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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15화 (21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5화>

    ***

    “아니, 이거 놓으시라고··· 나 지금 갈 거라니까?”

    “대인. 그러지 마시고 일단 제 말을 좀 들어보십······.”

    은근슬쩍 내 손목을 잡아 끄는 사신을 뿌리쳤다.

    휙!

    “왜, 또 한 대 치시게요?”

    “어찌 이러십니까······.”

    “그러는 사신은 어찌 이러십니까? 내 살다, 살다 사신한테 얻어 터지긴 또 처음인데.”

    “대인.”

    “아니, 됐다구요. 놓으시라고!”

    사신의 손길을 뿌리치고 나니 저 멀리 황 종사관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대감. 정말로 황성으로 가실 생각이신지······.”

    “간다니까. 조정에 사람 보냈습니까, 어쨌습니까?”

    “일단은 둘 보냈습니다.”

    “잘 했어요. 이제 말머리 돌립시다.”

    “대인··· 따지고 보면 우리 둘에게 잘못이 있지 않겠습니까. 서로 오해가 있어서 생긴 불미스러운 일이니 만큼······.”

    “아, 사신하고, 나. 서로에게 과실이 있다?”

    “···”

    “그럼 잘 됐네. 저기 목격자들 데리고 황성 가자니까요? 가서 황제폐하께 누구한테 더 과실 있는지 물으면 될 거 아닙니까?”

    “···”

    “아니,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칙사라며?”

    “···예.”

    “폐하의 칙서를 들고온 칙사라며? 칙사가 뭐야? 폐하를 대리하는 사람 아닙니까? 결국 칙사인 사신이 날 쳤다는 건, 황제께서 날 쳤다는 거나 다름이 없는데 지금 당장 황성으로 가서 폐하께 날 칠 만큼 원한이 있냐 여쭤보겠습니다. 그러니까.”

    “···”

    “같이 안 가실거면 사신은 저쪽길로 가시고, 나는 이쪽길로 가고. 됐지요?”

    나는 볼 장 다 봤다는 듯 말머리를 돌렸다.

    갑작스런 사태에 우물거리던 우리측 수행원들은 마지못한 척 내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사신 김환동은······.

    “대인! 대인!”

    헐레벌떡 뛰어와 내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아챘다.

    “고삐 놓으세요. 이거 위험합니다. 말이 놀라서 앞발로 사신 걷어 차기라도 하면 어쩌려··· 아, 지금 보니까 쌍방으로 몰아가려고 일부러 이러시는 건가? 내가 탄 말이 앞발로 사신 쳐버리면 이게 또 사신 말씀대로 정말 서로한테 과실이 생기니까?”

    획-!

    오해를 사기 싫었던지 김환동이 황급히 손에 쥔 고삐를 놨다.

    “어찌 이러십니까··· 부디 노여움 푸십시오.”

    “화 난 거 없다니까요? 그저 황제폐하께 따지러 가는 겁니다, 따지러.”

    “아니··· 갈 때 가시더라도 어찌 준비도 없이, 조정에 전하지도 않고 먼 길을 가려 하십니까. 제가 걱정이 다 돼서 이럽니다, 걱정이.”

    “준비는 뭐, 거치는 고을들에 들러서 물자 보급하면 되구요. 조정에는 이미 사람 보내놨고··· 걱정? 걱정은 사신이 할 필요는 없으시고. 비키세요.”

    “대인.”

    “아, 비키세요. 진짜 말이 칠 지도 몰라요.”

    “대인.”

    “왜요, 또.”

    “제가 어떻게 하면 노여움을 푸시겠습니까?”

    김환동이라 했던가.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

    ‘아니, 당연한 건가?’

    아무리 칙사라도 왕자를 때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제놈도 아찔했겠지.

    게다가, 피해자인 내가 입 닥치고 보자기처럼 가만 있는 게 아니라 북경으로 가네 마네 지랄 발광을 하고 있으니······.

    “진짜 됐구요. 폐하께서 어찌 당신 같은 사람을 칙사로 보낸 건지 내 따져 물을 겁니다. 거기서 폐하께서 감히 황제를 능멸했다고 하면 벌 받고, 아니면 푹 요양하다 오는 거고.”

    나는 가볍게 말허리를 걷어찼다.

    말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자, 김환동이 그 앞길을 막아섰다.

    “대인.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전 죽습니다······.”

    “아니, 칙사라면서요. 폐하께서 죽여도 날 죽이지, 칙사 씩이나 되는 분을 왜 죽입니까?”

    “···대인. 제발······.”

    “제발이고 나발이고···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말입니다? 이거, 폐하께서 지시하지 않고서는 사신이 이리 막나갈 수가 없습니다. 의주에서는··· 얼마랬더라?”

