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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33화 (23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33화>

    ***

    “부디 소국의 어려운 형편을 외면치 말고 잘 헤아려 달라 하옵니다.”

    털썩.

    통사(통역관)가 말을 전달하기 무섭게 웬 젊은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젊은 사내의 이름은 시마부쿠 추라우미.

    해안가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군선의 선장이기도 한 자였다.

    추라우미는 무릎 꿇은 그대로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애절하면서도 간절하기까지 한 추라우미의 호소에 장중의 시선이 자연스레 통사에게 모아졌다.

    수십쌍의 시선들이 부담스러울법도 하건만, 통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추라우미의 말을 통역했다.

    “서둘러 구원치 않으면 적들이 운텐에 상륙을 시도하고 나키진구스쿠(今帰仁城)를 함락시킬지 모른다고 하옵니다. 나키진구스쿠가 함락되면 그 일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셈이라 하옵고, 어쩌면 나키진구스쿠를 함락시킨 연후에는 그대로 남하하여 왕도를 함락시키려 들지도 모른다고 하옵니다.”

    사무적인 통사의 입에서 왕도와 함락이란 단어가 나오자 장중에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명색이 일국의 왕이 기거하는 수도가 왜구들에게 함락된다.

    장중의 탄식은 깜짝 놀라 내뱉는 비명일지도 몰랐다.

    상식적으로 수도가 왜구에게 함락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니, 귀국에는 병사(兵事)를 아는 장수가 정녕 없단 말이오? 경거망동하여 일을 그르쳐 놓고 어찌 떳떳하게 손을 벌린단 말이오이까?”

    놀랍기는 융도 매한가지였다.

    놀랍다기 보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왜구에 의해 본토가 위험에 처했단다.

    어이도 없었지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번 전쟁은 아주 간단했다.

    남해정토군이 궁고도의 오랑캐들이 발호하지 못 하도록 저지하는 사이, 유구군은 도카시키라는 섬을 점거한 왜구를 무찌른다.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그런데 이 간단한 일을 못 해냈다. 아니, 못 한 정도가 아니라 잘못된 판단으로 나라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추라우미라는 사내의 말에 의하면 유구군이 도카시키 섬 근해에 나타나자 섬에 웅거하고 있던 왜구들이 돌연 배를 타고 나왔단다. 유구군은 당연히 놈들이 도망하는 것이라 판단, 추격을 감행했는데······.

    알고보니 유인책이었다.

    도망하는 거라 생각한 왜구들은 어느 순간, 일사분란하게 뱃머리를 돌려 선상전을 시도했다.

    왜구가 백병전에 능하다는 건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도 알 만한 사실.

    문제는 그 코흘리개들도 알 만한 사실을 유구군이 몰랐다는 것이었다.

    유구군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왜구의 선상전에 응했다.

    정말 왜구의 백병 능력을 몰랐을 리는 없고, 수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에 선상전에 응했던 것이겠지만, 이 한 번의 실책이 불러온 결과는 패퇴였다.

    유구군 측에는 정확히 500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쇼신왕은 회군을 지시했고 나하로 돌아왔다.

    왜구가 유구군을 뒤쫓아왔고, 간발의 차로 나하에 도달한 유구군은 적들이 항구에 들어오지 못 하도록 쇠구슬을 쳐서 막아냈단다.

    제법 기특한 수라고 할 수는 있었지만 쇠구슬 덕에 나하에 들어오지 못 한 왜선들은 일제히 종적을 감췄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부의 운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유구국 입장에선 간담이 서늘한 일이었다.

    적들이 운텐 상륙에 성공해 민가를 급습한다면 그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텐데, 설상가상으로 적들이 남하를 택해 왕도로 짓쳐든다면 해상전에서 맞딱뜨린 왜구의 기세로 보아 막아낼 수 있을지 장담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유구국으로서는 달리 방책이 없었다.

    미야코 공략에 나선 조선군에 구원을 청할 밖에.

    자,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융이 쯧쯧 혀를 차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유구국은 바로 얼마 전까지, 조금이라도 저희들 피해를 줄이려고 조선이 선봉을 서라 마라 하면서 융의 뒷목을(?) 잡게 했었다.

    근데 지금은 그것도 모자라 아예 턱밑까지 쫓아온 왜구까지 몰아내달라 한다.

    기가 찰 일이었다.

    “그게, 설마했다고 하옵니다.”

    “무슨 설마 말이냐?”

    “설마 왜구가 뱃머리를 돌려 선상전을 시도 할 줄은 몰랐다는 말 같사옵니다.”

    융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상전을 시도 할 줄 몰랐다면, 하다못해 왜구가 선상전을 시도 할 때 거리를 벌렸어야 했다.

