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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202화 (202/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02화>

    ***

    “대감.”

    편전에 있어야 할 내가 승정원에 나타나자, 승정원의 관원들과 아전들은 화들짝 놀란 채 예를 갖췄다.

    물론 지금은 그런 허례허식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종이, 종이. 종이랑 붓!”

    내가 펄쩍 뛰며 지필묵을 요구하자, 아전 하나가 후다닥 뛰어나가더니 지필묵을 가져왔다.

    “자, 거중기··· 거중기부터.”

    나는 거중기부터 떠올렸다.

    그 이미지는 물론이고, 작동 방식과 원리까지.

    문돌이였지만, 이런 기초 지식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문돌이를 과하게 무시하는 처사다.

    문제는······.

    너무 시끄럽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나 때문에 승정원 관리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저 수군거림 때문에라도 집중이 안 된다.

    “미안하지만 모두들 나가주십시오.”

    어이없는 주객전도의 상황.

    나도 안다. 승정원 관리들이 얼마나 어이가 없을지.

    근데 어떡해?

    집중해야하는데.

    다행히 말 잘 듣는 승정원 관리들은 내 말에 고분고분, 승정원을 빠져나갔다.

    나만 남게 된 승정원.

    나는 펜대··· 아니, 붓대를 굴렸다.

    “아니, 종이가 왜 이렇게 작어?”

    사람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을 하다보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만, 절대 예민한 거 아니다.

    진짜로 종이가 작다.

    고작 A4용지만한 크기의 종이로 뭘 그리라고?

    이걸로는 거중기를 연상시킬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여보세요, 밖에 아무도 없습니까?”

    “예! 대감!”

    젊은 관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그 뭐야. 이거 말고 큰 종이 없습니까?”

    “얼마나 큰 종이 말이시온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병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 한 폭 정도 되는 크기? 아니다, 절반 크기여도 됩니다.”

    “아, 예. 속히 가져오겠사옵니다.”

    관리가 뛰쳐나간 사이.

    나는 머릿속으로 거중기를 어떻게 그릴지, 작동 방식과 원리를 어떻게 설명할지 정리를 했다.

    예의 관리가 돌아온 건, 정리가 얼추 끝났을 쯤이었다.

    “여기있사옵니다.”

    “두 번 일 시켜서 미안한데 사람좀 도화서에 가서 그림 기똥차게 잘 그리는 화원으로다가 한 명만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도, 도화서요?”

    “아, 예.”

    뜬금없이 웬 도화서인가 싶겠지만, 나는 얼굴도 잘 생겼고, 똑똑한데다가··· 또, 아무튼 간에 부족한 게 없는 팔방미남이지만 그림 실력만큼은 꽝이다.

    내가 발로 그린 거중기 그림을 편전에 걸어놓고 설명할 순 없다.

    어쨌거나, 일단 준비물은 다 마련이 됐다.

    나는 일단 화원에게 보여줄 거중기 그림부터 그렸다.

    최대한 신중하게, 붓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거중기의 골격이 되는 몸체는 대충 그려도 됐지만, 도르래의 원리를 설명할 부분은 최대한 신중하게 그렸다. 먹은 연필이 아니라 지워지지도 않으니까.

    마침내 거중기가 다 그려졌다.

    발로 그린 것 같지만, 화원이 참고 할 만한 그림은 되는 것 같다.

    자, 이제는 거중기의 원리를 정리하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에 자료 하나 없이 발표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언변이 뛰어나서 굳이 필요가 없거나, 준비성이 없거나.

    나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료를 정리해야한다.

    <거중기>

    설명 :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계로 그 원리는 도르래 원리와 똑같다. 도르래는 물체의 무게를 분산시켜 주기 때문에 아주 작은 힘으로도 큰 무게의 물체를 들어 올릴 수 있게 되는데, 거중기가 이와 같은 원리다.

    작동 방식 : 일단 몸체 윗 부분과 아랫 부분에 각각 네 개의 도르래를 연결한다. 그 다음 몸체에 연결한 줄에 들어올릴 물체를 매달고, 도르래의 좌우에는 밧줄을 연결시킨다. 그리고······.

    <녹로>

    설명 : 거중기처럼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데 쓰는 기구이다.

    작동 방식 : 네모난 틀을 만든 다음 틀 앞에는 기둥 역할을 할 기다란 기둥을 비스듬히 세운다. 그 끝에는 거중기처럼 줄을 연결시키고······.

    도화서에서 화원이 도착한 건, 거중기와 녹로 프레젠티이션을 위한 준비가 끝났을 쯤이었다.

    “···?”

    어지럽게 흩어진 종이와 필기도구들에, 화원은 의문문을 띄우고 있었다.

    “저거랑, 저거 그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거랑 저거는 당연히 내가 발로 그린 거중기와 녹로다.

    대충 그림을 살펴보던 화원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머잖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의자를 내어준 채 화원을 앉히고는, 화원이 편히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왔다.