    “···”

    “정주랑 평양에서는? 내 조정에서 이 소식 듣는데, 이건 뭐 칙사인지 좀도둑인지······.”

    절레절레.

    “가서 폐하께서 사신한테 그러라고 시킨 건지, 그리고 사신이면 제후국의 왕자를 마음대로 쳐도 되는지, 내 따져 물을 겁니다. 내 목을 걸고서라도.”

    목을 건다는 말이 자못 비장하게 느껴졌을까?

    김환동이 울상을 짓는다.

    물론 진짜로 목 걸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게다가 내가 미세먼지의 온상인 북경을··· 아, 지금은 미세먼지가 없지.

    아무튼 그 먼 길을 내가 왜 가나?

    힘들어서라도 안 간다.

    털썩!

    “지금 뭐하십니까?”

    사신 놈이 무릎을 꿇었다.

    뜻밖의 상황에 나는 두말 할 것도 없고, 황 종사관도 놀란 눈치였다.

    나는 누가 볼까 싶어 얼른 환동이를 일으켜세웠다.

    다행히 본 사람은 나랑 황 종사관 밖에 없는 것 같다.

    “칙사라면서 그리 함부로 무릎을 꿇습니까? 이것도 폐하께 여쭤봐야겠구만.”

    “아니··· 대인. 제가, 그··· 제가 진심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만, 이 어찌 그 정성이 전달이 안 된단 말입니까. 부디 노여움 푸십시오······.”

    진짜 곧 울 것 같기라도 한 모습의 환동이다.

    이 정도가 한계인 것 같다. 여기서 더 몰아붙이면 역효과가 날 것 같은 어떤, 뭐랄까··· 밀당 마스터이자, 카사노바의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남녀간의 밀당만 그런 게 아니라 사람대 사람의 밀당도 한계치 이상 도달하면 역효과가 나잖나.

    이쯤에서 그만해야 될 것 같았다.

    난 울상을 지은 환동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못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내 모습을 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근엄한 표정처럼 비쳐질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말입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습니까?”

    “예, 암요. 어찌 아니 그러시겠습니까?”

    “내가 들어보니까, 사신의 부친께서는 조선인이라 했고, 사신도 3살인가 4살까지는 이 조선땅에서 발 붙이고 살았다는데 어찌 하는 짓이 한인(漢人)들보다 더 하단 말입니까?”

    “···”

    “아니. 그걸 떠나서 사신이란 일국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사신의 그릇된 행동으로 명과 우리 조선의 사이가 틀어진다면, 사신이 책임지시려 했습니까?”

    “송구합니다.”

    “내 설마 사신께서 무릎까지 꿇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사신께서 잘못을 했기로서니, 황제폐하를 대신해서 오신 사신을 무릎 꿇게 만들었으니 내 이 이상 일을 따지진 않겠습니다.”

    일순 환동이의 표정이 밝아진다.

    “단.”

    “···”

    “황제폐하께서 사행길에 조선의 여염집에 폐를 끼치란 특지를 내리셨던 게 아니라면, 저것들은 다 원주인에게 돌려주십시오.”

    밝아졌던 환동이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내가 말한 것들은 환동이가 여기까지 오며 뜯어냈던 뇌물들이었다.

    “왜요, 싫습니까?”

    “아, 아닙니다. 싫다니요··· 그럴 리가요.”

    “그리고 조선에 머무는 동안 더는 황제폐하께 누가 되지 마십시오. 사신이 그리 막나가면 제후국인 우리가 누굴 의심하겠으며,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약조한 겁니다?”

    “이를 말이겠습니까.”

    “어긴다면 난 그 날로 내 목을 걸고서라도 명에 갑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예.”

    “두고 볼 겝니다.”

    ***

    서대문.

    “아니, 사신이 왜 저리 고분고분 하답니까?”

    “판윤(전임). 어찌 된 영문입니까? 치계에서는 칙사가 이런저런 일로 트집을 잡아서 서북(평안도)의 재물을 모조리 갈취하려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소인도 잘 모르겠소이다··· 분명 아까 개성에서만 해도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찔러 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명에서 칙사가 오면 임금은 서대문까지 칙사를 마중 나갔다.

    임금이 나가는데 조관들이 불참한다는 건 어불성설.

    당연히 조정대신이란 자들도 모조리 서대문에 모여서 칙사를 마중 나왔는데 문제가 있었다.

    “조선국왕 전하를 뵈옵게 되니 참으로 광영이옵고, 또 익히 들어서 아시겠지만 본 사신은 조선국에서 어린 시절을 나고 자랐으니, 어찌 남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대국에서 출세하여 이처럼 국왕 전하를 뵈옵게 되니 먼저 간 아비의 모습이 눈에 아른 거리옵니다. 우리 아비도 조선에서 전하의 치세에서 복록을 누렸다면 그리 무참히 살해 당하진 않았을 것인데······.”

