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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16화 (216/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6화>

    ***

    “하하하. 그랬었소?”

    “예. 그때는 참으로 아득했었지요. 아찔도 했었구요.”

    “이런 미안한 경우가 다 있나. 그래도 사신이 중국으로 건너가 크게 출세하여 칙사로서 돌아왔으니 부친께서도 참으로 흡족해 할 것이오.”

    “지하에 계시니 아들이 장성해 크게 된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될 뿐입니다.”

    “으음. 부친의 고향이 이성현이랬던가?”

    “예.”

    “3살 때 강을 건넜다 하셨으니··· 혹 나고 자란 마을의 이름은 기억하시오?”

    “아버지께서 늘 석치리, 석치리 하시면서 석치리가 제 고향이라 누차 말씀하셨었습니다. 덕분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칙사로 오면서 들러볼까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 해 못 들러봤으니 아쉬울 따름이지요.”

    “허어. 부친의 형제들께서는 없고?”

    “이성현에 남아 계실 듯 한데, 강을 건넌 이후로 교류가 없었던지라 알아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따로 이성현에 사람을 보내 사신의 백부와 숙부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수소문해보겠소이다.”

    “감사합니다.”

    막상 융이 이야기를 나눠본 사신은 흠 잡을 게 크게 없었다.

    이런 인물이 왜 치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됐는지 의아할 정도로 말이다.

    이쯤 와서는, 사신이 정말 재물을 밝힌 흡혈마였는지 조차 긴가민가할 지경이다.

    사람이 호탕하면서도 겸손했다.

    그렇게 융이 사신을 재평가(?) 하던 그때였다.

    “전하.”

    “음? 상선이 어쩐 일인가?”

    상선은 괜히 사신의 눈치를 살피며 귀엣말을 건넸다.

    “송구하오나 황 종사관이 긴히 뵙기를 청하옵니다.”

    “황 종사관?”

    “예.”

    “이제 곧 영칙서의(迎勅書儀)를 행할 텐데, 짬이 어딨단 말인가? 나중에 보겠다 전하라.”

    “하오나··· 중차대한 문제라 하여······.”

    “중차대한 문제?”

    “예. 도제조 대감과 관련된 문제라 하옵니다.”

    도제조라면 진성이를 이름일 터였다.

    그렇다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흐음. 알았다.”

    융은 사신에게 양해를 구한 뒤, 황 종사관을 불러들였다.

    ***

    칙사가 오면 제후국은 해당 칙사를 황제처럼 극진히 대한다.

    서대문까지 왕이 마중을 나가는 것도 그 일환이다.

    하지만 칙사를 극진히 대접하는 예는 이게 시작이다.

    영칙서의.

    황제를 대리해서 칙서를 가져왔다고 해서 받는 예가 또 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영칙서의를 행하기 일식경 전이었다.

    모든 문무백관들은 영칙서의의 일환인 리셉션을 위해 광화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금군들은 오랜만에 의장용 갑주를 입고 궐문을 시위하고 있었다.

    이제 왕의 OK 사인만 떨어지면 영칙서의 의식이 시작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광화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일부 대신들, 그러니까 삼정승, 육조판서, 삼사의 장관들만 입조하라는 령이 떨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영칙서의 의식이 실행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명을 전달받자, 허침은 깜짝 놀라 상선에게 되물었다.

    물론 상선이라고 내막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건 소인도 잘 모르겠소이다. 다만 속히 편전에 드시라는 말만 하셨소.”

    “곧 사신이 칙서를 모시고 오시거늘······.”

    “일단 가시지요.”

    결국 허침을 비롯한 대신들은 리셉션을 팽개친 채 편전에 들었다.

    “전하. 곧 영칙서의가 행해지온데 불러 계셨다 들었사옵니다. 신이 듣기로 사신이 이제 막······.”

    뜬금없는 귀환령(?)에, 의문을 가진 대신들을 대표해 허침이 말했다.

    다만 말을 끝맺지는 못 했다.

    스윽-.

    임금이 손을 들어 말을 막는데 무슨 수로 말을 맺겠나?

    허침이 조용히 입 다물고 물러서자, 노기 띤 얼굴의 융이 말했다.

    “영칙서의는 없다.”

    “예? 그게 어인 말씀······.”

    “칙서를 거부하겠단 말이다.”

    청천벽력.

    대신들의 심정을 네 글자로 표현하자면, 청천벽력 말고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 줄 말이 더 있을까?

    없을 터였다.

    웅성웅성.

    편전이 곧 도떼기 시장처럼 시끌벅쩍해졌다.

    “전하. 그게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칙서를 거부하시겠다니요.”

    “칙서의 오만함을 경은 듣지 못 하였단 말인가?”

    “아니, 방금 전까진······.”

