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29화>
***
통사의 말을 전해 들은 쇼신의 얼굴이 일순 종잇장처럼 와락 일그러졌다.
조선 왕자나 왕이나··· 하나 같이 예법이란 걸 잘 모르는 사람 같다.
기분이 상한 건 사실이지만,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
쇼신은 조선 왕이 볼 세라 얼른 신색을 가다듬었다.
“전하. 송구하오나 조선 왕이 의외로 강경하옵니다. 오판인 듯 하니 이쯤에서 물러나시는 것이······.”
우미였다.
쇼신은 조선왕의 싸늘한 시선은 굳이 피하지 않은 채 말했다.
“아쉽군.”
“무리한 요구임은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아쉽고 말고 할 게 없사옵니다. 조선과 우호가 깨질가 우려되니 속히······.”
쓰윽-.
한차례 거수로 우미의 입을 틀어막은 쇼신이 통사에게 말했다.
“전하라.”
“말씀하시옵소서.”
“오해가 있는 듯 합니다. 아국이 귀국에게 선봉을 맡긴 것은 순전히 우리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함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호족들이 상쟁(相爭)한 나라입니다. 대국에 빗대기는 민망한 일이지만 저 옛날 중국의 전국(戰國)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결국 전장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장수는 단숨에 도태시켰습니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은 선봉을 권하면서 용맹을 떨치길 바랐고, 이를 서로의 믿음에 대한 증표로 삼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조선에 선봉을 권한 것도 이런 습성이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이지, 결단코 우리의 피해만 우려해서는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우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전하께서 조선에 선봉을 맡기고자 하는 뜻은 굽힌 듯 하니 다행한 일이었다.
조선 왕도 버럭 호통치던 앞전과 다르게 조곤조곤한 어조였으니 일이 잘 해결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우미의 착각이었다.
“왕께서 뭐라시더냐?”
쇼신의 물음에 통사가 연신 머뭇거렸다.
“그게······.”
“뭐라셨냔 말이다.”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냐고··· 하셨사옵니다.”
“변명?”
쇼신이 얼이 나간 그 사이.
조선 왕의 입이 오물거렸다.
“뭐라 하신 것이냐?”
“지금 우리가 이역만리를 달려 온 건, 이역만리를 달려와야 국가에 득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득실도 없이 오로지 우방국이 위험에 처해, 그걸 구원하고 적자(敵者)들을 격파하기 위해 온 것인데, 장사치처럼 득실만 따지면서 뭐가 더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골몰하는 모습이 참으로 통탄스럽다··· 라고 하셨나이다.”
통역이 끝나자마자 조선왕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먼저 득실을 따진 것은 귀국이니 본인들도 득실을 따져야겠다시면서··· 우, 우리가 선봉에 안 서면 돌아가시겠다고 하옵니다······.”
“득실을 따진 게 아니라 습성이었음을 확실히 말씀 드린 것이냐?”
“예. 외람되오나 단단히 화가 나신 듯 하나이다.”
굳이 통사의 언급이 없더라도 왕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듯 연신 씩씩거리고 있었으니까.
“크흠. 대국의 아량을 베풀어 달라 전하게.”
동등한 제후의 입장에서 용서해달란 말을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에둘러 표현하자 다행히 조선왕의 기색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 했다.
“미야코 정벌에 동원되는 군사가 300인 걸로 아는데, 본인께서도 본인 군사들이 상하는 실(失)을 할 순 없으므로 200명을 추가로 더 받아 득(得)을 취해야겠다 하시옵니다······.”
“아니, 200명이 추가로 미야코 정벌에 동원되면 왜구는 어쩐단 말이냐?”
조선이 미야코를 정벌하는 사이 류큐는 왜구에 총공세를 편다.
이게 바로 전술의 골자였다.
류큐에서 가용 가능한 병력이 3천이 조금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류큐의 병력만으로는 미야코와 왜구를 동시다발적으로 타격하기가 불가능하니까.
그런데 왜구라 해도 만만히 볼 자들이 아니다.
지금 가용 가능한 병력이 3천이라도, 몽땅 이끌고 가서 왜구를 섬멸하는 건 당연히 어렵다.
어수선한 틈을 타서 궐기할 호족들과, 아직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조선군을 대비해서라도 병력을 남겨둬야했고, 결국 왜구 섬멸에 나서는 병사는 최대가 1800이었다.
한 명의 군사라도 아쉬운 판국에 200은 절대 적은 수가 아니다.
