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07화>
***
“물럿거라! 썩 물럿거라!”
임금의 행차는 매일 있지 않다.
능행에만 가끔 볼 수 있는 게 임금의 거둥이었고 그마저도 북촌에 위치한 서운관(書雲觀)의 길을 이용하니 서울 사람들에게도 임금의 행렬을 보기란 하늘에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하늘에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임금의 거둥이 두 번이나 있었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당연히 임금님 용안을 뵙겠다고 서울을 비롯한 성저십리, 심지어는 경기도 각지에서 인파가 몰려들었고 오전에 임금님 용안을 못 뵌 사람들은 아예 멍석을 깔고 오후 늦도록 기다리기 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임금의 어가 행렬이 강변의 봉해위를 검열하고, 애오개를 통과하자 그 길목에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물론, 불순한 의도로 뛰쳐나왔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임금님 용안을 뵙겠다는 마음가짐이 대부분이었다.
좁은 길목에 다수의 사람들이 튀어나오자, 선두에서 어가행렬을 호위하던 청로대(임금의 호종부대)가 어가를 에워싸며 사람들을 물리쳤다.
물론 백성들도 그 이상 접근하지는 않았다. 그 이상 접근했다가는 칼을 맞아도 억울할 게 없는 처사였으니까.
대신.
“상감마마! 상감마마께서는 하늘이 우리 동국을 어여삐 여겨 내려주신 성군이시옵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소서!”
“신(臣)은 남촌에 살고있는 이 아무개이온데 전하께서는 참으로 성군이시옵니다! 효성은 매우 깊고, 지덕은 높으니 만수무강하시옵고 천년만년 신민에게 복록을 누리게 해주소서!”
“태평성대로다! 태평성대로다! 아아! 태평성대로다!”
넙죽 엎드리며 임금의 덕을 칭송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임금이라고 다를까.
융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럿거라! 썩 물럿거라!”
“어허, 거기! 고개 들지 말라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행렬을 따라온 청로대와 별감들은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경계했다.
“어디.”
융은 천천히 어가의 쪽창을 열었다.
작은 창인지라 밖이 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여태 보지 못 한 엄청난 인파였다.
따로 이르지 않을 만큼이나 기분이 좋았다.
단 한 가지만 빼면.
“숭재야.”
임금의 거둥은 절대 가볍지 않다.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보통 임금의 거둥은, 거둥 직전부터 행렬의 편성, 수행원 등을 어떻게 구성할지 논의를 한다.
특히, 아무리 성군 소리를 듣는 요즘이라 할지라도 사족들에게는 반감을 사는 정책이 많았다 보니 암살이라던가, 멀리서 살(화살)을 날리는 끔찍한 무리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호종의 책임자가 정해지고, 어가 바로 주변으로는 정예군들이 배치된다.
또 그 정예군들은 임금의 총신(寵臣)이 진두지휘를 하는데, 지금 청로대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건 임숭재였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다, 융이 쪽창을 통해 부르자 고개를 조아렸다.
“불편한 게 있으시옵니까?”
“너는 그 무복이 참 잘 어울리는구나.”
애당초 능행이 아니라 대열(임금이 친히 검열함)을 위해 행차가 있었던 것이니 만큼, 행렬을 배종하는 신하들은 모두 무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임숭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전에 한 번 진성대군께 보여드리니 이를 두고 ‘핏이 살아 있다’ 라고 하시더군요.”
“핏? 옷차림이 잘 어울리면 핏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이냐?”
“대군께서는 그리 말씀하셨사옵니다.”
“으음. 핏이라··· 너는 무복의 핏이 참 잘 살아있느니라.”
“망극하옵니다.”
“확실히 너와 진성대군은 콤비가 참 잘 맞아.”
“과찬이시나이다.”
“아, 맞다. 아무튼 말이다.”
“하교하시옵소서.”
융은 쪽창을 통해 뒤를 힐끗거렸다.
별감 무리와 함께 뒤섞여있는 취타대가 눈에 들어왔다.
취타대.
이들은 어가 행렬에 뻘로 대동하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임금의 거둥에는 연주가 뒤따른다.
애당초 임금의 거둥은 그 자체가 엄숙하고 위압적이지만, 그걸 더해주는 게 바로 취타대의 어가 행악(行樂)들이었다.
취타대는 당연히 행악 연주를 위해 호종에 참가시킨다.
“지금 여민락(임금의 거둥시 연주하던 노래)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냐?”
“아, 예. 연주가 마음에 안 드시옵니까?”
“아니, 안 든다기 보다는··· 이 흥이 안 난다, 흥이.”
숭재는 잠시 기가 막혔다.
행악(行樂)에 흥이 웬 말인가? 하지만 전하께서 그러시다는데······.
“다른 걸 연주하라 이르오리까?”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 않더냐. 그래서 말인데, 아직도 봉해위가 따라오고 있는 것이냐?”
숭재는 뒤를 바라봤다.
저 멀리 행렬 끄트머리에서 봉해위가 따라오고 있었다.
