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11화 (211/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1화>

    ***

    긴 여정 끝에 동래에 상륙하고, 동래에 이틀간 머물면서 여독을 풀다가 상경한 다마구스쿠 우미(玉城海)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20년 전에도 한 번 조선을 찾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정사로서 왔지만 당시에는 서장관 개념이었다.

    때문에 더 감회가 새로울 수 밖에 없었다.

    20년 전만 해도 다시 이 땅을 밞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으니까.

    ‘변한 건 없구나.’

    당시의 기억과 지금의 모습에서 변한 건, 크게 찾아 볼 수 없었다.

    반면.

    “아버님. 강 좀 보시옵소서. 강이 무척 크옵니다. 책에서나 보던 장강(양쯔강)과 같으니 과연 장강의 모습도 이러하겠사옵니다.”

    그의 아들 안곤(安昆)은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하다못해, 강을 보면서도 감탄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이해는 되지만 그들은 사신이었다.

    왕의 뜻을 대리하는 사신.

    사신으로서 위엄을 갖춰야했다.

    “조선인들이 보고 있으니 자중하거라.”

    본인도 너무 들떠있었음을 자각한 건지, 곧 안곤이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안곤에게는 자중하라 했지만 우미 역시 곁눈질은 계속했다.

    확장강에 비할 바는 아닐지라도 안곤의 말처럼 아름다운 강이었다.

    “하온데 정말 조선왕이 원병을 보내주겠사옵니까?”

    “약조를 했으니 아니 보내줄 까닭도 없지.”

    “그 약조란 것도 결국 조선의 왕자와 맺은 것이지 않사옵니까?”

    사실 그래서 우미가 쇼신의 뜻을 받들고 조선에 온 것이기도 했다.

    전권을 부여 받았었다지만, 원병이라는 약조는 절대 가볍지가 않으니까.

    일종의 확인이랄까.

    겸사겸사 조선의 정세도 염탐을 하고 말이다.

    “혹 조선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는 그리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우린 원병이 필요하다.”

    조선왕자가 다녀간 지난 몇 개월 사이.

    왜구가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벌써 놈들에게 잡혀간 백성만 마흔이 넘었고, 나포 된 배는 6척이 넘는다.

    어찌보면 지금은, 잡혀간 백성이 마흔이고 빼앗긴 배가 6척에 불과하지만 놈들을 방관했다가는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게 뻔했다.

    서둘러 소탕을 해야했다.

    아니라면 미야코 오랑캐들과 왜구의 연대가 더욱 공고해질 테니까.

    “아, 아버님.”

    어딘가 불안해보이는 안곤의 음성에 사색을 멈춘 우미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문제는 그들 모두 무장한 군대라는 점이었다.

    ***

    “정말 전하께서 친정을 가시는 겁니까?”

    석평이었다.

    “몰라, 인마.”

    “전하께서 친정을 나서시면 참전할 조신들도 구할 텐데··· 스승님도 가십니까?”

    이번에는 경덕이.

    “모른다니까!”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십니까······.”

    “내가 요새 너희들한테만 시달린 게 아니라, 얼마나 어? 후. 말을 말자, 말어.”

    형님이 정말로 친정을 나가냐는 질문을 하도 받아서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지금은 석평이와 경덕이지만, 봉해위에서는 훈련병들도 물어보고, 그들을 훈육하는 조교들도 물어보고, 심지어는 소기파도 물어보고··· 집에가서는 덕산이, 하여간 엄청 시달렸었다.

    지금도 석평이랑 경덕이한테 버럭 소리지른 거 보고, 입대(?)하더니 성격 버렸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놈들이 한 두 번 물어본 거면 내가 왜 소리를 지르겠어?

    조용히 타이르지.

    근데······.

    “그보다, 송애(반석평의 호). 세조대왕께서 친정을 감행하셨을 때 조신들로 하여금 자원케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따라나선 사람들이 조신들만 있었던 게 아닐세. 장사(壯士)들도 따로 구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에 전하께서도 장사들을 구하시면 자네도 동참할 텐가?”

    “가야지. 궁고도(미야코)를 내 눈으로 직접 볼 걸세.”

    “자네는 몸이 비실비실해서 되려나 모르겠군.”

