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13화 (213/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3화>

    ***

    “옛 선비들이 말하기를 극기(克己)란 모름지기 편벽되어 극복하기 어려우니 인(仁)으로서 극복하는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이 극기를 깨닫는 것은 결국 남의 도움을 받아서는 아니 된단 말인데 극기가 부족하면 신중함이 부족해지고, 신중함이 부족하면 근신함이 지나치게 되고, 근신함이 지나치면 결단이 부족하게 되옵니다. 하물며 진성대군은 어쩌겠사옵니까? 진성대군은 비록 덕이 있지만 스스로 극기를 극복하지 못 했으니 국본을 보좌하는 일은 온당치 못 한 일이오며······.”

    후비적후비적.

    “전하께서 심사숙고 끝에 종사에 이롭다 판단되어 대청을 결정하셨겠습니다만, 본시 대청은 종사에 이롭지 못 한 일이옵니다. 전하의 일신(一身)이 옥체라 불리니 이는 전하의 일신이 종사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옵니다. 한데 지금 세자에 대청을 맡긴다면 종사의 주체는 어찌 되는 것이겠으며, 대의가 어찌 변질 되는 것이겠사옵니까? 전하께서는 일찍부터 성직(거짓이 없음)하셨는데, 먼 훗날 오늘날을 되돌아보면 어찌 괴로움이 없겠습니까? 부디 바라건대······.”

    후비적.

    요즘 잔소리들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다.

    진성이는 이런 큰 귀지들을 왕건이라 부르던데, 진성이 표현을 빌리면 큼지막한 왕건이가 딸려나왔다.

    “지금 밖에서 재잘거리는 이들은 누구인가?”

    새끼손가락에 딸려나온 귀지를 툭- 튕겨낸 융이 상선에게 물었다.

    “헌납 김언평(金彦平)과 장령 권헌(權憲)인 줄로 아뢰옵나이다.”

    “아직도?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가?”

    “족히 두 시진은 지났사옵니다.”

    “허. 이러다 귀에 딱지가 앉겠군.”

    “돌려 보내오리까?”

    “돌려 보낸다고 해서 돌아갈 작자들이면 애당초 진을 치지도 않았겠지.”

    그건 그랬다.

    사흘.

    친정을 감행하겠다고 선포(?)한 지 사흘이 지났다.

    지난 사흘 전부터 사헌부면 사헌부, 사간원이면 사간원, 홍문관이면 홍문관··· 죄 몰려와서 성토를 해댔다.

    첫째날은 사헌부에서.

    둘째날은 사간원에서.

    셋째날은 홍문관에서.

    셋째날인 오늘은 꼭두새벽부터 홍문관원들이 진을 쳤었다.

    참다 못 한 융은 결국 금군을 동원해 강제 해산(?) 시켰는데, 그들을 강제 해산 시키자마자 헌납 김언평과 장령 권헌이 멍석을 깔고 읍소를 하기 시작했다.

    상선 말로는 진을 친 지 벌써 두 시진이라니 과연 말로 타이른다고 해서 돌아갈 작자들은 아닌 것이다.

    “그보다, 내 뭘 더 챙겨가야 되려나······.”

    원래의 융이었다면 밖에서 직언이랍시고 귀 아프게 떠들어대는 저 언관 놈들을, 금군을 이용해 쫓아내고도 남았을 터였다.

    실제로 오전에는 홍문관원들이 질질 끌려 나갔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건, 속된 말로 초치기 싫어서였다.

    지금 그는 일종의 장부를 작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친정을 나가면서 챙겨 갈 물품들을 정리한 장부 말이다.

    기대에 부풀어서 정리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비명이 들려온다면 확실히 부정 탈지도 모를 일이다.

    “뭐가 빠진 것 같단 말이지··· 흐음.”

    지난 사흘간 정리했으니 어지간한 건 빼먹지 않고 다 장부에 작성했는데, 뭔가가 빠진 느낌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편전에 납실 시간이시옵니다.”

    “편전에? 어찌?”

    “···칙사 문제로 패초를 보내시지 않으셨사옵니까.”

    “아! 맞다! 내 깜빡했구나. 어서 가자.”

    “예.”

    융은 강녕전을 나와 편전으로 향했다.

    과연 편전에는 패초를 받고 입궐한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무아의 상태로 서책을 읽다 보니 미처 경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말았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아니옵니다, 전하.”

    “영상이 그리 말해주니 내 마음이 놓인다. 그래, 경들도 알겠지만 지금 칙사가 의순관(의주에 있는 객사)에 머물고 있다. 칙사의 입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을 하다 융의 머리에 번뜩이는 뭔가가 있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일월오봉도가 보였다.

