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19화 (219/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9화>

***

“전하! 전하께오서 지금 영칙서의를 중단하고, 칙서는 거부하겠다 밝히셨사온데 지금 칙사가 온 까닭은 등극조치를 반포하기 위해서이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둘 모두를 거부한다면, 중국 조정이 우릴 의심 할 수도 있사옵고, 그리된다면 선황의 은혜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그렇사옵니다. 지금 중국에서 칙사를 보내온 것은 등극조치를 위해서이옵고, 다만 칙사가 크게 패악을 부려 전하께오서 상심을 얻으신 것인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신은 아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청컨대 영칙서의를 재개하소서.”

“신들이 지금 앞다투어 몰려나와, 전하께 서운한 말씀을 아뢰는 것은 진성대군이 당한 일을 부정함이 아니오라, 그저 대국과의 사이가 틀어질 것을 우려하는 것이옵니다. 지금 같은 시국에 대국에서 티끌 작은 일도 트집을 잡는다면 우리 같은 소국은 어찌 할 바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옵니다. 당장 칙사가 돌아가고, 대노한 새 황제가 오만한 여진 오랑캐를 정벌하겠다는 명분으로, 철령위에 대군을 급파한다면 어찌 되겠사옵니까? 사신의 잘못은 엄중히 따지되, 칙서는 영접하시옵소서. 그리하면 천만다행한 일이겠나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읍소였다.

장장 이틀에 걸쳐 진행된 읍소기도 했다.

이번 읍소는 갑작스런 감이 없잖아 있었다.

대리청정을 세자에게 맡기겠단 말을 공표 했을 때도, 대신들은 궐문이나 전각에 나가서 읍소하진 않았었다.

이건 임금의 말 한 마디에 이전과는 다른 강한 권위가 실려 있기 때문이라 해석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대리청정을 공표했을 때도 없던 읍소가 칙서 거부라는 사태과 일어남과 동시에 진행됐다.

물론 대리청정 문제와 칙서 거부 문제를 똑같은 저울에 두고 잴 수는 없겠지만, 문무백관들로서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또, 그들의 의아함에 불을 지폈던 건, 이번 읍소에 임금의 측근이라 알려진 좌의정 임사홍과 대제학 김감이 참가했단 점이었다.

읍소는 분명 대사헌 김전으로부터 시작됐다.

임사홍과 김감, 그리고 김전은 서로 의견 충돌이 잦은, 대치점에 있는 인사들인데 이번 사안을 두고 함께 읍소를 했다.

일각에서는 임금이 시킨게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도저도 아닌 입장의 중립적인 인사들은 이걸 기회로 삼아 읍소에 참가 할 수 밖에 없었다.

칙서 거부 사태를 맞아 읍소를 하고 싶었어도 임금이 역정을 낼까 못 했었는데, 일단 그 물꼬를 김전이 터줬고 이어서 임금의 측근인 사홍과 김감이 참가했으니 임금이 역정을 내도 크게 책 잡진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처음은 김전의 1인 시위에 가까웠던 읍소는 이틀이 지나며 예순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게 됐다.

이 예순이 넘는 인원은 죽기 살기로 읍소를 해댔지만, 정작 읍소의 대상(?)은 평온한 모습이었다.

“또 누가 참가했다고?”

“오늘 아침 예조참의 권인손과 병조참의 김수경(金壽卿), 공조참의 송천희(宋千喜), 병조정랑 복희달(卜禧達), 사복시첨정 윤지청(尹之淸), 사헌부 감찰 민종원(閔宗元), 공조참판 최응현(崔應賢), 도합 7인이 참석했사옵니다.”

“병조참의나 복희달, 그리고 윤치정은 그렇다 치지만 나머지 것들은 뭐란 말인가. 이것들이 눈치만 살피다가 은근슬쩍 멍석을 까는구나.”

병조참의 김수경과 병조정랑 복희달은 임사홍의 당여였다.

