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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31화 (23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31화>

    ***

    안곤이 탄 군선이 점점 해안가에 가까워졌다.

    그 사이.

    해안가 너머에는 무장한 일단의 무리가 도열했다.

    그 수는 어림잡아 기백.

    안곤의 선봉대를 저지하기 위해 마중을 나온 듯 했지만 애석하게도 적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으차! 으차!”

    “빨리 안 갖고 와? 이 새끼들 빠져가지고!”

    모든 군선의 갑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구르르르-.

    굉음마저 들릴 지경이었는데 육중한 화포에 달린 바퀴가 갑판을 지나가면서 내는 소음이었다.

    잠시 후.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하고 있던 군선의 측면 포혈에 하나같이 화포가 고정됐다.

    가장 먼저 배치를 끝낸 건 대장선이었다.

    대장선의 누각 깃대에 화포비(火砲備)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올라가자, 그걸 시작으로 다른 군선들에도 화포비라는 깃발이 도미노처럼 올라가기 시작했다.

    화포 배치가 끝났다는 걸 알리는 신호기였다.

    이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융에게 이계동이 다가왔다.

    “끝났는가?”

    “예, 장군.”

    “장전은 비격진천뢰로 하지.”

    “굳이 비격진천뢰까지 사용 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이계동의 물음에 융은 상륙 준비를 시작하는 안곤의 선봉대를 바라봤다.

    “저들도 우리 화력을 봐야 왕에게 가서 우리의 위력을 주달 할 게 아닌가?”

    온갖 미사여구로 꾸민다 한들 국제 관계는 순수하지 못 하다.

    그 사실을 융은 이번에 왕을 만나면서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재작년.

    진성이 왕의 국서를 가져온 적이 있었다.

    당시 왕은 국서에 자신을 소제(小弟)라 칭하고, 조선을 형님의 나라라 불렀다.

    흡족한 국서였지만, 직접 본 왕은 노회하고 교활한 자였다.

    어떻게든 저희들 손실을 줄이려 봉해위를 선봉에 내세우지 않았던가?

    압도적인 화력을 보여줌으로써 대국의 국력을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알겠사옵니다.”

    이계동이 화포장들에게 눈짓을 하자, 화포수들이 낑낑거리며 비격진천뢰가 담긴 함을 들고 왔다.

    그리고 장전이 끝났을 즈음.

    “음?”

    융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저 멀리.

    그러니까, 안곤의 선봉대를 저지하기 위해 나와있는 궁고도의 오랑캐들 사이로 검은 그림자들이 아른거렸다.

    검은 그림자들은 말로는 표현이 안 될 만큼 괴이한 행색이었다.

    뭐랄까, 불가에서 말하는 가릉빈가(迦陵頻伽) 같기도 했고, 산해경에 나오는 만세(萬歲)와 같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괴이한 그림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뭇했다.

    등의 좌우로는 무슨 날개 같은 게 달려 있었는데, 전체적인 형상이 새와 비슷한데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불가의 가릉빈가, 산해경의 만세와 같은 인면조의 몰골과 흡사했다.

    이 괴이한 인면조(?)를 확인한 건, 융만이 아니었다.

    “이, 인면조?”

    “인면조다!”

    갑판에 있는 군사들도 확인 한 건지, 곧 갑판이 술렁거렸다.

    인면조는 한갓 무지렁이도 알 만한 요괴의 일종이다.

    두억시니나 그슨대 같은 요괴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요괴임은 확실하다.

    지역마다 구전 되어오는 인면조의 공포는 다르지만, 흔히 사람의 혼을 빼가고 선인이 살고 있는 고을에 가뭄을 퍼뜨린다는 속설이 있었다.

    물론.

    “인면조는 무슨.”

    융은 그런 속설 따윈 믿지 않았다.

    말이 안 된다. 그런 요괴는 신화 속이나, 혹세무민하길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인구(人口)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럴싸하게 꾸미긴 했지만 필시 사람이다.

    그저 온몸을 검게 칠하고 좌우에 날개 같은 형상이 있을 뿐인데 온몸은 진흙으로 도배를 하고, 좌우의 날개처럼 보이는 것은 검게 칠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이어 붙였다면 설명이 된다.

    “병판.”

    “하명하시옵소서.”

    “방포하라.”

    인면조건 지랄이건.

    비격진천뢰에는 장사 없을 터였다.

    지휘관들이 동요하는 군사들을 잠재우고 방포령을 내렸다.

    쾅! 콰쾅!

