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208화 (208/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08화>

***

편전이 반갑기는 또 오랜만이다.

얼마만에 편전에 드는 건지 모르겠다.

훈련병들 굴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게 벌써 한 달하고도 보름이 다 되다 보니 여간 고욕이 아니다.

씻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고.

밥은 또 어찌나 푸석한지······.

취사병 놈들 군기가 빠져도 단단히 빠진 게 분명하다.

가끔은 모래까지 씹히더라니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밖에서 훈령병들과 구르던 날 구원해준 건 안처직이다.

안처직의 치계 때문에 입조한 거거든.

「···하므로 죄인 아흔을 구금하여 심문하였는데 이제 갑자기 놈들을 불러다 힐책하니 그 안색은 매우 어둡고, 기색은 놀란 듯 하였으나 왜종은 본시 교활하고 약삭한 기질이 있어 언제 성상의 권위에 도전할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아뢰건대 지금 대마도의 형국을 보면 신과 감조관이 매질하고 있는 형국인데 이를 두고 필시 조정에서는 위무하란 말이 나올 듯 합니다. 그들이 언제 또 불측한 짓을 행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리된다면 놈들의 발호를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키우는 꼴이 될 테니 어떤 일이 있어도 위무치 말아주시옵소서」

이건 안처직이 올린 치계다.

그런 의미에서 난 안처직이 이래서 좋다.

공자가 어쩌고 맹자가 어쩌고··· 하다못해 당나라 땐 어쨌고 송나라 땐 저쨌고 같은 어려운 말들이 전혀 없잖아.

딱 요점만 말하는데, 사실 이 시대에서는 요점만 말하는 사람이 5%도 안 된다.

다 고사에 빗대거나 성인의 말씀을 빌려다가 돌려 까기를 하든, 간접적인 의사 표현을 하든 한다.

반면 안처직의 요점은 보다시피 아주 간단하다.

내가 지금 대마도에서 이놈들 채찍찔하고 있는데, 혹시 조정에서 놈들한테 당근 주자는 말이 나와도 절대 그러지 마라.

얼마나 간단해?

좌우지간.

대마도주 지금쯤 단단히 약이 올랐겠다.

내가 대마도를 안핵하는 일은 절대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근데 뭐 어때?

당해도 싼 위인인데.

“음. 임금이 전장에 나가는 장수에게 부월을 하사했으면, 전장에 나간 장수에게 모든 판단을 일임하라 하였으니 하물며 안처직에게 맡긴 안핵의 일이 이와 다를까? 지금 안핵사의 치계가 이러하니 비록 천만다행한 일이다만, 혹시라도 궁지에 몰린 도주가 안핵사와 감조관을 해하진 않겠는가?”

“과연 안핵사가 사로잡은 죄인이 벌써 아흔이 넘어, 이제 곧 압송한다 하니 다행한 일이옵니다만, 이를 두고 도주가 어찌 불측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특히 안핵사가 직접 ‘위무치 말아달라’ 청한 건 무슨 곡절 때문이겠사옵니까? 안핵사의 말대로 조정에서 위무하는 건 온당치 못 한일이 될 듯 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장수의 일은 장수에게 맡기고, 사공의 일은 사공에 맡기라는 말이 어찌 나왔겠나이까? 안핵사가 지금 사지에 스스로 걸어들어간 형국이지만, 오히려 위무하게 되면 역효과가 날 걸 우려하고 있으니 회유치 말고, 그대로 두는 것이 이로울 듯 하옵니다.”

“예. 도주가 제아무리 어리석다 한들 본인이 처한 상황을 모르진 않을 텐데 둘을 어찌 해 할 수 있겠사옵니까. 본성 자체가 간에 붙고 쓸개에 붙기를 타고난 자들이니, 둘을 해 하는 일이 자충수가 됨을 모를리 만무할 것이옵니다.”

끄덕끄덕.

이게 맞지.

안처직의 말마따나 지금 상황에서 당근과 채찍질을 병행하는 건 절대 이롭지 못 하다.

내가 개를 키워 본 적은 없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알거든.

개가 잘못했을 땐 절대 간식 주지 말라는 거.

예컨대 주인을 문다거나 집을 헤집고 다녔는데, 그저 예쁘다고 간식을 주면 개는 본인이 잘한 줄 알고 또 그런다.

습관이 잘못 든다 이 말이지.

도주를 개에 빗대는 게 좀 미안한 일이긴 한데, 도주도 그런 개와 같다.

버릇 잘못 든다.

대마도에 있는 안처직도 그걸 염두에 두고 이런 치계를 올린 게 분명했다.

아주 적절한 상황 판단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물론 형님의 우려처럼, 궁지에만 몰면 발톱을 드러낼 수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본 도주는 그리 막가파는 아니었다.

오히려 엄청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성적이니까, 감성적으로 나오는 형님께 설설 기었던 거지.

