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14화 (21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4화>

    ***

    “아, 왜 안 와.”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하지만, 기다림의 미학이고 뭐고 기다리다 얼어 뒤지시겠다.

    추위에 벌벌 떨면서 궁시렁거리자, 경덕이가 반응한다.

    “스승님. 저기 아닙니까?”

    “어디.”

    까치발 들고 고개 너머를 바라보자 과연 행렬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사람 한시간 넘게 기다리게 만들고 이제 나타나네. 얼씨구? 기어오네, 기어와.”

    꽃샘추위에 날 개성까지 불러낸데다가 사람 한 시간 넘게 기다리게 만든 장본인.

    다름 아닌 사신이다.

    사신이 오면 보통 조정에서는 영접사를 보내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의주까지 사신을 영접하러 간 영접사로 한성판윤 전임(田霖)이란 분이 계셨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으니······.

    영접사 전임이 치계를 올릴 때마다 무슨 말을 했는줄 아나?

    사신이 또 횡포를 부렸습니다.

    사신이 재물을 요구했습니다.

    사신이 기생을 요구했으나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수령을 욕보이고 객사로 돌아갔습니다.

    ···등등.

    의주에서는 의주대로.

    정주에서는 정주대로.

    평양에서는 평양대로

    아주 이 새끼가 지나가는 고을마다 쑥대밭이 됐다는 치계 밖에 없었다.

    불알도 없는 새끼가 뭔 계집은 그리 밝히고,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닌데 재물은 뭘 또 그리 탐내고, 얼마나 살이 뒤룩뒤룩 쪘으면 타고 가는 말들이 죄다 십리도 못 가고 쓰러져서 갈아치운다 하고······.

    이런 치계만 올라오니 조정에서는 치계만 올라오면 아주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에까지 이르러버렸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됐고 그 결과 구원투수로 내가 등판하게 됐다.

    아무리 막가파식 사신이더라도 설마 왕자가 개성까지 마중을 나왔는데 여전히 막나가겠냐는 논리 덕분이었다.

    “대감.”

    행렬에서 기마 1기가 먼저 뛰쳐나왔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누군지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해졌다.

    한성판윤 전임이다.

    “어떻습니까?”

    나는 다가온 전임에게 사신을 흘기며 물었다.

    이미 사신의 작태가 어떤지는 치계로 들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사신을 모시고 오는 전임에게 직접 듣는 것과는 또 의미가 다를 것이다.

    내가 묻자 전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행을 조심하셔야 할 듯 하옵니다.”

    “내가요?”

    “예. 사신이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 특지를 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임의 의견처럼 조정에서도 이런 의견이 있었다.

    사신이 막가파식으로 행동하는 건, 황제의 비호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라는.

    쉽게 말하면 황제가 우릴 길들이려는 것 아니냐는 의견인 셈이다.

    “안 그래도 조정에서도 그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대책도 마련이 됐겠지요?”

    초췌해보이는 전임이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아쉽게도 대책 같은 건 없었습니다만.”

    조정에서도 대책이랍시고 세운 게, 결국 날 보낸 정도다.

    황제의 칙사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왕자라도 보내서 사신의 패악을 좀 막아보자··· 라는 임시방편인 셈이다.

    사실 이 이상 대책이 어딨겠어?

    아닌 말로다가 자객이라도 보내서 사신 목을 쓱싹- 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대충 죽여놓고 호환을 당했다고 얼버무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아··· 그렇습니까. 큰 일입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하나 싶다.

    “치계에 차마 못 담은 내용도 있을 것 같은데요.”

    치계는 긴급 보고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긴급히 보고하는데 자잘한 사안까지 보고 할 수는 없을 테고, 당연히 자잘한 패악은 언급을 안 했을 것이다.

    “그게······.”

    은근히 묻자 전임의 입이 봇물터지듯 열린다.

    본인이 가져온 물건을 강매해 차익을 남긴 일.

    아전을 폭행한 일.

    역원의 역마와 관아의 관마들을 강탈한 일.

    등등.

    전임은 사신의 패악을 쉴새없이 토해냈다.

    “개새끼네.”

    그걸 다 들은 나는 한마디로 요약을 시켰다.

    개새끼.

    “대감. 언행을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사신은 특히 트집을 잘 잡는지라, 수령들이 치룬 곤욕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걱정마세요.”

    그러라고 나 보낸 거니까.

    나는 말허리를 가볍게 걷어찼다. 말이 가볍게 투레질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나는 강정왕(명에서 성종에게 내린 시호)의 적자인 진성대군 이역이라 합니다.”

    자존심 상해서 굳이 말에서 내리진 않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흐음.”

    기세 싸움이라도 하자는 걸까.

    못 마땅하단 눈초리로 날 흘긴 사신 역시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

    “공(公)의 부왕이신 강정왕은 그 어진 이름이 본시 우리 중국에도 드러났었는데 어쩌다 나라가 이 꼴이 났는지 모르겠소이다.”

    사신은 아마 나에게서 ‘오시는 동안 불편한 거라도 있으셨습니까?’ 라는 말을 기대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내 부왕을 언급할 리가 없다.

