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21화 (22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21화>

    ***

    여긴 충훈부.

    왜 충훈부인지는 이따 설명하기로 하고··· 모두 알다시피 나는 한차례 출정을 해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출정 직전의 심정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떨림, 두려움, 긴장, 초조함, 불안감······.

    오만가지 감정이 한데 뒤섞여 심마가 돼서 날 괴롭혔다.

    이부자리에 누워도 잠은 안 오고, 어쩌다 잠이 들면 악몽을 꾸게 된다.

    전장터의 모습, 피비린내 나는 악취, 목이 떨어진 시체, 피아를 구분 할 수 없는 비명 소리.

    그러다 어디서 날아든지도 모를 화살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이등대군의 시절에 나는 그랬었다.

    나는 분명 그랬는데······.

    “내 일찍이 우리 병조판서가 무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만, 그 무재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됐으니 광영이다.”

    “망극한 말씀이시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말이다. 내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적진에 파진하면 봉선(의장용 부채)을 사용함이 좋겠나, 아니면 작선(의장용 부채)을 사용함이 좋겠나? 일단 내 잘 모르겠어서 둘 다 챙기긴 했는데.”

    “···송구한 말씀이나 작선이 더 위엄을 갖출 수 있겠사옵니다.”

    “음, 그래? 하면 봉선은 선봉을 맡는 장수에게 주어 사용케 해야겠다. 선봉의 장수 조차 봉선을 사용하면 궁고도의 오랑캐들이 까무러쳐서, 마치 옛적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침공할 때, 우산국민들이 사자조각상을 보고 놀라 투항한 것처럼 앞다투어 투항을 할 것이다. 아니 그런가?”

    “과연, 천만지당하신 말씀이시나이다······.”

    ···보다시피 형님은 아니신 것 같다.

    출정을 앞두고 어린 아이처럼 들뜬 형님을 이해 못 하기는 이계동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는 애써 비위를 맞추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들뜰대로 들뜨신 형님은 이번에는 다른 먹잇감(?)을 발견한 듯 했다.

    “오, 우리 소 장군은 갑주가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도열한 군사들 사이에 우두커니 자리잡고 있던 소기파를 돌아보며 패션 평가(?)를 하신 것이다.

    “···과찬이시옵니다, 전하.”

    “난 전하가 아니다.”

    정색까지 하시며 본인은 전하가 아니라는 형님의 말씀에 당황한 우리 소 대대장에 내가 더 당황스럽다.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전하가 아니라니까?”

    “송구하옵니다, 전······.”

    부릅!

    “장······.”

    “장?”

    “군······.”

    아이고, 두야······.

    미쳐버리겠다.

    이걸 지켜보고 있는 나도 미쳐버리겠는데 당사자인 소 대대장은 오죽할까.

    저게 무슨 말인가 하면 형님이 기행 벌인 거 다들 기억하지?

    소위 말하는 버킷리스트.

    그 버킷리스트를 쉬는 기간 동안 좀 실행에 옮겨보겠답시고 벌였던 기행들 말이다.

    저건 그 기행중 하나다.

    형님은 이번 원정군의 이름을 남해정토군(南海征討軍)이라 이름을 붙이셨다.

    여기까지라면 기행이라고 할 것도 없고, 지극히 상식적인 부대명 부여지만······.

    “잘 했다. 이제 부터는 장군이라 부르도록 하라.”

    문제는, 남해정토군 명명과 함께 본인을 남해정토 대장군으로 부르게 하셨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본인이 본인을 사령관으로 제수하셨단 거지.

    일각에서는 이런 기행 때문에 형님이 또 정신병(?) 도진 거 아니냐는 수군거림까지 있을 정도였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이런 기행만 제외한다면 지극히 정상적으로 출정 준비를 했거든.

    정신이 어떻게 된 거라면 절대 있을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말이다.

    다만 전쟁을 앞두고 들뜬 형님이 정상이냐 아니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적은 있었다.

    “예, 장군.”

    “그래, 소 장군의 갑주는 아주 잘 어울리는데 나는 어떤가?”

    “아주 자, 잘 어울리시옵니다.”

    형님의 갑옷은 다른 장수들이 입은 갑옷들과는 사뭇 달랐다.

    수은갑에 색은 황금색이었다.

    고작 황금색으로 끝이냐?

    그럼 안 되지. 명색이 임금인데.

    어깨에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의 어깨장이 장식돼 있었고, 가슴 부분은 황룡기의 일종인 황룡 두 마리가 들어가 있었다.

    한가운데 여의주가 있고, 그 여의주의 좌우로 황룡과 오색의 구름들이 있는 모양새로 말이다.

    아, 투구?

    갑옷이 저 정도인데 투구는 말해 뭐해?

    투구는 황금과 검정이 뒤섞여 있었는데 앞뒷면에는 역시 황룡이 들어가 있었다.

    투구 술은 형님의 원정에 대한 열정을 나타내는 표현인진 몰라도 빨간색이었다.

    이런 휘황찬란한 갑주였으니 멋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만.

    “하하하. 그런가? 쑥스럽군.”