진짜 저 실성한(?) 조선왕이 전쟁 일으킬지 모르겠다는, 일면에선 합리적인 사고를 해서 말이다.

“흐음. 그럼 대마도의 일은 안처직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겠다. 다만 국가의 일은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둬야한다 했으니 최악의 일이란, 도주가 안처직과 김억수를 해하는 일이다. 이를 억제코자 내 교서를 내리고자 한다.”

“하교하시옵소서.”

“지금 너희가 말로는 굴종을 약조하여 내 그 약조를 또 한 번 믿게 됐다만 지금 그 일을 두고 조정에서 너희를 벌하지 않음을 두고 회자됨이 민망할 지경이다. 내 이르건대 귀도에 들어간 나의 신민이 어떤 이유에서건 한 사람이라도 상한다면, 이러한 시국에 나의 약조가 잘못됐음이 만천하에 증명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결국 나의 호령에는 정당함이 떨어질 것이다. 내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도주에게 말하노니, 나의 신민 한 사람이라도 상하게 된다면 너희 섬은, 앞으로 사람 살지 않는 섬이 되리라. 이리 보내면 도주가 경거망동하지 못 할 듯 한데 어떤가?”

차라리 협박에 가까운 교서에 잠시 당혹스러워하던 대신들도, 이 교서를 통해 도주를 억제시킬 수 있다 판단했는지 곧 찬동의 뜻을 내비쳤다.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그리고 지금 동래현령 신공섭(申公涉)의 말에 의하면 유구국 사신이 동래에 들었다는데, 아무래도 원병 때문인 듯 하다. 봉해위로 하여금 접대코자 하는데 이는 어떤가?”

여담인데 신공섭은 나랑은 손윗동서 지간이다.

이장길이 파직되고 나서 동래현령 자리로 옮겨갔다.

사람됨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도 두 번인가, 세 번 밖에 안 봐서.

“봉해위의 위엄을 보여준다면 필시 사신들도 놀라 까무러칠 것이옵니다. 다만 봉해위가 동래까지 내려 갈 순 없는데 상고하면 동래~서울로 드는 길로 사신이 입조하면 광나루를 지나치니, 이 광나루에서부터 접대하게 하면 어떻겠사옵니까?”

“광나루에서? 흐음. 도제조의 생각은 어떤가?”

나는 당연히 OK다.

부산까지 내려가는 거면 솔직히 반대겠는데 광나루면 코앞이니까.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럼 그 문제도 그리 처리하도록 하고··· 아, 그리고.”

“하교하시옵소서.”

“아니다. 되었다. 모두 물러들 가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편전을 빠져나가던 그때.

“도제조는 좀 남으라.”

***

「···앞으로 사람 살지 않는 섬이 되리라.」

얼마 후, 대마도.

"···”

“도주는 어찌 대답이 없으시오.”

충격적인 내용의 교서였다.

무라모리가 사색에 질린 채 벌벌 떨고만 있자, 교서를 전달하러 온 선전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라모리를 나무랐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뒤늦게 무례를 자각한 무라모리가 자세를 바로하고 교서에 예를 차렸다.

그리고 잠시 후.

“도주.”

협박서에 가까운 교서를 받고 움츠려있던 무라모리를 찾아온 건 안처직이었다.

안처직을 보면 절로 이가 갈리지만 무라모리는 최대한 공손히 그를 맞이했다.

“어명이오.”

“예? 무슨 어명 말씀이신지······.”

“전하께서 죄인들을 모두 압송해오라는 어명을 내리셨단 말이외다.”

“아······.”

“마침 선전관이 교서 때문에 입도했으니 죄인들은 선전관 편에 딸려 보내겠소이다. 그래도 되겠소?”

동의를 구하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결국, 무라모리가 할 말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면 그리 알고 처리하겠소.”

“아, 대인.”

“말씀하시오.”

“그게, 대인께서는 아니 돌아가시는가 하여··· 누추한 곳에 오래 머물고 계시니 제가 다 송구한 마음이 듭니다.”

“왜, 얼른 돌아갔으면 하오?”

뜨끔한 무라모리는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 섬이 척박하고 미개한지라 대인께서 불편을 겪고 있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 음식도 입에 맞지 않으시다 하셨었구요.”

“천하에는 피죽도 못 먹는 걸인들이 널렸는데 왜식(倭食)이라고 어찌 마다할까, 괜찮소이다.”

“···”

본전도 못 찾고 시무룩해진 무라모리였다.

***

강녕전.

난감함은 허침의 것만이 아니었다.

임사홍과 채수도 난감하긴 매한가지였다.

전하께서 삼정승들을 또 불러계셨다. 단순히 부르기만 한다면 난감할 것도 없겠지만, 문제는 차제에 논하기로 되어있던 친정에 있었다.

“하오나 전하. 그 일은 차제에 논하기로······.”

“맞다. 차제에 논하기로 했었지.”

“그러하옵니다. 하오면 신들은······.”