    “상선! 상선!”

    갑작스럽게 상선을 찾는 임금에 대신들에 어리둥절해하던 즈음.

    상선이 편전에 들었다.

    “불러계시옵니까, 전하.”

    “내 일월오봉도도 챙기라는 명을 내렸던가, 아니 내렸던가?”

    “그런 분부는 없으신 줄로 아옵니다.”

    “그럼 이것도 따로 챙겨야··· 아니지. 경들은 들어라.”

    “···”

    “내 궁고도에 친정을 나가 파진을 하게 되면 이 일월오봉도를 진중에 세워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게 좋겠는가, 아니면 용기(임금의 깃발)만 세우는 게 좋겠는가?”

    “이, 임금의 행차나 진연(進宴)에는 일월오봉도를 세우니 세조대왕의 친정에 나가실 때에도 챙긴 걸로 아옵니다.”

    “음. 그럼 이 일월오봉도도 챙겨가야겠다.”

    “···”

    “아. 내 추태를 보였구나. 아무튼 칙사의 입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으니, 비록 우리가 말하지 않는다면 사신이 봉해위의 존재를 어찌 알겠냐만 혹시라도 사신이 봉해위의 존재를 알게 되면 뭐라 설명하는 게 좋겠는고?”

    “가뜩이나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여 명조에서는 신경이 곤두서있을 것이옵니다. 봉해위가 중국을 자극 할 수도 있으니 도적을 토포하기 위한 군대라 함은 어떠시옵니까?”

    “음. 하지만 도적을 토벌하기 위한 군대치고 군기가 정연하다는 사실을 칙사가 알 수도 있을 텐데? 참의.”

    육조참의가 있었지만 지금 융이 호명한 사람은 예조참의 권인손이었다.

    “예, 전하.”

    “경이 일전에 중국에 다녀오면서 말하길 이번에 오는 칙사가 김환동(金煥東)이라는 조선 출신 환관이라 하였다. 경이 보기에 이는 새로운 황제가 등극해서 우리의 충심을 시험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새 황제가 김환동을 총애하기 때문인가?”

    중국은 때때로 환관을 칙사로 보내곤 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속된 말로 조선을 길들일 필요성이 있을 때마다 환관을 보내곤 했다.

    융이 말한 충심 시험이란 건 바로 그것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것까진 신도 알지 못 하옵니다. 다만 신이 연경(베이징)에 머물면서 칙사로 김환동이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알아보매, 탐욕이 크다 들었사옵니다. 이를 통해 본다면 전자가 아닐지요?”

    “흐음. 하긴, 환관도 환관 나름인데 거기에 조선인 출신이니··· 그럼 뭐라고 설명을 해야하겠는가?”

    “호환이 기승을 부려 착호(捉虎)를 위한 부대라 설명한다면 납득 할 것이옵니다.”

    “착호를 위한 부대?”

    “예. 특히 김환동이 조선 출신 환관이라 하니, 신이 듣기로 3살 때 아비와 조부를 따라 압록강을 넘은 걸로 아옵니다.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만, 우리 조선에 호환이 막대하단 건 모르지 않을 테니 이를 잘 설명한다면 납득을 하지 않을는지요?”

    “으음. 그럼 그건 그리 하도록 해야겠고··· 아, 그리고.”

    “하교하시옵소서.”

    “지금 칙사가 서울에 들면 필히 유구국 사신과 조우하게 된다. 내 볼 때, 두 사신이 조우해서 이로울 게 전혀 없는 듯 한데 경들의 뜻은 어떤가?”

    여기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사실, 아주 상식적인 문제기도 했다.

    굳이 두 나라 사신을 한 자리에 둬서 이로울 게 뭐가 있겠는가?

    유구국 사신의 입이 무겁다 할지라도 그 수행원들이 말실수를 할지 몰랐다.

    “혹 두 나라 사신이 만나게 되면 논란이 생길지 모르니 유구국 사신은 속히 하직 시키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그럼 그리해야겠다. 한데 참의.”

    “예, 전하.”

    “칙사는 이번에 칙사로 오는 환관이 탐욕스럽다 했는데 성품은 어떠한가?”

    “김환동은······.”

    ***

    “난 칙서를 모시고 온 특사요. 지금 내가 환관이라 하여 무시하는 거요, 뭐요?”

    김환동이 툴툴거리자 의주목사 심형(沈亨)은 안색부터 어두워졌다.

    칙사가 의주에 도착해 의순관에 머문지도 벌써 이틀.

