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26화 (226/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26화>

***

편전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역모.

이건 가장 민감한 단어였다.

그래서 조정대신들은 설명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역모의 역자도 꺼내지 않는다.

일종의 금기어인 셈이었다.

그런데 역모란다.

모두들 얼이 나간 채 금붕어처럼 눈만 뻐끔거렸다.

“그게 참말이란 말이오, 제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영의정 허침이었다.

그는 놀란 듯, 눈을 부릅 뜬 채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주위만 두리번거리는 세자 황이를 힐끗거린 채 임숭재에게 물었다.

숭재는 비통한 표정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말입니다.”

“아니··· 아니, 이 어찌··· 어찌 학궁이 역적의 소굴이······.”

태학생들의 시위가 역모로 변질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갖고 있었던 허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가 학궁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게 사실이었다.

허침이 우려했던 건, 태학생들의 시위로 어수선한 틈을 타 발호하는 역적들이었지, 태학생이 역적질을 할 거라 우려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런데 태학생들이 역적모의질을 했단다.

나라의 간성이 될 태학생들이!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허침은 한차례 휘청거렸다.

“제예.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자세히 설명 좀 해보시오.”

휘청거린 허침을 부축한 우의정 채수가 물었다.

누군들 역모에 민감하지 않겠냐만, 그 역시 허침처럼 역모에 민감한 사람중 하나였다.

과거, 평안도 관찰사 시절 박원종의 역모가 발생했고, 그걸 막기 위해 남하하던 진성이 채수에게 역적 무리를 저지하란 명을 부원수로서 내린 적이 있었다.

워낙 소수의 병력이었기 때문에 반나절만 막아도 성공적이었지만 채수의 근왕병들은 역적 무리를 장장 하루 넘게 저지시켰다. 거기에 거짓 투항을 하고 길안내를 자처하면서 반란군들을 엉뚱한 곳으로 안내해 진성에게 시간을 벌게 해줬었다.

그 덕택에 진성의 구원군은 후미 걱정 없이 무혈입성 할 수가 있었지만 반대로 채수는 역적들에게 붙잡혀 모진 고초를 당했었다.

때문에 그는 허침처럼 역모에 더욱 민감 할 수 밖에 없었고, 허침처럼 태학생들의 시위를 강경진압 해야 한다 주장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임숭재의 입에서 사건의 전말이 새어나왔다.

그러니까, 임숭재의 말을 빌리자면, 오늘 아침 입궐을 하는 중에 학궁에 적을 두고 있는 노비가 길목을 막아서고 태학생들이 역적모의를 했다고 고변을 했단다.

“하, 하지만 그 노비가 태학생들에게 원한이 있어 무고를 한 걸 수도 있지 않소.”

이런 무고는 잊을라치면 한 번 씩 올라온다.

주인을 무고한 노비.

주인을 고소한 노비.

사노들도 이럴진대 관노들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대사성 이점이 일말의 희망을 품고 물었지만······.

“소인도 어찌 그점을 감안하지 않았겠습니까? 처음에는 그 노비가 태학생들을 무고하는 줄 알고 꾸짖었지만, 이걸 소인에게 건네더군요.”

숭재가 소매에서 꺼낸건 허접하게 엮은 책자였다.

저게 뭔가··· 미간을 좁히며 살펴보던 대신들은 곧 경악을 금치 못 했다.

“기, 김씨부참(金氏符讖)이 아니오? 그, 그게 어찌······.”

부참은 길흉화복이나 흥망성쇠를 예언한 말이나 글씨를 이른다.

그리고 이 김씨부참은 제목에서 유추 할 수 있듯 김씨가 예언한 말이나 글이란 뜻이었는데, 문제는 세조초에 조심스럽게 유통이 되기 시작해서 세조말에는 금서로 지정이 됐다는 점이었다.

부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였다.

세조가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으므로, 곧 조선은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다.

그 벌로 인해 수만의 백성이 아사할 것이다.

이를 구원할 사람은 인간으로 현신해 김씨의 아들로 태어난 미륵 밖에 없다.

인간으로 현신한 김씨 미륵은 날개가 달려있고, 민중과 함께 봉기해 삼한을 구원할 것이다··· 등등.

