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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35화 (23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35화>

    ***

    일단의 무리가 보무도 당당하게 정전 뜰을 가로질렀다.

    정전 뜰을 가로지르는 무리의 복장은 정전을 시위하는 친군들과는 사뭇 달랐다.

    친군들이 일본의 오오요로이(大鎧) 같은 형형색색의 찰갑옷을 입고 있었다면 정전 뜰을 가로지르는 무리는 빨갛거나 검은, 통일된 두정갑을 입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이들 무리의 선두에서 씩씩거리며 걸을을 옮기고 있는 남자였다.

    남자가 입은 갑옷은 황금색이었다.

    견갑 부근에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의 어깨장이 있었고 가슴팍에는 황룡 두 마리가 승천하는 문양이 들어가 있었다.

    갑옷도 친군들에 비하면 이색적이었지만 투구도 마찬가지였다.

    황금과 검정색이 뒤섞여있던 남자의 투구 앞뒷면으로는 역시 황룡 문양이 들어가 있었는데, 압권은 투구술이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빨간 투구술이 투구드림(목보호대)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색적인 갑주에 친군들의 시선이 남자에게 쏠린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친군들이 본인을 흘겨보건 말건.

    남자는 잔뜩 화라도 났는지 씩씩거리며 정전을 올랐다.

    마침내 남자가 정전을 오르자, 친군들이 쭈뼛거리며 막아섰다.

    아무래도 남자와 무리가 패용하고 있는 무기 때문인 듯 싶었다.

    남자의 허리춤에는 환도가 패용돼 있었고, 다른 무리의 사람들도 각기 환도나 장창 혹은 도끼 같은 흉측한 무기들을 패용하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친군들로서는 당연한 제지였다.

    하지만 그게 더 남자의 화를 돋웠다.

    “썩 비켜라!”

    이색적인 복장처럼 이국적인 남자의 말이 친군들에게 통할리 만무했다.

    친군들이 쭈뼛거리기만 하자, 잠시 후.

    소란을 듣고 정전 안에서 관리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관리들의 선두에는 쇼신도 있었다.

    쇼신은 남자, 아니 융을 막아선 친군들을 호통쳐 물린 뒤 부복했다.

    쇼신이 부복하자 관리를 비롯한 친군들 모두가 부복했다.

    “이웃국이 당한 뜻밖의 불행에 이처럼 걸음 하여 주셨으니 어찌 이처럼 황공하고 고마운 때가 있겠으며, 이는 실로······.”

    통역이 말을 전하자, 융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대신.

    “뜻밖의 불행? 이는 그대 왕의 실책이었다. 그대 왕은 도대체 군사를 어찌 부렸기에 자꾸 왜구 따위에 패퇴하고, 염치 없이 또 구원을 청한단 말이냐!”

    “왜구의 기세가 마치 파죽지세 같기도 했사옵고 또 무장들이 왜구와의 전투 경험이 많지가 않아······.”

    “나의 장졸들은 무슨 궁고도 오랑캐와 칼을 섞어 본 적이 있다는 듯 들리는군.”

    “면목이 없다 하시옵니다.”

    “당연히 면목이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한 융은 부복한 쇼신과 재상들을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쇼신의 어좌에 착석했다.

    이건 외교적인 실례나 무례 정도가 아니라 양국이 적대를 하게 되어도 할 말이 없는 처사였지만, 그 누구도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무례를 인지하지 못 할 만큼이나 쇼신의 다급함은 컸다.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목전에 칼이 겨눠진 형국이 바로 류큐가 처한 형국이었다.

    “그래서, 지금 전황이 어떻게 되는가 물어보라.”

    “···하여 지금은 자키미구스쿠까지 함락 당하고 왜구는 남하하는 중이라고 하온데 진격로를 살펴본다면 궁을 함락시키려는 속셈 같다 하옵니다.”

    “허. 아무리 그대 왕의 나라가 작은 나라라지만 어찌 왜구 따위에 국란이 발생한단 말이냐?”

    시간을 계산해보면 유구군이 도카시키섬 근해에서 왜구에게 패퇴당하고, 여러 성들이 함락 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달도 채 안 걸렸다.

    20일 정도?

    고작 20일만에 왜구의 수중에 나라가 떨어질 위기에 처했으니 융은 왕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

    “지도를 가져오라 전하라.”

    잠시 후.

    지도가 융의 눈앞에 펼쳐졌다.

    왜구가 상륙한 지역과 여태 왜구가 진격했던 진격로와 왜구의 수중에 떨어진 성들.

    그리고 재차 왜구가 상륙한 중부 지역과 예상 진격로가 상세히 그려진 지도였다.