그래서, 융이 임사홍에게 은근히 읍소를 권하자 함께 데려왔을 터였다.

윤지청도 마찬가지다.

한데 나머지 사람들은 적당히 눈치만 살피다 나왔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 융 자신이 묵인하지 않았다면, 아예 나오지 조차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묵인하자마자 튀어나오는 꼴들이 썩 좋은 인상을 주진 않는다.

“저 3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4인은 아직도 직언과 읍소를 후세에 이름을 알릴 도구로 생각하는 위인들이다. 한심한지고.”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반문하고 싶었던 상선이지만, 전하께서 그러시다는데······.

“이쯤하면 됐으려나. 상선이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잘 모르겠사오나, 다만 어제 진성대군께서 드셨을 때, ‘적어도 수십명이 읍소에 동참하면 못 이기는 척 들어주십시오’ 라고 하신 건 기억이 나옵니다.”

“음. 하기사. 이름난 재상들도 여럿 참가했겠다··· 광화문 밖에도 이쯤하면 소문이 퍼져 나갔을테고··· 사신도 이쯤하면 반성하고 있겠지.”

“그럴 것이옵니다.”

“하면 상선이 나가서 어제 준비한 말을 이르도록 해라.”

“예.”

강녕전을 나온 상선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전언이외다.”

모두가 의관을 정제하고 자세를 바로했다.

“너희에게 이르건대, 내가 지금 무척 화가 나있는 것은 사신의 태도요, 황제의 업씬여김이다. 내 그래서 칙서를 거부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 뜻에 반(反)을 한 정도가 아니라, 이제 황제의 신하인지 나의 신하인지 분간 할 수 없을 만큼 통촉을 외쳐대니 솔직한 심정으로, 금군으로 하여금 너희들 모두를 쓸어버리고 싶었으나 상선이 간하고, 또 진성대군이 간하니 생각건대 신하는 무엇이고 군주는 무엇이냐? 또, 정치는 무엇이냐? 내가 생각하는 정치는 신하와 군주가 화합하는 것이니 내가 너희를 쓸어버린다면 이것이 어찌 정치이고, 태평한 시대를 원하는 백성의 마음에 부합하는 것이겠더냐. 내 이점을 참작하여, 일전에 내린 명을 거두니 삼정승들은 속히 영칙서의를 준비토록 하고, 예조판서는 이 사실을 모화관에 가서 사신에게 전하라.”

“···!”

이미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는 소수의 인원들은 ‘아이고, 허리야.’ 쭈볏거리며 일어났지만, 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다수의 인원들은 ‘읍소가 먹혀들다니······.’ 오히려 충격에 휩싸인 모습들이었다.

***

「조선국왕에게 칙(勅)한다. 그대 왕이 알다시피 우리 명(明)은 천명을 받아 천하의 주인이 된 지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하늘을 연(天開) 태조의 훈계를 그 자손들 역시 끝까지 이어받았고, 대행황제께서도 깊은 인덕과 지극한 혜택을 두루 베풀어, 그 덕이 그대 왕의 나라에도 닿았음이라. 내 지금 개인적으로는 아비를 잃은 고자(孤子)가 되었고, 효하지 못 하여 불효자가 되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대행황제의 훈계를 받들어 천명을 잃지 않게 하는 일이다. 아! 슬픔이 천지를 진동시키고, 하늘에 울부짖으며 호소해도 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 하겠도다. 그러나 주변의 제신들이 명은 천하의 주인인데, 천자의 자리를 오래 비우면 제후들이 동요한다 하고, 종친과 문무백관들 역시 여러차례 글월을 올려 자리에 나아가기를 간곡히 청하고 권하니, 나는 이를 세 차례나 거절하다가 이들의 정성이 너무 간절하고, 또 종묘사직은 중한 것이라 계속 거절하는 것도 선황에 대한 예가 아니라 생각되어 지난 14일 천지와 종묘사직에 고하고 황위에 올랐도다. 이에 그대 왕에게 이를지며, 짐이 천명을 이어받아 천자의 지위에 올랐으므로 천하의 죄인을 사면하여 하늘에 호소하고, 크게 변혁을 일으켜 천하를 새롭게 흥업시키리라. 천자의 자리는 지극히 크고, 정치란 지극히 어려우니 그대 왕은 짐의 미진한 점을 잘 보좌할지어다. 짐이 이제 대통을 이어 받아 만방에 군림하게 됐으니, 짐의 교화가 미치는 곳에는 그곳이 어디든 은택을 펴겠으며, 생각건대 그대 왕의 나라가 비록 멀지만, 대대로 충정을 다 바쳤고 옛 법식을 살펴보면 더욱 마땅히 우대해줘야 하므로 특별히 폐백과 함께 칙하니 그대 왕은 짐의 이러한 뜻을 잘 알고 헤아려 예의를 더욱 두텁게 할 것이며, 안으로는 정치를 잘 닦아서 그대 나라를 흥성하게 하라. 이는 천명(天命)이로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영칙서의 의식이 끝이 나고, 환동이는 드디어 칙서를 반포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가 황제가 됐으니 너희는 모두 꿇어라! 에 가까웠다.

