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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24화 (22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24화>

    ***

    “송애! 시국이 이런데도 망설일 참인가?”

    “망설이는 것이 아닐세. 다만······.”

    “사은지대(師恩至大)라 했네. 스승의 은혜가 지극히 큰데 그 은혜란 것도 결국 스승의 가르침에 있네. 나는 우리 스승님께 많은 가르침을 사사받았고, 덕분에 큰 세상을 나가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네. 그런데 지금 스승님이 모함을 받고 계신데도 아무런 행동도 않고 가만 기다리잔 말인가?”

    “하지만 성균관은 자네와 내가 학문을 닦은 곳일세. 하물며 이번에 소두(疏頭)로 나선 분은 자네와 내가 신래(새내기) 시절, 신방례(신입생 환영회)에서 고욕을 치르고 있을 때 우릴 구해준 김 선생이기도 하고··· 내 어찌 마음에 불편한 점이 하나 없이 나설 수 있겠는가?”

    “자네가 말한 그 김 선생, 김식(金湜) 그자가 우리 스승을 욕보이고 있는데도 그런 하찮은 인연 때문에 사은을 배반하겠단 말인가?”

    “아니, 그렇긴 한데··· 사람으로서 어찌 감정이 복잡하지 않겠나? 자네도 신방례를 기억하겠지만 얼마나 고욕스러웠어? 그때 김 선생이 아니었다면 큰 곤욕을 치를 뻔 했었네······.”

    “북송 때, 정이천(程伊川)의 두 제자가 눈발이 휘날려도 문밖에서 가만히 스승을 기다렸네. 정문입설(程門立雪)이란 고사가 참으로 여기서 비롯된 것일세. 그런데 그 두 제자가 어떤 마음으로 폭설이 내리는데도 미동도 없이 스승의 부름을 기다리기만 했겠나?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세. 한데 지금 고욕을 면케 해 준 자를 은인이랍시고 나서지 못 하겠단 건가? 지금 김 선생을 생각해보게. 자네와 내가 성균관을 나온 뒤로 동재의 장의(학생회장)가 되었다는데 그 이후로 어떻게 됐나? 사람이 아주 추해졌네.”

    “···”

    “어디 추한 것만 있나?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딱 간신의 혀로 군왕을 좌지우지 할 자일세. 이 자가 지금 스승님이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씹선비와 다름이 없는데, 이 씹선비를 어찌 참선비가 두둔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면 어쩌자는 건가? 우리가 무슨 명성이 있어서 그들을 호되게 질책 할 수를 있겠나, 아니면 우리가 무슨 지위가 있어서 무찌를 수가 있겠나?”

    석평의 걱정 어린 물음에 경덕은 쯧쯧 혀를 찼다.

    “자네는 말로는 난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씹선비가 되기 싫다고 하면서, 하는 짓은 어째 영락 없는 씹선비로군!”

    석평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실제로 그의 스승인 진성은 석평에게 때때로 씹선비란 말을 하곤 했는데, 석평은 씹선비란 말을 가장 듣기 싫어했다.

    어감이 문제가 아니라 씹선비에 내포 된 뜻 때문이었다.

    콱 막힌 자는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는 석평에겐 이만한 모욕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동문이라 할 수 있는 경덕에게까지 씹선비라 불리니 기분이 안 상한다면 성인군자리라.

    “씹선비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나.”

    “내 과격한 언사를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니면서 새삼스럽게 삐지긴··· 나보다 한 살이라도 더 잡순 자네가 참게.”

    “아니, 꼭 이럴 때만······.”

    “됐고, 따라오게. 내 이 씹선비들을 어찌 질책하는지 몸소 보여줌세.”

    “비책이라도 있는 건가?”

    “암! 있고, 말고”

    “뭔데, 그게?”

    “따라오면 알게 되네.”

    석평은 뭔가 비책이라도 있는 건지 기세등등하게 앞장 서 걷는 경덕을 미심쩍어하면서도 뒤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광화문.

    “이게 자네가 말한 비책은 설마 아니겠지······.”