    너무 공손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분명 여태 조정에 전해진 치계는 칙사가 재물을 탐낸다는 게 대부분이었다.

    영접사로 간 전임 조차 칙사의 횡포가 이루 말 할 수 없을 지경이라, 조정에서 만반의 대비를 갖춰야 한다는 말을 전했을 정도였고.

    그런데 이게 뭔가?

    공손한 모습과 고상한 언행이 명조의 수재들이 모였다는 한림원에서 선발되어 온 이 같았다.

    당황한 건 대신들 뿐만이 아니었다.

    “어, 사신이··· 그, 사신이 지금 부친을 말했소만 내 일찍이 이성현에 이런 인재가 있었음을 알았다면 사신의 부친이 강을 넘도록 방치하진 않았을 텐데 참으로 애석하고, 또 미안한 일이오.”

    융도 마찬가지였다.

    “옛날에 항우가 관중을 점령하매 한생의 간언을 듣지 않고 외려 그를 죽임한 뒤에 비단옷 차림으로 고향에 군대를 몰고 나아가는 실책을 범해 결국 천하를 일통하지 못 했습니다만, 전세가 역전 됨을 알고도 고향으로 나아갔던 항우의 심정이 이해가 가옵니다. 비록 환관의 몸이나 칙사로 고국에 돌아왔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 하겠습니까? 더욱이 왕께서 환대하여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사신이 한림원에 계시다 해도 믿겠소이다. 말은 청산유수요, 목소리에는 기품이 있으니 과연 폐하께서 어찌 공을 칙사로 보내셨는지 알겠소. 황은을 입었소이다.”

    “···”

    “아, 내 너무 오래 세워두웠구려. 갑시다.”

    “예.”

    “듣기로 지나는 관문마다 결채(사신을 환대할 때 사용한 장식품)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고 하던데, 내 사과 드리리다.”

    융이 은근히 물었다.

    칙사가 오면 당연히 사신이 거치는 관문에는 결채가 설치된다.

    황명을 받들고 오는 사신을 환대함과 동시에, 황제에 대한 최소한의 예였다.

    하지만 여태 오색으로 장식한 결채를 트집 잡은 사신은 없었는데, 결채를 트집 잡은 유일한 사신이 바로 김환동이었다.

    트집 잡은 이유도 참으로 가관인데, 결채의 색깔이 왜 오색이냐는 것이다.

    결채의 색깔은 당연히 오색이니, 이는 마치, 돼지 다리가 왜 사족이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아. 그건 제가 일찍 조선을 떠난데다 환관으로 있은지 오래되어 예법에 어두워 그랬었습니다. 민망한 일이니 왕께서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융은 사신을 경계하며 임사홍을 불렀다.

    그리고 잠시 후, 사홍이 다가왔다.

    그는 사신이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사신이 지금 어떤 것 같은가? 분명 입조를 해서도 무례하게 굴 테니 만반의 채비를 갖추라 하지 않았었던가? 근데 지금 사신을 보라. 이처럼 공손한 사신은 내 접한 바가 없다.”

    “시, 신도 영문을 모르겠사옵니다.”

    그때.

    “전하.”

    “아, 부르셨소.”

    “혹 기생과 연회를 준비하셨습니까?”

    융은 사신이 무슨 트집을 잡을새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오. 내 성대하게 준비 했으니 걱정마시오.”

    “아닙니다. 내 어찌 황제의 명을 전하러 온 마당에, 제후국의 재물을 소모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폐하께 누가 되는 일이고, 새로 등극한 황제께서도 원치 않는 일일 테니 그 재물들은 모두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눠주소서.”

    꿀꺽.

    “···사, 사신.”

    “예, 전하.”

    “혹 나나 신료들이 무슨 실수라도 했소이까? 아니면 오는 길에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셨다던지······.”

    “그럴 리가요.”

    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

    ‘혹···?’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인물.

    진성이었다.

    ‘혹시 진성이가?’

    융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례한 사신에 대항(?) 하기 위해 진성이를 보낸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수비를 위한 전술과 같았다.

    아무리 무례한 사신이더라도 일국의 왕자를 함부로 할 순 없을 테고, 그나마 개성이나 파주, 고양에서는 민가에 폐를 끼치지 않겠다 싶어서 행한 전술 말이다.

    진성이 때문에 사신이 공순하게 굴 리는 없다.

    아무리 진성을 총애하고, 그 총명함에 감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지만, 옛말에 성인군자도 글을 모르고, 사납게 짖는 개는 어쩌지 못 한다 했으니 진성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하면 무슨 연유로. 흐음.’

    사신이 막나가도 문제.

    공손해도 문제.

    골치가 아픈 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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