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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04화 (204/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04화>

    ***

    얼마 후, 연변.

    보를 쌓다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인지 연변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우중충 했다.

    이들을 지휘, 감독하는 권관과 사민경차관 홍해성 역시 아무리 죄인들이지만 사망자가 나왔기에, 무작정 속도를 내라 독려 할 수도 없었다.

    당연히 진행 속도는 이전보다 더뎌질 수 밖에.

    “이대로라면 내년 봄까지 외벽이나 완공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공석의 말에 홍해성은 현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봄까지 외벽은 완성 시켜야 할 터인데······.”

    이들이 아무리 죄인이라지만, 일단은 사민(徙民) 된 이들이다.

    이주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농사다.

    아무리 악덕한 탐관오리일지라도 농사철에는 부역을 시키지 않는다.

    하물며 이제 막 정착을 하기 시작한 연변이야 오죽할까?

    “이리 된 이상 연변의 농사는 내후년으로 미루고 공사에만 매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족한 부분은 구휼미로 어떻게든 메꾸구요.”

    김공석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연변 일대에 여진족이 씨가 말랐다지만, 임금께서 북정을 마음 먹으시면서 잠깐 도망을 간 것 뿐이다.

    몇 년만 있으면 언제든 본인들 거주지로 내려올 텐데, 그리되면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성이 필요한데, 지금은 농사와 공사 둘 모두를 진행할 여력이 없었다.

    한쪽에 공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내 전하께 따로 장계를 올려봄세. 전하께서도 이들을 가여이 여기시는 마음이 있으니 사정을 아신다면 구휼미가 어렵겠는가?”

    “예.”

    공석과 해성이 착잡한 마음을 달래던 그때였다.

    저 멀리 먼지바람이 좀 휘날리는가 싶더니, 기마 8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북진 만호 민천동이 분명했다.

    공석과 해성은 망루에서 내려가 천동을 맞이했다.

    “만호께서 예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조정에서 사람이 왔소이다.”

    “조정에서요?”

    “그렇소이다. 내 연변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장계를 올렸지 않소. 장계를 보신 전하께서 조치를 취해주신 듯 하오.”

    “조치라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으니 가서 봅시다.”

    “아, 예.”

    공석과 해성은 천동을 따라 강변으로 움직였다.

    강변 저 멀리에서는 배 몇 척이 올라오고 있었다.

    머잖아 배가 정박했다.

    책임자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공석과 해성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조치라기에 조정에서 사람이라도 보내준 줄 알았건만, 사람은 얼마 있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스무명 남짓.

    “만호, 조치란 게 뭡니까?”

    대답은, 자신을 갑동이라 소개한 장인이 했다.

    “조정에서 소인들과 함께 거중기와 녹로를 보내주셨습니다.”

    역적들이 발호했을 때, 공을 세운 위인인지라 아무리 군기시 장인일지라도 공석과 해성도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해성은 비교적 공손한 어조로 되물었다.

    “거중기? 녹로? 그게 무어랍니까?”

    갑동은 말없이 배한켠을 가리켰다.

    나무와 도르래와 무슨 밧줄 같은 게 고정돼 있었다.

    “이제 저걸 조립해서 쓸 겁니다.”

    “···”

    “일단 하역이 우선이니 군사들좀 불러주십시오.”

    “아, 예.”

    공석과 해성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군사들을 불러 모았다.

    다 함께 하역 작업을 시작하니, 두시진이 조금 안 돼서 하역이 끝이 났다.

    하역이 끝나자 갑동은 또 다른 군기시 장인들을 불러 모아 조립을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저, 저게 뭐요?”

    솟대도 아니고, 장승도 아닌 모습에 해성과 공석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다.

    그에, 갑동은 피식 웃었다.

    대군께 설계도를 받아봤을 때, 자신과 군기시 장인들의 반응도 저랬었다.

    거중기와 녹로의 해괴한 모습에,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다.

    군사들과 죄인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군기시 장인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갑동은 녹로의 도르래에 연결된 줄에 바위를 묶었다.

    그리고 얼레로 향한 채 관중(?)들을 향해 소리쳤다.

    “놀라지들 마시오. 감아라!”

    쿠르르르-.

    기괴한 소리와 함께 얼레에 연결된 줄이 감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거 전부는 아니었다.

    “어어!”

    큼지막한 바위.

    장정 넷이 들어도 꿈쩍도 않을 것 같은 큼지막한 바위가 단번에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녹로를 처음 보는 사람들로서는 입이 쩍 벌어질만한, 상식 밖의 일에 가까웠다.

