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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25화 (22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25화>

    ***

    “결단을 내리십시오, 아버님.”

    혹자가 보면 자식이 아비를 겁박하는, 그래서 천하에 따로 없을 불효자식이라 손가락질 할지 모르는 모습이었지만, 불효자식을 자처할 만큼이나 숭재의 마음은 간절했다.

    “흐음.”

    간절한 그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의 아비 사홍은 침음하며 대답을 아꼈다.

    그런 사홍의 모습이 답답한지 숭재는 애꿎은 가슴을 텅텅 두들기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아버님 답지 않으십니다. 어찌 보신만 하려 하십니까?”

    “이놈. 보신이라니··· 말을 가려하거라!”

    점잖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허연 수염을 쓸어내리던 사홍이 발끈했다.

    그가 한낱 보신주의 소인배에 불과했더라면 지난 세월, 20년 넘도록 군말 없이 유배지에서 지냈을 턱이 없었다.

    어떻게든 복귀하려 안간힘을 썼을 것이고, 어떻게든 웃전에 줄을 대려 안달복달했을 터였다.

    그는 언젠가는 본인의 충심을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 믿고 보수주인과 아전들의 모욕을 감내하며 그 억겁 같은 세월을 견뎠었다.

    보신이란 말은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죄인들이나 난신적자로 몰려 삭판당한 죄인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이지,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버님의 모습을 스스로 되돌아보십시오. 어찌 보신이 아닙니까?”

    “이놈! 네놈이 예흥청 장관이 되면서 우인(광대)들과 어울리더니 이제 건방지기가 감히 하늘을 찌르는구나!”

    “군사부일체라 했는데 지금 태사로 불리는 김굉필은 과거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신념과 소신을 꺾지 않고, 그 스승인 김종직과 절연하며 그를 비판 했습니다. 부자의 정은 이미 천륜이라 사제의 정과는 비교 할 수 없겠지만, 김굉필의 일화가 어찌 호사가들의 구전에만 떠도는 일화가 되어야겠습니까? 뭇 선비의 사표가 되는 일입니다.”

    임금과 아비처럼 받드는 스승에게도 비판을 서슴지 않는 것이 선비의 도리인데 하물며 부자 관계는 오죽하겠냐는 물음이었다.

    늘 기방만 전전하면서 부마로서 신세한탄만 하던 숭재가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됐다는 점에서 아비로서 일견 뿌듯하기도 하면서, 불안한 마음도 싹 틀 수 밖에 없었다.

    선비가 고꾸라지는 건, 이를 시샘하는 선비들에 의해서다.

    하지만 재상이 고꾸라지는 건, 반대파의 모함과 무함 때문이다.

    몇 차례나 무함을 받아 고초를 겪었던 사홍은 적어도 숭재 만큼은 평탄한 관직 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네 형을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냐?”

    임희재.

    그 녀석은 후세에 이름 남기기에 혈안이 된, 한심한 작자들과 어울리면서 감히 임금을 비판하는 시구를 썼다가 유배됐었다.

    나름 사가독서까지 받으며 창창한 앞길이 열렸었는데도, 속된 말로 설치다가 가장 먼저 벌을 받았다.

    아주 다행히 전하께서 복권시켜주셨지만, 사홍은 지금도 그 날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 앉는다.

    내놓은 자식 취급했다지만, 어느 아비가 자식이 끌려가는 걸 바라겠나?

    “형님과 저는 다릅니다. 아버님. 지금 태학생들을 보십시오. 어린 두 선비를 탄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감의 개라느니··· 언젠가는 토사구팽을 면치 못 할 거라느니··· 온갖 모욕과 감히 입에 담지도 못 할 저주의 말을 퍼붓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어린 두 선비가 기개를 저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광화문에서 읍소 하고 있는데 어찌 소자가 마음에 감흥이 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어찌 네 뜻을 모르겠더냐! 내 어찌 태학생들을 쓸어버리지 않고 싶겠어! 하지만 태학생들을 건드는 것은 장차 화근이 되는 일이다, 네 정녕 모른단 말이냐?”

    “아버님은 보신하고 있지 않다 하셨지만, 지금 하시는 말씀이 딱 보신하고 있는 소인의 모습입니다. 아버님도 혈기왕성한 시절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그 어린 두 선비보다 고독하게 혈기를 내뿜은 적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광화문에 있는 두 선비의 모습에서, 폐비는 절대 안 된다 울부짖던 소싯적 아버님의 모습이 정녕 아니 떠오르신단 말입니까?”