    굉음을 동반한 포성이 평화롭던 미야코 앞바다에 울려퍼졌다.

    ***

    적선이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해질 만큼 가까워지자, 해안가에 도열한 군사들 사이에서 침묵이 감돌았다.

    “중산왕이 이놈이 결국 외세를 끌어 들였구나.”

    도유미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삼산(과거 오키나와의 삼국시대)의 일은 삼산(三山)에서 해결해야 하거늘, 놈이 기어코 외세를 끌어 들였다.

    저 멀리 기어오고 있는 수군선들은 눈에 익다.

    7년 전, 미야코 앞바다를 지나가며 야에야마를 토평했던 중산왕의 수군들이다.

    반대로.

    그들의 후위에서 일자진을 형성한 정체불명의 선박.

    천자가 보낸 군대라면 천자를 상징하는 황색기가 깃대에서 펄럭였을 터였다.

    황색기는 보이지 않으니 조선의 군선이 분명했다.

    ‘꼭 개미떼 같구나.’

    가슴이 시큰거렸다.

    저런 군세는 작은 섬의 투유먀에 불과한 도유미야로는 접한 적이 없는 대군이었다.

    특히 조선의 선박들은 하나 같이 위용이 대단했다.

    중산왕의 수군선들에 비해 어림잡아도 두세곱절은 됨직한 크기들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 배들에는 기천이 넘는 조선군이 승선해 있을 터였다.

    꿀꺽.

    얼마가 될지 모르는 미지수의 적을 상대하는 것만큼 두려운 건 없다.

    심지어 그게 낯익은 상대라면 몰라도, 전혀 모르는 상대라면 더더욱 두려운 감정이 일기 마련이다.

    도유미야 역시 같았다. 절로 입안에 침이 말랐다.

    “투유먀.”

    곧 있을 전투를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던 그때.

    오야케 사타가 그를 불렀다.

    “빤투(パ.ントゥ, 도깨비 가면)들 모두 대기 중입니다.”

    “알았다.”

    사타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도유미야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적의 군세에 탄성을 터뜨렸다.

    “대군이군요.”

    “대군이다.”

    “승산이 있겠습니까?”

    “물론이다.”

    허언이 아니었다. 오판도 아니었다. 하물며 자만은 더더욱 아니었다.

    도유미야는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적들은 대군이다.

    분명 지금껏 보지 못 한 대군이고, 조선군은 한 번도 상대 해 본 적이 없는 적이다. 그래서 미지의 적인 조선군에는 강한 두려움마저 인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인간이 으레 갖는 두려움.

    전투에 앞서서 생기는 두려움.

    그뿐이다.

    도유미야는 확신했다. 이길 수 있었다.

    여기서 적의 예봉만 꺾고 후퇴해, 섬의 안쪽까지만 끌어들이면 된다.

    안쪽까지만 끌어들이면 유리한 건, 자신들이다.

    저들은 미야코의 지형을 전혀 모른다.

    어디가 화공을 가하기 유리한 곳인지, 어디가 치고 빠지고 적당한 곳인지.

    “상륙합니다.”

    사타의 말처럼 중산왕의 졸개들이 상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궁수들 준비시키고, 빤투들은······.”

    도유미야가 상황에 맞게끔 명령을 내리려던 그때였다.

    쾅! 콰콰쾅!

    굉음이 연달아 울려퍼졌다.

    “화포까지?”

    조선의 수군들이 쏘아올린 게 분명했다.

    문제는.

    “조선군은 오합지졸들이란 말이냐?”

    “그러게 말입니다. 저게 닿는다고 생각하고 쏜 걸까요?”

    조선측 군선들과 도유미야의 군사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대략 700~900보였다. 어쩌면 1000(1km)보이상일지도 몰랐다.

    공성전이라면야 유효사거리 안에만 든다면, 건물이든 뭐든 피해를 줄 수 있겠지만 여긴 야전이다. 큰 피해를 줄 수 없을 텐데 화포라니······.

    조소가 터져나왔다.

    어쩌면 조선군은 생각 이상으로 오합지졸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화포를 왜 쏘아올린단 말인가?

    게다가.

    콰쾅!

    “허.”

    날아든 포환이 땅에 쳐박힌 모습을 바라본 도유미야는 실소를 금치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환의 크키가 일반 포환들에 비해 현저히 작았다. 저런 작은 포환들로는 공성전에도 큰 피해를 주진 못 할 텐데, 하물며 이런 야전에서는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겠나?