졸라게 재수가 없는 거지.

아무튼 칙서 반포가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사신을 위한 연회였다.

“대인, 감사합니다.”

연회가 베풀어지자 환동이는 제일 먼저 나한테 다가왔다.

아직까지도 환동이는 내가 중개 역할을 잘 해서 영칙서의가 재개 된 줄 안다.

물론 그러라고 각본대로 움직인 거지만.

“감사는 저한테 할 게 아니라 전하한테 하셔야 됩니다. 전하께서 말까지 번복하시면서 큰 결단을 내리셨어요. 무슨 의미인지 아시죠?”

원래 사회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도 말을 번복하는 게 쉽지가 않다.

그런데 사회적 지위의 끝판왕에 있는 왕은 얼마나 어렵겠나?

은근히 그점을 강조하자 환동이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가서 전하한테 인사나 드리세요.”

“같이 가면 아니 될는지······.”

“애도 아니고, 뭘 같이가요.”

“···칼 맞을까봐서요.”

“전하께선 누구처럼 뒷끝 없습니다. 가서 인사 드리고 오세요.”

“그래도······.”

아무래도 버럭 역정을 내신 형님의 모습이 환동이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좀 도와줘야지.

“전하!”

내가 손을 번쩍 들고 형님을 부르자, 술을 들고 계시던 형님이 날 바라봤다.

“도제조는 무슨 할 말이 있더냐?”

“사신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옵니다.”

“사신이?”

“예!”

나는 머뭇거리는 환동이의 옆구리를 쿡쿡 눌렀다.

환동이는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형님 앞으로 나아갔다.

“소, 소인이 큰 무례를 저질렀사온데 이를 사해주셨으니 참으로 감읍한 일이나이다. 돌아가는대로 폐하께 왕의 도량이 참으로 커서, 동국이 평안할 것 같다고 아뢰겠나이다.”

“내 황은을 저버릴 뻔 했는데 사신으로 하여금 다시 입었으니 내가 고마운 일이외다. 자, 한 받으시오.”

“예.”

“근데 사신.”

“예?”

“언제 돌아갈 참이오?”

“아, 아마 사나흘 정도 더 머물다가 가지 않을까 싶사옵니다. 아까 예조판서도······.”

“내일 출발하시오.”

“예? 그, 그건 좀······.”

“하하핫. 농이오, 농. 그보다, 내 영칙서의를 재개한 이유는 잘 알고 있으실 거라 믿소.”

“이, 이를 말이겠습니까. 돌아가는대로 약조한 바는 꼭 지키겠사옵니다.”

“뭐, 어기셔도 상관은 없소. 우리야 좀 늦더라도 진주사를 보내서 아뢰면 되니까.”

