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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17화 (217/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7화>

    ***

    편전에서 칙서를 거부하겠다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줄은 꿈에도 모르는 광화문.

    “사신께서 선원전에 이르렀소이다!”

    영칙(迎勅)이라는 깃발 하나를 하늘 높이 치켜 든 기마 한 기가 광화문에 난입하며 소리쳤다.

    선원전이라면 광화문과 지척이었다.

    이제 곧 육조거리에 도달할 테고, 그 다음은 광화문.

    때문에 소식을 전해 받은 문무백관과 종친들은 초조함에 휩싸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영칙서의를 위한 의식에는 임금이 무조건 필요했다.

    사신이 도착하면 임금이 대가를 타고 광화문에 들어가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의식은 개뿔이고 궐에서 나올 기미도 안 보이니 초조할 수 밖에.

    본의 아니게 모든 의식을 집전하게 생긴 왕세자 황이는 더더욱 불안해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의젓하다지만, 아직 어린 나이에 이런 의식을 집전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숙부님. 왜 아바마마께서 전언이 없으실까요?”

    초조해하다 못 해, 바들바들 떨고 있는 황이가 진성에게 물었다.

    하지만 진성도 영문을 모르기는 매한가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불안에 떨고 있는 세자를 안심시키는 일 뿐이었다.

    “박 내관이 입궐한 지 일다경은 됐으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

    “또 사람을 보내볼까요?”

    잠시 고민하던 진성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는 편이 좋긴 하겠······.”

    그때.

    광화문에서 영칙서의를 기다리다가 편전에 불려갔었던 대신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저하.”

    “네.”

    “전하께서 편전에 드시라 하시옵니다.”

    “아바마마께서요?”

    “예.”

    “하지만 이제 곧 사신이 오시는데······.”

    “어명이니 속히 드소서.”

    “알겠어요.”

    세자 황이 내관과 금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광화문 안에 들어서자, 그 모습을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허침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들으시오.”

    이목이 허침에게 집중됐다.

    “지금 전하께서 영칙서의를 중단하겠단 어명을 내리셨으니 문무백관과 종친들은 모두 사정전에 모여 대기하시오.”

    웅성웅성.

    “영상대감.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칙서의를 중단하겠다니요?”

    “대감. 사신이 이제 선원전에 이르렀사옵니다. 한데 갑자기 영칙서의를 중단해버리면······.”

    도처에서 질문이 쏟아졌지만, 허침은 대답 없이 광화문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

    “대인. 이제 어쩝니까?”

    “아, 진짜. 나도 모른다고요.”

    “대인이 혹시 전하께 말씀 아뢴······.”

    이 새끼가 이제 날 의심하네?

    “아니라니까? 막말로, 사신한테 얻어 터진 게 자랑도 아니고 내가 그걸 왜 말합니까?”

    “정말로 아니신데 어찌 이런 사달이··· 후우.”

    모화관.

    오며, 가며 보긴 했는데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이다.

    그런데 괜히 왔다는 후회가 막심하다.

    “거, 사신쪽 사람이든 우리쪽 사람이든, 누가 가서 고한 것 같은데. 그러게 사람을 때리긴 왜 때립니까? 오죽 했으면 당사자가 괜찮다는 것도, 제삼자가 갖다 일러바쳤을까.”

    내 막말에 환동이의 얼굴이 수치심 때문인지 벌겋게 달아오른다.

    아니, 수치심이 아니라 화가 난 건가?

    “이건··· 이건, 그러니까··· 아! 이건, 황제폐하에 대한 모독입니다!”

    지랄이 존나게 풍년이다.

    “모독인지 아닌지, 그런 건 난 모르겠고요. 아무튼 난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입궐해야 된다니까? 왜 자꾸 붙들어 맵니까?”

    나 정말로 가야된다.

    솔직히, 내가 여기 온 것도 따지고 보면 저놈이 자꾸 들러 붙어서다.

    광화문에서 영칙서의를 중단한단 영의정 아저씨의 말과 함께 입궐을 했는데··· 딱 영제교를 건너던 무렵, 사신의 수행원이 찾아왔다.

    좀 만나달라나 뭐라나?

    잠깐이면 된다길래 모화관까지 찾아와줬는데, 벌써 한시간째 칭얼거리고 있다.

    신배가 칭얼거리는 건, 귀엽기라도 하지 다 커서, 배도 남산만하게 튀어나온 아저씨가 칭얼거리는 건 솔직히 좀 쏠린다.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허.”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까 승정원에서 사람이 왔을 때, 한 말 잊었습니까?”

    날 데리러 온 승정원 관리는 환동이에게, 모쪼록 잘 지내다 가시라, 라는 형님의 분부가 계셨다고 똑똑히 전했었다.

    환동이가 이 일련의 사태를 맞아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게 아니라면, 분명 기억하고 있을 말일 터였다.

