “저 왜구 놈은 감히 나의 군사 두 명의 목숨이나 앗아갔기에 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대 왕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자, 나의 군사 예순명이 죽거나 다쳤다. 나의 슬픔은 지극하면서도 또 헤아릴 수 조차 없으니 이를 무엇으로 어루만질 수 있겠는가? 그대 왕은 혹 해답을 아는가?”

    “···”

    여전히 대답이 없는 쇼신에, 융이 또 다른 구실로 왜구를 베려던 그때였다.

    “본인은 어리석어서 잘 모르겠사옵고 혹 대왕 전하께오서 문득 생각나는 해답이 있으시면 말씀해 달라 하시옵니다.”

    “있긴 한데··· 그대 왕에게 무리가 가는 부탁이 아닌지 모르겠도다.”

    “나라를 재생시켜주신 은혜가 있는데, 어떤 부탁인들 어떻겠냐고 하시옵니다. 속히 말씀해달라 하시옵니다.”

    “그럼 말이다······.”

    ***

    「···그래서 결국 우리 남해정토군이 왕도를 수호하게 된 것이다. 이제 왜구가 들이닥치는데 우리가 입성했던 걸 몰랐던지, 연전연승한 왜구의 기세가 과연 파죽지세였다. 그 기세가 가히 천군과 같음이라, 호기롭던 군사들도 곧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 군사들이 두려워하니 문득 장판파 전투에서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뛰어든 조자룡과, 옛날 삼한의 관창이 떠올랐다. 관창은 수세에 몰린 아군의 사기를 진작 시키기 위해 죽을 길을 알면서도 단기로 뛰쳐나가지 않았던가? 내 임금의 몸으로 관창과 조자룡처럼 뛰쳐나갈 수는 없어, 다만 성루에 올라 남해정토군에게 외치기를, ‘후위에 너희의 임금이 있음이니 너희가 나아가는 길이 사지가 아님을 알게하리라!’ 대성(大聲)하였다. 그러자 군사들이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함성을 내질렀다. 어떤 군사는 ‘와!’를, 흡사 불씨(부처)의 설법에 천지의 짐승들이 굴복했다는 데서 나온 사자후처럼 터뜨렸고, 또 어떤 군사는 ‘주상전하 천세!’하며 산호천세를 외쳤다. 또한 다른 군사는 ‘종묘와 사직이 바로 우리의 등뒤에 계시다!’ 외쳤다. 군사의 사기가 다시금 오르니 이를 보고 김억수가 대완구를 통해 비격진천뢰를 쏘게하고··· 중략. 좌우지간, 지금 대승을 거두니 왕이 드디어 나의 위엄에 압도되었다. 내 위엄에 압도 된 왕을 보니 새삼 감개가 이는구나. 왕에게는 봉해위의 정병 예순명이 상한 책임을 묻게 하였는데, 이는 서찰에 적기에는 말이 길어지니 내 직접 가서 알리도록 하마. 이제 귀국하는데, 내 직접 본 왕은 무척 노회하고 교활한 자라, 군사를 비우면 왕이 약조한 바를 어기고 경거망동할지도 몰라, 엄선한 봉해위 정병 육백과 병조판서 이계동을 유구국순찰사(流球國巡察使)로 삼고 혹시 다른 왜구가 준동할지 모른다는 핑계로 남겨놓았다. 귀국하기 전에 먼저 배를 띄워 우편을 보낸다.」

    몇 달 만에 오키나와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 몇 달만에 온 편지는 승전보였다.

    미야코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오키나와 본섬을 왜구가 침략해 아군들이 가서 무찔렀다는 승전보 말이다.

    다만 난 이 승전보를 읽고 피식 실소가 터져나왔다.

    승전보는 승전본데, 이건 마치 유치원생의 일기를 보는 기분이다.

    이 편지의 제목에,

    [XX유치원 꽃님반 이융 어린이 일기] 라고 적어 놓았다면 아마 충분한 당위를 갖을지도 몰랐다.

    ‘어지간히 들뜨셨나 보네.’

    이 편지를 희희낙락해 하며 써내려갔을 형님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의 선행을 쪼르르 부모에게 달려가 재잘재잘 떠드는 것처럼, 형님도 이 사실을 조정에 빨리 알리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

    이역만리로 나가서 무공을··· 아니, 이 정도면 무공 정도가 아니지.

    따지고 보면 한 나라를 구해준 셈이다.

    얼른 본인의 업적을 자랑하고 싶으신 마음 때문이었는지, 편지의 내용들이 조리 있지 못 하다.

    “합하. 전하께서 말씀하신 전사자의 유족들은 어찌 처결하면 좋겠습니까?”

    들뜬 형님의 모습이 눈에 그려져 흐뭇하기도 잠시.

    허침 할아버지가 전사자의 유족 문제를 거론하자, 나는 금방 우울해졌다.

    그러고 보니 전사자가 있었다.

    예순명의 사상자 중에 전사자만 스물 셋이었다.

    이 편지에도 형님은 사족을 남기면서, 전사자의 유족들에 관한 처분은 최대한 관대하게 처리하라 지시한 적이 있으셨다.

    “전례대로 하면 어떤가요?”

    “전사자를 조문(弔問)하고 구휼하는 법문이 명백히 있는데 이는 최근 시행된 적이 없고 더욱이 이번 일은 친정을 나선 임금의 휘하에서 전투하다 전사한 이들이니 해당 법문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의 일을 전례로 보자면, 전사자에 대해 초혼제(招魂祭)를 지냈었고 전사자의 집안에는 5년간 복호(충신에게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던 일)하도록 했습니다. 또, 전사자가 군관인 경우에는 그 집안에 쌀과 콩을 각각 5석씩 하사했고, 군졸은 3석씩 주어 휼전(恤典)을 베푸셨었습니다. 이에 따라 처리하게 되면 전례대로 처리하는 것이 되겠지만, 전하께서 사족을 다시면서 ‘최대한 관대하게, 유족들이 억울함이 없도록 하라’ 하셨으니 전사자의 집안에는 10년간 복호하고, 군관에게는 쌀과 콩을 각각 10석씩, 군졸에게는 7석씩 주도록 함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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