“···”

나는 멀찍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둘이 잘 화해해서 다행이다.

***

“벌써 간다니까, 좀 아쉽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환동이와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였지만, 그 미운 정도 정은 정이라고, 막상 간다니까 좀 아쉬워졌다.

물론 내가 착해서 그런 거겠지?

그 뭐야, 사관 중에 김구오라는 사관이 있는데 말이다?

이 사관이 뒷끝이 장난이 아니거든.

내가 김구오처럼 뒷끝있는 사람이었으면 아쉽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었을 거다.

그런 거 보면 난 너무 착해서 탈이다.

“정확히 언제 출발합니까?”

“전하를 뵙고, 정오쯤 출발하지 싶사옵니다.”

“우리 약조한 거 안 잊었죠?”

“이를 말이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아, 내가 줄 게 이것 밖에 없네. 덕산아.”

“네, 대감마님.”

잠시 후, 덕산이가 우리집 행랑식구들과 함께 수레 2대를 가져왔다.

“이게 다 뭡니까?”

“설탕 조금이랑, 또 산삼 조금이랑, 비누랑, 뭐 아무튼 좀 챙겨봤습니다.”

“아니, 이런 걸 어찌··· 괜찮습니다. 전하께도 받았습니다.”

“줄 때 받으세요, 줄 때. 따지고 보면 뇌물이니까.”

“···”

“환동 씨. 우리가 또 같은 조선인 아닙니까?”

“그, 그렇지요.”

“환동 씨가 대국에서 출세하면 그게 바로 우리 자랑이라, 이 말입니다. 근데 출세하기가 어디, 쉽겠어요?”

환동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렵지요.”

“적당히 기름칠도 하고, 에? 또 뭐야. 윗분들 경조사도 제때제때 챙기고 해야 출세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이번에 나 때문에 빈털터리 되셨었잖아요.”

알다시피 의주~개성까지 내려오는 동안 환동이가 해쳐먹었던 거, 내가 다 돌려줘버렸다.

환동이 입장에선 눈 뜨고 코 베인 격일 터.

“그래도 너무 많은데······.”

“어차피 황제폐하도 특지 내리셨었다면서요. 최대한 조선에 가서 원성 사라고. 원성 사러 간 사람이, 빈털터리로 오면 폐하께서도 우리 사이 의심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사이···요?”

우정과 사랑사이라는 띵곡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노래 참 좋은··· 아, 이게 아니지.

“같은 조선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사이 아닙니까? 이보다 더 한 사이가 어딨겠어요?”

“···예, 확실히 그렇지요.”

“아무튼 간에, 이번에 빈 손으로 가시면 개인적으로도 억울하실 테고, 황제폐하한테도 할 말이 없을 테니 이거라도 좀 가져가십시오.”

“대인······.”

곧 울 것 같은 모양새의 환동이다.

근데 내가 저놈 예뻐서 주는 게 아니다.

나는 딱 사실만 말했다.

황제가 환동이한테 조선에 가서 최대한 원성 사란 특지를 내렸는데, 환동이가 빈 손으로 돌아오면 뭐가 되겠나?

그리고.

이제 환동이랑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환동이가 명나라에서 출세하면 우리 입장에선 천군만마를 얻는 격이나 다름이 없다.

근데 환동이한테 말한 것처럼 출세하기가 어디 쉽겠나?

적당히 기름칠도 해야 출세를 할 수 있는 거지, 사람이 나처럼 꼿꼿하고, 강직하고, 바르고, 정직하고, 착하고, 남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는 절대 못 하고, 이런 성품이면 출세 절대 못 한다.

“내가 이따는 입궐을 못 할 것 같아서 지금 전해드리고 가는 거니까요. 이따 인사 못 드려도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시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한데 어디 가십니까?”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는 맙시다.”

환동이에게는 말 못 했지만 봉해위에 가야 된다.형님께서 사신이 떠나는 대로 봉해위를 점검하라는 명령을 내리셨거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