    하지만 난 사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들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내 부왕이신 강정왕의 어진 덕은 들으시고, 내 형님이신 금상 전하의 어진 덕은 듣지 못 한 듯 하니, 똑같이 궁형(성기를 없애던 형벌) 받은 건 사신과 사마천이 같을텐데, 듣는 귀는 다른 모양입니다.”

    오히려 고자 새끼라고 눈치를 줬다.

    “대감. 언행에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내 말에 깜짝 놀란 건 사신이 아니라 오히려 전임이었다.

    그는 옆에서 귀엣말로 언행을 자제해달라 부탁했지만 천만에.

    언행을 자제시킬 생각이었다면 조정에서 날 보내려고 했을 리가 없다.

    오히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개념으로, 또라이는 또라이로 상대시키려고 날 보낸 게 분명하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솔직히 말하면 대신들이 그런 의도로 날 보냈는지는 모른다. 근데 형님은 너가 잘 구워 삶아 보내시라면서 날 등떠미셨다.

    잘 구워 삶아 보란 게, 너가 대신 비위 맞추라는 건지··· 또라이처럼 굴어서 제 풀에 지치게 만들라는 건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난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또라이를 또라이로 상대시키려고 형님이 날 보내셨다면, 정상인처럼 굴어줄 순 없다.

    “입이 그리 험하시면 뒷날 무슨 면목으로 강정왕을 지하에서 뵙겠소이까? 강정왕께서는 사신을 이리 대하지 않았소이다.”

    “대행황제 폐하도 우릴 이리 대하지는 않았는데요.”

    “···”

    탐색전에선 내가 이긴 것 같다.

    사신을 보니 방심하다가 한 대 쳐맞은 몰골이다.

    이럴 땐 주도권을 빼앗기면 안 된다.

    “아무튼 가시죠. 서울까진 제가 뫼시겠습니다.”

    ***

    “저기요.”

    “음?”

    “저건 뭡니까?”

    말머리를 나란히 하던 나는 검지를 행렬 끄트머리에 가리켰다.

    탐색전에서 졌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개성에서는 한 건 못 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임진나루에 오는 동안 말 한 마디 없이, 꿀꿀해 보이던 사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면 모르오? 짐꾼들이잖소.”

    “짐꾼들인 건 아는데 제 말은 왜 짐꾼들이 사투리를 쓰냐는 거지요.”

    꽁해 있던 사신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서울까지 가면 뻘쭘할 것 같아서 행렬을 한바퀴 돌아봤다. 그런데 별안간 사투리가 들려오지 않겠나?

    사투리.

    별 거 아니라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존나 별 거다.

    이건 마치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이북 사투리가 들려온 것과 흡사하다.

    “아니, 초면에 무례하는 건 내 공의 지위를 생각해서 참았소만 이제는 짐꾼들이 어쨌다고 무례하게 구는 거요. 영접사는 어딨소이까! 영접사! 영접사!”

    어미 잃은 아기새처럼 영접사를 찾는 사신이었다.

    “영접사는 아까 사신께서 개성부에 들렀을 때, 어떻게 한 건 해볼라고 눈알 굴리는 모습보고 학을 떼시면서 먼저 가셨소.”

    “뭐라? 한 건?”

    “아무튼 왜 의주 백성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겁니까? 그것도 짐꾼으로.”

    별 거 아닌 사투리가 존나 별 거가 된 건, 단순히 짐꾼들이 사투리를 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사람들이 의주의 백성들이란 점이 문제였다.

    사신이 끌고 왔다는 소리가 되니까.

    “내 짐이 많아 의주목사에게 부탁을 했더니, 목사가 붙여줬소이다. 그것도 문제요?”

    “문제지.”

    “무, 문제지? 난 칙서를 모시고 온 칙사요! 지금 내가 환관 출신이라 하여 무시하시는 것 같은데,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할 것이외다!”

    “앞으로 처신 똑바로 할 테니 저 사람들은 돌려 보내겠습니다.”

    “아니, 저자들을 돌려 보내면 짐들은 어쩐단 말이오?”

    으쓱.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신이 알아서 할 문제죠.”

    “허. 지금 공은 날 환관 출신이라 하여 내심 무시하는 마음이 있으신가 본데··· 누차 말했다시피 칙사를 이리 대하는 예는 없었소이다. 내 예궐하는 즉시 이 일을 따져 묻겠소.”

    “따져 묻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일단 저 사람들은 돌려 보내지요.”

    라고 통보하듯 말한 나는 행렬 끄트머리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예의 의주 백성들에게 돌아가도 된다 말을 했다.

    의주 백성들은 긴가민가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내 눈치를 살피는 의주 백성들에게 전하께서 허락하신 일이니 돌아가라고 했다.

    “경덕아.”

    “예, 스승님.”

    “너가 책임지고 이 사람들 데리고 의주목에 데려다 줘라. 할 수 있지?”

    “알겠습니다.”

    나는 경덕이를 통솔자로 삼고, 군사 몇 명을 붙여줬다.

