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2화>
***
지루해.
아니, 이 음란마귀들아!
그 지루 말고······.
따분하다고.
정말 따분하다.
“하아암.”
하품이 절로 나온다.
여긴 경회루다. 이제 척하면 척이고, 탁하면 탁이니 왜 경회루에 왔는지 대략 눈치는 깠을 거라 믿는다.
맞다.
연회 때문이다.
아까 편전에서 잠깐 국서를 두고 왔다고 사신들이 동평관으로 돌아갔더랬다.
사실 국서를 두고 왔다는 말은 믿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사실이 그렇잖아?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자국의 왕이 쓴 문서를 깜빡 두고 올 사신은 없으니까.
게다가 내가 오키나와에서 본 우미라는 분은 철두철미한 사람같았다. 그런 철두철미한 사람이 쇼신왕의 국서를 두고 왔을리는 더더욱 개연성 없지.
그래서 편전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었다.
형님이 친정을 선포(?)해서 사신이 당황한 거고, 그래서 지금 잠깐 머리 식힐 겸 돌아간 거다··· 아니다, 사신이 정말 국서를 놓고 온 거다······.
논쟁이 일자 형님은, 사신 국서 두고 온 거 맞으니까 이제 연회나 준비하라고 명을 내리셨다.
그리고 시작 된 연회.
말했다시피 따분하다.
다행히 나만 그런 건 아닌지······.
“노래란 본시 흥을 돋우는 것인데 어찌 흥이 안 돋는 것인가.”
옆에서 형님이 궁시렁거리셨다.
옆자리란 말에 눈치 챘겠지만 지금 내 자리는 어좌를 제외하면 상석 중의 상석이다.
세자 황이와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이니까.
한참을 궁시렁거리던 형님은 더 이상은 참지 못 하겠는지 악공들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노래 좀 바꾸라는 무언의 제스쳐였다.
눈치 빠른 악공들의 지휘자(?) 전악(장악원 정육품 관리)이 무언의 제스쳐에, 서둘러 노래를 바꿨다.
바뀐 노래는 천년만세곡(千年萬世曲)이라는, 연례악의 일종인 노래였다.
물론 지루하기는 이전에 악공들이 연주한 보허자(步虛子)랑 같았다.
천년만세곡이 아주 조금 더 나은 수준이랄까.
“그만, 그만, 그만.”
형님이 스톱을 외치자 연주가 뚝 끊겼다.
“···”
만인들의 시선은 형님에게로 집중됐다.
사신으로 온 우미 씨도 당황한 모습이 역력하다.
“사신들이 얼마나 연주가 지루하면 술잔에 술이 비었겠는가?”
“···”
“사신은 앞으로 나오시오.”
통사가 통역하자, 우미 씨가 당황한 듯 움찔거리다가 허리를 수그린 채로 형님의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형님이 쪼로록- 우미 씨의 술잔에 술을 따르자······.
삐이, 삐.
악공들이 여민락만(與民樂縵)을 연주했다.
원래 임금이 연회에서 이렇게 술을 따르면 연주가 뒤따르는 게 연례의 법도기 때문이었다.
다만.
쾅쾅.
“그만하라지 않던가.”
“···”
신경질적으로 악공들을 흘긴 형님은 사신에게 미안하단 말을 전한 뒤, 제신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흥이 전혀 없으니 연회가 연회 같지가 않구나. 누가 창(唱)하여 흥을 띄울 이가 있겠는가?”
한마디로 누가 노래라도 불러서 분위기 좀 띄우라는 말씀이시다.
“이계동이 죽지사(竹枝詞)를 잘 부르는 줄 아뢰옵나이다.”
“그래? 하면 이판이 죽지사를 창 해보아라.”
이계동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자신이 있기 때문에 사양도 안 하는 것 같았다.
들고있던 술잔을 내린 나도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이계동에게 집중했다.
기생이나 한량들이 노래 하는 건 봤어도 어딘가 근엄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대신들이 노래하는 건 한 번도 못 봤거든.
-건-곤이! 불노-월장-재- 하니, 적-막-강산-이······.
기대감은 산산조각 났다.
“···이판이 창을 아주 잘 하는구나. 잘 들었으니 그만해라.”
“···예, 전하.”
이계동이 노래하다 말고, 뻘쭘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음, 이게 뭐랄까··· 형님 말씀처럼 이계동이 노래를 못 부르는 건 아니다. 분명 아닌데··· 분위기를 띄우기엔 몸이 간질거릴 만큼 느린 노래다.
이러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설 수 밖에.
“크흠.”
형님도 눈치 주시는 거 보니, 정말로 나설 수 밖에 없겠다.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분위기 띄우는 노래는 한정적인데.
랩은 안 된다.
여기 사람들 놀라 까무러칠 거다. 무엇보다, 난 랩을 못 해.