    아무래도 내가 발로 그린 그림이다보니, 설계적인 부분에서 핀트가 엇나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옆에서 지적을 해주며 장장 한시진이 걸려서 그림을 완성시켰다.

    화원에게 감사 인사를 한 나는 그림과 자료를 들고 헐레벌떡 편전을 찾았다.

    편전에서는 다른 사안들이 논의 되고 있었다.

    동평관에 아직도 있는 대마도주에 대한 문제.

    권인손의 치계에 대한 문제.

    앞으로 진행 될 치수 문제.

    등등.

    “그게 다 무엇이냐?”

    형님은 내가 헐레벌떡 편전에 들자, 옆구리에 낀 그림과 자료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임금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는 게 신하의 도리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아니, 시간은 있었지만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머릿속에 정리해둔 자료라던가 말들을 금방 까먹어버릴 것 같았다.

    “잠시만. 저기로, 좀.”

    여담인데, 무력이 아니라 말(言) 한 번으로 임금을 어좌에서 내려오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조선 팔도에서 얼마나 될까?

    일단 나는 가능하다.

    내 말 한 번에 형님은, 날 이렇게 대한 놈은 네가 처음이야··· 라는 반응과 함께 쭈뼛거리시며 어좌에서 내려오셨거든.

    당연히 신하가 임금을 어좌에서 내려오게 만들었으니 주변에서 호통이 들려와도 이상할 건 없지만, 원래 사람은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 할 말을 잃곤 한다.

    상식 밖의 일을 당한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버버거리면서 어좌에서 내려온 형님에 읍을 할 뿐이었다.

    “자, 그럼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아!”

    발표 전에 깜빡한 게 있다.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해야하는데, 화원이 그린 그림이 아직도 내 옆구리에 끼어있다.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대충 어좌에 걸었다.

    “이, 이······.”

    “저 무슨······.”

    어버버거리던 대신들이 정신을 차렸는지 어좌에 감히 그림을 걸어대는 해괴망측한 모습에 딴지를 걸려고 했지만, 내가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형님이 거수하자 입을 다물었다.

    “무엇인고?”

    “이건 거중기라 하는 물건이옵니다.”

    “거중기?”

    “예.”

    “그럼 그 옆에 있는 건?”

    “이건 녹로라고 하는 것인데 둘 다 도르래를 이용한 도구입니다.”

    “한시진만에 돌아온 것이 바로 저것 때문이렷다?”

    “맞습니다.”

    “무슨 도구인고?”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축성을 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죠?”

    “물론이다.”

    “일이 고되다 보니 공사 중에 압사 당하는 사람도 한 둘 씩 나오게 되구요.”

    연변보에서 죽은 두 명도 돌에 깔려 압사를 당한 걸로 알고 있다.

    문제는 꼭 연변보의 문제도 아니란 것이다.

    지금도 팔도 어딘가에서는 관아를 증수하거나, 성벽을 보수하거나, 지체 높으신 양반님네들 기와집을 짓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을 거다.

    진짜 문제는 이 모든 걸 수작업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렇게 사건, 사고가 잊을만하면 깝툭튀 하는 거고.

    “그런데?”

    “저 두 기구를 이용하면 사상자 없이 공사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형님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 말을 반신반의해서는 아니리라.

    아마, 저 기구가 대체 뭐길래 사상자가 준다는 걸까, 라는 어떤 호기심에 눈살을 찌푸리신 것 같다.

    21세기에서 공사는 말그대로 공사다.

    공사=사상자란 등호 성립이 전혀 없다.

    하지만 여기서 공사는 사상자와 연결이 된다. 공사를 하면 사상자가 없을 수가 없어서, 사상자가 안 나오면 다행이지만 나와도 어쩔 수 없다, 라는 인식이 팽배하단 말이다.

    그러니 사상자 없이라는 말에 호기심을 느끼실 법도 하지.

    “어찌 두 기구가 사람을 상하지 않고도 축성을 할 수 있단 것이냐?”

    “자, 보십시오. 거중기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 거중기는 도르래 원리로 물체의 힘을 분산시키는 기능이 있습니다. 예컨대 열 명의 장정이 힘을 쏟아야 들 수 있는 무거운 물체를, 물체의 힘을 분산시켜 한 두명 장정의 힘만으로도 들어올릴 수 있게 만드는 거죠.”

    “···?”

    “자, 여기 그림에 보시면 연결된 줄들이 보일 겁니다. 이 줄들로······.”

    나는 장장 반시진이 넘게 거중기와 녹로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결과?

    “과연 저런 기구가 있으면 공사가 훨씬 수월하긴 하겠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사상을 당하는 것은 공사장까지 수레로 옮긴 바위나 돌을 인력으로 나르거나, 성벽에 올리려다가 깔리는 일 때문인데 저걸 이용하면 완전히는 어렵더라도 과연 줄일 수 있는 있을 듯 하니 기특한 물건인 듯 하옵니다.”

