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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28화 (22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28화>

    ***

    의금부.

    “아직이란 말이냐?”

    “김식이가 백면서생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심지가 강건한 듯 합니다.”

    “옥사(獄事)가 속히 종결 되어야 할 판에··· 허어, 참.”

    “너무 걱정마십시오, 아버님. 굳이 김식이 자백을 하지 않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하께서도 꼭 자백을 받아내라시지 않았더냐? 되도록 말끔히 처리돼야 할 것이다.”

    “예. 염려 놓으십쇼. 이미 송호영이나 다른 자들의 자백은 받았으니까요.”

    초조해보이던 사홍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래? 언제 말이냐?”

    “어젯밤에 자백을 받았습니다. 김식이가 제법 오래 버티고 있긴 합니다만 과연 언제까지 버티겠습니까? 그들의 신념도 고작 사흘치 밖에 안 됐으니 길어야 닷새입니다. 닷새면 다른 자들처럼 자백을 할 테지요.”

    “저하는? 저하께는 아뢨느냐?”

    “아뇨. 이제 막 아뢰려 입궐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으음.”

    “그보다 아버님.”

    “그래.”

    “빈청은 어떻습니까?”

    “빈청?”

    “예. 슬슬 형벌의 수위를 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참해야지요.”

    “음. 전하께서 아니 계신데 함부로 사람을 참하냐 마냐로 논쟁이 있긴 했다만 자백까지 받았으니 다른 분들의 생각도 같을 게다.”

    “그럼 다행입······.”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생각에 흡족해지던 그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금부도사 박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박호는 사홍에게 가볍게 목례한 채 숭재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시오?”

    “그게······.”

    박호가 사홍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의정의 반열에 오르신 분이오. 망설일 게 무에 있겠소. 괜찮으니 말해보시오.”

    “그게, 김식이······.”

    “김식? 자백을 받은 거요?”

    “아니옵니다.”

    “그럼 김식이가 왜?”

    “김식이 목을 매달았습니다.”

    쾅!

    “뭐라, 목을?”

    “예. 소인도 어찌 된 영문인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포승줄을 풀고 기둥에 목을 매단 듯 합니다.”

    “칼(형틀)을 씌우지 않았었소?”

    “···면목 없습니다.”

    “옥사쟁이들은 대체 뭘 했길래 죄인이 자결하는 것도 보지 못 했단 말인가!”

    “송구합니다. 한데 아셔야 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또 뭐가 있단 말이오!”

    “자결한 김식이 글을 남겼사온데 이게 망측하여······.”

    “글?”

    “예. 튀어나온 못에 자해를 하고 피를 내서는 벽면에 글을 쓴 듯 한데.”

    “뭐라 썼는데?”

    “충신불사이군이라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기가 찬 숭재는 실소를 금치 못 했다.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든 기인으로 보이려 안달이 났구만. 이만 나가보시오.”

    “예.”

    박호가 조심스레 장내를 빠져나갔다.

    “왜 성을 내는 것이냐, 차라리 잘 된 일 아니더냐?”

    사홍은 성 내는 숭재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잘 된 일이었다.

    충신불사이군이라는 망측한 글귀를 남기긴 했다만 역적 혐의가 있는 자가 남긴 글을 누가 믿겠나?

    오히려 그런 글귀를 남긴 뒤 자결했으니 압박감을 견디지 못 하고 자결했단 말이 나올 게 뻔했다.

    “소자는 김식이가 최소 닷새는 버텨줄지 알았습니다.”

    “사흘을 버티건 닷새를 버티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옥사가 잘 해결이 되면 그걸로 족한 게지.”

    “저들 중에도 누군가는 신념을 지켜줘야 소자의 마음이 그나마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알 듯 말 듯한 표현이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속으로 삭였다.

    지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소자는 김식이가 목 매단 서간에 좀 가보겠습니다.”

    “그래, 나도 이만 입궐해야겠다.”

    사홍이 장내를 빠져나가고, 숭재는 금부도사 박호와 함께 김식이 목 매단 곳으로 향했다.

    과연 박호가 말한대로 벽면에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는 글자가 빨간 피로 적혀 있었다.

    거기서 살짝 시선을 돌리자, 혀가 쭉 빼밀어진 김식의 처참한 사체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 하오리까?”

    “수습해서 기다리시오. 단.”

    “말씀하십시오.”

    “다른 죄인들이 김식의 자결 사실을 알면 크게 동요 할 수 있으니 굳이 알리진 마시고.”

    “아, 예.”

    “도사.”

    “예, 대감.”

    “잠깐만 나가주시겠소?”

    “에? 아, 예.”

    도사가 옥을 빠져나가고, 숭재는 홀로남아 한참 동안 김식의 사체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는 무함이고 누명이라 소리치던 김식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가슴이 연신 쿵쾅거렸다.