    쏟아지는 시선들에 석평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뭐 대단한 거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나? 이게 비책이 아니면 뭔가? 모름지기 스승님께서는 씹선비들은 논리로 털어야 한다고 하셨네. 어디 우리가 스승님께 하루, 이틀 털렸나? 저것들도 같을 걸세. 저것들 체면 우리가 확 구겨놓자고.”

    “···어림잡아도 마흔은 넘어보이는데.”

    “마흔이면 어떻고 여든이면 어떤가? 저것들이 뭐, 칼이라도 빼들고 위협하겠나? 그리고, 칼을 빼들면 빼든대로 이롭지. 제놈들 말이 틀렸다는 거니까. 스승님도 그러시지 않았나 원래 밑천 드러난 사람일수록 게 할 말 없어지면 욕을 하기 시작한다고.”

    “후··· 자넬 믿은 내가 천치지, 천치.”

    “계속 서 있을 텐가? 저 씹선비들이 자네만 쳐다보고 있네 그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석평은 한숨을 내쉬며 경덕의 옆에 멍석을 깔았다.

    그러고는 앞서 자리잡은 경덕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

    “신(臣) 김식 이하 37명의 태학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나와 대청을 맡으신 세자저하와 동시에 이를 수렴(垂簾)하시는 대비전하를 번거롭게 하시는 까닭은 진실로 국가의 존망이 북촌의 진성대군 궁가에 달리게 되었기 때문이옵니다. 진성대군은 사흘 전, 학교를 열도록 하겠다는 말을 공언하였는데 이는 저하의 지지가 있기 때문입니까, 대비전하의 지지가 있기 때문입니까? 두 분의 지지가 없다면 어찌 이것이 가당한 일이겠으며, 온당한 일이 되겠사옵니까? 무릇 학교라 함은······.”

    “신 송호영 아뢰옵나이다. 신이 듣건대 진성대군은 사흘 전, 편전에서 대사성 이점에게 못 할 말을 쏟아냈다는데 이것이 가당한 일이겠사옵니까? 하물며 대신과 재상이 모인 편전에서 학예의 으뜸인 대사성에게 장헌대왕(명에서 세종대왕에게 내린 시호)의 말을 빌려 수치를 줄 수가 있겠사옵니까? 대사성이 편전에서 까마득히 연소한 진성대군에게 모욕을 당한 것은 그의 말에 반박을 했기 때문인데, 걸왕의 폭정이 과연 이러했겠사옵니까?”

    “신 민영덕 아뢰나이다. 지금 진성대군은 은근한 교만을 즐기고 있사옵니다. 그게 아니면 어찌 사사로이 학교를 지을 수가 있겠사오며, 지방의 학생들을 한량이라 모욕 줄 수가 있겠사옵니까. 이는 성상전하께서 잠시 친정을 나가신 틈을 노리고, 본인의 전횡을 위해 갈등을 조장하고, 갈등을 조장하여 이문을 취하기 위함인데, 거기서 나온 책략이 바로 학교인 것이옵니다. 보건대 진성대군은 지금 학교를 지어, 그자들을 중한 자리에 올리면서 당여(수하)로 삼아 붕당을 꾀하려 있사옵니다. 그자들이 중한 자리에 오르지 못 하더라도 본인을 비호해줄 식자가 생기는 셈이니 어찌 학교를 짓는 것이 대군으로서 하책인 일이겠사옵니까? 하물며 이러한 목적을 알고 있는 신들이 어찌 학업을 이어나갈 수가 있겠사옵니까. 청컨대 통촉하여주시옵소서.”

    김식 포함 38명의 발언이 순차롭게 이어지던 그때였다.

    “신 서생 서경덕이 세자저하와 대비전하께 아뢰옵나이다. 지금 저들이 말하는 바는 모두 거짓이옵니다. 방금 태학생 민영덕은 진성대군이 은근한 교만을 즐기고 있고, 학교를 지어 본인을 비호할 세력을 만들기 위함이라 하였는데, 대관절 어느 아둔하기 짝이 없는 자가 세력가의 자제도 아니고, 농군의 자제를 식자로 키워 세력으로 키우려 하겠사옵니까? 그리 만든다 한들 티끌 이득이 있겠사옵니까? 지금······.”

