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09화>
***
어라?
이상하다. 왜 기상 나팔 소리가 안 들··· 아, 맞다.
깜빡했다. 여기 집이지.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진영에서 기상 나팔 소리를 들었더니 눈뜨고 나팔 소리 안 들린다며 이상함을 느껴버렸다.
봉해위 수료식을 앞당기던가 해야지··· 이러다가 진짜 말뚝 박을지도 모르겠다.
“어우, 속 아퍼.”
집이라는 안도감과 나팔 소리에 대한 자괴감이 가시자, 숙취가 엄습했다.
오랜만에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더니 숙취가 장난이 아니다.
속이 거의 혼돈의 카오스급이다.
오장육부가 뒤집어진 느낌.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숙취다.
“안 먹는다니까 자꾸 먹이셔서··· 어우. 속이야.”
어제 퇴궐하기 전.
형님은 나만 좀 남으라고 하셨었다.
별 생각없이 남았다. 원래 나만 남으라 하시고, 독대한 적이 원데이, 투데이가 아니니까.
가끔 시간대가 맞으면 밥도 같이 들기도 했었고.
그런데 어젠 좀 이상했단 말이지······.
형님은 술을 참 좋아하신다. 술과 관련한 어제시도 여럿 지었고, 언제였지. 한 번은 승정원 승지들에게 술을 주제로 시를 짓게 한 적도 있으셨다.
그만큼 술을 사랑하시는데··· 그런 형님도 일정이 남아 있으면 술은 안 드신다.
뭐, 가끔 반주는 하시지만.
그런데 어제.
어제는 일정이 남았는데도 술을 찾으시더니··· 아니, 그건 문제가 안 된다.
진짜 이상했던 건, 안 마신다는 날 붙잡고 딱 한 잔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명 운운하시면서!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됐는데, 술을 어떻게 한 잔만 마시나?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 되고, 석 잔이 말통 되는 거지.
근데 희한하게도 형님은 술을 잘 드시지도 않았다. 술이나 먹자는 양반이, 나한테만 주구장창 먹이지 뭔가.
그 결과.
나만 술이 떡이 돼서 금군에게 업혀온 기억이 난다.
필름 안 끊긴 게 그나마 다행이다.
“덕산아! 밖에 덕산이 없냐?”
“불러 계십니까요, 대감마님.”
“일찍 일어났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요.”
열린 문 틈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니 과연 해가 중천에 떴다.
체감상 얼마 안 잔 것 같았는데 퍽 오래 잔 모양이다.
어제 초경이 치기 전에 금군한테 업혀왔으니까··· 16시간을 꼬박 잔 셈이네.
“어제 너가 고생 많았다.”
금군한테 업혀 들어오고, 덕산이한테 주인대 노비 말고 대장부대 대장부로 술 한 잔 하자고 엉겨(?) 붙었던 기억이 난다.
덕산이 입장에선 많이 난감했을 거다.
맨정신에 술 마시자는 것도 아니고 술이 떡이 돼서 마시자고 엉겨 붙었으니까.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요. 마음 쓰지 마십시오. 헤헤.”
종 하나는 잘 뒀다.
“출타 좀 하게 채비좀 해라.”
“진지는 어쩌시구······.”
“속 울령거려서 뱃속에 음식 들어가면 그대로 게워낼 것 같다. 식사는 됐고, 바로 준비해.”
“예.”
잠시 후.
채비를 한 나는 집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은 전성군(全城君) 이변(李忭)의 저택이었다.
배가 다르긴 하지만 내 동생이다.
물론 몇 번 만나보진 않아서 혈육의 정 같은 건 별로 못 느끼지만.
“형님께서 어쩐 일로······.”
혈육의 정 같은 것도 못 느끼는 동생집에 숙취에 헤롱거리면서도 왜 왔냐고 묻는다면 그 답변은 이따하기로 하고, 변이는 내가 왔다는 사내종의 말에 버선발로 뛰쳐나와 날 반겼다.
아니, 반긴 건 아니고 뭔가 저 혼자 켕기는 게 있는지, 반기는 척과 함께 곁눈질로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냐?”
라고 말한 나는 내 집처럼 편안하게 대청에 걸터앉았다.
탁탁.
“뭐해? 앉아.”
“아닙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여전히 예의가 바르구나.”
“감사합니다.”
“근데 내가 너 말고도 볼 사람이 좀 더 있다. 그래서 얼른 용건만 보고 가야 돼.”
아침 일찍 일어났으면 쉬엄쉬엄 해도 됐을 텐데, 해가 중천에 뜨고 일어났다.
얼른 일마치고 훈련소로 들어가봐야한다.
“아······.”
“아우님.”
“예, 형님.”
“아우님도 견성군 소식은 들었지?”
“아, 예. 들었습니다.”
언제였지, 형님은 종친들을 불러 경회루에서 연회를 베푸신 적이 있었다.
나도 참석하려다가 형님이 못 오게 하셨었고, 잠깐 서운해했다가 곧 그 내막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 날 견성군 상투가 잘렸다나 뭐라나?
