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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34화 (234/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34화>

***

“두령. 이것좀 보시오, 이것좀”

나키진성의 성곽에 오른 왕성진(王省進)의 곁으로 누군가 희희낙락해 하며 다가왔다.

그의 아우 미치마사(道雅)였다.

“그게 뭐냐?”

“뭐긴 뭡니까, 금부처지. 옛날에 이 성에 왕이 살았다더니 정말인 것 같소. 금이 아주 많소. 흐헤헤헤.”

성진은 피식 웃었다.

“그 모자는 무엇이냐?”

“아, 이거? 여기 성주 관모라던데 형님도 써보시겠소?”

“됐다. 너나 실컷 쓰거라.”

“에이, 왜 또 그러시오. 한 번 써보시오.”

미치마사가 재차 권하자, 성진은 못 이긴 척 관모를 받아들었다.

어색하게 관모를 쓰자 미치마사가 폭소를 터뜨렸다.

“이상한가?”

“아니오, 이 나라 고관대작 같으시오.”

고관대작 같다는 말에 성진은 쑥쓰러운지 관모를 벗어 미치마사에게 건넸다.

“성과는 좀 있었더냐?”

“성과? 금이 아주 많았다니까?”

“음. 다른 건?”

“다른 건 은도 좀 있었고··· 아! 천축주가 있었소.”

“천축주?”

“모르시오? 거, 왜 옛날에 큐슈 놈들이 얻어다 줄 수 없겠냐고 했던 술 말이오.”

“아아. 기억 난다.”

“이놈들은 아예 술독에 빠져서 지내는지, 천축주가 아주 많았소. 큐슈로 가서 팔면 돈 좀 만지겠소.”

“또 다른 건 없었고?”

“많았지. 근데······.”

말끝을 흐린 미치마사가 음흉하게 웃었다.

“사람만 한 게 있겠소?”

성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사람만한 재물도 또 없지.

“몇 사람이나 잡아 들였는데?”

“놀라지 마시오.”

미치마사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보였다.

“쉰?”

“에이, 두령 따르는 식구가 몇 명인데 통이 그리 작소?”

“오백?”

끄덕.

“무엇보다 계집들만 삼백이 넘소, 삼백이. 여기 계집들 살결이 까무잡잡한 것이··· 나는 피부가 백옥이어야 자지가 벌떡 거렸는데 웬 걸? 까무잡잡하니까, 다른 의미로 벌떡 거리지 않겠소?”

“넌 치마 두른 계집만 보면 벌떡 거리잖느냐.”

“아니, 날 무슨 호색한 취급을 하시오? 두령도, 참.”

“호색한 맞다.”

“크흠. 아무튼 말 나온 김에 더 잡아들일까, 어쩔까? 더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오.”

잠시 고민하던 성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백이면 충분해. 그 이상 됐다간 괜히 자리만 차지할 테니, 다음 약탈지에서는 사람은 그만 잡아 들이거라.”

“여부가 있겠소. 아, 그리고 두령.”

“응?”

“두령 칼날 나가서 다시 갈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랬지.”

“잘 갈렸나 시험이나 해보지 그러오?”

“시험?”

“마침 늙은 놈들은 아직 안 죽였거든.”

노인들은 노예로 상품 가치가 전혀 없다.

당연히 잡아들이는 즉시 살해한다.

성진은 등에 대충 고정시킨 노타치(野太刀)를 풀어 칼날을 살펴봤다.

날이 무뎌져서 수하들을 시켜 갈긴 갈았는데, 시험은 아직이었다.

“그럴까?”

“이리 오시오. 내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놨으니까.”

성진은 미치마사를 따라 성곽을 내려갔다.

과연 미치마사의 말처럼 성곽 밑에는 노인 몇 사람이 줄지어 무릎 꿇려져 있었다.

“목부터 자르시겠소, 팔부터 잘라보시겠소?”

“팔부터 해보마.”

미치마사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무릎 꿇려진 노인의 팔을 움켜잡았다. 노인이 발버둥 쳤지만, 노인의 힘으로 장정의 완력을 당해내기란 무리에 가까웠다.

결국 노인이 팔을 쭉 뻗은 모양새가 됐다.

“엄한 데 치지말고 잘 내려치시오. 나 손 없는 병신 되기 싫으니까.”

“걱정도 팔자다.”

자세를 잡은 성진이 노타치를 내려쳤다.

푸학!

노인의 팔이 맥없이 잘려나갔고, 곧 노인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떻소?”

노인이 고통에 몸부림치건 말건.

미치마사가 칼날 상태가 어떻냐고 물었다.

“좀 무딘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엔 목을 쳐 보시오. 목 치면 무딘지 잘 갈렸는지 알겠지.”