섬멸 과정에서 10의 피해를 입을 일이, 20의 피해로 늘어날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 그건··· 드, 득실을 잘 따지는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라고 하시옵니다.”
“다시 한 번 대국의 넓은 아량을 베풀어달라 말씀 아뢰보거라.”
“하면 일전에 연회자리에서 말씀 드린 청을 가납하실 생각이 있냐고 여쭈시옵니다.”
당시 연회 자리에서 조선왕이 한 말이 번뜩 기억 났다.
조선왕은 연회 자리에서 류큐의 소를 원했다.
대금을 치를 테니 40마리의 소를 달란 말을 했었는데, 당시 쇼신은 정중히 거절을 했다.
그의 입장에선 거절 할 수 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조선은 대국이고 류큐는 소국이다.
대국인 조선은 류큐와의 외교에서 내세울 게 많겠지만, 소국인 류큐는 얼마 없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선대왕들 시절부터 조선이 탐내던 수우(물소)였다.
어쩌면 먼 훗날 요긴하게 쓰여질 수도 있는 소를 굳이 내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이전처럼 적당히 둘러대서 거절 할 수도 없었다.
“후. 암수 스무쌍을 호의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드리겠다고 말씀드리라.”
“···”
“뭐라셨는데 말이 없는 것이냐?”
“아량을 베풀었으니 서, 서른쌍은 주실 줄 알았다고 하시옵니다······.”
“하아.”
가지, 가지하는구만.
이라는 말이 목구멍 너머까지 올라왔지만, 직업윤리 투철한 통사가 또 있는 그대로 전할지 몰랐다.
말을 삼킨 쇼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량에 매우 감사하니 응당 암수 한 마리씩, 서른쌍을 드릴 것이라 전해라.”
라는 말을 통사가 전하자마자 조선왕이 손을 뻗어왔다.
이게 무슨 예법인지는 일전에 류큐를 찾은 조선왕자를 통해 익혔다.
악수라는 예법이었다.
쇼신은 표정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채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악력이 이리 약해서 되겠냐고 하시옵니다.”
여러모로 직업윤리가 투철한 통사였다.
***
그날 밤.
“전하. 괜찮겠사옵니까?”
“장군.”
“예?”
“장군이라 부르라 하지 않았더냐.”
“하오나 아까는······.”
“아까는 왕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으니 나 또한 임금이었던 것이지. 다시 장군이라 부르도록 하라.”
“···예. 하온데 장군. 정말 괜찮을지요?”
“안 괜찮을 건 무엇이냐?”
“하오나 이 일로 왕이 원한을 가졌을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무슨 원한 말인가.”
“원병을 보낸 일을 상국에 알릴 수도 있고··· 또, 전하께서 직접 친정오신 사실을 우리 조정에서는 비밀에 부쳤는데 친정 오신 사실까지도 통고할 수도 있사옵니다.”
“그 사실은 비밀에 부치기로 서로 맹약했다. 어긴다면, 뭐······.”
잠시 말끝을 흐린 융은 여닫이 창을 열었다.
그다지 멀지도 않은 곳에 유구 왕이 기거하는 궁궐이 보였다.
“병판.”
“예, 장군.”
“직접 와보니 어떻더냐?”
“어인 말씀이신지······.”
“이 유구국이란 나라는 참으로 소국이 아니더냐? 고작 200의 군사에 벌벌 떠는 것만 봐도 그렇고, 여러모로 소국이지.”
“에? 아, 예. 그렇사옵니다.”
“내 직접 와보니 이 나라는 더더욱 소국이다. 참으로 소국이야. 그래서 손 짓 한 번이면 망국이 될 만큼 참으로 작은 나라기도 하지.”
“하, 하오나 장군! 그, 그리 했다가는 상국에서······.”
“국가의 일이란 결국 여러 이해 관계가 맞물리기 마련이다. 상국이 제후 하나를 잃으려 하겠느냐, 둘을 잃으려 하겠느냐?”
“무, 물론 그렇긴 하옵니다만 황상께서 진노하실······.”
“걱정마라. 왕이 맹약만 잘 지킨다면 황상께서 진노하실 일이 어찌 생기랴?”
“···”
“자, 실없는 소린 이쯤하고 출정 채비나 하지. 이틀 뒤 출정할 것이다.”
“예.”
***
“으음.”
고민이군.
“흐음.”
정말 고민이야.
그런 의미에서.
“덕산아!”
“네?”
“너라면 어떡할래?”
“예? 뭐가 말입니까요?”
“폐지할래 말래?”
밑도끝도 없는 질문에 덕산이는 몸서리까지 쳐댔다.