    “알지요. 아는데······.”

    힐끗.

    이 새끼가 이제는 초롱초롱 눈을 밝히기 까지 한다.

    왜, 짱구보면 나오는 그 눈망울 있잖아.

    짱구는 귀엽기라도 하지······.

    “아, 나더러 어쩌라고요!”

    오해는 말아라.

    절대 화내는 거 아니다. 한시간째 시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분노게이지가 아주 조금 오바했을 뿐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일단 이리 찾아왔는데 전하를 뵙는 것은 지극한 도리 아니겠습니까?”

    “아까 서대문에서 뵀었잖아요.”

    “그 잠깐 본 게 어찌 뵌거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전하께서 갑자기 칙서를 거부하겠다고 하셨는데 이를 해명조차 하지 않고 돌아간다면 이는 직무유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요?”

    “제가 듣기로 전하께서는 대인을 총애하신다 들었습니다.”

    긁적긁적.

    “별 걸 다 들으셨네.”

    “대인을 따라 입궐한다면 어찌 무리한 일이겠으며, 어찌 사람으로서 한 번 은혜를 입어 갚을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잠깐, 은혜?

    그러고 보니까, 옛날에 내 친구 누나 이름이 은··· 아, 이게 아니지.

    은혜라.

    “은혜요?”

    “예, 대인께서 이 일을 잘 중재만 해주신다면 어찌 은혜를 입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말은 내가 황성에 안 간다고 했을 때도 하셨잖습니까?”

    개성에서 있었던 일을 두고, 환동이 놈은 나한테 큰 은혜를 입었다며 아첨을 해댔었다.

    인물이 훤칠하다는 둥··· 역시 종친으로서 위엄을 갖췄다는 둥··· 큰 귀에서 인품이 보인다는 둥.

    듣기 만망할 정도의 삼류 아첨이었다.

    “아. 그랬었나요?”

    “그랬는데요.”

    “아무튼 간에 어떻게, 염치없지만 부탁좀 드리겠습니다.”

    “형님이 단단히 화가 나신 것 같은데······.”

    환동이를 데려가는 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데려가서 괜히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문제인 거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영칙서의를 중단하는 것도 하는 거지만, 칙사를 보지도 않고 돌려보내겠다고 말씀하신 걸 보면 정말로 화가 머리 끝까지 나신 것 같았었다.

    그런데 여기서 환동이를 데려가면 어떤 불똥이 튀겠어?

    아, 나한테 튀는 불똥 말고, 이건 인류애적인 차원에서의 불똥을 이름이다.

    가끔 TV 뉴스 보면 그런 일들이 소개되곤 했었다.

    학교 폭력 피해자의 부모가 학교에 찾아와 가해자를 떡실신(?) 시켜버렸다는 일.

    이런 뉴스처럼, 가해자 보고 꼭지가 도신 형님이 환동이 목을 쳐버릴지도 몰랐다.

    그래도 명색이 사신인데 말이야.

    내가 걱정하는 건, 이처럼 박애적이고··· 또, 어떤 인류애적이고, 그리고··· 좌우지간 그런 거다.

    “괜찮습니다. 일단 해명을 하거나, 서로 대면을 해야 오해가 풀려도 풀리지 않겠습니까?”

    “맞아 죽을 수도 있는데요?”

    여태 진지한 태도로 매달리던 환동이가 피식거렸다.

    “설마 칙사의 목을 치시기라도 하겠습니까?”

    “그러고도 남을 것 같은데. 뭐, 아무튼 내 목숨도 아니니까, 그럼 같이 가십시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나중에 향 피우게 돼서 밤마다 찾아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

    바들바들.

    “아니, 벌벌 떨거면서 왜 따라왔어요?”

    “막상 오니 긴장이 돼서······.”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나, 여기서 죽나 매한가지라면서요?”

    오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알고 보니 환동이가 애걸복걸한 사정도 이해가 됐다.

    나는 일차원적인 생각으로 접근했었다.

    단순히 사신이 칙서도 전하지 못한 채 돌아가면 벌을 받을 거라는, 매우 일차원적인 생각.

    그런데 환동이는 날 정말 생명의 은인 쯤으로 느꼈는지, 아니면 뭐랄까··· 스톡홀름 신드롬인지는 몰라도 경복궁까지 오는 내내 본인 속을 확 털어놨다.

    그 중에 하나가 이대로 돌아가면 제 명에는 못 산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환동이게 슬슬 납득이 갔다.

    이 녀석, 정말 돌아가면 죽을지도 몰랐다.

    “근데, 황제가 내려준 할당량은 얼만데요?”

    녀석이 털어놓은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할당량이다.

    내가 개성에서 황제가 제후국 백성들 삥뜯으라고 특지를 내린 거냐고 추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땐 거의 농담반 진담반이었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정말로 그런 특지를 내렸었단다.