‘적당히 시대적으로다가 맞는 가사면서도 분위기를 띄울 만한 게······.’
붉은 노을?
그래, 이문세의 붉은 노을이 좋겠다. 그러고 보면 이 곡도 참 띵곡이었지.
자, 띵곡 선곡은 끝났다.
“전하. 제가 한 곡 불러도 되겠사옵니까?”
“도제조가 말인가? 이를 말이냐, 어서 창하라.”
만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노래하는 건 아무래도 부끄럽다.
하물며 반주도 없이 노래하는 건 더 그렇다.
나는 무대(?)로 나가기 전에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아이러니하게도 맨정신에 하려니 삑사리 날 것 같아서 말이지.
“무슨 노래를 부르려 함인가? 전선을 간다인가, 아니면 멸적(滅敵)의 횃불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진짜 사나이인가?”
“군가가 아닙니다.”
“그래? 어서 창해보라.”
“큼큼.”
목을 가다듬고 나니 손이 허전했다.
아까 원샷하고 비운 술병에 숟가락을 꽃아서, 마이크 대용으로 손에 감았다.
이제 좀 낫네.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면~ 슬픈 그대 얼굴♪ 생각이나~ 고개 숙이네 눈물 흘러~ 아무 말 할 수가 없지만♪ 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 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없는 노을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최선을 다해 붉은 노을을 불렀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
“···”
적막이 감돌았다.
그리고.
짝짝짝짝-!
적막을 깬 건, 상석에서 터져나온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였다.
***
짝짝짝짝-!
“헙.”
우미는 싱글벙글해 하던 조선왕이, 왕자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미친 듯 박수를 쳐대자, 헛바람을 들이키며 손뼉을 마주쳤다.
“참으로 기이하고 괴상한 노래입니다.”
안곤의 말에 우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국에서 왕자를 봤을 때도 확실히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너무 뛰어나, 범부에 불과한 자신의 사고 영역으로는 판단 할 수 없거나.
지금 보니 전자 같으면서도 후자 같다.
뻔히 왕이 주재하고 있는 연회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는 건··· 뭐, 그래. 이건 왕이 시킨 것이니 그러려니 한다만 종친의 신분으로 술을 병째 들이키는 건, 역시 상식 밖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노래.
안곤의 말처럼 노래가 참으로 기이하고 괴상했다.
다만 더 기이하고 괴상한 건, 왕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저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거렸다는 점이었다.
희한하고 괴상한 일이었다.
“그보다, 지금 연회에서의 조선왕을 보면 무슨 의도를 갖고 친정을 언급한 건 아닌 듯 합니다.”
“네 생각도 그러하냐?”
“예. 즉흥적이고, 그저 예탁(예측)이 불가한 위인인 듯 합니다.”
우미는 안곤의 말에 동의했다.
연회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왕이 무슨 의도가 있어서 친정을 언급한 줄로 알았다.
그게 상식적인 일이고.
하지만 막상 연회에서 본 조선왕은, 왠지 몰라도 정말 별 뜻 없이 친정을 언급 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확신처럼 강하게 들었다.
매사에 즉흥적이고 예법에 얽매이지도 않고 남 눈치를 안 본다.
과연 저런 성품이시니 친정을 운운했을지도.
게다가······.
“지, 지금 왕께서 뭘 하고 계시는 건가?”
안곤과 대화를 나누다, 조선왕이 보인 이상행동(?)에 당황한 우미가 통사에게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한가운데로 나아가더니 갑자기 덩실덩실 춤사위를 추고 있었다.
“처, 처용무라는 무용이라 하옵니다.”
“처용무?”
“예. 왕께서 즐겨하는 춤사위라 하온데, 간혹 감정이 고조되시면 저리 춤을 추신다 하옵니다.”
“허어.”
확실히 남 시선 따윈 신경쓰지 않는 왕 같다.
사신이 보건 말건 난데없이 춤사위라니.
난데없는 춤사위에 어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당혹스럽기까지 했지만, 우미가 우려했던 건, 조선왕과 그의 신하들이 가진 의도였다.
지금도 왕의 춤사위에 맞춰 무슨 괴상망측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조선 왕자.
당장 저 조선 왕자가 류큐에 머물 때도 얼마나 많은 류큐인들을 쥐락펴락했던가?
심지어 그가 모시는 왕까지도.
그런데 저게 조선왕의 실체라면, 그래서 별 뜻 없이 정말 호의로 친정을 감행하려는 거라면 류큐에 불리할 일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이롭게 작용하면 작용했지.
명색이 일국의 왕이 나서는 정벌이다.
왕들이란 결국 업적에 열광하기 마련이고, 특히 정벌은 그 업적에 크게 도움이 된다.
조선으로서는 왕이 나서는데다, 왕의 업적으로 삼고자 할 테니 미야코 오랑캐들의 정벌에 총력을 기울일 터였다.
