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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18화 (218/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8화>

    ***

    걱정 되는 거.

    “힐책?”

    “예. 명나라에서 힐책을 하지 않겠습니까?”

    환동이가 돌아간다 -> 빈 손으로 돌아온 환동이에게 황제가 내막을 물어본다 -> 환동이가 살려고 각색을 해보지만 결국 죽는다 -> 환동이를 죽였지만 황제는 여전히 형님한테 화가 났다 -> 사신을 보낸다.

    라는 계산은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환동이도 할 터였다.

    “새로 등극한 황제가 시시비비를 엄정히 가릴 줄 아는 이라면, 어찌 날 힐책한단 말이냐? 스스로 부끄러워 할 테지.”

    이건 뭐, 황희의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도 아니고···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래.

    황제도 체면이란 게 있을 텐데, 제 잘못을 남한테 덮어 씌우려고 하진 않겠지.

    만!

    “황제가 어떤 성품인진 몰라도 자존심이 되게 센 것 같은데 전쟁을 일으키면요?”

    “네.”

    “이제 등극한 황제가 상도 다 치르지 않은 시점에 군사를 일으키는 건, 자충수에 가깝다.”

    “으음.”

    “왜,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것이냐?”

    “뭐, 결국 형님 말씀은 황제도 전쟁은 못 일으킨단 거잖습니까?”

    “그렇지.”

    “그럼,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무슨 말이냐?”

    말에 조금 모순이 있었다.

    어차피 황제가 전쟁을 못 일으킬 거라는 전제를 깔고 가니까, 형님께서도 이렇게 뻗대는(?) 걸 텐데 그걸 알면서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냐니··· 부족한 내 어휘력에 부정적인 의미로 새삼 감탄을 해본다.

    나는 조금 더 쉽게 설명하기로 해봤다.

    “칙사를 도주처럼 만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도주처럼?”

    “네. 그래도 칙사로 내정돼서 내려온 거 보면, 새 황제한테 엄청 총애를 받는 사람 같은데 이대로 돌려 보내면 그대로 죽임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반대로, 이번 일을 유야무야 시키고 돌려보내면 칙사의 입장에선 우리가 생명의 은인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칙사의 생사여탈권을 우리가 쥐고 있단 말에 형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리 검은 짐승 거두지 말란 속담도 있다지만, 명에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정보통으로 놔두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여서요.”

    정보통이란 말에 형님은 쉽게 납득을 하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리되면, 황제가 우리에게 보인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못 하게 된다.”

    “형님.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이게 실리란 걸 얻으려면 때로는 명분도 포기 할 줄 알아야 한다구요.”

    나한테 단기로 속성교육을 받았을 때, 내가 누차 한 말이었다.

    실리는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

    “좌상의 의견은 어떠한가?”

    “전하께서 크게 진노하셔서 신들도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저 뜻에 따른다고 아뢰긴 했습니다만 대군의 말씀이 온당한 듯 합니다. 지금 시점에서 명과의 사이에 금이 가는 건 이롭지 못 하옵니다.”

    “흐음.”

    나는 고민하는 형님에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저번에 형님께서는 연변에 있는 오랑캐들이 돌아오면 충돌이 일어날 테고, 그럼 명에서 알게 될 걸 우려하시지 않으셨었습니까.”

    국경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암묵적인 룰이란 게 있었다.

    지금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특히 지금 설치된 연변보는 건주위의 여진족들이 득시글 거리는 땅이다.

    건주위의 여진족은 우리보단 명을 섬기고 있으니, 이놈들이 쪼르르- 명에 달려가서 아뢸 수도 있는 일이다.

    “연변보에 대한 묵인을 얻는 대신 이번 일을 무마시키라?”

    “네.”

    “하지만 이미 영칙서의를 중단하겠다 말했고, 칙서를 거부하겠단 말을 문무백관들 모두에게 공표했는데 지금 와서 영칙서의를 재개하고, 칙서를 맞는다면 군주가 돼서 말을 번복한 것이 아니냐?”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그건 제 주특기 아니겠습니까, 주특기.”

    “주특기?”

    마침 모양새를 살릴 만한 적임자가 있었다.

    ***

    “하나도 안 바뀌었네.”

    “대감.”

    사헌부에 들어서자, 관리들이 일제히 하던 일을 중단하고 마중을 나온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전관예우인가··· 라는 망상과 함께 관리들의 인사를 받았다.

    “대사헌께서는 어디 있나?”

    “집무실에 계시온데 그건 어찌······.”

    “내 영감께 긴히 드릴 말이 있어서.”

    “소인이 뫼시겠사옵니다.”

    나는 예전에 내 비서관 격으로 일했던 배녹사 김희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뭔가에 골몰하고 있었던지, 대사헌 아저씨는 내가 온 지도 모르고 있다가 김희저가 ‘도제조께서 오셨습니다’ 라는 말에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감, 여긴 어쩐 일로······.”

    “못 올 데 온 것도 아니고··· 뭘 그리 놀라십니까. 하하.”