“쇠, 쇤네가 어찌 그런 나랏일에 왈가왈부 할 수 있겠습니까요······.”
“하, 고민이란 말이지.”
고민을 너무 했더니 당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당 떨어진 김에 상에 놓인 절편을 집어 들어서 설탕에 한껏 묻힌 채 입에 집어넣었다.
요즘처럼 설탕을 집어 먹다간 당뇨 걸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지만, 원래 머리 쓸 일이 많을수록 단 게 당기는 건 만고진리의 법칙이다.
이건 매우 적법한(?) 당 섭취란 말이지.
좌우지간 뭐가 고민이냐면, 요즘 성균관을 폐하라는 의견과 폐하지 말라는 찬반이 5:5다.
학궁이 역적의 소굴이 되었으므로 폐해야 한다.
그건 비약이고 자정 할 수 있도록 도와 나라의 간성으로 잘 키워야 한다.
이게 5:5로 나뉘었다.
문제는 황이가 성균관 존폐 결정권을 나한테 위임했다는 거다.
자장면이냐 짬봉이냐를 두고 한시간 넘게 고민하다가 영업 시간이 끝나서 결국 쫄쫄 굶은 적이 있을 만큼 지독한 결정장애가 있는 나한테!
하여간 어린 놈의 자식이, 세자라고 숙부한테 어려운 숙제나 내주고 말이야.
“하, 진짜 어떡하지.”
“덕산이한테는 물어보시면서 왜 이 수제자한테는 안 물어보십니까, 스승님?”
라고 스승님 고민 중에 싸가지 없게 끼어드는 이 녀석은 당연히 경덕이다.
“넌 없애라고 할 거잖아.”
“당연하지요. 성균관은 실로 백해무익한 기관이 된 지 오래입니다. 송아지 먹일 타락(우유)을 왜 뺏어 먹냐는 궤변을 늘어 놓던 자들 아닙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이건 경덕이가 처음 날 스승으로 모셨을 때의 일화다.
내가 잠깐 몸살이 나자 형님이 숙수들을 보내서 타락죽을 먹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경덕이가 송아지 먹을 음식을 왜 스승님이 뺏어먹냐고 한 적이 있다.
“그, 그건 이 제자가 잊고 싶은 기억입니다. 하여간 백해무익한 성균관은 폐지하는 것이 장차 나라에도 이로울 것입니다.”
“자식아. 넌 왜 이렇게 극단적이냐? 너가 무슨 말 목 자른 김유신이라도 되냐? 아, 몰라.”
고개를 휘휘 털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복잡할 땐 산책만한 게 없다.
옷 갈아입고 덕산이는 내버려둔 채 경덕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어라?”
목적지 없이 산책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성균관에 오고 말았다.
성균관 너머에는 당연히 내가 지을 하보두 대학의 터도 보였다.
터 닦기가 끝나고 주춧돌을 세울 삼인지 현장 곳곳에는 자재들이 널부러져있었다.
그걸 보니 뭔가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경덕아.”
“예, 스승님.”
“너는 석평이랑 같이 공부하면 어떤 생각드냐?”
“생각이요? 생각이랄 게 있겠습니까. 벗이지만 내가 이 녀석보다는 더 큰 학문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지요.”
“그렇지?”
“예. 한데 그건 어찌 물으십니까?”
“넌 다 좋은데 왜 자꾸 봉황의 깊은 뜻을 알려고 하냐? 알려고 하지마라.”
“···?”
생각하면 그래.
어떤 분야든 라이벌이 있어야 발전을 하잖아?
라이벌이 없으면 지금 상태에 안주하게 될 테니까.
게다가, 사람은 본성 자체가 비교 하는 걸 참 좋아한다.
어떤 제품이 좋네··· 어떤 연예인이 더 예쁘고 멋지네··· 어떤 학교가 더 훌륭하네 등등.
비교란 게 어떻게 보면 사람을 비참하게도 만들지만, 또 어떻게 보면 자존감을 높여주기도 한단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씹선비 소굴이 사라지면 내가 만들고 있는 이 학교가 상대적으로 빛을 못 발하게 된다.
자, 생각해보자고.
보존 시킨 성균관이 몇 년 뒤에도 꾸준히 씹선비질(?)을 하고 있다.
그에 반해 설립자인 나의 건학 이념과 목적에 따라 잘 공부한 학생들이 나라에,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 크게 이바지를 하고 있다면?
“오케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나는, 넘쳐흐르는 욕조물을 보고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처럼 오케이를 외친 채 궁궐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