어가행렬을 따라올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전하께서 이 봉해위의 위엄도 백성들에게 새삼 보여주고 싶다 하신 통에 서대문까지 호종하게 됐다.
“예. 잘 따라오고 있사옵니다. 돌아가라 이르올까요?”
“아니. 아까 그 가락 말이다.”
“가락이라 하시면··· 군가라는 것 말이옵니까?”
“그래. 여민락은 그만 연주하도록 하고, 대신 봉해위를 어가 선두에 세워서 그 군가를 좀 부르게 하거라.”
“하오나······.”
“왜, 네 아버지께 한 소리 들을까 겁이 나느냐?”
“···”
“괜찮다, 괜찮아. 너도 아까 그 가락에서 참으로 씩씩한 기상이 느껴진다 하지 않았더냐? 행차시에 매번 같은 연주만 하면 무얼 한단 말인가, 그런 씩씩한 가락도 행악에 포함시켜야 그게 임금의 거둥이지.”
“···알겠사옵니다.”
말머리를 돌린 숭재가 행렬 끄트머리로 향했다.
그러고는 봉해위의 책임자 소기파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소기파는 잠시 난감해했지만, 어명을 거역 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그 결과.
잠시 어가가 멈춰섰다.
임금이 탄 어가가 멈추니 당연히 행렬도 멈출 수 밖에.
행렬이 멈추니 태평성대를 노래하거나, 임금의 덕을 찬양하던 백성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가에 무슨 일이라도 났나?”
“왜 갑자기 멈춰 선 거래요?”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봉해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왼발, 왼발.”
“···?”
행렬 끄트머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봉해위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잘 짜여진 앞뒤의 간격하며, 절도 있게 탁탁 발맞춰 걷는 모습하며, 게다가 웬 해괴한 구령까지······.
하지만 충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봉해위가 어느 덧, 어가 행렬에 다다랐을 즈음.
“선두, 제 자리에 서!”
“핫, 둘!”
훈련병들이 절도있게 멈춰서자, 소기파가 소리쳤다.
“좌향좌!”
처억! 척!
“···!”
“주상 전하께 대하여 경례!”
“충-! 성!”
“바로!”
곧이어 소기파가 임숭재에게 다가갔다.
“행진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전하께 여쭤보겠습니다.”
잠시 후.
숭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기파는 다시 훈련병들을 인솔했다.
봉해위가 다시 절도 있게 움직이자, 백성들은 이를 넋놓고 지켜봤다.
지금껏 보지 못 한 행진이었다.
그 움직임은 씩씩했다. 그러면서도 절도가 있었고, 군사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잘 벼려진 칼처럼 매서웠다.
말로만 듣던 황군(황제의 군대)의 모습이 아닌가, 일부 백성들은 수군거릴 정도였다.
“서대문까지 어가를 호종한다! 호종간에 군가는 진짜 사나이! 핫, 둘, 셋, 넷!”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핫, 둘!”
“너와 나! 종묘(나라)지키는! 성은에 살았다!”
“핫, 둘, 셋!”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군가가 시작되자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며 눈살을 찌푸리던 백성들도, 봉해위의 등장으로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된 취타대도, 어가행렬을 호종하던 신하들도, 그 템포와 박력에 중독된 것인지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어가 안의 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군가들 보다 특히 이 ‘전선을 간다’가 마음에 들었다.
어딘가 비장하고, 그러면서도 서글프고··· 군사의 비애가 잘 서려있으면서도 또 씩씩한 가락이었다.
***
일국의 왕이 체신머리 없게(?) 군가를 흥얼거리고 있는 그 시각, 대마도.
무라모리 역시 체신머리 없게 고개를 넙죽 조아리고 있었다.
“···”
그런 무라모리를 안처직이 흘겼다.
그 매서운 눈빛에 무라모리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조선왕이나 신하나··· 조선 것들은 하나같이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런 종자들이 왜 노략질을 당하기만 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이게 다 무어요.”
차갑기 까지 한 그의 어조에 무라모리는 마른 침을 꿀꺽거렸다. 그리고 비굴하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보, 보다시피 칼이오만······.”
“칼인 걸 누가 모르나.”
몰라서 물은 게 아니면 왜 물은 건데!
빽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눈앞의 안처직은 안핵사 자격으로 쓰시마에 입도했다.
그에게 밉보인다면······.
꿀꺽.
생각도 하기 싫다.
그냥 일전에 본 조선왕이라 생각하고 바짝 기어야 했다.
“대관절 이 칼들은 어디에 쓰려고 이리 모아둔 것인가를 묻는 게 아니오. 혹 전하와의 약조를 어기고 우리 해안을 노략질 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건 아니오?”
미심쩍어하는 안처직.
그에 무라모리는 펄쩍 뛰었다.
“아, 아니오! 내 어찌 감히 그런 불측한 생각을 마음에라도 품었겠소이까? 부디 믿어주시오. 절대 아니오.”