    따지고 보면 환동이 놈은 황제 명령을 잘 수행한 충견이었다.

    “구체적으로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만, 되도록 원성을 살 정도라 하셨었습니다.”

    “참, 나.”

    그래도 황제 씩이나 되는 양반이 삥이나 뜯으라 했다니 마음엔 안 든다.

    아, 물론 그 명을 곧이곧대로 수행한 환동이 새낀 더 맘에 안 들고.

    “대감. 드시랍니다.”

    궁시렁거리고 있자, 편전에 기별을 넣으러 갔던 상선 대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칙사는요?”

    “함께 드시랍니다.”

    “가시죠.”

    상선 대감을 따라 편전안으로 들어가자, 어쩐 일인지 편전 안은 썰렁했다.

    기껏 보이는 사람들이라곤 좌의정 임사홍과, 홍문관 대제학 김감, 그리고 세자 황이 정도였다.

    아, 물론 어좌에는 시니컬한 표정의 형님도 계셨고.

    “전하!”

    아까까지 긴장돼서 몸이 주체가 안 된다던 환동이는 편전 문이 열리자마자 후다닥- 뛰어나가 넙쭉 부복부터 했다.

    그래도 형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환동이는 가볍게 무시한 채 대신 나한테 말씀하셨다.

    “진성이 너는 어찌 개성에서의 일을 나한테 고하지 않은 것이냐?”

    “그건 말씀드리자면 말이 좀 길어지는데요··· 그러니까.”

    나는 개성에서 있었던 일을 살짝 각색했다.

    함께 듣던 환동이가 입을 쩍- 벌릴 정도인 걸 보면 살짝이 아닌 것 같긴 했지만 내 기준에선 살짝이 맞다.

    쾅!

    “이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서대문까지 사신을 마중나가, 배알도 없이 시시덕거렸으니 사신.”

    “에?”

    “사신은 내가 얼마나 우스웠소?”

    “아, 아니옵니다. 우, 우습다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지금 사신이 죄를 빌러 온 것이든 해명을 하러 온 것이든, 나는 사신과 나눌 말이 없소이다. 돌아가시오.”

    “하, 하오나··· 이,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조선과 명,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이, 일이옵니다.”

    “이대로 칙서를 맞는 것은 더더욱 이롭지 않소.”

    “부디, 전하······.”

    “내 그래도 사신을 영 뵙지 않은 것은 예가 아닌 것 같아 진성이와 함께 들이긴 했소만, 지금 보니 괜한 짓을 한 것 같구려. 돌아가시오.”

    “전하······.”

    “밖에 금군 있느냐!”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사신이 피곤하시다 하니 어서 객사까지 뫼셔라.”

    “알겠사옵니다!”

    금군들이 환동이를 질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아마 대사헌 김전이 봤으면, 환동이가 아무리 저지른 죄가 있어도 경악을 금치 못 했을 거다.

    금군들이 칙사를 질질 끌고 나가는 건, 황제를 질질 끌고 나가는 거랑 비슷한 의미니까.

    나한테 감히(?) 손찌검을 했던 환동이지만, 이런 모습 보니까 또 불쌍해진다.

    저대로 돌아가면 정말 황제한테 맞아 뒈질지도 모르는데.

    ‘아니지. 뒈질 짓 하긴 했지.’

    하여간 난 너무 착해서 탈이다.

    “저런 놈을 내 사신이라고 우대했으니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다.”

    “···”

    “세자.”

    “예, 아바마마.”

    “너는 오늘의 모습을 똑똑히 새겨야 한다. 네 훗날 보위에 올랐을 때도 대국이 남아있다면, 대국이라 할지언정 무조건 조아려야만 하는 건 아니다. 부당한 일이 있다면 부당한 일은 응당 호소하고, 항의해야 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바마마.”

    “그리고 진성이.”

    “예.”

    “너는 또 얼마나 물러터졌으면 저런 놈도 사신이랍시고 데려온 것이냐?”

    “사신이 죽는 소리 하길래······.”

    “제 스스로 죽을 자리 찾아 누운 놈이다.”

    “그렇긴 합니다. 근데, 정말 저대로 돌려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물론이다. 감히 칙사가 종친에게 손찌검을 했으니 이건 황제의 뜻이나 다름이 없다.”

    라는 살벌한 말씀을 하신 형님은 뭐라 궁시렁거렸다.

    아마, 세자에게 들리지 않게 욕을 하신 걸로 보인다.

    어지간히 화가 나신 모양이다.

    내가 맞은 것도 맞은 거지만, 형님의 입장에선 넌씨눈 노공필이 사신한테 쳐맞고 왔어도 화가 나셨을 거다.

    때려도 본인이 때리지 황제 따까리한테 맞고 오면 얼마나 화가 나겠어?

    그래서 더 드릴 말씀은 없다.

    다만 걱정되는 건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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