    경덕이 반박 아닌 반박을 이어나가자, 듣다 못 했는지 시위대의 누군가 소리쳤다.

    “지금 뭘 하는가!”

    “눈깔은 장식인가? 보면서 뭘 하냐고 묻네.”

    “아니, 저런 막돼먹은······.”

    시위대에 동요가 일건 말건.

    경덕은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나갔다.

    “결국 저들이 주장하는 바는 정상적인 식자라면 결단코 납득 할 수 없지만, 어찌 저리 과격하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저들의 주장을 반대로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문제이옵니다. 진성대군이 교만한 것이 아니라 태학생들이 교만한 것이고, 진성대군이 걸왕의 폭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학생이란 신분을 무기 삼아 폭정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고, 바로 저들이야 말로 본인들의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떼로 몰려나와 참소(讒訴)하고 있는 것이며, 저들이 편전에서 있었던 진성대군의 발언을 트집 잡으면서 당여 운운하는 것은 진성대군이 학교를 세운다면 본인들의 출사에 지장이 생길까 우려하는 것인 동시에, 성균관으로 똘똘 뭉쳐 본인들이 붕당을 하려 함인 것이고, 본인들이 중한 자리에 올라야 하기 때문인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본인들만 알고 잘난 체를 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며, 이리 난동을 피워 대군의 학교를 막지 못 한다 한들 본인들의 구심점을 만들고, 이를 후세에 전할 수가 있으니 장헌대왕이 정창손에게 한 말씀처럼, 저런 저열한 선비들에게 이 참소가 어찌 하책인 일이겠사옵니까? 지금 성균관은 배움의 장이 아니라 오로지 시위하고 후세에 이름 남기기에 혈안이 된 소인들만 모인 소굴이 되었으니 이를 구제할 방안은 한시라도 빨리 성균관을 폐하는 일이 될 것이옵니다. 성균관을 폐하소서!”

    “아니, 저, 저!”

    “저런 미친 놈이 있단 말인가!”

    “가만, 저 자 화담(서경덕의 호) 아닌가?”

    “허! 방교(자퇴) 하고 나서 한량처럼 허송세월하다 대감의 개가 되었다더니 사실인 모양이로구만!”

    곧 경덕을 알아본 태학생들 사이에서, 경덕을 질타하는 소리가 쏟아지자 선두에서 이들을 진두지휘하던 소두 김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찍이 경덕과 안면이 있는 김식이었기에 그는, 씩씩거리며 자신들을 삿대질하는 경덕에 침음했다.

    “자네는 경덕이 아닌가.”

    함께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진정 시킨 김식이 묻자 곧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는 자네는 씹선비의 씹선비인 김식이가 아닌가?”

    “뭐라?”

    “남의 부모가 물려준 함자를 종놈 이름 부르듯이 부르는 씹선비한테 씹선비 김식이라고 했는데 뭐, 잘 못 된 거라도 있나?”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났다.

    김식의 입장에서 경덕은 까마득한 후인이었다.

    피식 거린 김식이었지만 다만 의아한 건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위대에 물었다.

    “한데 경덕이 저자가 말한 씹선비란 말이 무슨 뜻인가?”

    여기저기서 잘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감을 보면 칭찬은 아닌 게 확실했다.

    아무래도 씹질의 그 씹과 선비를 합쳐서 씹질만 해대는 선비, 그러니까 볼품없는 선비를 부르는 멸칭과 같은 것 같았다.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반골 기질이 강해서 미움을 사는 일이 많더니 이제는 시국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반골 기질을 보이는군.”

    “그러는 자네는 예전에는 제법 참선비 노릇 좀 하더니 이제는 후세에 이름 남기기에 미쳐서 바야흐로 후세에 미움 사는 일을 하고 있군?”

    “허.”

    헛바람 들이키던 김식의 시선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송애? 송애 자네가 어찌 저 반골과 함께 있단 말인가?”

    “김 선생이 하시는······.”

