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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32화 (23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32화>

    ***

    “분하도다······.”

    임금의 독백에 계동은 의아했다.

    승전이었다.

    아니, 승전 정도가 아니다.

    대첩에 가까웠다.

    동맹국인 안곤의 선봉대에서 전사자가 열 한 명이 나오고, 부상자가 마흔명 정도 나오긴 했지만 아군의 피해는 전무하다.

    전사자는 하나도 없고, 부상자가 아홉 정도다.

    이 아홉 중에도 넷은, 급박한 후방 지원 중에 화포와 비격진천뢰를 나르다 넘어져서 타박상을 입은 정도고 진짜 적과 교전해서 부상 입은 이들은 다섯 밖에 안 됐다.

    그마저도 모두 경상자였고.

    이건 분명한 대첩이었다.

    병사(兵事)의 일을 뒤져봐도 이런 압도적인 승리는 흔치가 않다.

    하물며 아군의 피해가 전무한 상태에서의 승리는 더더욱 흔치가 않다.

    그런데 분하시다니······.

    계동은 고개를 돌려 무릎 꿇려진 적괴를 바라봤다.

    분해도 저자가 분해야 한다.

    본인과 본인의 군사들이 전의를 다지던 와중에 갑자기 날아든 비격진천뢰에 박살이 나버렸다.

    수하들은 전투다운 전투도 치르지 못 한 채,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생전 처음 보는 무기와 화력에 압도돼, 혼비백산하며 달아나기 바빴다.

    모르긴 몰라도 갑판의 군사들이 저들의 복색을 보고 인면조라 수군거렸던 것처럼, 저들은 비격진천뢰를 낙뢰 내지는 천벌로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적괴는 어떻게든 전열을 가다듬으려 했을 테지만 잘 훈련 받은 관군이 아니다 보니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소수의 병력만으로 안곤의 선봉대를 막아보려 안간힘을 썼겠지만 이어서 상륙한 봉해위에 포위 당하며 결국은 대패.

    그래, 분하려면 확실히 저자가 분해야 한다.

    본인 나름대로는 승전을 점쳤으니 군사를 몰고 나온 걸 테지만, 결과적으로 손도 못 쓰고 지리멸렬하지 않았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할 것이다.

    “장군··· 대첩이옵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계동은 황공한 마음으로 대첩을 새삼 언급했다.

    어쩌면 전하께서는 동맹국의 피해자도 전무한 대첩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욕심이다.

    이만해도 대첩임은 분명하다.

    “누가 모른단 말인가?”

    흠칫.

    계동은 몸을 흠칫거렸다.

    요 며칠 들떠있던 전하와 달리 매우 퉁명스러우시다.

    혹 자신이 없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싶어, 억수와 소기파를 비롯한 제장들을 바라봤지만 그들도 영문을 모르긴 매한가지인지, 갑자기 퉁명스러워진 전하에 당혹스러워하는 눈치다.

    이럴 땐 일단 엎드리는 것이 신하의 도리다.

    털썩!

    “장군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사옵니다. 장군께서 지휘하지 않으셨다면 필시 안곤의 선봉대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군사들도 큰 피해를 입었을 테니 실로 비격진천뢰를 쏘아 올리라는 명은 시기적절하였사옵고, 주효하였사옵니다. 하오나 전쟁에 사상자가 아주 없을 순 없으니 선봉대가 입은 피해가 작은 피해는 아니지만, 병사의 일로 따져보면 아주 작은······.”

    융이 더 큰 대첩을 바랐다고 지레짐작한 계동이 이만해도 대첩임을 새삼 상기시켜주려던 그때였다.

    생각하니 열불이 뻗치는지 융은 씩씩거리며 어딘가로 걸어갔다.

    놀란 제장들이 그를 뒤따랐다.

    그는 고작 열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열 걸음을 걷고 그 앞에 있는 건, 무릎 꿇려진 도유미야였다.

    도유미야는 일의 원흉(?)인 융을 살기 가득한 눈초리로 마주봤다.

    비록 끌려오긴 했어도 외세에 굴복(?) 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의사 표현이기도 했지만······.

    “아니, 이놈이 어디서 눈을······.”

    퍽!

    “그 기세를 아까 보였어야지!”

    ···문제는 시기가 좋지 않았다.

    “패장으로 끌려와서 무슨 눈빛이 그리 살벌하단 말이냐? 허!”