성진이 준비하는 사이, 미치마사는 예의 노인을 일으켜세우고는 미리 준비된 팔(八) 자 형태의 형틀에 상투를 고정시켰다.

앞전처럼 자세를 잡은 성진이 노타치를 횡으로 그어올렸다.

손 끝에 얼얼한 통증이 전해짐과 동시에 노인의 머리가 허공에 붕- 떠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노인의 머리는 이내 힘없이 데구르르-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떻소?”

“다시 갈아야겠구나.”

성진이 도를 내려다보며 아쉬워하던 그때.

“두령. 준비 다 끝났소.”

성진의 또 다른 부하 장분(張奮)이 다가와 말했다.

미치마사가 푸젠성까지 노예로 끌려왔다가, 그 무재를 보고 성진이 수하로 삼은 경우라면 반대로 장분은 그와 같은 푸젠성 출신으로, 초창기부터 해적질을 함께 한 수하였다.

“그럼 가볼까.”

약탈이란 건 결국 시간 싸움이다.

육지에 상륙해서 관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야 한다.

성진 역시 십수년이 넘도록 해적질하며 이 원칙은 끝까지 고수했다.

어쩌면 그가 십수년이 넘도록 각국의 관군들에게 토벌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지 몰랐다. 그는 아쉬움이 조금 남더라도 빠르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성진은 이번 한 번만 원칙을 어겨볼 참이었다.

이대로 난구스쿠를 함락시키고 왕도까지 진격한다.

사실 성진도 왕도까지 진격할 생각은 없었다.

유구국의 관군들이 그리 손쉽게 격파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을 터였다.

적당히 털고, 적당히 잡아들이고, 적당히 괴롭히고 빠져나갔겠지.

하지만.

유구국 관군들은 일부러 져주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의 수준이었다.

게다가, 조선군으로 판명이 난 일단의 선단(船團)이 도유미야의 섬이 있는 곳으로 향했으니 당분간은 안심이었다.

왕도까지 진격한다. 왕도에는 왕의 명령에 의해 수많은 사족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하니, 당연히 그만한 금은보화들이 지천에 널려있을 것이었다.

이 금은보화들을 모조리 약탈해 배에 싣는다.

이게 성진의 계획이었다.

이번 한 번.

딱 이번 한 번만 원칙을 어기고 크게 해먹어서 휘하에 있는 수하들에게 잘 분배해 고향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난구스쿠를 통과해야한다.

물론 성진은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본 유구군은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었다.

왕도에서도 그럴 터였다.

***

휘청!

쇼신이 휘청거리자 우미가 후다닥 다가가 부축했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현기증이 도는지 쇼신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괜찮겠소······.”

북부에 있다던 왜구가 중부에 출몰했다는 소식이 방금 전해졌다.

어찌 괜찮겠는가?

심장이 벌렁거렸다.

운텐과 나키진구스쿠가 함락되고 조정에서는 난구스쿠에 400명의 충원 병력을 보냈다.

기존에 600명의 수비군이 있었으니 대략 천여명에 달하는 수비군이 구스쿠를 지키게 된 셈이었다.

반면 지금까지 파악 된 왜구의 병력은 천오백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

생각보다 일찍 운텐과 나키진구스쿠가 왜구의 수중에 떨어졌지만, 운텐 전투와 나키진구스쿠 공성전에서 입은 왜구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터였다.

모르긴 몰라도 수백의 사상자는 발생했을 것이었다.

결국 파악된 정보에 의하면, 왜구가 가용 할 수 있는 병력은 넉넉 잡아 천여명 정도.

승산이 있었다.

수성측 1000 VS 공성측 1000.

양쪽이 비등했으므로 이전처럼 허무하게 함락되진 않을 거란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왜구가 난구스쿠에 출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건,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진 몰라도 왜구는 난구스쿠에서 대치만 했다.

난구스쿠에서 척후를 보내봐도, 왜구들은 별다른 움직임도 없이 난구스쿠의 앞에 진을 치고만 있었다.

한데 방금.

소식이 들어왔다.

수백에 이르는 왜구가 북부가 아닌 중부의 자키미구스쿠(座喜味城)에 나타났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난구스쿠가 뚫린다면 북부 전체가 왜구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조정은 난구스쿠와 같은 북부에만 신경 썼지 중부에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 했다.

자키미구스쿠의 수비병력은 백오십 남짓.

반면 출몰한 왜구는 수백이 넘는다 하니 이건 아찔한 정도가 아니었다.

“조, 조선군은? 추라우미에게서 아직 소식은 없소이까?”