    “···”

    멋이고 나발이고 이대로 계속 세워두면 어떤 기행을 또 벌일지 모르시겠다.

    “큼큼.”

    나는 단상에 올라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사실, 이게 우리가 지금 충훈부에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출정을 앞두고 종묘와 사직에는 출정을 고했는데 그걸로 부족하셨던지 형님은 마제(군신에게 지내던 제사)를 지내자는 제안을 하셨다.

    마제까지 지내버리면 출정식이 너무 화려해진다는 의견이 제기됐고, 그 의견에 따라 나는 충훈부에서 간소하게나마 결의를 다지자는 말로 형님을 다독였다.

    흔쾌히 응하신 형님은 이 출정식의 집전을 황이가 아닌 나에게 맡기셨다.

    여담으로, 이게 또 형님이 제정신(?) 이라는 방증이기도 했다.

    형님은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나에게 이번 충훈부 출정식 집전을 지시하셨다.

    대청을 맡긴 황이는 정통성은 둘째치고, 이미 종묘와 사직에서 역시 출정을 집전해 그 권위를 감히 의심할 사람들이 없겠지만, 어쨌건 섭정인 나의 권위 역시 살아야 본인이 없는 사이 황이를 잘 보좌 할 수 있을 거라는 논리셨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명색이 섭정승인데도 내 명을 거역할 불순분자들이 있을지 모르니 이번 출정식 집전으로 나한테 힘을 실어줄 생각이셨던 거다.

    전쟁억제력이란 말에 1:1로 대응 될 수도 있는 반란억제력을 위해서랄까?

    뭐, 아무튼.

    의식이 시작됐다.

    의식은 간결했다. 이미 종묘와 사직에서 대대적인 출정식은 치른 뒤였으니까.

    충훈부 출정식은 그저 옛 고사들을 좀 들먹이면서 북이랑 꽹과리쳐서 전의를 복돋는 일 정도였다.

    그리고 이 일련의 의식이 모두 끝이 나고.

    “여러분은 들으십시오. 지금 충훈부에서 출정을 채비하고, 결의를 다지게 한 것은 주상 전하의 뜻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형님에게로 쏠렸지만, 지금 이 자리에 계신 형님은 대장군 이융이다······.

    “여러분은 이제 이역만리의 궁고도를 평정하러 나아갑니다. 강맹한 여러분임은 내 누구보다 잘 알지만, 두려움이 없을 순 없고 사상자가 없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겁쟁이처럼 조정에 남아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여러분의 어머니와 할머니와 안사람들이 부뚜막에 쪼그려 앉아 치성을 드리는 것처럼, 명산대천의 산신들께 치성드리는 일 밖엔 없습니다.”

    “···”

    “이에 산신들께 고하노니 전장터로 나아가는 우리 군사들이 두려움을 갖지 않게 해주시고 대신 용기를 얻게 해주십시오. 적들이 휘두르는 칼날은 교묘히 비껴가게 해주시고, 우리 군사가 휘두른 칼날은 적의 급소를 정확히 찌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또, 우리 지휘관들에게는 큰 지략으로 적을 무찌를 수 있게 해주시고, 적들에게는 그 지략을 두렵게 하는 두려움만 주십시오.”

    미리 약속 된 내 연설은 여기서 끝이었다.

    나는 형님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형님은 칼을 높이 빼들고는,

    “출정하라!”

    보무도 당당하게 충훈부를 나서셨다.

    그로부터 보름 후.

    남해정토군이 부산진에 당도했다는 파발이 전해졌다.

    ***

    시 한 편이 떠오른다.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아닌 게 아니라 방금 파발이 도착했다. 사흘 전, 부산진에 도착했던 남해정토군이 군사를 정비한 뒤, 수신제(水神祭)와 마제를 지내고 배에 올라타 출항을 했단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진짜 없었다.

    내전이거나, 뭐··· 여진족과의 전쟁이면 보급을 위해서 진두지휘라도 할 텐데 보급은 이미 오키나와에서 전부 충당해주기로 약조가 돼있고 나는 형님과 약조한대로 섭정승으로서 임무만 잘 수행하면 됐다.

    “합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끄덕.

    “합하. 이건 저기- 경상도 진해에서 갓 건져오린 미역과 해삼이온데···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끄덕.

    “합하. 이건 제 종들이 우연히 캔 산삼이온데 뿌리냄새를 좀 맡아보십시오.”

    킁킁.

    확실히 냄새 좋네.

    “거기 놓고, 다음.”

    앉은 자리에서 뇌물 쳐받아 잡수는 게 어떻게 섭정승으로서 임무를 잘 수행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변호사 불러라.

    그리고, 지금 이건 엄밀히 기부 받는 거다.

    “경덕아, 얼마나 더 남았냐?”

    “마흔 두 분 더 기다리고 계십니다!”

    뇌물··· 아, 말실수!

    기부 받는 것도 정말 힘든 일이다. 어찌나 기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보다시피 줄까지 서있다들.

    “기부해주시는 분들 다 내일 오라 그러고 돌려보내라.”

    “예!”

    경덕이의 호쾌한 외침이 들려오자 나는 몇시간만에 기지개를 켰다.