    솔직한 심정으로 허침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허침 이하 모든 대신들이 어이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칙사가 의주~개성까지 패악을 부렸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전하께서는 칙서를 거부하겠다는 둥, 영칙서의를 폐하겠다는 둥··· 일언반구도 없으셨었다.

    ‘한데 이제와서?’

    어이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칙사를 서대문까지 마중 나간 게 누구시던가?

    바로 전하셨고, 그게 바로 반시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전하를 보필하면서 서대문까지 나아갔던 허침이기에, 허침은 그 누구보다 전하가 하신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

    -칙사가 조선인이라 해서 예전에 조선인으로 환관이 돼 패악을 부린 윤봉(尹鳳)과 정선(鄭善)처럼 패악을 부릴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공손해졌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 말에선 칙서를 거부하겠다는 초유의 사태를 임금이 일으킬 거란 유추가 전혀 안 됐다.

    이뿐이 아니었다.

    -칙사가 공손해진 건 다행이지만, 그러니 만큼 더더욱 영칙서의에서 트집 잡을 일을 만들면 아니 될 것이다.

    영칙서의를 폐하긴 커녕 오히려, 갑자기 공손해진 사신이 영칙서의를 핑계로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니 만전을 기하라는 말씀까지 하셨었다.

    그런데 갑자기 칙서가 오만하다는 둥··· 칙서를 거부하겠다는 둥······.

    어찌 이해 할 수 있을까?

    “오만함이라 하심은 어떤 걸 이르시온지요?”

    칙서 거부.

    영칙서의 중단.

    이 두 가지는, 적어도 대명(對明) 관계에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때문에 김전은 최대한 침착을 유지한 채 물었다.

    그러자.

    “들라하라.”

    융의 말과 함께 편전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무장한 군인 하나가 들었다.

    “아니, 황 종사관.”

    임금이 사신의 패악을 조금이나마 막겠다며, 진성대군을 개성에 보냈을 때, 호위로 딸려보낸 황 종사관이었다.

    “전하. 황 종사관은 어찌?”

    “내 너무 참담하여 입에 담기도 망측하고 두렵다. 종사관이 아까 내게 고한대로 진술하라.”

    “예!”

    잠시 후.

    황 종사관의 입에서 개성에서 있었던 일화가 술술 새어나왔다.

    그의 진술이 점점 구체적으로 묘사되면 될수록, 대신들의 표정은 일그러져갔다.

    어떻게 보면 친중파(?)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김전의 표정도 밝지만은 않았다.

    “일국의 왕자를 칙사가 이리 대접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렇사옵니다. 하물며 우리 조선은 명에 사대한 지 어언 백년이 지났사옵니다. 그런데 지금 제후국의 왕자를 칙사가 이리 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또 있어서는 안 될 일이옵니다.”

    여기저기서 볼맨소리가 터져나왔다.

    “내 말이 바로 경들이 한 말과 같다. 대관절 칙사가 제후의 왕자를 구타한 일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진성대군이 민망한 일을 당하고 이를 문제제기 하면 명과 조선의 우호에 금이 갈 듯 하여 말을 아낀 듯 한데, 명에 사대하는 처지라 해도 이는 좌시 할 수 없는 일이다. 칙서 맞는 예를 중단하고, 칙사는 곧바로 돌려보낼 것이다. 내 경들을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칙사를 돌려보낸다고 하셨사온데 지금 입국한 칙사는 등극조칙(登極詔勅)을 전하러 온 사신이옵니다.”

    사신에도 급이란 게 있다.

    그래서 이를 상중하로 나눈다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인 문제들로 오는 사신, 하등급.

    국제 상황과 대내의 문제를 전하기 위해 오는 사신, 중등급.

    황제의 등극이나 황태자 책봉을 알리기 위해 오는 사신, 상등급.

    지금 온 김환동은 상등급의 칙사라 할 수 있었다.

    김전의 말은 결국 화가 난 건 화가 난 건데, 상등급 사신을 정말로 돌려 보낼 것이냐는 완곡어법에 가까웠다.

    이런 칙사는 황제의 위엄과 관계됐기 때문에 황제의 진노를 살 수도 있었다.

    “내 어찌 모를까. 잘 안다. 그러나 경들은 생각해보라. 등극조칙을 전하는 칙사를 황제께선 화자(고자)로 보내셨음이다. 이건 무슨 은혜인가?”

    역시나, 이건 무슨 개같은 경우냐는 완곡어법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보통 등극조칙을 위해 오는 칙사 중에서 환관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거의 없다.

    환관을 보냈다가 혹시 제후국에서 뇌물 수수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 할 수 있고, 제후국의 관리들과 상회례(처음 인사하는 자리) 같은 곳에서 대면했을 때, 환관 칙사의 부족한 학문 소양 때문에 망신을 살 수도 있었기에, 보통 이런 칙사는 엄격히 선별해서 보내곤 한다.

