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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10화 (210/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10화>

***

두둥!

지금 상황에서 효과음이 들어갔다면, 아마 편전에는 이런 효과음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만큼 편전의 대신들이 받은 충격은 제법 컸다.

“갑자기 대리청정(代理聽政)이라 하오시면······.”

대사헌 김전의 눈은 어딘가 흐리멍덩해져 있었다.

그는 흐리멍덩해진 눈을 연신 껌뻑거렸다.

“알아 들었으면서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못 알아 들었단 말인가? 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 말했다.”

“···하지만 언질도 없이 대리청정을 이르시오면 신들로서는······.”

어이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처럼 뭐라 대꾸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할 터였다.

“그래서 지금 언질을 하지 않았는가?”

“지, 지금 신들은 아찔한 마음이옵니다. 하오나 대리청정은··· 대리청정은 그······.”

천하의 김전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말을 잇지 못 했다.

그의 말을 받은 건, 천하의 넌씨눈 노공필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대, 대리청정은 임금이 병이 들거나 혹 나이가 들어 정사를 돌볼 수 없을 때, 부득이하게 내리는 조치이옵니다. 하온데 지금 전하께서는 보위에 오르신 지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사옵고, 보령(임금의 나이)도 한창이시옵니다. 더욱이 특별한 병환도 없으시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올지······.”

노공필이 넌씨눈이긴 해도 여러 임금을 섬긴 노신다웠다.

그는 임금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물었다.

대리청정은 핑계고 다른 의도가 있으면 차라리 직접적으로 말해달란 뜻이었다.

다만.

“세자에게 정사를 대리케 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여기에 무슨 의도가 있겠는가?”

“하오나 지부사가 말한 것처럼 대리청정은 특별한 변고가 있을 조짐이 있을 때라야 시행한 일이옵니다. 매 시대마다 있던 일도 아니니 역대 왕조에서는 이를 변사(變事)라 여기기도 하는데, 과연 왕세자나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천하의 군국(君國)을 살펴보면 대개 군주가 평소 앓던 병환이 깊고 깊어져 도무지 손 쓸 수 없는 폐질(불치병)이 되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보위에 오른지 수십년이 지나 정신이 혼미해져 정사를 진실로 돌볼 수 없을 때였사옵니다.”

“그, 그러하옵니다, 전하. 대리청정을 시행한 천하의 군국들은 당세에도 매오 긴박한 마음에 나온 조치로서, 신하들이 말리려 해도 말릴 수 없는 처지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었는데··· 물론 지금 전하께오서 다 뜻이 있어 대리청정을 언급하셨겠습니다만, 신들로선 아득하고 아찔하고, 두렵고, 또한 슬픈 마음이니 이는 역시 신들이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 했기 때문이옵니다. 신들을 벌하여주시옵소서.”

넌씨눈 노공필이 이번에는 눈치껏 행동한다면서 자죄를 청했다.

몇 년 전, 대사간 이자건의 일을 보고 배운 학습효과 같았지만······.

“내가 경들을 벌하긴 왜 벌한단 말이냐. 내 별 의도가 있는 것은 절대 아니거니와 경들이 나를 보좌하지 못 했기 때문에 대리를 운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오면 어찌······.”

이게 팩트였다.

감정 기복이 심하긴 하지만 임금은 앓고 있는 질환은 따로 없다.

나이가 연로해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 아무런 의도도 없단다.

그럼 왜라는 단서가 당연히 붙는다.

“내 지금 세자에게 대청을 맡기는 까닭은 친정을 하고자 함에 있다.”

또 다시 효과음이 들려왔다.

두둥!

친정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삼정승들과 일부 대신들만 알고 있던 극비.

그런 극비가 다른 사람 입도 아닌 임금의 입을 통해 편전에 까발려지자, 편전은 혼돈에 빠졌다.

“치, 친정이라니요······.”

“온행(온천에 감)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동문서답의 대신들에 융은 눈살을 찌푸렸다.