분위기도 거의 상갓집 분위기였다고 하니, 안 가길 잘 한 거지.
어쨌든.
“견성군은 그러게 왜··· 쯧쯧. 지금 어디에 있다더라?”
알면서 모른 체 하고 물었다.
“···제주에 정배되셨다는 걸 들었으니 제주에 계실 것입니다.”
“아, 제주였어? 어쩌다 그 험지로··· 그러니까, 이 사람이 매사에 잘 해야 된다니까. 종친이라고 뻗대지 말고 겸손해야 되고.”
나처럼.
“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삼고 항상 주의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아우님.”
“예, 말씀하십시오.”
“내가 어제 들어보니까, 견성군 상투 잘린 날 형님하고 약조한 게 있다던데?”
“···”
“얼마랬더라······.”
“···”
“1만 5천 석이었냐?”
“···7천석입니다.”
“아, 그래? 뭐, 어쨌든 간에 형님 말로는 아직 안 들어왔다고 하시더라고.”
자.
내가 혈육의 정도 별반 못 느끼는 전성군 집에 숙취에 헤롱거리면서도 찾아온 이유.
맞다.
수금하러 왔다.
어제 술 마시다가 형님이 직접 부탁하신 일이기도 하다.
전성군을 비롯한 몇몇 왕자들에게 아직 주기로 한 돈이 입금(?)이 안됐는데 왕 체면에 닦달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왕자들한테 금군이라던가, 사람을 보내 닦달 하는 것도 위신 떨어지는 일이라면서.
틀린 말씀은 아니었다.
연회에서 형님이 견성군 머리채를 붙잡고 상투를 잘라버린 일화는 이미 조정은 물론이고, 지방에 까지 파다하게 전해졌다.
형님 손으로 종친의 위상을 짓밞아버린 셈인데 사람을 보내 또 짓밞으실 수는 없으셨을 거다.
“아······.”
“왜? 갑자기 좀 아쉬운 건 아니지?”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나는 전성군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이해해. 사람인 이상 아쉬울 수 밖에 없지. 한 두 푼 되는 돈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가난하게도 살아봤고 지금은 부자로도 살아보고 있다.
그리고 느낀 점은 많이 가졌을수록 내려 놓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건 인간의 본성 같다.
그러니 전성군을 충분히 이해한다. 욕 할 것도 없고, 나무랄 필요도 없다.
다만.
“그래도 우리가 형님과 사적으로 형, 동생 하는 혈육이지, 엄밀히 따지면 군신 관계 아니겠냐. 임금과 약조했는데 이거 어기면 기군망상이지. 너도 알잖아, 옛날에 누구야.”
벌써 몇 년 지났다고 이름 까먹었다.
누구더라.
아!
“이세좌나 윤필상도 기군망상하다가 목 달아난 거. 너는 종친이니까, 더 주의해야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언제가 좋을지 시기를 좀 조정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형님께서 오셨으니 오늘 바로 입궐해야겠군요.”
토닥토닥.
“그래. 너 인마. 이걸로 꽁해 있지 말고. 아, 그리고 이건 선물.”
나는 덕산이에게 손짓했다. 덕산이가 보자기 하나를 대청에 내려놨다.
“너 꽈배기라고 들어봤냐?”
“아, 예. 장안에 파다하던 걸요.”
“이거 꽈배긴데 너랑 제수씨 것좀 챙겨왔다. 충분히 챙겨왔으니까, 아랫것들도 좀 챙겨주고.”
꽈배기가 아무리 비싸다지만 7천석의 값어치가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걸로나마 위안이 좀 됐으면 좋겠다.
전성군 입장에서는 눈 뜨고 코베인 격이니까.
“자,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수금이 안 된 왕자가 전성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무산군도 있었고, 봉안군도 있었다. 두 사람 집에 더 들러야 한다.
***
하루 일을 보람차게 수금으로 마무리 했다.
무산군과 봉안군에게 수금하러 가자, 둘 역시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아까워서 안 낸 게 아니라 전성군처럼 적절한 시기를 노리고 있었단다.
지금이라도 당장 납부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이걸로 형님이 부탁한 일은 모두 마무리 했다.
그리고 집에 오자 누군가 집 밖을 서성이고 있는 게 보였다.
아, 내 자랑은 아닌데 알다시피 우리집 밖을 서성이고 있는 사람은 사실 한 두 명이 아니긴 하다.
선물 보내오는 족족 돌려보내는데도, 학습 효과란 게 전혀 없는지 선물 바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아직도 제법 되거든.
이번에도 학습효과 제로인 사람인가 해서 살펴보니 웬 걸?
“아이쿠, 도원수 대감 아니십니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헐레벌떡 뛰어갔다.
영의정 허침 할아버지였다.
난 사적인 자리에선 도원수 대감이라고 부른다.
별 뜻은 없고, 내가 부원수로 그의 휘하에 있었으니까.
그냥 옛 추억을 상기하는 차원에서?