    중산왕의 수군들이 상륙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기세를 꺾는 거라면 얼추 이해는 된다만 어쨌든 별 효용은 없······.

    콰콰콰콰쾅!

    연쇄적인 폭발음에 소스라치게 놀란 도유미야가 미친 듯 고개를 돌려댔다.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 한 채 땅에 쳐박혔다고 생각했던 포환들.

    콰콰쾅!

    “으악!”

    그 포환들이 2차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서 사, 산개하라!”

    일반 포환이 아님을 뒤늦게서야 깨달은 도유미야가 산개를 명령했지만, 이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뒤였다.

    ***

    “적들이 혼비백산 하는 꼴이 승기를 잡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옵니다. 승전을 감축드리옵니다.”

    비격진천뢰가 연달아 폭발하며 이계동의 말처럼 적들은 혼비백산 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당하는 무기에 정신 없이 뛰어다니거나, 일부는 도망하는 자들도 있을 정도였다.

    거기다 오랑캐들의 입장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안곤의 선봉대가 오랑캐들이 혼비백산한 틈을 타 상륙에 성공했다. 아직 선봉대의 전체가 상륙을 하진 않았지만, 일부라도 적들에겐 설상가상인 셈이다.

    선봉대가 몰아붙이고, 이어서 본대가 상륙해서 밀어 붙인다면 적들을 모조리 궤멸 시킬 수 있을 테니 승전도 과언은 아니었다.

    “허.”

    하지만 융이 보인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어찌 그러시옵니까?”

    “내 기가 차서 그렇다.”

    “예?”

    “병판은 어이가 없지 않느냐?”

    “어, 어인 말씀이시온지······.”

    이계동이 연유를 묻자 융은 고개만 절레절레 저어댔다.

    이건 융이 생각하던 ‘전쟁’이 아니었다. ‘전투’ 역시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던 전쟁과 전투는 이랬다.

    안곤의 선봉대가 상륙을 시도한다. 당연히 오랑캐들이 저지하려 들 테니, 적들을 주춤하게 만들기 위해 본대에서 화포로 지원을 한다.

    적들이 주춤하는 사이, 선봉대가 상륙을 완료하고 적과 교전을 펼친다. 선봉대에서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적들을 상대하는 사이, 본대 역시 상륙을 시도하고 곧 선봉대와 합류해 적들을 몰아붙인다.

    수적열세인 적들이 머리가 없지 않고서야, 이 허허벌판에서 결전을 펼칠 리 만무하므로 조금의 전투 끝에 퇴각한다. 남해정토군은 퇴각하는 적들을 추격하는데, 지형과 지물에 익숙한 적들이니 어떻게든 추격을 따돌릴 테지만, 남해정토군은 어떻게든 쫓아가 적들에 피해를 입힌다.

    결국 적들은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최후의 보루까지 퇴각에 퇴각을 거듭할 테고, 여기서 남해정토군 역시 지칠대로 지쳐 양쪽 진영은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날이 밝고 적들을 추격하기에 앞서 안곤을 사절로 해서 적에게 투항을 권고한다. 뒤집을 수 없는 판세임을 인정한 적괴가 마지못한 척 투항을 받아들인다.

    이에 매우 흡족해 한 융 자신은 새로운 통치자의 덕을 미리 준비해온 문장으로 보여주고, 마찬가지로 미리 가져온 소량의 식량을 풀어 인자함을 행동으로 알게한다.

    그래서 마침내 적괴에게서 하례를 받는다.

    이게 융이 일다경 전까지 생각하던 최소한의 전쟁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안곤의 선봉대가 적과 교전을 펼치긴 커녕, 화포 몇 방에 적들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고 있다.

    이게 무슨 전쟁이고 전투란 말인가? 일방적인 학살이지.

    “방포 중지하라.”

    혼비백산한 상태에서 안곤의 선봉대를 조우한 적들은 이제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포격은 의미가 없어보였다.

    방포를 중단시킨 융은 이어서 상륙을 명령했다.

    포격으로 주춤하다 못 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는 적들이었지만, 아직 다수의 오랑캐들이 살아서 선봉대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선봉대의 피해야 어찌 되든 상관 없다만, 안곤의 선봉대가 공을 독식하게 둘 순 없었다.

    최소한 조선의 최정예라 해도 과언이 아닐 봉해위가 창칼 한 번은 들게 해줘야 할 게 아닌가?

    이역만리를 달려왔는데 적과 칼 한 번 섞지 않고 돌아간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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