    “그렇긴 한데, 지금 같은 시국에 찾아오시니······.”

    대사헌 아저씨가 시국을 언급하자 나는 눈을 반짝였다.

    운이 좋다.

    오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게 생겼다.

    나는 은근슬쩍 집무실 한켠의 의자에 앉았다.

    허락도 안 받고 앉는 건, 대단한 무례지만 어차피 난 대외에 예의라곤 쥐뿔도 찾아 볼 수 없다는 평을 받고 있어서 상관 없다.

    “예. 시국이 문제긴 하죠. 영칙서의를 중단한단 말을 듣고 가슴이 어찌나 철렁 내려앉았는지 모릅니다.”

    “듣기로 사신과 함께 입조했다고 들었는데 어찌 되었습니까?”

    “어찌 되긴요. 형님······.”

    깐깐한 대사헌 아저씨 앞이란 걸 깜빡했다.

    “아니, 전하께서 문전박대하면서 내쫓으셨지요.”

    “흐음.”

    “대사헌 영감도 이번 일 듣고 놀라셨지요?”

    “이를 말이겠습니까. 갑자기 일을 당해 뒤숭숭한 것이, 마치 상을 당한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될까봐, 일부러 입조심 했던 건데······.”

    “그러셨었습니까?”

    대사헌 아저씨가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뜬다.

    이게 다 ‘작전’의 일환이라지만, 저 반응은 좀 기분 나쁘다.

    날 얼마나 바보로 알았으면 저런 반응이야?

    “네. 내가 살다, 살다 칙사한테 맞은 건 또 처음인데, 따지고 보면 나도 잘 한 것도 없고··· 저 때문에 일이 이리 커진 것 같아서 대사헌 영감이나 다른 분들 뵙기 민망할 정돕니다.”

    그래도 염치가 있으셔서 다행입니다.

    라고 대사헌 아저씨의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써있다.

    “그래서 말인데요. 왜 가만 계십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렇잔습니까. 이게 영칙서의 중단에··· 칙서 거부에··· 게다가 칙사는 돌려보내신다고 까지 하셨는데 이게 보통 가벼운 사안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니고 대사헌 영감께서 가만 계시길래······.”

    “소인도 전하의 의중을 모르지 않습니다. 지금 일이 커질대로 커진 건 사실입니다만, 칙사가 종친을 폭행했으니 어찌 가벼운 일이겠고, 한 사람의 신민으로 화가 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새황제가가 등극조치를 전하는 사신으로 환관을 내정한 건 우릴 무시한 처사라는 전하의 말씀도 일리가 있으십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나서겠습니까?”

    생각보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계셨군.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그 말이 딱이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신을 굽히시면 안 되지요!”

    “예?”

    “내가 맞은 건 맞은 거고, 새황제가 우릴 업씬여기는 거면 업씬여기는 거지만··· 그렇다 해도 영칙서의를 중단하겠단 말씀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사헌 영감은 펄쩍 뛰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갑작스런 호통에 대사헌 아저씨가 당황해하신다.

    “말이 그리 됩니까?”

    “이게 또··· 보세요. 칙사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럼 빈 손으로 돌아온 칙사한테 새황제는 자초지종을 묻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러다가 칙사 김환동이 이러쿵저러쿵 해서 귀국했다, 라고 하면 새황제가 우리한테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뭐, 겉으로는 내가 잘못했으니 조선에 죄를 묻지 않겠다 할 수도 있죠. 있는데··· 이게, 괘씸죄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뭐 하려고 주청사를 보낼 때마다, 또 진주사를 보낼 때마다 오늘 일 때문에 ‘안 된다.’, ‘하지마라’ 하면 얼마나 손해가 막심하겠습니까?”

    “저도 그게 걱정이긴 합니다.”

    “그럼 더 가만 계시면 안 되지요. 지금 대사헌 영감 말고 나설 사람이 누가 있단 말입니까? 대사헌 영감처럼 소신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이 조정에 누가 있냐, 이 말씀입니다.”

    “으음.”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는 김전에 나는 은근하게 물었다.

    “설마 형님이 진노하실까봐 두려우신 건······.”

    “아닙니다! 내 어찌 선비로서 군주의 진노가 두려워 말을 삼가겠습니까? 얼토당토 않은 말씀이십니다!”

    아니면 아닌 건데 생각 이상으로 발끈하신다.

    “근데 왜 행동으로는 안 나서시는데요? 지금 대사헌 영감이 가진 소신은 ‘이건 아닌데’, ‘명나라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래도 칙사를 돌려보내면 안 되는데’ 아닙니까? 근데도 가만 있는 건, 소신을 지키지 못 하는 일이 아닙니까.”

    “흐음.”

    나는 여전히 긴가민가 하는 대사헌 영감의 ‘그 부분’을 살살 긁어드렸다.

    그리고.

    “대감의 말씀에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확실히 지금 가만 있는 건, 선비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지요.”

    라고 말씀하신 영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

    ***

    모화관에 왔다.

    왜, 모화관이냐고?