    그와 함께 숭재의 입이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우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대의 신념은 나흘치였고, 난 이 일을 후회하지 않네.”

    한차례 독백과 함께 숭재는 옥을 빠져 나갔다.

    ***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내 귀를 의심했다.

    “누가 죽었다구요?”

    “김식이 목을 매달았습니다.”

    숭재 씨의 말에 도처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역적이 결국 죽음으로 죄를 자백했다는 데서 오는 어떤 희열일 수도 있고, 드디어 옥사가 이걸로 끝이 났다는 안심일 수도 있고··· 뭐, 그것도 아니면 나처럼 그냥 무거운 마음이 한숨으로 새어나온 걸 수도 있고.

    “타살 흔적은요?”

    마음이 무겁건 말건.

    그래서 그게 한숨으로 새어나오건 말건.

    역적은 역적이다.

    이런 옥사는 끝까지 잘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

    혹시 몰라서 타살 흔적이 있냐고 묻자, 숭재 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검관(시체를 처음 검시하는 관원)의 말로는 딱히 타살 흔적은 안 보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도 그렇습니다.”

    “근거는요?”

    “옥간들이나 서간에 하옥된 다른 죄수들의 말로 침입자는 없었다는 진술이 있었습니다. 비록 구타 흔적이 있긴 합니다만 이건 고신에 의한 것인데다 더욱이 그 구타 흔적들도 정상적으로 푸르거나 붉은색이었습니다.”

    숭재 씨가 말한 붉은색은 이곳의 검안 방법중 하나였다.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보니까 시체가 나오면 검안이란 걸 하게 된다.

    21세기의 그것처럼 100% 확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또 감초즙으로 일일이 멍이 든 자리들을 확인해봤는데 변색은 없었습니다. 기둥 위에도 목을 매단 흔적이 분명하고, 혹시 역모의 배후가 독살한 수도 있어 은비녀를 집어 넣어봤는데 역시나 그대로였습니다.”

    어쨌건 타살이거나 독살은 아니란 것이었다.

    “무엇보다······.”

    “또 있습니까?”

    “김식이 죽기 전, 자해를 해서 피를 내고는 그 피를 먹 삼아서 벽면에 충신불사이군이란 글까지 남겼으니 어찌 타살이겠습니까?”

    “다른 말은 없었구요?”

    “그것 말고 없을 무(無)에 원한 원(冤)자를 써서 무원이란 글을 남기긴 했는데, 소인이 보기로는 억울함이 없게 한다는 최치운(崔致雲)의 신주무원록에서 비롯된 무원이기 보다는 본인이 지은 죄에 대해 딱히 원통함은 없다는 걸로 보여집니다.”

    도처에서 김식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는 순간 까지 어떻게든 기인으로 보이려 안간힘을 쓰는구만.”

    “허어. 저런 자가 어찌 학궁에··· 쯧쯧.”

    “저하. 역적이 스스로 자결하였으니 이는 역시 본인의 죄를 죽음으로 실토한다는 것이옵니다. 하오나 어찌 역적을 편히 죽게 할 수 있겠나이까? 시신은 오등분으로 참시하여 본으로 삼으소서.”

    허침 할아버지의 말씀에 황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식은 그리 처리토록 하고, 다른 자들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숙부님. 숙부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제가 위관이었다면 이러쿵 저러쿵 했겠지만 위관은 제예였으니 제예의 의견을 듣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네요. 제예. 제예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네, 편히 말하세요.”

    “영의정의 말씀처럼 역적을 편히 죽게 할 수는 없사옵니다. 김식은 참시토록 하고, 다른 자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참하거나 유형에 처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죄의 경중이요?”

    “예. 송호영과 민영덕은 김식의 역적모의에 적극 가담하긴 했습니다만 후에 반성하고 김식의 죄와 어찌 역적모의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진술한 바가 있사옵니다. 둘을 참하는 건, 형편에 맞지 않은 듯 하니 사사(賜死)로 대신하고, 다만 그 외 역적모의에 적극 가담한 김현송, 도경식, 최민진, 최덕경, 나호공, 나칠태, 하영균, 이 7인은 재산을 적몰하여 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남은 자들은요?”

    “당연히 원칙상 모두 참하는 것이 맞습니다만, 그리되면 대청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호사가들이 나올 수 있으니 절도에 유형으로 사(赦)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음. 제예의 의견이 온당한 듯 싶습니다. 그리하도록 하고, 죄인의 가족들은 어찌할까요? 역시 김식의 가족들처럼 노비로 삼는 것이 좋겠지요?”

    “아뢰옵기 송구하옵니다만 저하.”

    “네, 말씀하세요.”