    순간 욱! 하는 마음에 주먹을 날렸지만, 화는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내가 이러려고 이역만리를 달려왔단 말이냐! 이러려고?”

    끌려온 패장을 앞에 두고 신세한탄을 해봤자 이미 매듭 지어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전쟁을 다시 하겠답시고, 애써 백기 들고 투항한 오랑캐들을 도로 풀어줄 수도 없지 않겠는가.

    한편.

    계동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적이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투항해서 화가 나신 것이었다.

    ‘···’

    뭐라고 말씀 아뢰어야 할지 선뜻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없었지만 일단은 전하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게 우선 같았다.

    전하께서는 한 번 화나시면 눈에 뵈는 게 없다.

    포로들을 모조리 베어버릴지도 몰랐다.

    “장군. 일단 고정하시옵고··· 어찌 처분할지를 논하는 것이 우선인 듯 하옵니다.”

    “후··· 그래, 병판의 말이 옳다. 내 여기서 성을 낸다 한들 무엇이 바뀌겠는고?”

    “그, 그렇사옵니다.”

    “일단 적괴는··· 음. 적괴가 왕에게는 역적이라고 했었던가?”

    “예. 이미 경신년(1500년)에 왕에게 귀순하였는데, 왜구와 결탁 할 수 있게 되면서 다시 반기를 들었으니 어찌 중산왕의 입장에서 역적이 아니겠사옵니까? 또, 대대로 궁고도의 도주들은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고 하니 과연 역적의 소굴이 아니겠사옵니까?”

    “흐음. 내 이미 한 번 역모의 일을 당한 뒤인지라, 역적의 역자만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라는데 하물며 왕은 어쩌겠는가? 하물며 역적의 소굴이였다니 왕에게 인도하는 것이 도리인 듯 하다. 처분은 왕이 알아서 하겠지.”

    “중산왕도 필시 감사해 할 것이옵니다.”

    “나머지 놈들은 어찌 한다.”

    지휘관급에 해당하는 자들은 스무명이었다.

    비격진천뢰에 전사한 이들을 제외하고, 이들 지휘관급 인사들 중에 생포된 자들은 열 일곱.

    조선에서였다면 굳이 살려두지 않았겠지만 여긴 이역만리다.

    그리고 조선의 관할에 포함될 곳이다.

    피를 보는 건 그다지 좋은 수는 아닌 듯 싶었다.

    “뭐, 굳이 죽일 필요는 없겠지. 섬을 샅샅이 뒤져서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압수하고, 적괴를 추종한 적장들은 감금시키도록 하라.”

    “예!”

    “그리고 내 미리 작성해온 글은 알아서 배포시키도록 하고.”

    “예, 장군.”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역만리 미야코 섬 곳곳에 임금의 교서가 반포됐다.

    「조선국 임금이 궁고도의 야인(野人)들에게 이른다. 너희가 지금 크게 화란(禍亂)을 일으켜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말을 내 들은지 오래이다. ···생략. 그러므로 천지의 질서란 것은 상기한 것과 같을 텐데 너희는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질서를 세우려 하였으니 내 크게 노한 마음과, 중산왕과의 의리로서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사해를 넘어온 것이다. ···생략. 아아! 천위(天威)와 천위(天爲)는 무엇이더냐? 내가 행한 이것이 바로 제왕의 위엄(天威)이며, 하늘의 일(天爲)인 것이다. 너희가 비록 나에게 반(反)하고,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혀 나의 분노를 샀으나 나는 본시 덕이 있는 사람이다. 은혜를 베풀고자 하니 순종하는 이들은 대왕의 은혜를 입게 할 것이요, 너희를 가여이 여기는 나의 지극한 뜻을 배반하는 자들은 모조리 참살할 것이다. 너희가 지금 나의 이런 지극한 뜻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무리를 이루어 변절하려 한다면, 나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 마땅히 오만대군을 데려와 너희의 섬을 짓밞을 것이다. 너희의 섬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게 할 것이고, 생물이 살지 못 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치국(治國)을 위력과 무력으로 하지 않고 은덕으로 하는 것은 진실로 종사의 신령에 힘을 입고, 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상기한대로 나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만대에 이르는 부귀와 영화를 내릴 것이다. 아! 내가 생각하건대 경사(京師)와 지방이라 하여, 서로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니 지금 너희가 그러하다. 너희가 비록 이역만리에 떨어져있지만, 어찌 왕의 은혜가 다르겠더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일은 자식이 멀리 있다 해도 다르지 않으므로, 내가 너희를 가여이 여기는 마음 또한 이와 같다. 너희는 이미 수차례 도리를 저버렸으니, 이제 또 다시 도리를 저버리지 않게 하라. 이런 나의 지극한 뜻을 섬의 야인들이 모두 알게 할 것이며, 이를 어긴 자는 국법으로 엄히 다스리리라. 명(明) 정덕(正德) 1년. 6월 14일 왕이 교(敎)하다.」

    ***

    암벽은 길게 뻗어 있었다.