    그 이틀 동안, 내가 환관이라 무시하는 거냐 마냐는 말을 정확히 열 세 번째 들었다.

    사람에게는 학습효과란 게 있다.

    열 세 번 학습(?)을 하고 나니 저 말이 어떨 때 하는 건지는 안 듣고도 알 지경이었다.

    “혹 무엇이 마음에 안 드시오?”

    “그 말투.”

    “···”

    “내 아비가 비록 이성현(利城縣) 출신으로, 조선에 살던 당시에 역졸(驛卒)로 살았다지만 나는 명에서 나고 자랐소이다. 지금 목사의 말투는 내가 역졸의 자식인데다 환관이라 내심 무시하는 기저가 마음에 깔렸기 때문인 것이오. 아니오?”

    이번에는 말투가 문제였나 보다.

    칙사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쉰 심형이 말했다.

    “처음 사신을 만나 뵀을 때, 사신께서 나는 조선 출신이니 참으로 정겹다, 날 편히 대해달라, 하셔서 친근감을 느껴 그리 했던 것인데, 민망하게 됐습니다. 송구합니다.”

    “사람이 예의상 하는 말을 진담으로 듣는 건 또 뭐요?”

    “송구합니다.”

    “크흠. 내 아침에 부탁했던 건?”

    “가져왔소··· 아니, 가져왔습니다.”

    “어디 좀 봅시다.”

    환동은 심형을 따라 객사를 나섰다.

    객사 밖에는 갈기에 윤기가 흐르는 준마 한 마리가 여물을 먹고 있었다.

    “난 2필을 말씀 드렸을 텐데?”

    “그게, 사신께서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하는 말이 관내에 없는지라······.”

    “여염을 뒤지면 나올 거 아니오?”

    “하지만 어찌 사신을 접대하는 일로 여염에 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사신께서 너그러이 이해를 해주시면······.”

    “아니, 목사! 지금 그 말은 내가 말을 갈취라도 한다는 말로 들리오? 내 황도에서 가져온 말들이 지금 지치고 기력이 쇠해 있으니 잠깐 빌려가겠다는 게 아니오! 내 돌아가는 길에 어련히 돌려줄까. 그런데 여염에 폐를 끼친다 하면··· 허, 참.”

    “그게 아니오라······.”

    “그게 아니면 뭐요. 역시 내가 환관이라 하여 무시를 하는 것이렷다?”

    자격지심일까, 아니면 새로 황제에 등극한 황제에게 지시를 받은 걸까.

    어쩌면 둘 다가 아닐까, 심형은 생각했다.

    “···어찌 제가 칙서를 모시고 온 사신을 무시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노여움 푸십시오.”

    “내 지금 목사가 대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틀은 더 머물러야겠소이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 떠나기로······.”

    “왜, 내가 의주목 관고를 다 털어갈까 겁이라도 나시오?”

    “아, 아닙니다. 다만 이미 사신께서 내일 상경하겠다는 뜻을 치계로 올려보냈던 터라······.”

    “이틀 뒤에 출발할 것이니 계집들이나 좀 불러오시오.”

    “···예.”

    한숨을 내쉰 심형은 아전들을 시켜 관기들을 의순관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심형이 최대한 선별한 의주 기생 열둘이 의순관에 도착했다.

    기생들이 줄지어 환동에게 인사를 올리자, 환동은 찬찬히 기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저 아이는 박색이니 빼시오.”

    “저 아이는 내 볼 때 이미 목사가 건든 듯 하니 내 어찌 데리고 놀 수 있겠소. 빼시오.”

    “저 아이는··· 아니, 아이가 아니라 이미 손주까지 낳았을 것 같은데 어찌 데려왔소. 빼시오.”

    빼시오, 빼시오, 빼시오가 연달아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기생 넷이 남게 됐다.

    “넌 몇 살이냐?”

    “열 여섯이옵니다.”

    “넌 몇 살인고?”

    “열 다섯이옵니다.”

    “그럼 너는······.”

    남은 기생 넷의 나이를 각각 물은 환동은 가장 나이가 어린 기생 둘을 데리고 의순관으로 들어갔다.

    의주판관 조현범(趙賢範)은 그런 환동을 못 마땅한 눈초리로 흘겼다.

    “저리 토악질이 나오는 사신은 실로 오랜만입니다.”

    “흐음. 우리야 며칠만 더 참으면 될 테지만, 조정이 문제일세. 비위 맞추기가 여간 쉽지가 않을 텐데······.”

    심형과 현범의 한숨과는 대비되게, 의순관 안에서는 환동의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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