    “두, 두억시니다!”

    그 해괴한 모습과 무지막지한 힘에 요괴의 일종인 두억시니가 연상됐는지 누군가 겁에 질린 채 소리쳤다.

    괴력난신의 일종인 두억시니라니··· 얼토당토 않은 소리임은 공석과 해성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도 녹로의 무지막지함 힘에 압도 된 건 마찬가지였다.

    공석은 조심스레 녹로로 다가가 얼레를 매만졌다.

    두억시니일 리는 추호도 없었지만, 어느샌가 벌떡 일어나 두억시니의 형상을 한 채, 몽둥이로 자신을 내려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두려움과 달리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진 않았다.

    “이걸 이용해 공사를 하라는 어명이 계셨습니다.”

    “이 두억시··· 아니, 녹로로 말이오?”

    “예. 한결 수월할 겁니다.”

    공석은 녹로를 빤히 올려다보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이 두억시니 같은 괴력을 가진 녹로를 이용하면 보 쌓는 일이 한결 수월해지리라.

    그 이후, 갑동과 군기시의 장인들은 연변의 죄인들에게 녹로와 거중기 사용법을 전수했다.

    ***

    -널 만날 수 있는 날♪ 친굴 만났고♪ 끊이지 않던 대화가 이젠 끊기고♬ 널 바라보다가 다른 사람을 겹쳐 봤어♪ 누군가 내 안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2016년도였을까.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노래가 있었지.

    박원의 노력.

    모르는 사람이 없는 띵곡이고, 나도 참 많이 불렀었다.

    물론 지금도 부르고 있고.

    그래서 말인데, 이역이 되면서 모든 능력치가 버프 된 것 같다.

    암기력이면 암기력, 집중력이면 집중력······.

    노래 부르다 말고 웬 능력치 타령이냐고?

    왠지 가창력 버프도 받은 기분이거든.

    아니, 확신이다. 받았다.

    이현호로 살 때는 이렇게 까지 잘 부르진 못 했었다.

    그땐 노래방 가면 가장 먼저 하던 일이, 리모콘에 있는 리버브 버튼 눌러서 에코음 확대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야 못 부르는 노래 실력을 감추고, 조금이라도 더 잘 부르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지금?

    여기 리버브 버튼이 어딨고 하다못해 마이크가 어딨어?

    생목으로만 부르는데도 어지간한 가수 뺨칠 정도다.

    자뻑이 심하다고?

    아닐 걸?

    지금 내 앞에는 관객들이 있거든.

    “잘 부르신다······.”

    “엄청 애절하지 않니?”

    봐라, 궁녀라는 관객들을.

    처음에는 나 혼자 심심해서 흥얼거리는 수준에 불과했었다.

    그러다가 홍문관을 지나가던 궁녀1이 내 노래를 듣게 됐고, 어느 새 다른 궁녀들까지 데리고 왔다.

    확실히 내가 음치, 박치였다면 그럴 리가 없다.

    남이 들었을 때도 잘 부른다는 느낌이니 다른 관객들까지 끌고 온 거겠지.

    자, 그런 의미에서 다음 곡은 더 원의 겨울사랑이다.

    -···하얀 눈꽃처럼 여린 나의 사람♪ 그 사람이 나아아아를 아프게 하네요♬ 오, 바람이 불어와, 멀리 그대애애앨······.

    노래 부르는 중간에 슬쩍 곁눈질을 했다.

    홍문관의 기단석 모퉁이에 살짝 숨어 내 노래를 훔쳐(?) 듣던 궁녀1이 보인다.

    두 손을 가슴에 꼭 모은 채, 두 눈은 지그시 감고 있는 걸 보면 감미로운 내 노래에 뻑이 가도 보통 뻑이 간 게 아닌 것 같다.

    그만 불러야겠다.

    이러다가 정말 고백이라도 받으면 피차 곤란하니까.

    “후후.”

    새삼스럽지도 않게 나르시시즘을 느끼고 있던 그때였다.

    “대감?”

    “헉!”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예서 뭘 하고 계시옵니까?”

    홍문관 전한 이행이었다.

    “아··· 그게요.”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계시던데······.”

    긁적긁적.

    할 말이 궁색해졌다.

    내가 홍문관 섬돌에 쳐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건, 말하자면 좀 길다.

    한식경 전만 해도 나는 편전에 있었다.

    이제 곧 오키나와 왕과 약속한 봄이 다가오니 슬슬 그 문제를 매듭 짓자는 형님의 말씀에, 파병 문제의 논의가 오가고 있었고 그러다가, 《해동제국기》의 필사본이 필요해졌다.