“경들은 들어라. 여러 대왕들 중에서 무력을 뽐내지 않고 위엄을 떨친 왕이 얼마나 있더냐? 혹자는 수문제의 고사를 떠올린다만 왕의 친정이 어찌 실패한 일만 있겠는가? 태조고황제(주원장)는 말할 것도 없고, 태종(영락제)께서는 친히 북적을 정벌하시면서 그 강역을 크게 넓히셨다.”

“하오나······.”

“더욱이 이 일은 삼정승들이 찬동한 일이니 왈가왈부 하지 말라.”

획!

대신들의 고개가 삼정승들에게 획 돌아갔다.

갑자기 수십쌍의 눈이 한 번에 몰리자 삼정승들은 당황한 듯 허둥거렸다.

“아니오. 우린 말렸소.”

그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찬성한 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도제조가 찬성한 일이니 일을 진행하겠다.” 라고 말씀하신 전하께서 강녕전을 나가셨었다.

그런데 찬성이고 말고 할 게 어딨단 말인가?

“다만 내 친정을 나가고 세자에게 대리를 맡긴다면, 세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물정에 어두우니 대비마마와 도제조로 하여금 보좌케 할 것이다.”

획-!

이번에는 대신들의 시선이 억울하다는 듯 손사래치던 삼정승들에서 진성에게로 옮겨갔다.

지금은 대리청정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친정이 문제였다.

친정을 위한 대리청정이었으니까.

무조건 막아야 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억울해 하던 허침이었다.

털썩!

“전하! 대리청정은 임금의 병환이 깊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하나의 방편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다만, 친정은 보낼 장수가 없고 마땅한 대책이 없기 때문에 임금이 전장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온데 하물며 외국의 전쟁은 오죽하겠나이까? 차라리 여진 오랑캐가 준동하여 일을 벌하시고자 하신다면 마다하지 않겠사오나······.”

“영의정은 바로 어제까진 찬성하다니 왜 갑자기 반대를 하는 것이냐?”

임금의 말 한 마디에 대신들의 시선이 또 한 번, 허침에게로 옮겨갔다.

이전에는 순수한 의도로 그를 바라본 것이라면 이번에는 의혹이 가득한 눈초리들이었다.

혹시 임금과 짜고 치는 건 아닌가 하는.

물론 허침으로선 허무맹랑하기 까지한 의혹이었다.

“시, 신은 찬성을 한 적이 없사옵니다. 어제··· 어제 전하께오서 신들을 불러 친정을 논하시다가 ‘이는 도제조도 찬성한 일이다’ 하시고서는 침소를 빠져나가시는 통에······.”

“반대를 하려 했는데 못 했다?”

“···예.”

그 이후.

알현을 청했지만 임금은 만나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찬성이라면 절대적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찬성했다.”

“···”

“내 며칠 전, 삼정승들을 불러다 친정을 논의함에 있어 경들은 차제에 논하자고 하지 않았던가? 내 그래서 바로 어제 경들을 불러 다시 일을 논의하자, 경들은 말하기를, ‘군주가 어좌를 하루라도 비운다면 누가 만기를 처결하겠으며, 일전에 세자에게 대리를 맡기시고 대비마마에게는 이를 보필케 한다 하셨는데 국가의 일에는 용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대비마마께서는 나라의 어른이기 이전에 아녀자인데 어찌 큰 결단을 내리시겠으며, 하물며 어린 세자께서 큰 결단을 내리시겠습니까?’ 라고 하지 않았던가. 기억하는가?”

그것까진 기억난다.

“기, 기억하옵니다.”

“그래서 내 세자를 보필하는 일에 도제조도 있지 않냐 되물었고, 그러자 좌의정 임사홍이 ‘도제조께서 과연 나라의 대업을 보필하는 일에 찬동을 하시겠습니까?’ 하였다. 그런데 도제조는 나라의 대업을 보필하는데 찬동을 하겠다고 했으니, 이를 두고 본다면 영상이 찬성을 한 게 아니면 무엇인가? 더군다나 오키나와와는······.”

“···유구국이옵니다.”