    “송애. 선생은 누가 선생이야?”

    “아니, 그래도······.”

    “여기까지 따라나왔으면서 왜 그러나!”

    “크흠. 그, 여러분이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아 나오게 됐습니다.”

    “끼리끼리라더니 자네도 화담에게 물 들었나?”

    “물 들다니요.”

    “그렇잖은가. 지금 여러 선생들이 우국의 심정으로 앞다퉈 달려나와 시국을 논하고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화담을 따라 나온 것이니, 내 일찍이 자네를 알고 지내면서 거는 기대가 무척 컸는데 애석한 일일세. 보통 잘 난 선비는 이를 시샘하는 자들에 의해 고꾸라진다더니, 자네는 사람 잘 못 만나 고꾸라진 셈이 아닌가?

    “말씀은 가려하십시오.”

    “내 신방례에서 자네에게 베푼 호의와 자네가 동재에 기숙하면서 베푼 편의를 생각하면 날 이리 대할 순 없음일세. 내 어찌 말을 가려 할 수 있겠는가?”

    “장의께서 베푼 호의와 편의는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지만, 한 사람의 선비로서 그 호의와 편의에 얽매여 입을 꾹 다물고 있다면 그것이 남몰래 역적모의를 하는 대역죄인과 다를 바 무에 있겠습니까?”

    “인면수심이라더니 딱이로다.”

    이쯤되자 석평도 슬슬 화가 치밀었다.

    인면수심이라니··· 이건 적어도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에겐 대단한 모욕이었다.

    “선인이라 해서 대우 받는 것은 그 선인의 인품이 고상하다는 것에 있지, 나이에 있지 않습니다. 장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건, 본인의 인품이 천박한다는 걸 나타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박? 천박은 누가 천박한가? 시국을 걱정하는 우리가 천박한가, 권세에 빌붙어 아첨하는 자네들이 천박한가?”

    석평의 인내심도 이제는 한계였다.

    “당연히 형 씨가 천박하지.”

    “혀, 형 씨?”

    “형 씨의 말대로 우리가 권세에 빌붙어 아첨한다면, 형 씨들은 후세의 인구(人口)에 아첨하고 있지 않는가? 과연 대감의 말씀이 옳았네. 나는 대감을 뫼시면서도 대감이 형 씨들을 씹선비라 하는 것을 간혹 이해 못 할 때가 있었는데 대감은 선구자가 아닌가?”

    “이보게!”

    “대감께서 말씀하시길 본래 천박한 사람일수록 본인의 밑천이 드러나면 화를 내면서 논지를 흐린다 했는데 형 씨는 천박한 정도가 가히 그 깊이를 잴 수가 없을 만큼이니 형 씨가 바로 천박함의 으뜸일세!”

    석평은 비록 경덕과 어울리는 일이 잦았지만, 성균관 태학생 시절 예의를 잘 아는 선비라 칭송이 자자했었다.

    김식이 거는 기대가 컸다는 말도, 빈 말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성균관의 선인들은 석평에게 거는 기대가 자못 컸었다.

    그런데 180도 바뀐 석평.

    김식으로서는 속된 말로 어이가 털려 말이 제대로 안 나올 지경이었지만······.

    “형 씨들은 진실로 저열하네. 대감께서 학교를 만드시려 함은 만백성이 학문을 닦아 군자가 되게 하려 함이신데, 그래서 만백성을 군자로 만드는 것은 선비의 꿈이요, 이상일진대 이를 반대하는 것은 결국 형 씨들이 훗날 관직에 나아갔을 때, 백성들이 앎을 깨우치고 있으면 치도가 용이하지 못 하기 때문이요, 그들이 앎을 깨우치고 있으면 침학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요, 그들이 앎을 깨우치고 있으면 무능한 형 씨들을 탄핵할까 두렵기 때문이 아닌가? 진실로 형 씨들은 위군일세. 이를 우리 대감께서는 장헌대왕의 말을 빌려 저열한 선비라 했네만 나는 대감의 말을 빌려야겠네.”

    “···?”

    “씹선비들만이 본인들이 씹선비인 걸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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