    이거, 진짜 기부 받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잠시 후, 손님들을 돌려보낸 경덕이가 돌아왔다.

    “얼마나 찼냐?”

    “곳간 3채 모두 찼습니다.”

    “돈 벌기 참 쉽다, 그지?”

    나는 지금 섭정승으로서 전횡을 일삼고······.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진짜로 기부를 받고 있었다.

    “예, 효과가 제법인 걸요?”

    “다 내 덕이지.”

    “예, 스승님이 섭정승이 되신 덕이지요.”

    “부지는 알아봤냐?”

    “네. 알아는 봤는데······.”

    “문제라도 있어?”

    “문제라면 문제고 아니라면 아닌 문제인데요.”

    “뭔데?”

    “그 땅이 알아보니 김 봉사라는 자 땅이더군요.”

    “근데?”

    “그 땅 대감께서 구매할 의사가 있다 하시니, 돈 받고 파는 건 언감생심이고 본인도 기부하겠답니다.”

    “이제 개나 소나 기부하려 그러네.”

    “스승님이 섭정승이 되신 덕이죠.”

    “어째 비꼬는 것 같다?”

    “절대요.”

    “공짜로 받으면 진짜 뇌물되는 거야.”

    누차 말하지만 난 지금 기부를 받는 거지, 뇌물을 받는 게 아니다.

    “곳간 3채에 있는 건 모두 공짜로 받으셨습니다.”

    “그건 기부 받은 거지.”

    “예. 그렇죠.”

    “그 김 봉사인지 심 봉사인지한테 시가로 살 거니까, 공짜로 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전해라.”

    “그럼 안 팔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럴 땐 적당한 전횡이 필요하다.

    “저번에 벽서 사건 배후가 아직 안 밝혀졌다고 협박해, 그럼.”

    “스승님도 가만보면 참 잔인하십니다.”

    “원래 교육 사업하려면 사람이 좀 잔인하고 그래야 돼.”

    자, 교육 사업.

    이게 바로 내가 지금 기부를 받고 있는 이유다.

    아닌 게 아니라, 나 이젠 씹썬비들 설치는 꼴 못 참겠다.

    이것들 하루 걸러, 하루 시위를 해댄다.

    이 씹선비들만 아니면 내 섭정질(?)은 평탄한 편이었다.

    어제는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치수사업의 첫삽을 떴다.

    얼마나 역사적인 일인가?

    그제?

    그제는 더 대단해.

    작년 세수를 근거로 올해 농사가 예년과 같다면 올해는 세수가 더 늘 거라는 호조의 보고가 있었다.

    평탄하게,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아주 자연스럽게 섭정질을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성균관 태학생들.

    어째 형님이 출정 한 뒤부터 그 빈도가 점점 늘어나더니 이제는 하루 걸러 시위를 해대고 있었다.

    이유도 각양각색이야, 아주.

    언제였지? 엿새 전인가?

    아무튼, 이날 이것들이 누구 사업 말아먹게 하려고 덕복이를 탄핵했다.

    덕복이가 누군가?

    내 주머니를 빵빵하게 만들어준 일등공신, 비누공방의 사장님 아니신가?

    그런데 이 잡것들이 지금 비누 때문에 선비들이 사치에 눈 멀어가고 있다면서 덕복이를 엄벌에 처하라 지시를 한 거다.

    덕복이를 탄핵하고 나서는 이 간댕이 부어 쳐먹은 것들이 대리청정을 탄핵했다.

    알다시피 대리청정의 주체는 황이다.

    그런데 그 주체인 황이를 탄핵한 게 아니라 대리청정을 탄핵했다.

    이 개새끼들이 날 돌려 깐 거다.

    그래서 더는 못 참겠단 생각이 존나 절실하게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성균관이고 나발이고 폐교 시켜버릴까도 싶었는데 그러면 왠지 내가 지는 것 같잖아?

    뭔가, 군사 독재정권처럼 학생들 탄압하는 그림같기도 하고 말이지.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자연도태라는 아주 좋은 단어가 떠올랐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성균관에 대항할 학교를 만들어서 이 새끼들을 자연도태 시켜버리는 거다.

    내가 만든 학교가 성균관 보다 더 뛰어나면, 성균관은 당연히 자연도태 될 게 아닌가?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1~2년 전 쯤.

    나는 형님께 21세기 대한민국의 교육을 설명 드린 적이 있다.

    내 설명을 들으신 형님께선 이 교육 사업을 언젠가 꼭 추진하고 싶다 하셨었는데, 지금까지는 재정 문제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형님이 학교 건립 추진으로 인해 발생할 정치적 타격을 크게 염두하셔서 강하게 밀어붙이질 못 했었다.

    근데 나?

    나는 타격 입을 정치력이란 게 없다.

    속된 말로 형님 땜빵인데 뭐.

    그래도 내 돈으로 하기는 영 아쉬워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부자를 모집했는데 보다시피 곳간 3채가 꽉 차버렸다.

    자, 이게 말하는 게 뭐겠나?

    ‘씹선비들 죽었다고 복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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