    “나는 어리석어 잘 모르겠지만 이는 새로 등극한 황제께서 순한 양을 원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건 경들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조정에서 역시 환관이 칙사로 내정됐단 소식에 그런 의견이 대두됐었다.

    새로 등극한 황제가 본인이 만만이(?)가 아니란 걸 알리기 위해 일부러 환관을 칙사로 보낸다는 의견이었다.

    이 의견은 거의 공론에 가까웠었다.

    그게 아니면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일개 환관 나부랭이를 칙사로 보낼 까닭이 없거니와, 그 환관 나부랭이의 출신이 조선인일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내 여기까지는 일찍부터 황은을 입은 몸이고, 새로 등극한 황제께서 다 깊은 뜻이 있으셔서 그랬겠거니, 했다만 칙사가 왕자를 구타한 일을 어찌 참으랴? 이건 피해자가 진성대군이라서가 아니다. 칙사가 일국의 대신과 재상을 구타해도 유감스러운 일인데, 하물며 종친을 구타했으니 이는 좌시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융이 처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사신을 마중 나갔다가 치계와 다르게 갑자기 공손해진 사신에 의아해 할 무렵이었다.

    소식을 전한 건, 황 종사관이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이 사실을 융에게 보고했다.

    융으로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 수 밖에 없었다.

    김환동은 조선인이다.

    비록 칙서를 모시고 온 칙사라지만, 그 핏줄은 조선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칙사란 감투를 쓰더니 왕자를 구타했다.

    어찌 화가 안 나랴.

    거기다 더 화가 난 건, 사신의 태도였다.

    글쎄, 진성이 이 사실을 명에 고하겠다 노발대발 하니 그제서야 사죄를 했다지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었다.

    여기서 더 화가 나는 건, 서대문에서 만난 사신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굴었다는 것이다.

    먼저 불미스런 일이 있었다 밝혔다면 이리 화가 나지도 않았을 텐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나다 못 해 울화가 터지는 건, 진성이 역시 한마디 말도 안 했다는 점이었다.

    숨기려고 했다기 보다는 숨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신들에게 말한 것처럼, 공론화 되면 대국과의 사이가 틀어질 수 있을 거라 판단했겠지.

    하지만.

    하지만 융이 영칙서의를 중단하고, 칙사를 돌려보낼 생각을 한 건, 단순히 진성대군이 폭행을 당했고, 개인적으로 화가 나서 때문은 아니었다.

    이건 왕의 권위와도 관련된 일이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제후의 권위는 인정해준다. 애당초 제후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면, 조선이 명에 사대하지도 않았을 터다.

    그런데 종친을 폭행했다. 왕의 가족을 말이다.

    융은 일전에도 약속한 재물을 제때 내지 않은 전성군, 무산군, 봉안군을 벌하기 보다 진성을 보내 독촉했었다.

    이미 견성군을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그 상투는 친히 잘라버리기 까지 했는데 여기에 더해서 전성군, 무산군, 봉안군까지 벌해버린다면 그 스스로 종친을 탄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안 한 짓거리를 사신이 한 셈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더군다나 융은 처음부터 칙사로 환관이 내정됐단 소식에 어처구니가 없었었다.

    제대로 된 사람을 칙사로 보내달라 주청사(중국에 청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신)를 보낼 생각까지 했었는데, 대신들의 만류로 관뒀을 정도였다.

    가뜩이나 환관 칙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하는 짓거리는 더더욱 마음에 안 든다.

    이건 황제가 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제후의 권위를 갉아먹는 일에 지나지 않았는데, 부왕께선 어찌 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융은 황제의 권위를 위해 제 권위를 내줄 생각이 티끌 만큼도 없었다.

    특히 등극을 이유로 이리 푸대접을 하고 제후의 권위를 갉아먹는다면, 앞으로는 더 끌려 다닐지도 몰랐다.

    이런 정치적인 이유도 있는고로.

    “경들은 속히 돌아가서 문무백관들과 종친들에게 영칙서의를 중단하겠단 내 뜻을 알리고, 또한 대사헌은 사신에게 가서 그 일을 따져 물어라. 그리고, 예조판서.”

    “예, 전하.”

    “내 이 일을 황제폐하께 항의치 않는다면, 어떤 신민이 날 받들겠느냐. 의주에서부터 개성까지 사신이 벌였던 모든 패악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이를 진주사(국내의 일을 중국에 알릴 때 보내던 사신)로 하여금 고할 것이니 속히 정사로 누가 좋을지 생각해보고 아뢰도록 하라.”

    “아, 알겠사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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