    “내가 듣건대 왜구는 화기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예. 사실이옵니다. 저 왜구들이 대국도 넘나드는 왜구인지는 모릅니다만, 설사 대국을 넘나들던 왜구들이라도 비격진천뢰에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니 성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기다리다가 왜구가 들이닥치면 비격진천뢰를 쏘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억수의 말처럼 농성하며 기다리다가 비격진천뢰로 적들을 당황하게 만든 연후에, 예상되는 퇴각로에는 미리 군사를 포진시키고 기다리다가 왜구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효시(신호용 화살)를 쏘아 올리게 만들어 협공을 가하는 것도 이로울 듯 하옵니다.”

    “그러면······.”

    세부적인 작전 논의가 시작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쇼신과 유구국의 관리는 배제된 작전 회의였다.

    ***

    “어떡하겠소, 두령? 단번에 넘겠소, 어쩌겠소?”

    저 멀리 보이는 성곽을 바라보며 미치마사가 말했다.

    그 말에 성진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

    이미 나키진구스쿠를 큰 손실없이 함락시켰고, 역시나 큰 손실없이 자키미구스쿠를 함락시켰다.

    여기까지 오면서 작은 전투가 몇차례 있긴 했지만 모두 승리했다.

    연전연승에 수하들의 사기는 탱천한 상태였다.

    지금 이 기세로 몰아친다면 필승을 장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길게 하시오? 성앞에 포진만 해도 백기 들 것 같구만.”

    “애들 상태는 어떠하냐?”

    “어떠긴, 쌩쌩하오.”

    “미치마사.”

    “말씀하시오.”

    “너에게 좌군 400을 맡기마. 한 번 두들겨 보거라.”

    “에이, 두들기는 정도로는 안 되지. 내 기필코 함락시키겠소.”

    “무리하진 말고, 적성의 방비가 얼마나 견고한지만 확인하거라.”

    “뭐, 그럼 그러리다.”

    잠시 후.

    미치마사가 좌군을 이끌고 본영을 벗어나자 성진의 곁으로 장분이 다가왔다.

    “두령, 괜찮겠습니까?”

    미치마사에게 맡겨도 괜찮겠냐는 질문임을 성진은 모르지 않았다.

    성진은 저 멀리 말에 오른 채 희희낙락해하며 수하들을 닦달하고 있는 미치마사를 흘겼다.

    “뭐가 말이냐?”

    “미치마사는 혈기가 이성을 앞지르는 때가 많아서 강노지말(공세종말점)의 시점을 읽지 못 합니다. 자칫 사백의 선봉대가 궤멸이라도 된다면······.”

    “괜찮다. 그저 간을 보는 것이니 미치마사라고 못 할 것이 있겠더냐.”

    그러는 사이.

    미치마사의 선봉대가 채비를 마치고 성곽으로 출진했다.

    성곽에서는 선봉대의 등장에 동요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성곽의 수문군들은 종이나 파루(쇠북) 따위를 울리며 선봉대의 등장을 알렸고, 미치마사의 선봉대는 사다리나 갈고리같은 조악한 공성무기를 이용해 성곽 오르기를 시도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생각보다 적의 방비가 허술한 듯 싶습니다.”

    선봉대의 전투를 지켜보던 장분이 감상을 토해냈다.

    성진 역시 동감이었다.

    왕이 머무는 성이라길래 방비가 공고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공고하긴 커녕 미치마사의 선봉대에도 쩔쩔 매고 있는 모습들이다.

    절로 조소가 터져나왔다.

    저런 군세로 무슨 자신들을 추격하고, 몰아낼 생각을 했는지······.

    “본대까지 끌어들이고 일망타진하려는 적의 기만처럼 보이진 않느냐?”

    성진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성격이었다.

    십수년 넘게 왜구질(?)을 해먹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신중한 성격 탓이었다.

    장분에게 묻자, 장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성진의 생각도 같다.

    정황상 기만술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기만술이란 것도 강군일 때 비로소 효용을 발휘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 그런 군세가 있었다면 성진과 수하들은 운텐에 상륙하긴 커녕 도카시키 섬에서 진작에 쫓겨났을 터였다.

    확실히 이 나라의 군사력은 형편 없는 수준이다.

    “예비 부대만 남겨 두고 모두 돌격시켜라.”

    “예.”

    곧 본대가 성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보무는 당당했고 사기는 탱천한 상태였다.

    천군만마와 같은 저 수하들이 왕성을 함락시키까지 과연 얼마나 걸릴까?

    두시진? 세시진?

    어쩌면 자키미구스쿠에서처럼 왕이 투항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성진은 생각했다.