    나는 조정 대신들이 거중기나 녹로의 원리를 이해 못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사실 16세기 사람들이라고 IQ가 8, 90대일 리는 없다.

    똑같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니까.

    그저, 원리는 대략적으로 짐작은 해도 그 원리를 실체나 말로 증명을 못 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레젠테이션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보다시피 다들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경들의 말이 과연 그러하다. 도제조는 어찌 이런 기특한 물건을 발상한 것이냐?”

    이구동성으로 괜찮은 물건이라는 대신들의 말에 도취(?) 되어 있던 내게 형님이 물었다.

    “어······.”

    뭐라고 답해야 될까.

    21세기에서 체험학습이란 걸 갔는데 거기서 알게 됐다?

    초등학교 교육 과정을 밞고 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알게 됐다?

    둘 다 미친 소리처럼 느껴질 건, 굳이 말 안 해도 알 만한 것이다.

    “책에서 봤습니다, 책에서.”

    “책? 어떤 책 말이냐.”

    “중국의 서책이 아니겠는지요?”

    영의정 허침이 당연하다는 듯 중국 서책을 언급했다.

    사대주의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실 특정 발명품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게 대부분이다.

    당장 종이만 해도 중국에서 발명이 됐다는 걸 알고 내가 얼마나 충격을 먹었는데.

    좌우지간.

    ‘정약용이 뭘 보고 발명했댔더라 기기······.’

    기기 뭐였는데 자세히 기억이 안 난다.

    허침의 말처럼 중국의 서책을 보고 고안해냈다는 것만 기억나는데, 다만.

    다만 말이지?

    ‘정약용 아저씨는 진짜 중국 책 보고 한 거지만, 나는 한국 책 보고 고안해낸 거잖아?’

    교과서를 중국에서 만들었을 리가 있나?

    한국 책 보고 고안해낸 게 100% 맞다.

    그러니까, 굳이 중국 책 보고 발명했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내가 고안해냈다고 해도 양심에 찔릴 게 1도 없다는 거지.

    “아, 실언을 했습니다.”

    “···?”

    “책을 보다가, 책에서 도르래라는 말이 나왔었습니다. 그러다가 저 도르래를 이용하면 무거운 물체도 운반 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됐구요. 근데 마침 연변에서 사고가 났다고 하니, 생각만 하던 걸 구체적으로 좀 그려봤습니다.”

    생각만 하던 걸 그림으로 옮긴 것 치곤 존나게 구체적인데?

    라는 대신들의 표정은 가볍게 무시하자.

    “그러하냐? 과연 내 아우구나. 경들은 모두 본받으라.”

    형님은 100% 신뢰를 보내주고 계시지만, 다른 대신들은 어딘가 미심쩍다는 표정들이 가득이다.

    이럴 땐 하나의 진실을 보태면 된다.

    사람은 원래 90% 거짓이란 확신이 있어도 10%의 진실을 보태지면 나머지 90%도 진실처럼 여겨 버리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무슨 진실이냐고?

    “에, 또 제가 사실 기회가 안 돼서 말씀을 안 드렸지만 타작 도구도 발명을 했는데 말입니다.”

    “타작 도구?”

    나는 소풍대풍을 설명드렸다.

    기존에 타작하던 방식보다 3~4배 능률이 오른다는 말도 함께.

    지금처럼 90%의 거짓에 소풍대풍이라는 10%의 진실이 보태지자 대신들은 얼추 수긍하는 눈치였다.

    원래 저놈이 좀 모자란 것처럼 굴더니 발명가 기질이 있긴 있었나 보네, 라는 듯.

    ‘후후.’

    이제 난 조선의 에디······.

    응?

    몇백년만 지나면 조선의 위대한 과학자로 불리게 될 거라는 사실에 흐뭇해하던 내 눈에 사관 하나가 들어왔다.

    “흡!”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사관은 헛바람까지 들이키며 고개를 떨궜다.

    그러더니 아주 조심히 붓을 놀린다.

    ‘뭐야, 내 욕하나?’

    《무종실록(武宗實錄) 1506년 11월 24일 기사》

    .

    .

    .

    사신은 논한다.

    진성대군 이역은 세간에 사람됨이 우습다는 평이 있는 자다.

    임금과 가까이 한 뒤로 권세를 누리고 있는데 과연 왕자의 신분으로 편전에 마음껏 드나드는 걸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신은 단호히 후세에 전하건대, 그는 언행에 조금도 삼감이 없을지 몰라도【앞전에 진성대군은 임금과 대신들이 연변의 일을 평의(評議)하던 중에 뛰쳐나가 한시진만에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임금을 어좌에서 끌어내렸다】 과연 여러 성인들과 학자들도 생각 못 한 물건을 고안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려 하니 우습다는 평이 웬 말이겠는가?

    진성대군이 우습다는 세간의 평은 지나친 속단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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