    한숨을 내쉬는 그 사이에도 추라우미는 통사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제발 구원해달라는 둥··· 대왕의 위엄을 왜구에게 보여달라는 둥··· 우리 왕께서 기댈 곳은 이제 대국 밖에 없다는 둥······.

    아무리 봐도 입 발린 소리에 가까운 호소였다.

    “그대의 왕은 바로 얼마 전까지 나의 군사들 더러 선봉에 서라 하면서 나를 우롱하였는데 이제와서 도와달라 청하는 것은 어느 나라의 도리인 것이오? 더욱이 우리의 약조는 파병에 있었소. 우리는 약조를 이행하여 이역만리를 달려왔고, 그대가 보듯이 이 오랑캐 소굴을 평정하였소이다. 그런데 오랑캐 소굴을 평정하자마자 군사를 빼내 구원을 해달라?”

    허!

    암만 융이 이번 전쟁이 너무 쉬워 미련이 남았더라도 이건 아니다.

    말한대로, 이제 막 섬을 평정했다.

    교서를 반포한 건, 며칠 되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유구국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뺀다?

    융은 그래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지난 번, 왕이 선봉 운운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융이 그 말에 발끈하자 뭔가 오해가 있다며 능글맞게 둘러대던 왕이 아니었더라면··· 그럼 뭐, 잠깐이라도 고민 해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왕이 급히 보낸 추라우미라는 젊은 사내는 진격이니 함락이니란 말을 쓰면서 상황이 위급하다 전달하고 있지만, 능글맞던 왕을 생각하면 그리 위급한 상황은 아닐지도 몰랐다.

    이미 그의 군사들을 선봉에 내세우고, 유구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려 했던 전례가 있는 왕이 아니던가?

    “하지만 오죽 시급하면 사람이 하나라도 모자란 때 군선을 보내서 일을 알려왔겠냐고 하옵니다.”

    그거야 네놈들 사정이지.

    융은 내심 냉소했다.

    “전하. 지금 군사를 움직여 중산왕을 돕는다면 장차 유구국이 보은하려 들지 않겠사옵니까?”

    이계동이었다.

    융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겠지.”

    “한데 어찌······.”

    “왕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지 않더냐. 서로 득이 되는 일이었으니 약조를 맺었던 거긴 하다만, 이역만리를 달려온 우리 더러 선봉에 서란 말을 한 게 바로 왕이다. 그런데 지금와서 본인들 사정이 궁하니 또 선봉에 서달란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하오면 원병은 아니 보내실 참이시옵니까?”

    “아니 보낼 수야 없지.”

    이게 사실이었다.

    아무리 왕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기로서니, 그래서 별로 내키지 않는 게 사실이라지만 왜구에 유구국이 피해를 입는 건 조선에도 이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뜸을 들이고 있는 참이다.”

    “뜸 말이옵니까?”

    계동을 일별한 융이 말했다.

    “그럼, 귀국은 우리에게 무얼 약조 할 수 있소이까?”

    “무슨 말씀이신지 묻사옵니다.”

    “일군을 움직이는 일이오. 누차 말하지만 그대의 임금과 한 약조는 동시에 거병하는 일이었고, 우리는 약조대로 거병했소. 궁고도의 오랑캐들도 토평했지. 그래서 이제 막 오랑캐 소굴에 교서를 반포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알게 하였는데, 귀국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빼내면 교서가 이제 무슨 소용이겠소? 결국 이 궁고도를 버릴 각오를 하고 군을 움직여야 할 터인데, 신의니 우호니 하는 추상적인 말로는 일군을 움직일 수 없소.”

    통사가 말을 제대로 전달한 모양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추라우미가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송구하오나 본인에겐 그런 권한이 없다고 하옵니다.”

    “나에게도 그런 권한 같은 건 없소.”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러자 추라우미가 오체투지하며 말했다.

    “말하길, 지금 본인에게 어떤 권한도 없어 쉽사리 약조를 할 순 없겠지만 전하께오서 저희 왕을 구원해준다면 왕이 필시 그 은혜에 감사해 할 것이며,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원해주신 셈이니 어떤 말씀이든 들어주실 것이라 하옵니다.”

    “나는 약조를 원하는 것이오. 지금 그대가 이 궁고도에 나타난 것은 그대의 말처럼 본국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일 것이고, 왜구의 기세가 파죽지세 같아서 일 텐데, 귀국을 구원하겠답시고 파죽지세의 왜구를 막으려 든다면 나의 군사들에게 피해가 발생 할 수 밖에 없소. 그런데 자꾸 구두로만 말하니 내 했던 말을 반복 할 수 밖에 없소이다.”

    “정확히 어떤 걸 원하시냐고 묻사옵니다.”

    “어떤 거라. 병판이 생각하기에 어떤 걸 받아야 우리가 손해가 없겠는가?”