    ***

    “오, 형님 오셨소?”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는 미치마사였다.

    그런 미치마사였지만 성진은 쉽사리 말문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함락한 것이냐?”

    “보면 모르시오? 함락했잖소.”

    “···”

    성진은 할 말을 잃었다.

    두~세시진이면 왕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시진으로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개전 일식경(30분)만에 외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치열하게 선봉대를 저지하는 듯 보이던 수비군들은 모조리 내성 안으로 퇴각한 뒤였다.

    “적들이 오합지졸이라 다행이오. 아니면 피해가 컸을 텐데.”

    미치마사의 말처럼 성의 출입구인 성문은 절묘한 위치에 있었다.

    좌우로 높다란 성곽이 있었기 때문에 사다리를 걸쳐도 쉽게 함락시키긴 어려웠을 터였고, 성문은 좁은 길목으로 이어져 있어서 자칫 잘못 진입했다가는 성곽의 사수(궁병)들에게 집중 사격을 받을 수가 있는 위치였다.

    공성측이 뚫기에 버겁거나 다수의 피해를 감수해야 했을지도 몰랐는데 다행히 손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과연 미치마사의 말처럼 오합지졸인 건 맞는 듯 하다.

    “두령. 적들이 혹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장 도인. 그게 무슨 소리시오?”

    미치마사는 도복을 즐겨 입던 장분을 흔히 도인이라 부르곤 했었다.

    “이리 손쉽게 함락 될 성이 아니지 않겠소.”

    “아니, 나랑 내 수하들이 용맹을 떨쳐서 함락 시킨 거지, 적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단 말이오? 혹시 전리품 때문에 그러시오?”

    성진은 전리품 배분을 흔히 공에 따른 차등으로 나누곤 했었다.

    “전리품 때문에 그러겠소. 그냥 너무 쉬운 게 아닌가 해서······.”

    “아니라면서 왜 자꾸 나랑 내 수하들 공을 깎아내리시오? 쉽긴 뭐가 쉬워? 저기 드러누운 놈들 안 보이시오?”

    두 사람 사이에 언쟁이 벌어져서 좋을 건 없었다.

    “둘 모두 그만하거라.”

    “하지만 두령. 장 도인이 자꾸······.”

    “그만하라니까.”

    “크흠.”

    “장분.”

    “예, 두령.”

    “아까 적들의 기만일 것 같냐는 질문에 너는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네가 보기엔 적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듯 하더냐?”

    “손쉽게 성을 함락시킨 건 오랜만인지라 예민했던 것 같습니다. 설마 별 꿍꿍이가 있겠습니까? 두령 뜻대로 하시지요.”

    “으음.”

    괜히 찝찝해졌지만 이미 외성안까지 본대가 들어온 뒤였다.

    지금 본대를 회군 시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설마 꿍꿍이가 있으려고.’

    그럴 일 따윈 없다.

    무슨 대단한 꿍꿍이가 있었다면 애당초 선봉대가 외성을 점령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모두 진입시······.”

    쿠르르릉-.

    “응?”

    “무슨 소리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수뇌부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기를 잠시.

    “적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고개를 들자, 내성벽에 바글거리는 적들이 보였다.

    다만.

    “화, 화포?”

    성진을 당혹케 한 건 바글거리는 적들이 아니었다.

    아까 전까진 텅 비어있던 포문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화포였다.

    빠르게 명을 내려야했다.

    이대로 퇴각할지 돌격할지.

    성진이 택한 건, 후자였다.

    선봉대에 이어 본대까지 기천의 병력이 이미 외성에 진입한 상태였다. 일시에 퇴각하다가는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낳을 수가 있었다.

    “돌격하라!”

    그의 외침과 함께 포성이 울려퍼졌다.

    쾅!

    콰콰콰쾅!

    “어라, 형님. 이놈들 어디 물에 잔뜩 젖은 화약 갖다가 썼나 본데? 어째 화포가 힘이 없어.”

    미치마사가 힘없이 데구르르 굴러가는 포환을 보며 낄낄거렸다.

    갑자기 등장한 화포에 잔뜩 긴장했다가,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 하고 데구르르 굴러가는 포환에, 우습기는 다른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들은 포환 곁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포환을 번쩍 들어올려 이것도 포격이라고 하냐는 둥, 곧 짓쳐들어가서 너희 계집들을 모조리 겁간 하겠다는 둥, 내성벽을 향해 도발했다.

    그때였다.

    쾅쾅쾅쾅!

    콰콰콰콰콰쾅!

    뇌성벽력같은 소리와 함께 수하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던 포환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리고 벌어진 것은 아비규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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