    “···”

    “소자 오늘도 광화문을 지나면서 두 선비를 봤습니다. 볼 때 마다 두 선비의 안위가 걱정되고, 울화가 터집니다. 무도한 태학생들이 지금도 온갖 모욕과 저주의 말을 퍼부으면서 조리돌림 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칼질인들 못 하겠냔 생각에 두 선비의 안위가 걱정되고, 태학생들이 본인을 세치 혀로 능멸하고 있는데도 가만 계시는 대군께 울화가 터집니다. 대감인들 어찌 화가 아니 나시겠습니까? 다만 본인의 지위에서 태학생들을 탄압하는 것은 주상께 해가 가는 일임을 알기 때문에 잠자코 계신 게 아니겠습니까?”

    “흐음.”

    “태학생 놈들을 보십시오. 그놈들이 무슨 유학하는 선비입니까? 그놈들의 하는 꼬락서니를 가만 지켜보고 있으면 우인들만 못 합니다. 전하께서 계실 때, 대군이 학교를 운운했다면 저들이 어찌 감히 광화문에서 대군을 참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자마자 참소하고 있으니, 결국 전하는 두려워서 제 할 말들을 못 했지만, 만만한 대감께는 말로서 수치를 주고 있는 게 아닙니까? 저런 위군자들이 과연 장차 나라의 대들보로 성장을 하겠습니까? 나라의 국운을 맡길 일이 있다면 소자는 저런 소인배들 보다는 아직도 광화문에 있는 젊은 두 선비에게 맡기겠습니다.”

    “네 말대로 전하께서 아니 계시다. 그런데 함부로 태학생들을 탄압한다면 전하의 왕업에 누가 되는 일임을 모른단 말이냐? 저들이 뭘 믿고 저리 설치겠더냐? 이를 알기 때문이다. 한데 어찌 위군자들이 아는 사실을 너는 모른단 말이냐?”

    “압니다. 알기 때문에 더더욱 쓸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뭐라?”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저들은 다시 쥐죽은 듯 지낼 테지요. 언제 그랬냐는 듯, 언제 대군을 능멸했냐는 듯, 또 언제 시위를 했냐는 듯 잠잠히 세월이 지나가길 기다릴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전하께서 틈을 보이신다면 놈들은 또 다시 들고 일어나면서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때 전하께서 그들을 숙청한다면, 과연 무슨 말이 나오겠습니까?”

    “음.”

    “차라리 지금 우리 두 부자의 손으로 화근을 잘라내야 합니다. 후세에 욕을 얻어 먹든, 소인배들의 수군거림처럼 간신으로 묘사가 되든, 지금이 적기입니다. 그것이 장차 나라에도, 전하께도 이로운 일임을 아버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사홍은 손에 쥔 염주알을 굴려댔다.

    사색에 잠긴 그를 숭재도 방해하진 않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생각해둔 방책이라도 있는 것이냐?”

    “방책이요?”

    드디어 아비인 사홍이 동조한단 생각 때문인지.

    생각해둔 방책 때문인지.

    숭재는 낮게 웃었다.

    ***

    긁적긁적.

    “너네 어제도 이러고 있더니 아직도 이러고 있냐?”

    “스승님!”

    “얼씨구. 건들면 울겠다?”

    아닌 게 아니라, 경덕이의 눈시울이 새색시 뺨에 찍어바른 연지처럼 붉다.

    “잠 못 자서 그런건데요.”

    이 말을 석평이가 했다면 사내 놈이 눈물이나 질질 짠다는 게 창피해서 둘러대는 말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화자가 경덕이라면 다르다.

    이 녀석, 정말 잠 못 자서 눈이 충혈됐나 보다.

    뻘쭘하게 됐군.

    “크흠. 아무튼 이 자식들아. 돌아가.”

    “하지만 저 씹선비들이 아직도 스승님을 참소하고 있지 않습니까? 명색이 스승님의 수제자인 제가 어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나는 여전히 광화문에 결집해 있는 씹선비들을 바라봤다.

    저 씹선비들은 영락없이 씹선비인데, 체력 하나 만큼은 참 기똥차.

    지치지도 않나 봐?

    벌써 며칠 째야, 기억도 안 난다.

    ‘경덕이랑 석평이가 광화문에 진을 친 지가 오늘로 이틀이니까······.’

    어, 그래. 딱 닷새 됐겠네.

    닷새 동안 참소 한다는 게 참,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데··· 체력 만큼은 존경스럽다.

    “수제자라면서 스승 그림자는 잘도 밞네.”

    “아.”

    경덕이가 발등에 불똥 떨어진 듯 그림자 밞은 발을 뗐다.

    이렇게 약간 모자란 모습 보면 질풍노도의 중2병을 정통으로 맞고 있는 소년 같은데, 하는 짓을 보면 또 기특하단 말이지.