    “사돈 남말 하기는.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전하와 우리는 동문 아닌가? 아무렴 쓰임이 없겠는가?”

    경덕이가 갑자기 날 흘겨본다. 그리고.

    “하긴. 청을 거절하진 않으실 테지. 아, 그래서 말입니다, 스승님. 전하께서 친정을 나가신다면 언제쯤?”

    이것들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쳐 듣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모른다고 이 자식들아! 아니, 그나저나. 너희들 숙제는 다 했어? 다 하고 여기와서 노닥거리냐?”

    이놈들한테 시달린 게 벌써 몇 년인가?

    이제 횟수로 2년차다.

    시달릴 때마다 매번 숙제를 내줬는데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뭐, 숙제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고 아라비아 숫자 100번 필기하기다.

    갑자기 웬 아라비아 숫자냐고?

    쓸데없는 거라도 숙제로 내줘서 시달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예. 다 했습니다. 송애 자네도 다 했지?”

    “이를 말인가?”

    그럼 내가 할 말이 없다.

    “근데 스승님. 그 글씨들을 숫자라고 하셨는데 어디에 쓰임이 있는 문자들입니까?”

    당연히 지금은 쓰임이 전혀 없다.

    저놈들 혈기왕성한 체력을 조금이라도 꺾어 놓자고 내 준 거니까.

    “···봉황의 깊은 뜻을 알려고 하지마라.”

    “아, 예.”

    두 씹선비(?)들에게 시달리고 있던 그때.

    “대감. 채비를 마쳤사옵니다.”

    소기파였다.

    드디어 해방이란 점에 만세삼창을 외치고 싶었다.

    “그럼 갑시다. 자,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고.”

    저 씹선비들은 못 간다.

    왜냐고?

    사신단 맞이하러 가거든.

    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두 덤앤더머들을 놔두고, 의장에 동원된 일개중대와 함께 진영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광나루 부근에 도착했다.

    “놀라긴.”

    오키나와 사신단이 멈칫거리는 걸 보니, 봉해위의 정연함에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놀라긴 아직 이르지.

    ***

    광나루에 자신들을 영접하러 나온 조선국 왕자와 함께 입조하고, 조선의 임금에게 인사까지 올렸지만 우미는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처음에 그 봉해위라는 군대를 봤을 때는, 사신의 위엄이고 뭐고 놀라서 까무러칠 뻔 했다.

    안곤 역시 마찬가지인지, 선위사 정광세가 사신단을 영접하러 나온 군대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말머리를 돌릴 뻔 했다는 우스개소리까지 했다.

    하지만 봉해위를 접하고 놀란 건 시작에 불과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건가?”

    하례와 함께 조선왕에게 예물을 바친 우미는 국사 자격으로 왕을 접견했다.

    서로를 금칠하는 탐색전이 끝나고 드디어 본론에 들어갔는데······.

    “지금 뭐라고 하신 건가?”

    “그, 그게······.”

    “뭐라고 하신 거냐니까.”

    “봉해위를 몰고 친정에 나서실 거라고······.”

    깜짝 놀란 우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싱글벙글한 조선왕이 보였다.

    “친정?”

    “예.”

    “허.”

    이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가 조선에 사신으로 온 건, 조선에서 약조를 이행하고 있는지 혹시 불이행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행하게끔 만들기 위해서였다.

    사람이란 변덕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하물며 국가의 일은 사소한 일로도 틀어지곤 하니까.

    조선이 약조를 이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신단을 놀라게 만든 봉해위로 하여금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출병 시기만 확인하면 됐다.

    그런데 친정이라니···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 한 일이었다.

    당혹스러움이 얼굴에도 드러나서였을까.

    조선왕이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우미는 반사적으로 통사를 바라봤다.

    “직접 무도한 오랑캐를 벌하고, 우호를 다지시겠다고 하시옵니다.”

    조선왕의 성품이 화끈하다더니 확실히 화끈하다 못 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같았다.

    그만큼 열의를 갖고 임하겠단 뜻이니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의 일이 사소한 것에서 틀어지듯, 국가의 일은 사소한 것 하나도 그 의도를 봐야했다.

    심지어 이번 일은 친정이다.

    물론, 조선왕이 친정에 나서면 당연히 유구의 입장에서는 이롭다.