    “지난 옥사때 전하께서는 죄인의 가족들에게 성은을 내려주신 바가 있습니다. 이번 옥사는 더더욱이 전하께서 아니 계신 자리를 틈타 일으킨 역모이니, 어찌 지난 옥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죄질로 치자면 더 극한 죄이옵니다. 허나 지난 옥사때 전하께서 성은을 내려주셨는데 이번 대청때의 옥사에는 가족들을 연좌하여 노비로 삼는다면 후세에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것 같습니다. 재산은 모조리 적몰하되, 사진으로 내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옥사에 가장 적극적인 건 숭재 씨였다.

    아마 그로서는 철렁했겠지.

    사실 허침과 채수가 겪었던 것처럼, 숭재 씨 역시 지난 역모 때 큰 고초를 겪었었다.

    난리가 일어나고 몸을 감췄다가, 역적들이 임사홍을 의금부에 가두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직접 박원종을 찾아갔다가 몰매를 맞고 의금부에 하옥 된 적이 있거든.

    나는 그래서 숭재 씨도 이번 옥사에 적극적인 줄 알았다.

    그래서 역적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모두 형률에 맞게끔 벌해야 한다고 주장할 줄 알았고.

    근데 의외인 걸?

    “숙부님?”

    내가 떨떠름한 것처럼, 황이 역시 떨떠름해 하는 표정이었다.

    황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무언으로 내 의사를 물었다.

    “제예의 말이 틀린 것 같진 않습니다. 사진이야 늘 사람이 부족하기도 하구요.”

    “음. 하면 이견이 없다면 제예의 말처럼 처결토록 하겠습니다.”

    이걸로 옥사는 얼추 종결이다.

    일단 지난 역모 때랑은 다르게 속전속결로, 유혈충돌 없이 끝나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형님은 지금쯤 미야코에 도착했으려나.’

    ***

    이계동은 당혹을 금치 못 했다.

    당혹감에 그는 연신 허둥거렸다.

    “전하. 부디 고정하시옵소서.”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단 말이냐?”

    “하오나 어찌 이러시옵니까······.”

    “비켜라. 어찌 임금의 앞을 가로 막는단 말이냐?”

    “전하께서는 스스로 남해정토 대장군이라 하셨사옵니다. 지금 소장은 임금의 앞을 가로 막은 것이 아니라, 부관의 심정으로 상관의 앞을 가로 막는 것이옵니다. 하오니 부디 고정을 하옵······.”

    “지금은 내 대장군이 아니라 임금이다. 임금으로서 담판을 벌이러 가는 것인데 어찌 막는가?”

    “···”

    조금이나마 임금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계동은 한숨을 내쉬며 막아 선 앞길을 비켜섰다.

    길이 열리자(?) 융은 씩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객사를 시위하던 금군들 역시 그를 따라 나섰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왕성에 있는 쇼신의 침소였다.

    쇼신은 조선 임금이 입궐했다는 소식에 예를 갖추기 위해 급히 의복을 찾은 건지, 옷매무새가 정갈하진 못 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쇼신에 다가간 융이 말했다.

    “그대 왕은 내가 전쟁에 미친 것 같소? 내가 전쟁에 미쳐서 내 군사들을 모조리 사지로 등떠밀 만큼 실성을 한 것 같냔 말이오!”

    라고 묻자 쇼신은 갑작스런 소란에 침소를 찾은 금군들을 물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통사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있겠냐고 하시옵니다. 다만······.”

    “뜸 들이지 말고 왕의 뜻을 전하라.”

    “···”

    “이놈!”

    “다만 공론이 그러하다고······.”

    “공론? 대관절 무슨 공론이 그러하단 말인가?”

    “···”

    “전하라.”

    “교하소서.”

    “어떤 대단한 공론이길래 귀국의 조정은 위험을 무릅쓰고 한달음에 달려온 구원병을 선봉에 내세우려 한단 말인가?”

    통사는 연신 망설였다.

    망설이는 통사에 융이 버럭 호통쳤다.

    “속히 전하지 못 한단 말이냐!”

    통사가 전하자 쇼신은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한달음에 달려와준 것은 지난 날 연회에서부터 누차 말씀 드렸다시피 감사한 일입니다만······.”

    “뜸 들이지 말라!”

    “소, 송구하옵니다. 왕이 전하길 조정에서는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고 싶어한다고······.”

    쾅!

    “귀국의 전쟁에 참가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 불필요한 희생은 우리 장병들이 당하는 희생이 불필요한 희생일텐데 감히, 뭐라?”

    “저,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눈을 부릅뜨고 쇼신을 노려보는 융에 황망해진 계동이 융을 타일렀다.

    하지만 융으로서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미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통사는 톡톡히 전하라. 우리가 귀국을 위해 원병을 보낸 것은 맞지만 그대들의 조정들에서 나온 말처럼 불필요한 희생을 감수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라고, 그대들이 선봉에 서지 않는다면 이만 돌아가겠노라고.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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