    쭈욱- 시원스럽게 뻗은 절벽의 정면에는 푸른 바다가 있었고, 바다 위로는 작은 암초들이 듬성듬성 나있었다.

    물은 굉장히 맑았다.

    슬쩍 발을 담가보았다.

    물에 담긴 발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그 곁을 지나가는 물고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하늘에 구름은 없다.

    대신, 철썩! 파도가 암초에 부서지며 일어난 포말이 흡사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 같았다.

    속세라기 보다는 신선들이 살고 있는 선계란 말이 훨씬 더 어울릴 만한 곳이었다.

    “장군.”

    선계일까 속세일까.

    아니면 그 경계일까.

    어떻게 보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생각을 곱씹던 융의 곁으로 이계동이 다가왔다.

    계동의 기척에 융은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전하라 부르라 하지 않았더냐.”

    “아, 예··· 전하, 어찌 나와 계시옵니까?”

    “너무 아름다워서, 이제 돌아가면 영영 오기 힘들 테니까. 돌아가기 전까지 눈에 담아 놔야지 않겠는가.”

    “화원(화가)이 궁고도의 풍광을 담고 있사오니 귀국하셔도 그림으로써 이곳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림은 결국 허구가 아닌가. 저 암초에 낀 이끼, 지금 내 발 밑을 지나는 물고기, 또, 저-기 보이는 어선, 저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 이 모든 걸 고작 한폭의 그림에 담는다는 것은 천하 명화(名畫)가 온들 힘들 텐데 설령 담는다 해도 지금의 감성을 느끼게 할 순 없다.”

    고상한 말씀에 계동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 계동에 피식거린 융이 말했다.

    “야인들은?”

    “교서를 접하고 크게 동요하긴 했사오나, 지금은 잠잠해졌사옵니다.”

    “오랑캐라 그런가, 어찌 임금이 바뀌었는데도 동요가 없단 말인가.”

    “안곤과 사타라는 오랑캐 덕이 컸사옵니다.”

    “뭐, 어쨌든 다행이다만 언제 들고 일어날지 모르니 무기는 제대로 확인하여 모두들 압수토록 하고, 또 식량을 베풀어서 잘 어루만지도록 하라.”

    “물론이옵니다.”

    “그보다 병판.”

    “하문하시옵소서.”

    “여기에 고을을 설치한다면 고을 이름은 뭘로 하는 것이 좋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계동이 말했다.

    “궁고도라는 이름이 있으니 그대로 불러도 되겠습니다만, 달리 이름을 짓는다면 귀면(鬼面)이 어떻겠사옵니까?”

    “귀면?”

    “군사들이 인면조라 오인했던 자들이 도깨비 가면을 쓴 자들이 아니었겠사옵니까?”

    “그랬지.”

    “하온데 고을의 이름에 감히 불길한 인면조의 이름을 넣을 순 없으니 그들이 쓰고 있었던 귀면으로 함이 어떻겠사옵니까.”

    “흐음, 귀면이라. 썩 괜찮도다.”

    귀면이란 이름을 곱씹던 그때였다.

    저 멀리 배 한 척이 슬금슬금 곶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크기로 보아 어선은 확실히 아니었다.

    “저건 뭔가?”

    계동은 미간을 좁히며 정체불명의 선박을 바라봤다.

    “어선은 아니고 군선 같사온데······.”

    “군선? 순시를 나갔던가?”

    “아, 아니옵니다. 나간 군선은 없사옵고, 나갔던 군선들도 모두 돌아왔사옵니다.”

    “하면 저건 뭐란 말이냐.”

    재차 물었지만, 눈으로 보고 있는 건 융이나 계동이나 매한가지였다.

    결국 융은 군사들을 불러 배가 향해오고 있는 해안가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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