    왕이 전쟁에 나서는 것이니 만큼 최정예들로 구성을 할 테고, 미야코 오랑캐들에게도 심적인 압박을 줄 수가 있었다.

    아니, 심적인 압박 뿐인가?

    조선이 나섰으니 이제 곧 천자의 군사도 상륙한다고 거짓 소문을 흘리면 놈들 사이에 내분이 일 게 불보듯 훤했으니 이로운 정도가 아니었다.

    다만.

    호의로 친정에 나서는 왕은 적어도 우미가 알기론 없었다.

    필시 의도가 있을 터였다.

    최악의 경우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미야코 오랑캐들을 요절내기 위한 원병이 칼끝을 오랑캐들이 아닌 유구에 겨눌 수도 있는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불가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조선에 득이 된다기 보단 해가 될 테고.’

    이역만리 떨어져있는 대국이지만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낸다.

    유구가 조선에 점령당하고, 몇 년 간은 대국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평생을 속이기란 불가능하다.

    대국과 척을 질 일을 조선에서 할 리는 없다.

    ‘그럼 뭐란 말인가.’

    그 의도를 파악하다 보니 신경질이 날 지경이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우미는 함께 입조한 안곤에게 물었다.

    안곤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우호를 맺었다 한들, 우리가 수백년의 신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외국의 전쟁에 군주가 친정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게 뭔지는 소자도 잘 모르겠사옵니다······.”

    “어찌한다.”

    누차 말했듯, 우미는 전권을 일임 받고 온 게 아니었다.

    그저 조선이 약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이행하고 있다면 언제쯤 출병을 할 것인지.

    또, 조선의 정세가 어떠한지.

    등등을 살피기 위해 온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예상 밖의 일을 당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왕이 소국에 베푸는 후의도 이처럼 두터운데 자국의 백성에게 베푸는 인정은 알 만한 일이며, 호령으로서 봉해위를 일으켜 함께 바다를 건너시려고 하니 과연 대국의 또 다른 대국이라 불릴만 하지만, 어리석은 사신이 고금의 역사를 보건대 임금이 자국의 전쟁에 친정을 나서는 일은 있어도, 외국의 일에 친정을 나서는 일은 없으므로 오직 두렵습니다, 라고 전하게.

    통사가 곧 그의 말을 전하자, 조선왕이 호탕하게 웃었다.

    “오직 우리의 우호를 나의 친정으로 아로새기고자 함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라고 하시옵니다.”

    친정 반대를 돌려서 표현한 건데, 난처했다.

    “전쟁에는 대소가 있기 마련인데, 이번 일은 작은 전쟁입니다. 작은 전쟁에 임금이 나서는 것은 체통에 맞지 않는 일인데 하물며 오랑캐를 벌하는 일은 오죽하겠습니까.더욱이 전쟁에 유시(눈 먼 화살)라도 날아들면 큰 일인데 저희는 소국이라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부디 통촉하여주십시오, 라고 전해보게.”

    “예.”

    잠시 후.

    “뭐라시던가?”

    “그저 호, 호의를 베푸는 것이니, 가, 감당할 게 전혀 없으시다고······.”

    호의는 개뿔!

    우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국가 간의 일에 호의는 없다.

    이건 상국과의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유구가 상국에 사신을 보내는 까닭이 뭐란 말인가?

    황제의 권위를 빌려 호족들을 잠재우고, 왕으로서의 통치에 정당함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반대로 황제가 유구의 사신을 환대하는 까닭은 뭔가?

    천자로서의 위엄을 천하에 뽐내기 위함이다.

    결국 국가의 일에는 대소 구분은 있을지언정, 호의란 건 있을 수가 없다.

    작년에 조선 왕자가 왔을 때도 협상까지 얼마나 지루한 기다림이 있었단 말인가?

    양국이 호의로서 서로를 대했다면 지루한 기다림이 있을리 만무했다.

    서로 협상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기다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호의로서 친정에 나선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무도한 미야코 오랑캐들도 믿지 않을 말이었다.

    “아버님. 일단은 조선왕의 의도를 파악 할 수가 없으니 이 일은 차후에 논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결론은 나오지 않을 터였다.

    일단은 시간을 두고 그 의도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