    김환동의 생명의 은인이 되려고 왔지.

    “대인, 대인!”

    김환동은 내가 찾아왔단 소식에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거면 날 왜 때렸나··· 싶지만 결과론적으로 보면 우리한테는 잘 된 일이니까.

    “어, 어찌 되셨습니까?”

    “완강하십니다.”

    “이런 낭패가······.”

    “칙사는 되도록 빨리 돌려보내고, 사신단 구성해서 황성에 보내자고 하셨습니다.”

    “대인, 저좀 살려주십시오. 저 이대로 가면 호랑이 밥이 될지도 모르옵니다!”

    “호랑이 밥이요?”

    “폐하께서 키우시는 동호대장군이라는 호랑이가 있는데 풍문에 의하면 사람도 먹이로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데 이대로 돌아가면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호랑이 우리에 던져져도 골백번은 던져질 테니, 호랑이 밥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안타깝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개성에서 있었던 일을 없던 일 할 수도 없고··· 또, 나는 없던 일 취급하려고 했는데 전하께서는 절대 그럴 용의가 없으시니까, 여기다 대고 뭐라 더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환동이는 철푸덕 주저앉았다.

    오만가지 잡생각을 다 하고 있을 거다.

    황제의 손아귀에서 도망갈 생각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환동이 입장에선 이게 살 길이 될지도 모르지.

    귀국길에 샛길로 빠져버려서 숨어버리면, 평생을 숨어 살더라도, 일단 목숨은 부지 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

    “우리가 또 같은 조선인 아닙니까?”

    “예.”

    “같은 조선인끼리 돕고 살아야 되기도 하고··· 사신을 이대로 돌려보내는 것도 영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말인데.”

    “말인데?”

    “혹시 칙사는 황제께 얼마나 신임을 받고 있습니까?”

    “폐하의 마음을 들여다보진 않았습니다만, 태자 시절부터 뫼셨으니 의지하는 바가 아주 없진 않겠지요.”

    “그럼, 어떻게 구명할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구, 구명할 길이라시면?”

    “전하께서 지금 새로운 국책을 진행하고 계신데··· 연변에 보를 설치한 일입니다.”

    “연변이라시면?”

    나는 연변이 설치된 배경과 그 위치를 설명했다.

    “나중에 문제 될 소지가 있는 곳이군요.”

    그러자 환동이는 대번에 문제점을 파악했다.

    “예. 지금이야 뭐··· 오랑캐들이 물러갔으니까 문제 될 소지가 없지만, 다시 돌아오고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하면 황제폐하께서도 아시게 될 테고··· 그럼 뭐, 이제 문제 될 소지가 되는 거고.”

    “한데 그건 어찌 저에게······.”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대외비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칙사로 온 제놈에게 말해줬으니 환동이 입장에선 이게 뭔가 싶을 테지.

    “여기까지 말씀을 드렸는데도 못 알아들으시면 이제 돌아가셔서 호랑이 밥이 되든 죽이 되든 하셔야겠군요. 크흠.”

    “아니, 대인. 자세히 설명을··· 아! 아? 혹시······.”

    “하, 진짜. 이런 거 말씀 드리면 안 되는데, 내가 우리 칙사께서 안쓰럽기도 하고, 또 심하게 반성하고 있으셔서 말씀 드린 겁니다. 거기에 대한 해석은 자유구요. 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이 있으면 전하께서 칙사를 돌려보내시겠냐, 하는 겁니다.”

    머잖아 환동이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마 뭐가 본인에게 더 득이 되는지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자고로 본인 목숨보다 득이 되는 건 없지.

    “제, 제가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확실히요?”

    “이를 말이겠습니까? 폐하께선 동쪽의 상황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으십니다. 지금 오랑캐가 조선땅에서 설치고 다니는 건 사실이니, 이를 폐하께 잘 말씀 드린다면 연변보의 일이 어찌 폐하의 심기를 건드는 일 축에나 끼겠습니까? 오히려 더 북진해도 된다는 말씀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에이, 더 북진해도 된다는 건 너무 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조선의 북진은 꺼려하거든.

    “아무튼 불가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요? 어떻게 불가한 일이 아닌데?”

    “지금 황제께서 저에게 최대한 조선에 가서 원성을 사라 하신 것은 새로 등극하시면서 황제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일환이기도 하시옵니다. 이를 군사로서 할 수가 없으니, 소인을 대신 보낸 것인데 제가 큰 패악을 부리고, 또 왕자까지 구타했는데도 돌아가서 ‘조선에 이변은 없습니다’ 보고 하면 황제께선 어찌 흡족한 마음이 아니 드시겠습니까? 여기에 제가 ‘그래도 동요하는 여론이 조선의 조정에서 있었으니 적당히 어루만질 필요가 있는 듯 합니다.’ 라고 한다면 황제께서 충분히 그 문제를 매듭 지어주실 것이옵니다.”

    “그래요? 흠. 하면 내 일단 전하께 말씀 드려보지요.”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굽신거리는 환동이를 뒤로한 채 모화관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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