최정예군들이 왕의 호위병력으로 따라 붙을 테고, 그리되면 못 해도 기백의 추가 병력이 원병으로 파병 될 것이었다.
그뿐인가?
조선왕의 위엄을 빌릴 수도 있었다.
미야코 오랑캐들은 조선왕이 정벌에 나섰다는 소식에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낄 테고, 그건 류큐가 상대할 왜구들도 마찬가지다
막말로 조선과 명이 동시에 류큐를 위해 나섰다고 거짓 선전을 한다면, 미야코 오랑캐들과 왜구들은 싸우기도 전에 사기가 꺾일 것이다.
결국 정말 조선왕이 호의로 나서주는 거라면, 류큐로선 손해 보는 게 전혀 없다.
오히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에 가깝다.
‘문제가 있다면······.’
단 하나다.
조선왕이 미야코 오랑캐들을 정벌하다가 눈먼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목숨을 잃거나.
하지만 설마 그리 될까?
미야코 오랑캐들이 암만 호전적이라 한들, 아까 본 봉해위의 기세에는 필적 할 수 없을 것이다.
잠시 후.
결심을 굳힌 우미가, 여전히 괴상한 노래를 부르는 조선왕자와, 그 괴상한 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조선왕을 흘기며 통사에게 말했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 송구스러운 일이나 조선왕께 아까 말씀하신 친정에 관해 얘기좀 하고 싶다고 전하게.”
***
연회가 끝나자마자 재상들은 편전에 모여들었다.
원래 연회를 마친 직후 재상들이 편전에 모이는 일은 아예 없었다.
애당초 연회란 게 못 해도 며칠전~몇주전부터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 저녁 일정은 모두 비워놓는 셈이랄까.
그래서 연회가 끝나자마자, 그것도 삼경이 친 야심한 밤에 재상들이 편전에 드는 일은 없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연회가 파하자마자 모두 편전으로 모이라는 왕의 특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짐작 못 하는 대신들은 없었다.
연회 때, 사신은 융의 친정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친정에 나서도 괜찮다는 우회적인 표현이니, 닳고 닳은 대신들이 한밤중에 자신들을 모이라 한 왕의 뜻을 모를리 없었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아까 사신이 한 말을 경들도 들어서 알겠지만 내 결국 친정에 나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하오나 사신은 연회를 베풀면서까지 본인들을 후대한 데 모자라 전하께오서 친히 나서주겠다는 그 정성에 감사한 것이옵니다.”
사홍이 사신이 감사한 건, 연회 때문이라고 마지막 발악(?)을 했지만 이미 불콰하게 취할대로 취한, 또 친정 생각에 기분이 들뜰대로 들뜬 융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발악이었다.
게다가 이미 사신에게는, 진짜로 간다? 진짜로 와도 돼, 라는 확답까지 받은 상태였으니 표현 그대로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다.
“이미 이야기가 끝난 일이니 좌상은 왈가왈부 하지마라.”
사홍도 이미 체념한 것인지 고개를 푹 수그렸다.
“다만 내 경들을 이 야밤에 불러들인 것은 말이다.”
“···하교하시옵소서.”
“내 서울을 비운 사이에 대청 할 세자를 어찌 보좌케 하면 좋을지를 논하기 위해서다.”
“전하의 뜻은 어떠시옵니까?”
“나 말인가? 나는 경들의 뜻을 따를 뿐이다.”
승자의 여유라고 했던가.
승자가 된 융은 어떤 말을 듣더라도 상관없었다.
이에, 그럼 가지 말라니까요? 라는 말이 목구멍 안에서 맴도는 건 사홍 뿐만이 아닐 터였다.
“입들이 수십이 넘는데 어찌 벌어지는 입은 단 하나도 없단 말이냐?”
“소신들은 전하의 뜻을 쫓음이 좋을 듯 하여······.”
“내 일전에 말한대로 어마마마께서 어린 세자를 보필케 하고, 또한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어마마마를 보필케 하고자 한다. 경들이 저번에도 말했지만, 우리 어마마마께선 여래지의 덕(智德)이 있으시고 아랫 사람 대하기를 귀체 대하듯 하신다만 과연 아녀자의 몸이니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걸 진성대군이 잘 보완 할 수 있을 듯 한데 어떤가?”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럼 어서 출병도 논하는 게 좋겠다. 당초 언제가 출병이었던가? 3월이었던가, 4월이었던가? 내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아, 그러고 보니 유구는 더운 나라라 하였으니 내 부채도 좀 가져가야겠다. 그리고··· 유구왕을 만나면 우열이 이미 나뉘었으니 내 말을 놓는 것이 좋겠는가, 아니면 이대로 존대하는 것이 좋겠는고? 아, 그리고 말이다······.”
“···”
들뜰대로 들떠, 대신들의 한숨 소리는 들리지 않는 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