질색팔색을 하며 날뛰는 무라모리임에도 안처직은 짧게 침음했다.
이 왜종(倭種)들의 말은 하나같이 믿을 게 못 된다.
하물며 왜구 두령의 말이야 믿겠는가?
섬이 척박하고 터전이 곤궁해서 자연스레 나쁜 기질을 갖게 된 건 이해하지만, 그게 사람을 해하는 것에 대한 면죄가 되진 못 한다.
“믿어달라 사정하고 약조를 어긴 게 한 두 번이야 믿는 척이라도 하지.”
“···”
노골적인 비아냥에 무라모리는 인상을 구겼다.
‘진성대군······.’
바드드득.
그를 생각하니 부아가 치민다.
아직도 진성대군과 나눈 대화가 기억에 선명했다.
-안핵사도 걱정마십쇼. 제가 내려가던지 안처직이 내려 갈 테니까요.
-안처직이요?
-예. 저랑 친한 분이니 만약 제가 안핵사로 내려가면 설렁설렁 대마도 풍광이나 구경하다 오는 거고··· 안처직이 내려가도 저랑 친분이 있는 분이니 제가 살짝 귀띔해드리겠습니다.
귀띔? 귀띔!
귀띔을 해줘서 이 정도라면, 안했을 시 안처직은 얼마나 더 활개치고 다녔을 거란 말인가?
아니, 얼마나 자신에게 수치와 모욕을 줬을 거란 말인가?
‘제기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조선왕의 엄포에, 겁에 질려 사고가 이성적이지 못 했다.
다시 와서 생각해보면, 감조관.
그래, 백번 양보해서 감조관은 이해한다. 안처직의 말마따나 선조들이나 본인이나, 조선왕의 약조를 저버린 게 한 두 번이 아니니까.
그래서 혹시 약조를 어기고 군대를 몰고 출항을 하지 않나 감시할 감조관 정도야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핵사······.
이것만은 막아야 했었다.
“안핵사, 합하.”
분노와 자책에 진저리치고 있는 무라모리를 대신해 오키히데가 처직을 불렀다. 처직은 눈에 쌍심지부터 키웠다.
“합하는 누가 합하인가?”
“소, 송구하옵니다.”
“호칭에 주의하도록 하라.”
“···예. 앞으로는 조심하겠사옵니다. 다만, 지금 죄인들을 구금해뒀으니 다른 것보다도 일단 죄인들부터 심문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부들부들.
오키히데가 ‘죄인’을 언급하자, 무라모리는 또 한 번 분노에 치를 떨었다.
사실 안핵사가 섬을 헤집고 다니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치와 모욕을 주는 것?
이것도 대승적 차원에서 참는다면 충분히 참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게 바로 죄인들이었다.
조선왕이 안핵사를 파견하는 명분은, 쓰시마의 노략질에 죄없이 노비가 된 조선인이 있을지 모르니 조사해보고 혹 있다면 쇄환시키고, 안핵사로 하여금 왜구 잔당들의 죄를 묻게 하겠다는 것에 있었다.
그런데 직접 겪어본 안핵사는 노비를 쇄환시키는 문제는 둘째치고 자신의 최측근들을 ‘왜구 잔당’으로 엮어 구금시켜버렸다.
이게 무슨 의미겠는가?
손발을 잘라내거나, 그들을 인질로 삼아 쓰시마를 제어하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왜구 잔당’으로 구금된 자들만 아흔 여섯 명이었다.
안핵사가 ‘왜구 잔당’으로 낙인 찍은 방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섬에 상륙한 안핵사는 그의 최측근과 그 자제들을 불러 모으게 한 후, 손발을 검사했다.
무슨 손발인가 싶었지만, 손발을 검사한 후에는 웃통을 벗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손이 거칠거나 혹은 생채기가 있거나, 몸에 자상이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왜구 잔당으로 지목했다.
농군의 손이 투박하면 투박했지, 저리 거칠 수도 없거니와 몸에 칼자국이 있는 건 더더욱 왜구 잔당일 수 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부아가 치밀다 못 해 안핵사의 목을 베고, 그 목을 소금에 잘 절여서 조선 조정에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건 전쟁 때문이었다.
조선왕의 엄포도 엄포지만, 그보다 무라모리는 한양에서 하경하면서 봉해위란 군대가 조직 되는 걸 봤었다.
일부러 보여준 건지, 아니면 우연찮게 접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특정 군대가 따로 조직된 데에는 필시 연유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만약.
만에 하나라도 그 군대가 쓰시마와 전쟁을 일으키려 조직한 군대라면?
안핵사의 목을 베는 건 충분한 전쟁 명분이 될 터였다.
한양에서 어떤 수치와 모욕을 참고 견뎠는데 명분을 내준단 말인가?
지금껏 잘 참았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됐다.
“그래? 하면 갑시다. 내 죄인 놈들의 면상을 보고 심문해야겠으니.”
앞장서 걷는 안처직을 무라모리와 그의 가신들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