한마디로, 김씨라는 인간의 몸으로 현신한 미륵이 세조를 몰아내고 왕이 될 거라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혁세적인 예언서였다.

때문에 금서로 지정이 되자마자 팔도에 수거령이 떨어졌고 모두 불태워졌다.

물론 그 이후에도 한 번씩 김씨부참이 발견 됐단 소식이 지방 수령들로부터 전해지긴 했지만 책을 소지한 자는 무조건 엄벌에 처해졌었다.

아직도 세간의 어느 깊숙한 서고에는 남아 있을진 몰라도 김씨부참이 편전에 모습을 드러낸 건, 적어도 세조 이후에는 없었다.

“맞습니다, 김씨부참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어찌 제예가 갖고 있냔 거요!”

“이거요? 장의 김식의 방에서 발견된 책입니다.”

곳곳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학궁 노비 자근노미(者斤老味)가 태학생들의 역적 모의를 듣고 깜짝 놀라 장의의 방을 뒤지다 나온 책이기도 하지요.”

“하, 하지만 그걸로 역적모의를 했다고 단정 지을 순 없소이다.”

대사성 이점이었다.

숭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걸로도 부족하다면 대관절 역적모의는 어찌 규정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자근노미가 이것도 소인에게 건넸지요.”

이번에 꺼낸건 종이였다.

“뭐라고 써진 거요?”

“왕이 집정치 않고 친정하니 간신 임사홍과 권신 진성대군 이역 일파의 농권(弄權)이 더욱 극심해졌구나. 이 어찌 한심하지 않은 일인가? 박원종 등이 들고 일어섰던 것은 참으로 이런 때를 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니, 우리 역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가만 앉아 기다릴 수 없도다. 800년 문묘를 존숭한 의리로 개만도 못 한 간신과 권신들을 처단하고, 종사를 바로잡으리라.”

편전이 술렁거렸다.

임사홍과 진성대군이 거론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역적 박원종의 역적질을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종사를 바로잡는다는 것은, 역적들이 늘상 하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가장 최근의(?) 역적인 박원종도 종사의 대의를 바로 잡겠다며 들고 일어섰었다.

“그, 그건 어디서 발견 된 거요?”

“이것 역시 김식의 방에서 발견이 됐는데 공초를 해봐야 알겠지만 지난 번 벽서 사건 역시 이 김식이의 소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 어찌 말이오?”

“자근노미가 전하께서 친정 가신지 얼마 안 돼서 벽서 사건으로 조정이 뒤숭숭한 때에 태학생들이 김식의 방에 모여 ‘권신과 간신이 농권하니 이제는 뉘 소행인지도 모른다’ 라고 비아냥 거리는 걸 들었다 합니다.”

웅성웅성.

“아니, 어찌 그런 말을 신성한 학궁에서 할 수 있단 말이오!”

“대사성! 지금까진 대사성으로서 태학생들을 비호한 것이라 여기겠소만 사안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대사성이 태학생들을 비호하는 것은 온당치 못 한 일일 것이외다!”

“학궁이 역적들을 키웠구려. 허어.”

술렁거림은 점점 더 심해졌다.

숭재가 바라던 바기도 했다.

그는 길길이 성을 내는 대신들을 흘긴 채 황이에게 말했다.

“저하. 밖에서 시위하고 있는 태학생들의 혐의가 이러하니 학궁에 의리를 지킬 까닭이 있겠사옵니까. 바라건대 역모는 절대 가벼운 사안이 아니옵니다. 벽서 사건만 일어도 역모의 역(逆)자가 나오기 마련인데 하물며 김식은 김씨부참과 입에 담기도 망측한 벽서를 소지하고 있었사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사옵니까?”

“···”

“신이 추측컨대 김식은 김씨부참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려 한 것이고, 적당한 때에 벽서를 붙여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 참이었던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들고 일어나려 했던 것이니 어찌 이것이 심증에 국한되겠사옵니까? 태학생들을 모조리 잡아들이소서.”