    그리고 다시 행렬의 앞으로 다가가자.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오?”

    “가당한 일은 아니지만 부당한 일도 아닙니다.”

    “난 칙서를 모시고 온 칙사요! 지금 내가······.”

    “환관 출신이라 하여 무시하는 것 같은데, 라고 할 참이시지요? 고만좀 합시다. 그거 한 번만 더 들으면 서른 여섯 번 듣습니다. 무슨 사람이 자격지심이라도 있나. 툭하면 환관이라서 무시하는 거냐 어쩌냐··· 귀에 딱지 않겠습니다, 진짜.”

    사신이 몸을 부들부들 떨어댄다.

    그러더니 말고삐를 잡아챘다.

    말이 투레질과 멈춰섰다.

    “내 공의 무례에 한 발 자국도 더 나아갈 수가 없겠소이다!”

    내가 너무 심했나?

    ‘는 개뿔!’

    원래 나라든 사람이든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

    사신이 올 때 마다 쩔쩔 매니까, 이 환동이 놈도 패악질을 부리는 거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관리들은 입하나 뻥긋 않고 굽신거리니까 이놈이 더 기고만장해 버린 거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이놈.

    더 갈 수 없겠다고 뻗대는 게,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아마, 개성까지 내려오는 내내 그랬을 거다.

    개성까지 내려오는 내내 영접사 전임이 시달렸단 셈이지.

    또, 그 때마다 전임은 사신을 살살 어린아이 구슬리듯 타일러서 갈 길을 재촉했을 건데, 난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러기가 싫었다.

    “그럼 가지 마시던가. 황 종사관!”

    내가 개성까지 마중을 나가면서 형님이 내게 붙여준 군사는 기마 20기다. 황 종사관은 그 20기의 기마들을 통솔하는 지휘관이었다.

    “예, 대감!”

    “사신이 못 가신다고 하니 우리라도 돌아가세. 얼른 배 띄우게.”

    “예?”

    “말 못 들었나. 얼른 배 띄워.”

    “하, 하오나 사신께서······.”

    “띄우라면 띄워!”

    “아, 예!”

    황 종사관이 임진나루의 사공들에게 달려간 사이.

    나는 사신에게 다가갔다.

    사신은 어처구니 없는 내 명령에 어이가 없다는 듯 날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내려오면서 영접사 전임이 굽신거리니까, 조정에서 아예 사신을 떠받들고 계신 줄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가 떠받드는 건 칙서지, 사신이 아니오. 사람이 착각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지금 그게··· 그게! 칙사한테 할 소리란 말인가!”

    사신이 버럭 소리치자, 나는 말에서 내렸다.

    저벅저벅.

    말에서 내려 사신에게 다가간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잠깐 고민했다.

    이걸 한 대 쳐, 말어? 하고.

    근데 아무리 또라이VS또라이여도 칙사를 치는 건, 무리수 같았다.

    주먹은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대신.

    “아, 에, 이, 오, 우.”

    입을 좀 풀었다.

    “칙사한테 못 할 소리 한 김에 내 한마디만 더 합시다. 지금 내가 사신을 보아하니까, 칙서 전하러 온 게 아니라 어떻게 한바탕 크게 해먹을 생각으로 온 것 같은데··· 칙서 됐으니까, 돌아가시오. 사신이 돌아가도 조정에는 내가 잘 말씀 드릴 테니까, 그냥 돌아가. 이거, 사람이 남의 나라에 와서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왜구들도 그렇게는 안 합디다!”

    말하고 보니 이번에는 사신이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왜, 화 나십니까?”

    “···”

    부들부들.

    나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럼 한 대 치시던가. 자, 치시오. 쳐.”

    “이, 이, 이······.”

    “치라고 갖다대줘도 못 치네. 칠 깜냥도 없으면서 부들거리긴.”

    비아냥거리던 그때.

    하늘이 번쩍! 거렸다.

    동시에 얼얼한 통증도 전해졌다.

    이 미친 놈이 치라니까, 정말 쳐버린 거다.

    “쳐, 쳤어?”

    본인이 쳐놓고도 깜짝 놀랐는지 사신은 내 얼굴과 제 주먹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아니, 그, 그게······.”

    “지금 아무리 칙서 모시고 온 사신이라지만, 내가 그래도 왕자의 지위에 있는데 쳤어?! 야, 황 종사관!”

    멀리서 사공들을 부리고 있던 황 종사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불러 계시옵니까, 대감.”

    “말머리 돌려. 우리 황성으로 간다. 사람 하나 조정에 보내서, 진성대군이 사신한테 한 대 맞았고 이거 황제께 따지러 간다고 전해.”

    “예? 가, 갑자기 말이옵니까?”

    “이거 사신이 아니라 완전 깡패야, 깡패. 황제께서 뭐 이따위 놈을 칙사로 보냈어? 나 지금 당장 황성으로 가서 이 일 따질 거니까, 잔말 말고 얼른 조정에 사람 보내. 얼른!”

    어리둥절해하던 황 종사관은, 내가 ‘얼른!’ 소리치자 그제야 허둥지둥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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