“그런데 마침 사신이 입국했으니 오늘이 바로 영상이 말한 차제가 아닌가? 사신이 동평관에 머물고 난 뒤에 이 일을 논할 텐가?”

“···”

단호한 어조에 삼정승들은 말없이 눈빛을 주고 받았다.

‘아무래도 전하께서 마음을 단단히 잡순 듯 합니다.’

‘어떡하는 게 좋겠소?’

‘어떡하긴요. 무조건 막아야지요.’

눈빛과 함께 뜻이 통하자, 허침이 대표해서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전하께서 어찌 친정을 거론하시는지 신들도 모르지 않사옵니다. 하오나 지금과 같은 시국에 친정을 감행하신다면 정국이 어찌 불안해지지 않겠사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전하. 전하께오서 저 남이(南夷)들을 친히 정벌하시고자 하는 뜻은 어찌 부당한 일이겠사옵니까? 친정에 나서신다면 우리 원군의 사기가 백배, 천배는 오르고 남이들은 동국의 임금이 나섰다는 소식에 필시 불안에 떨 것이옵니다. 하지만 어가를 타고 동래까지 행차하는 일은 의장(儀仗)에 드는 경비도 경비거니와 백성들에게도 민폐이옵니다. 봉해위의 출병이 4월 즈음인데 이 시기면 백성들이 한참 논밭에 나가 일할 시기이옵니다. 이때에 동래까지 행차한다면, 고을 수령들은 필히 백성들을 동원할 테니 이것이 첫 번째 민폐요, 가는 길목의 논밭을 밞고 지나가야 할 테니 백성들은 또 다시 씨앗을 뿌려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으니 이게 바로 두 번째 민폐이옵니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예. 더욱이 동래까지 백성들에게 피해를 아니 입히고 행차를 하신다 하셔도, 바다의 일이란 참으로 변덕스러워서, 뱃사람들도 조차 그 운을 하늘에 맡기옵니다. 하물며 일국의 왕이 하늘에 운을 맡기는 것이 가당한 일이겠나이까?”

순번을 정해논 것도 아닐 텐데, 마치 순번이 정해진 것처럼 허침 다음으로는 임사홍이, 임사홍 다음으로는 채수가 친정의 부당함을 아뢨다.

삼정승들이 단호히 말하니 또 머쓱해진 융이었지만 이번에야 말로 물러 설 순 없었다.

“좌의정의 말처럼 내가 친정에 나서면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백배, 천배 오를 것이다. 그런데 어찌 마다한단 말이냐. 또, 백성에게 끼치는 민폐를 말했다만, 백성에게 민폐를 끼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의장 없이 말을 달려서 동래에 갈 것이니 백성에게 어찌 민폐를 끼치는 일이겠는가?”

할 말이 궁색해진 삼정승들은 다시 눈빛을 주고 받았다.

‘이거 아무래도 방법을 바꿔야할 것 같소.’

‘어떻게 말입니까?’

“이 문제들이 문제가 안 된다 해도 군주가 어좌를 하루라도 비운다면, 누가 만기(임금의 정무)를 처결하겠사옵니까? 일전에 전하께오서 세자저하께 대리를 맡기시고, 대비마마께서 보필케 하면 된다 말씀하셨사옵니다만 국가의 일에는 용단을 내려야할 때가 있는 법인데, 나라의 어른이기 이전에 아녀자인 대비마마께서 어찌 큰 결단을 내리시겠사오며 어린 세자저하께서 어찌 큰 결단을 내리시겠사옵니까?”

허침의 말에 융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도제조도 있지 않은가.”

“도, 도제조는······.”

말문이 막힌 허침을 지원사격한 건 사홍이었다.

“도제조께서는 백관들은 물론 신 같은 노신들에게도 신망이 두터워 저하를 보필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혈육의 정으로 생각해본다면 도제조께서 과연 찬동하시겠사오며, 나라의 대업을 보필하는 일에 찬동을 하시겠사옵니까.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사홍의 지적은 일면에서 볼 때, 탁월했다.

형이 바다로 정벌을 나간다는데 동생인 진성대군이 찬성하겠냐.

둘의 우애를 보면 절대 반대를 외칠 터였다.

또, 세자와 함께 임금의 정무를 대신 처결하는 일에 찬동을 하겠냐.

적어도 사홍이 아는 진성대군은 절대 반대를 외칠 위인(?)이었다.

좋게 말하면 풍류를 즐기고, 나쁘게 말하면 책임 지는 일을 싫어하는 게 진성대군이니까.

그런 위인이 임금의 정무를 대신 처결하는 일을 찬동할 리 만무하다.

‘좌상. 아주 잘 하셨소.’

‘이제 한시름 논 것 같습니다.’

허를 찌르는 논리에 동감하는지 허침과 채수 역시 한시름 놨다는 듯, 안도했다.

하지만······.

“도제조는 찬동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