황이는 굳은 표정으로 진성이를 바라보다가, 머잖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예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바마마께서 한차례 역모로 상심이 크셨는데 또 역모라니요. 배은망덕한 자들입니다. 내 직접 죄인들을 문초 할 것인데 위관으로는 역시 숙부님이 맡는 게 좋겠지요?”

이미 위관(재판장)으로서 역적들을 다스렸던 적이 있는 진성에게 위관직을 맡기려 하자, 숭재가 진성대군을 흘기며 말했다.

“진성대군에게 위관을 맡기심은 참으로 천만지당하신 판단이십니다. 진성대군은 세간에 공명정대하다는 평이 있는데다 앞선 역모 때도 위관으로 명쾌히 사건을 해결했으니 어찌 위관이 어울리지 않다 하겠습니까? 다만 김식이 쓴 벽서에 안타깝게도 신의 아비가 거론됐으니 황망함이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바라건대 신에게 위관을 맡겨주소서. 신이 한 놈도 빠짐없이 관련자들을 밝혀내겠사옵니다.”

황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기실 황이만의 반응은 아니었다. 모든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숭재는 임금의 총애와 진성대군의 비호로 출사를 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부마로서 출사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걸 숭재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되도록 편전에서 발언은 삼갔다.

이리 단호하면서도 강경한 태도를 견지한 채 말한 건, 출사 이래 처음이라 할 수 있었으니 대신들의 떨떠름은 일면에선 당연했다.

“숙부님, 괜찮으십니까?”

“역적들을 위관으로서 공초하고 심문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더군요. 게다가 이번 사건을 파헤친 것도 제예의 덕이라 할 수 있는데, 스스로 나서겠다니 제가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문무백관을 대표해 고마운 일이죠.”

“좋습니다. 하면 제예를 위관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숭재는 고개를 조아렸다.

“신명을 다해 역적들을 밝혀내겠사옵니다.”

***

“좌상. 매번 이런 사건 때마다 거론 되니 상심이 크시겠소만 부디 마음을 굳건히 하시오.”

“허어. 학궁이 일을 그르치려 하니 좌상만 억울하게 되었소. 영상대감의 말처럼 심지를 굳건히 하시고, 사건을 지켜봅시다.”

편전을 나와 전각 아래서 누굴 기다리는 듯 서성거리고 있던 사홍에게 대신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홍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의 위로를 받았고, 잠시 후.

숭재가 편전에서 나왔다.

한차례 심호흡과 함께 사홍은 후다닥 숭재에게로 다가갔다.

“그 자근노미란 놈은 믿을만한 것이냐?”

“걱정 마십시오. 과거 소자에게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머리 검은 짐승은 언젠가 탈을 내기 마련이다. 참말로 믿을만 한 것이지?”

“예.”

“허어··· 내 이리 간담이 서늘한 적이 없었다. 어찌나 다리가 후들거리던지······.”

“긴장할 것이 무에 있겠습니까? 벽서는 몰라도 김씨부참이 김식의 방에서 발견 된 건 사실인 걸요.”

“그렇긴 하다만······.”

“이미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다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간악하기가 짝이 없는 자들이니 역모가 아니라면 저들의 기세를 어찌 누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대감께는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지 하는 걱정이 되는구나.”

“대감은 여리신 분입니다. 과거에도 역적의 자손들을 사진으로 내쳐서 살리게끔 하실 만큼 잔정이 많으신 분인데 스스로 거짓 역모를 일으키실 리가 없습니다.”

사홍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그런 분이시긴 하다.

“피를 묻히는 건, 우리 부자만으로 족하옵니다. 전하의 성은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성은을 내려주셨습니까? 그런데 저것들이 이제는 전하의 하시는 일 마다 훼방을 놓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까. 만백성이 앎을 깨우치는 것은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게 장차 나라에 불리한 일인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한데 저들이 반대하는 까닭이 뭐겠습니까? 대감의 말처럼 저희들만 대대로 권리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후··· 그래. 네 말이 맞다. 손에 피를 묻히는 건, 우리 부자만으로 족하지. 내 나이가 들더니 마음도 예전 같지가 않는 것 같구나.”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간적들을 쳐내는 일입니다. 걱정마십시오, 아버님.”

“그래, 그래. 그래도 조심하거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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