    “소, 손해라기보다는··· 사신의 말처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원해준다면 어떤 말인들 아니 들어주겠사옵니까? 시급을 요하는 일인 듯 하니 서둘러 출병을 하시는 것이··· 한 나라의 국운이 걸린 일이옵니다······.”

    “우리나라의 국운이 걸린 일도 아닌데 호들갑인 것이냐.”

    “그, 그래도 사람으로서 의리란 게 있사온데 국가 간에 의리가 없겠사옵니까······.”

    “그래서 그 의리를 이문으로 받아내려는 참이 아니냐.”

    뭐가 좋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침음한 융은 울먹거리다시피 하고 있던 추라우미를 바라봤다.

    “사신은 들으시오. 내 출병하겠소.”

    “감사한 일이라 하나이다.”

    “대신, 그대는 말하길 그대 나라를 구원한다면 필시 왕께서도 그 은혜에 감사해하며,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준 셈이니 어떤 부탁이든 들어줄 거라 했소. 맞소?”

    “그렇다고 하옵니다.”

    “한데 그대의 말과 다르게 막상 구원을 하고 나서 왕이 어떤 호의도 베풀고자 하지 않는다면······.”

    “···?”

    입을 오물거리던 융이 피식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오, 됐소. 병판은 속히 출병을 준비하라.”

    “예!”

    ***

    “급보이옵니다!”

    “어서 아뢰거라!”

    “나키진구스쿠가 함락되었다고 하옵니다!”

    전령의 말에 쇼신은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심장이 덜컹-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뭐라? 어디가 함락 돼?”

    “···”

    놀란 건 쇼신만이 아니었다.

    보고를 함께 듣던 재상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키진구스쿠가 함락되면······.”

    “북부가 왜구의 수중에 들어간 셈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소.”

    “허어. 이를 어쩐단 말이외까.”

    쇼신은 시끄럽게 떠드는 재상들을 일별했다.

    “둔(殿)은? 둔은 어찌 되었단 말이냐?”

    아라가키 둔.

    그는 나키진을 책임지는 북산감수(감독직)였다.

    “···전사하셨사옵니다.”

    사지가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적들이 운텐에 모여 들었다는 보고는 열흘 전의 것이었다.

    다시, 그 적들에 의해 운텐의 저지선이 뚫렸다는 보고가 들어온 건 엿새 전의 일이었고 적들이 나키진구스쿠에 모여 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온 건, 닷새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닷새만에 나키진구스쿠가 함락되다니······.”

    쇼신은 휘청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키진구스쿠는 난공불락까진 아니더라도 닷새만에 함락시킬 만큼 만만한 성은 아니었다.

    그 옛날 영웅들이 할거하던 시대를 거쳐, 삼산의 왕조들이 생겨날 즈음에는 북부의 맹적이라 불렸던 북산국(北山國)이 자리잡은 곳이기도 했다.

    북산국을 멸망시키고 삼산을 일통한 군진진물(君志真物, 초대 중산국 임금 쇼시쇼의 신호) 대왕도 무력으로 함락시키지 못 해, 책략을 써서 함락시킬 정도였다.

    그런 성이 고작 닷새만에······.

    “적들의 동태는 어떻더냐?”

    운텐이 북부의 관문이라면 나키진구스쿠는 북부의 보루였다.

    선대왕들은 북부 자체가 지형이 험난해 북산국 멸망 이후, 감수(감독)직까지 두었을 정도인데 나키진구스쿠가 함락됐다는 건, 북부의 일부가 왜구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리나 진배 없었다.

    “군을 정비하고 있는지, 별다른 움직임은 확인되지 않았사옵니다.”

    “전하, 지금이라도 난구스쿠(名護城)에 증원 병력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다마구스쿠 우미였다.

    그는 적들이 운텐항에 나타났다는 첩보가 들어왔을 때부터, 다수의 군사를 나키진과 운텐에 배치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다.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건, 신출귀몰한 왜구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왜구가 운텐에 나타나 전병력을 운텐과 나키진구스쿠에 배치시켰는데 적들이 나하항에 나타난다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적들은 나키진구스쿠를 함락시켰다.

    나키진구스쿠에서 남하하려면 난구스쿠를 거쳐야 한다.

    난구스쿠가 뚫리면 적들은 파죽지세로 남하할 터였다.

    “경의 말대로 해야겠다. 지금 당장······.”

    총동원령을 내려서라도 난구스쿠에 증원 병력을 보내라 하명하려던 그때였다.

    “급보이옵니다!”

    또 다른 전령이 들었다.

    쇼신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냐.”

    그런 쇼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우미가 전령에게 물었다.

    “난구스쿠··· 난구스쿠에 왜구가 출몰했다는 급보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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