    다만.

    “스승님. 편전의 공론은 어떻습니까?”

    제 스승 그림자 밞을까 재차 조심하는 경덕이를 대신해 석평이가 물어왔다.

    “물어 뭐하냐? 벌해야 한다는 쪽하고 안 된다는 쪽으로 갈리지.”

    벌해야 한다는 쪽은 의외로 영의정 허침 할아버지 쪽이었다.

    온화하고 말을 함에 있어서도 늘 상대를 존중해, 조정내에 적이 없다고 정평이 나 있는 허침 할아버지인 걸 감안하면 의외인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영의정 할아버지가 걱정하는 건, 역모다.

    작은 불씨가 화마가 되는 법이다.

    지금은 작은 불씨에 불과한 씹선비들의 시위가 역모로 변질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사전에 진압하자는 강경론을 펼치고 계셨다.

    아마, 북정군 도원수 시절 역적 놈들 때문에 고초를 겪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 민감하신 듯 싶다.

    그리고 안 된다는 쪽.

    이건 당연히 성균관의 총장이라 할 수 있는 대사성 이점이 주장하고 있었다.

    사실 대학 총장이 정부의 강제 해산 방침을 수긍한다는 것 자체도 총장으로서 자질이 없는 일이라, 이점의 주장을 딱히 불쾌하게 여기지는 않고 있다.

    어떻게 보면 총장으로서 당연한 일 하는 거지.

    문제는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당장 김굉필과 김전이 이 안 된다는 쪽에 합류(?)를 했다.

    그래서 조정 분위기도 엄청 어수선하다.

    아, 나?

    나는 당연히 마음 같아선 불도저라도 갖고 와서 밀어버리고 싶지.

    근데 엄연히 대리청정을 보좌하는 섭정이라 그런 권한까진 없다.

    황이의 주관 하에 있는 회의에서, 그 회의를 잘 보좌하면서 대신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게 내 소임이라 할 수 있으니까.

    “좌우지간. 너네도 이만 돌아가라. 당장 결판 날 것 같진 않으니까.”

    라고 말한 나는 광화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늘도 저 씹선비들 때문에 논쟁의 장이 된 편전에 들어가야 한다.

    여러모로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씹선비들인 셈이지.

    그렇게 도착한 편전.

    이미 편전에는 미리 와있는 대신들끼리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밖에 있는 씹선비들을 얼른 해산시켜야 하네··· 그랬다간 자칫 한생들을 탄압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가 있으니 지켜봐야 하네······.

    벌써 며칠간 반복 된 설전이기도 하다.

    내가 도착하자 시끌벅쩍하던 편전이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 들었다.

    그리고 황이까지 도착하자 얼추 진정이 되었다.

    물론 잠깐의 평화였다.

    “저하. 태학생들의 시위는 수수방관 할 수 없는 문제이옵니다. 소두를 불러 조정에서는 성균관과 학생들을 탄압할 의사가 없음을 알려야 하옵니다.”

    “아니옵니다, 저하. 지금 태학생들의 시위는 날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사옵니다. 일찍부터 학생이라 하여 나라에서는 큰 특혜를 주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특혜를 당연시 여기는 풍조가 생겼사옵니다. 대사성의 말처럼 저들을 불러 위무한다면, 저들의 기고만장함은 하늘을 찌를 것이고, 본인들의 잘못을 영영 뉘우치지 못 할 것이옵니다. 속히 금군을 불러 해산시키소서.”

    다시 설전이 오가기 시작했다.

    말했다시피 어제도, 그제도, 글피 전에도 반복된 설전이기도 하다.

    이제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인데 도통 결론이 안 나오니 어쩔 수가 있나?

    그렇게 어제와 그제와 글피 전처럼 똑같은 설전이 반복될 조짐을 보이던 즈음.

    “저하. 신 좌의정 임사홍 아뢰옵나이다.”

    “말씀하세요.”

    임사홍 아저씨는 크게 심호흡을 하셨다. 그러고는 나와 다른 대신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런 자리에서 불측한 말을 아룀이 매우 송구스럽사오나, 매우 중한 일이므로 아뢰지 않을 수가 없어 말씀 아뢰옵나이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시나요?”

    그러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시나 몰라.

    황이와 나, 그리고 대신들의 의아함이 깊어지던 그때.

    대답은 사홍 아저씨가 아니라, 숭재 씨에게 들려왔다.

    “소두 김식과 송호영 등의 태학생들이 어젯밤 역적모의질을 했다는 고변이 있었사옵니다. 사안이 중하므로 지금 아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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