지금 이 상황에서 쇼신이 의지 할 건, 조선 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왜구의 기만술에 깜쪽 같이 넘어가고 말았다.

당초 왜구가 운텐에 상륙해 나키진구스쿠를 함락했기 때문에 당연히 남하하여 난구스쿠를 공략할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난구스쿠의 병력들과 수백의 왜구가 대치중이기도 했었고.

기만이었다.

난구스쿠에 일부 병력을 보여준 뒤, 그대로 운텐에서 해안가를 끼고 돌아 중부의 자키미구스쿠에 상륙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아찔한 것은 난구스쿠의 구원을 바랄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전령의 말에 의하면 난구스쿠의 수비병력과 대치 중이던 왜구가 아직도 난구스쿠 일대에 남아 있다고 했다.

수비병력이 자키미구스쿠를 구원하기 위해 출성한다면, 낌새를 알아챈 왜구가 수비병력의 후미를 쫓을 게 분명했고, 그리되면 자키미구스쿠에 출몰한 왜구에게 앞뒤로 둘러 싸이게 된다.

결국 천여명에 이르는 병력은 왜구들의 협공에 지리멸렬하게 될 테니, 난구스쿠의 병력을 뺄 순 없었다.

“아, 아직이옵니다······.”

“허어.”

현기증이 났다.

상대는 고작 오랑캐라 경멸하던 왜구에 불과했다.

한데 고작 왜구에 불과한 상대에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워졌다.

“일단은······.”

차분히 머리를 식힌 쇼신이 명을 내리려던 그때였다.

“급보이옵니다!”

또 전령이 들었다.

“어디서 오는 것이냐?”

우미가 물었고,

“자키미구스쿠에서 오는 길이옵니다.”

전령이 대답했다.

자키미구스쿠에서 왔다는 전령에 쇼신은 또 한 번 가슴이 철렁내려앉았다.

“왜구가 남하하고 있사옵니다!”

“무, 무슨 말인가? 왜구가 남하하고 있다니!”

“자키미구스쿠가······.”

“속히 말하지 못 할까!”

“하, 함락 되었사옵니다······.”

쇼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 자키미구스쿠와 슈리(왕성)는 지척이거늘······.”

말문을 잇지 못 하는 쇼신을 대신해 우미가 전령에게 말했다.

“적의 기세가 아무리 파죽지세 같다 한들 자키미구스쿠는 철옹성이다. 어찌 그리 단번에 함락이 됐단 말이냐?”

“그, 그게······.”

“어허! 바른대로 고하지 못 할까!”

“서, 성주께서 투항을······.”

웅성웅성.

편전이 소란스러워졌다.

패배와 투항은 엄연히 그 의미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전자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기울였다는 뜻이지만, 투항은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항복을 했다는 뜻에 불과하다.

“수이(首)가 투항을 했단 말이냐?”

우미가 황당함을 참고 물었다.

메카루(銘苅) 수이.

그는 류큐에 몇 없는 무장중 한 사람이었다. 문무를 겸비했다는 평이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 그렇사옵니다······.”

“왜구란 몰아내면 되는 족속들이거늘 어찌 사족(士族)의 자제로서 왜구에게 투항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허어!”

변변한 전투 한 번 없이 성문을 열어 왜구를 맞았다는 데서 오는 배신감이 자못 컸는지, 대신들은 하나같이 수이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투항한 장수를 비난한다고 해서 사면초가인 형국이 바뀌진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자키미구스쿠에서 왕도까지는 반나절 거리에 불과했다.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슈리성이 왜구에게 함락되는 즉시 왕도 일대는 무간지옥으로 변할 것이었고, 쇼신 본인은 고작 왜구 따위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것이었다.

어쩌면 쇼(尙)씨 왕조가 그의 대를 마지막으로 끝이 날지도 몰랐다.

왜구가 물러가더라도, 그는 나라를 지키지 못 한 왕이 된다.

각지에서 호족들이 발호할 테고, 왜구에 힘을 잃은 그는 호족들의 발호를 막지 못 해 나라는 사분오열 될 것이었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어좌에서 끌려 내려올지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리하게 왜선을 추격하지 말 걸 그랬다.

승기를 다 잡았다고 판단해, 무리하게 추격을 명한 게 화근이었다.

그때 병사들을 허무하게 잃지만 않았더라도, 아니.

왜구의 반격에 당황해 뱃머리를 돌려 퇴각만 하지 않았더라도.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전하, 전하!”

자책과 자괴에 고통스러워하던 그 순간.

누군가 헐레벌떡 편전 안으로 들었다. 그러고는 미처 숨도 고르지 않은 채 소리쳤다.

“조선군이옵니다! 조선군이 당도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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