진성이 하도 오키나와라 불러대는 통에 또 말이 헛나왔지만 지금은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임금의 말을 어찌 끊는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아무튼 오키나와는 왜적과 궁고도의 오랑캐들 때문에 이 과인에게 청병한 것인데 정예 군사와 함께 내가 출병한다면 어찌 천군만마와 같은 흡족한 마음이 들지 않겠으며, 이제 막 우호를 다졌으니 내가 친정한단 소식에, ‘과연 대국의 왕 답게 소국의 일도 자국의 일처럼 생각하는구나’ 라고 여기지 않겠는가?”

절대 안 그럴 것 같은데··· 라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들은 없었다.

과유불급이란 뜻을 잘 모르시는 노공필 씨만 빼고.

“하오나 지금 갑자기 전하께서 군사를 몰고 나아가신다면 필시 사족들이 크게 반발할 것이거니와, 만에 하나라도 역심을 품은 자들이 나올 수도 있사온데······.”

쾅!

“지금 지부사는 도제조가 역심을 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이냐!”

노공필은 눈을 부릅 떴다.

말이 어떻게 그리 된단 말인가?

털썩!

“시, 신이 어찌 도제조의 충심을 의심하겠사옵니까!”

“그럼 어찌 역심을 운운한단 말이냐! 지금 내가 도제조에게 세자의 대리를 돕도록 하겠다 했는데, 너는 도제조가 세자를 보필하면서 역심을 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 역심이란 말을 어찌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이냐!”

“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시, 신은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사옵니다.”

“지금 왕을 기만하는 것이렷다?”

“어, 어찌······.”

“속내를 거짓으로 고하는 것 역시 왕을 기만하는 것이다! 지금 네가 속으로는 ‘필히 도제조는 역심을 품을 것이다’ 생각을 했으면서 내 그런 생각을 했냐 물으니 아니라 답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이게 왕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면 무어랴?”

갑분험.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당황한 건, 대신들이었다.

“저,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지부사가 어찌 그런 불측한 마음에서 그같은 말을 아뢴 것이겠사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아마 지부사는··· 이미 위엄을 떨치고 계신 전하께오서 도성을 비우면 이를 기회라 여기고 발호할 역적들을 두고 말한 것이옵니다. 팔도의 누가 도제조의 충심을 의심이나 하겠사옵니까?”

“크흠. 경들은 앞으로 역심은 입에 담지도 말라. 내 박원종의 난 이후로 역모의 역자만 들어도 치가 떨리거늘······.”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전하.”

“말하라.”

“매우 송구한 말씀이오나 친정을 감행하신다면······.”

융은 갑자기 손을 쑥 내밀고 김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저, 전하!”

“내, 내 지금 박원종의 일을 떠올렸더니 심병이 도진 듯 하다. 가, 가슴이 몹시 답답하고 쿵쿵거리면서 호흡하기가 어, 어려우니 이 일은 이리 알고 물러들 가라.”

“···”

“임금이 옥체를 간사하지 못 하겠다는데 어찌 아무런 말들이 없단 말인가? 상선은 어서 어, 어의를 불러라!”

“에, 예! 전하!”

상선이 후다닥 뛰어나갔다.

대신들 역시 미심쩍은 표정과 함께 편전을 빠져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편전이 텅텅 비자.

“푸하하하.”

파안대소하길 한참.

그는 별안간 표정을 굳혔다. 깜빡하고 있던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너, 너는 안 나가고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이냐?”

“흡!”

깜짝 놀란 사관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허둥지둥 사초를 챙겨 일어났다.

《무종실록(武宗實錄) 1507년 2월 12일 기사》

.

.

.

사신은 논한다.

갑자기 임금이 파안대소를 터뜨렸으니 이는 어인 영문이겠는가?

병을 핑계로 대신들을 쫓아낸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웃던 임금이 사신을 발견하고 ‘사초를 좀 보자’ 하였는데 이는 필시 불순한 의도가 계셨던 것이니 무례인 줄 알면서도 급히 인사만 올리고 춘추관에 돌아와 사초를 작성한다.

생각건대 임금의 친정은 신중해야 한다. 하물며 모략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인데 심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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