“아, 대감. 출타 중이라더니 돌아오시는 모양이군요.”
“예.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저 찾아오신 거예요?”
“예.”
“바람도 찬데 안에서 안 기다리고 왜··· 혹시 저희집 노복들이 실수라도 한 건 아니지요?”
말했다시피 선물 바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노복들도 이제 이골이 났다.
노복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아서 눈치껏 쫓아내라고 지시를 한 상태였다.
여기서 말하는 눈치껏은 선물 안 받는다고 돌려보내려는데도 막무가내로 선물 놓고 가려는 사람 있거나, 집에 들어오려는 사람 있으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해서라도 내쫓으라는 뜻이다.
혹시 식구들이 허침 할아버지도 못 알아보고 실수라도 한 것 같았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아닙니다. 안에서 기다리다가, 곧 오실 듯 하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그럼 다행이구요. 얼른 들어가시죠.”
나는 허침 할아버지를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전금아 여기 꽈배기 대여섯개랑 차 한잔만 내와라.”
“예, 대감마님.”
전금이가 물러가자 나는 허침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도원수 대감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뭐.”
“전하께서 친정을 감행하시겠다더군요.”
나도 어제 들었다.
“예.”
“예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
“어찌 찬성하셨습니까?”
나는 기억을 더듬어봤다.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지만 필름이 안 끊겨서 생생히 기억난다.
대작을 하면서 형님은 오키나와의 여러 일들을 물으셨다.
이미 오키나와에서 돌아온 뒤로, 수차례 말씀 드렸지만 그곳 일은 들어도, 들어도 신기한지 그날도 마찬가지로 물으셨던 것이다.
그곳의 여인들.
그곳의 풍습들.
그곳의 문화들.
그곳의 의복들.
그곳의 음식들.
등등.
그러더니 형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곧 봉해위가 출병을 할 텐데 내가 친정을 좀 하고자 한다.
어처구니없어 하는 나에게 형님은,
-아, 오해는 하지말거라. 내 별 뜻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그, 저기. 네가 오키나와에 다녀왔다는 말을 할 때면 나도 늘 가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한데 군주의 몸으로 어찌 하루라도 나라를 비울 수 있단 말이냐? 친정은 좋은 핑곗거리가 아니겠느냐.
결국 친정한다고 뻥치고 여행좀 다녀오시겠단 말씀이었다.
내가 여행을 가봐서 안다. 사람은 확실히 여행을 가야돼.
거기서 본인 삶을 좀 관조할 시간도 갖고, 쌓인 스트레스를 이국의 풍경으로 좀 해소도 시키고, 국내에선 먹을 수 없는 음식으로 미식 생활도 좀 즐기고 말이지.
그건 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나는 흔쾌히 그러시라 답했다.
그러자 형님은 몇 가지 단서를 다셨는데······.
-그러자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야 하는데, 지금 세자의 나이가 어리다. 너와 대비마마께서 보필해야 할 텐데 괜찮겠느냐?
이건 좀 다른 문제인지라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지만······.
-부탁좀 하마, 진성아. 내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언제 왕으로서 오키나와 같은 이국을 여행해본단 말이냐?
라는 말에 결국 술 기운 때문인지 그러시라 답해버렸다.
그나저나.
“어찌 찬성했냐고 물으시면······.”
“왕이 친정을 감행하는 건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바다를 건넌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군사와 함께 가니 왜구는 문젯거리가 되지 않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봉해위를 궁고도로 보내는 것은 궁고도 오랑캐들을 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전장에 전하를 보내다가 유시(눈먼화살)라도 맞는다면··· 아니, 궁고도에 상륙하기도 전에 풍랑을 만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긁적긁적.
다들 알다시피 술을 먹으면 부정적인 사람도 낙천적인 사람이 된다.
술 기운 때문에 풍랑을 깜빡하고 있었다.
한 번 가본 사람으로서, 사실 배가 뒤집어지는 문제는 문젯거리가 안 된다.
진짜 문제는 표류를 하는 거지.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형님을 다시 찾아 뵙고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딘가 노한 듯 안 노한 듯한 허침 할아버지가 일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감사합니다.”
일이 대충 마무리 된 것 같아 전금이가 아까 갖고 온 꽈배기를 가리켰다.
“이거 드셔보셨었죠?”
“예. 맛이 좋더군요.”
“드셔요.”
그렇게 꽈배기를 권하고 있는 그때였다.
“대감마님.”
덕산이였다.
“왜?”
“승정원에서 어르신들이 찾아왔는뎁쇼.”
“뭔데? 패초래?”
“예.”
나는, 혹시라도 설탕이 떨어질까 조심스레 꽈배기를 입안에 넣고 있는 허침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얼른 가봐야겠군요.”
패초가 나한테만 왔을리 없다. 그랬다면 그냥 내관들을 보냈을 테니까.
허침 할아버지도 중신들을 소집하는 패초란 걸 깨달았는지, 입맛을 다시며 꽈배기를 내려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