    홍문관에 내관을 보내겠다는 형님 말씀에, 편전이 따분하기도 하고, 겨울치고는 날도 따뜻하고, 몸도 좀 풀 겸 내가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닌 게 아니라 편전에만 한시진이 넘게 있었더니 몸이 여간 찌부등한 게 아니었거든.

    형님께 허락을 받고 홍문관에 도착해 《해동제국기》필사본을 요구했다.

    홍문관에서는 곧 사람을 시켜 직접 편전에 전달케 하겠다 했고, 난 알겠다는 답변과 함께 홍문관을 빠져 나왔다.

    그럼 이제 곧장 편전으로 가기만 하면 됐는데······.

    문제는 날이 너무 좋았다.

    볕도 너무 따뜻하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또 어찌나 시원한지······.

    이대로 들어가면 또 박터지게 입씨름 할 게 뻔하니 조금만 농땡이 피우자는 생각에 홍문관 섬돌에 앉아서 기다렸고, 그렇게 있다 보니 어느 새 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실직고하랴.

    편전 들어가기 싫어서, 농땡이 피우고 있었다고.

    “어··· 이건가요?”

    말을 흐리다가, 마침 전한이 들고 있는 종이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편전에서 요구한 《해동제국기》유구국기(琉球國記)의 필사본이리라.

    “아,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주시겠습니까? 제가 갖고 갈게요.”

    라고 말한 나는 전한이 들고 있는 필사본을 냉큼 낚아채고 후다닥 홍문관을 빠져나갔다.

    젠장, 쪽팔리다.

    걸음을 바삐 움직인 나는 편전에 들었다. 그리고 유구국기 필사본을 일일이 다른 대신들에게 나눠주었다.

    “도제조. 왜 이리 늦게 온 것이냐?”

    다른 대신들에게 필사본을 돌리고 나자 형님이 물으셨다.

    당연히 전한에게 말한 것처럼 농땡이 피우다 늦었노라고 말하기는, 아무리 형님과 나 사이라지만 말할 수 없었다.

    “에··· 그, 뭐야. 전한이 뒷간 가서 늦게 오지 뭡니까?”

    “흐음. 전한이 뒷간 가면 감감무소식이란 소문은 들었다만 참인 모양이로다. 뒷간에서 효험이 있는 탕약이라도 내려야겠다.”

    “예. 아무튼, 아까 어디까지 했었죠?”

    전한을 팔아먹은 게 양심에 찔려 얼른 화두를 전환시켰다.

    “병종을 말씀하고 계셨사옵니다.”

    “아, 병종. 에, 일단 저희가 상대하는 건 궁고도(미야코)의 오랑캐들입니다. 오키나와 왕에게 들어보니 궁고도의 오랑캐들은 칼은 잘 쓰지만, 활은 잘 못 쓴다고 하더군요. 일단 사부(궁수)를 4할 정도로 채우는 게 좋겠습니다.”

    “음.”

    “또, 거기 필사본 보시면 나와있지만, 오키나와는 예로부터 호족들이 성을 쌓아 지낸 세월이 오래됐습니다. 궁고도도 마찬가지죠. 파진군은 한 2할 정도 채움이 좋을 듯 합니다.”

    “하면 기병은?”

    “저희의 목적이 궁고도 호족의 성을 함락시키는 게 목적이라 필요 없을 듯 합니다. 부산에서 출발 후에 오키나와의 수도에 들려서 정비하고 궁고도로 다시 출발하게 될 텐데, 거기까지 군마를 태우고 간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구요. 말을 태울 바에는 화포를 하나라도 더 싣는 것이 좋아보입니다. 아, 비격진천뢰도요.”

    “그리하면 되겠도다.”

    그 이후로 파병 문제가 술술 논의됐다.

    명나라 때문에 파병을 한 적은 있었어도, 배타고 보낸 파병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배를 타고 가는 일이거니와 인원도 천명이나 된다.

    여러 가지를 중점적으로 논의하다 보니 두시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럼 이 문제는 이리 골격을 잡고 빈청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면 되겠도다. 결과는 품의해서 알리라.”

    대신들은 주섬주섬 필사본을 챙겼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파병은 확정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파병 준비에 박차를 가할 테고, 해가 가기 전에 천여명에 달하는 병력들이 모일 것이다.

    귀찮은 게 있다면, 형님께서 별충위의 상태에 강한 인상을 받으셨던지 훈련을 내게 맡기셨다는 건데··· 뭐, 이건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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