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01화>
***
“어찌 그러셨사옵니까······.”
보통 신하들은 종친을 견제한다.
그들이 대통을 위협하는 존재들이기 때문도 하지만 그들이 한 번 패악을 떨면 공사천 막론하고 모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임금이 따끔하게 혼을 내거나 벌을 내린다면 종친을 꺼려할 까닭이 없겠지만 본시 제 가족에게 관대한 게 인간의 본성이다.
왕이라 해서 다를 것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왕이라 종친의 처벌에 관대 할 수 밖에 없었다.
종친을 벌주는 건, 제 얼굴에 침뱉기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래서 융은 자신을 책망하는 사홍의 말이 왠지 낯간지럽게 들렸다.
XX군을 벌하소서.
XX대군을 벌하소서.
같은 말만 들었지, 종친을 벌주고도 책망을 받은 건 개국 이래 자신이 처음일 터였다.
“종친을 벌주어도 문제인가?”
너털웃음을 터뜨린 채 말하자 사홍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가 지나치셨사옵니다. 어찌······.”
입에 담기도 민망한지 사홍은 말끝을 흐렸다.
하기사.
입이 열 개라 한들 어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겠는가?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기 마련이옵니다. 하물며 지금의 형국은······.”
역모가 일어나도 하등 이상할 게 없사옵니다.
이게 사홍이 말하려는 바였지만 사홍은 끝을 맺진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역모 운운하는 것 부터가 불충이다.
“내 경의 충심을 어찌 모를까.”
사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그들이 상소 하나 올리지 못 하는 건, 강력한 임금의 권위 때문이다. 그런데 종친들에게 까지 채찍질을 가한다면, 혹여라도 불순분자들과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게 사홍이 걱정하는 것이고, 융도 사홍의 걱정을 잘 알았다.
왕에게 불만을 품은 사족들이 결집하고, 조직을 이뤄서 특정 왕자를 추대한다면 과거 박원종의 난과 같은 역모가 일어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찌······.”
“종친의 패악질이 하루, 이틀도 아니잖은가?”
사홍은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사실 틀린 말씀은 아니시다.
“더군다나 치수(治水)를 일으키려면 재물이 필요한데 말로 타일러서 바칠 자들이 아니다.”
사실 이것도 틀린 말씀이 아니시다.
“나는 부역에 나가보지 않아 그 고단함을 잘 모르지만 잊을만하면 부역의 고충을 아뢰는 이들이 있었으니 어찌 모르겠는가? 치수에 백성들을 동원하더라도, 밥은 먹여야 한다는 진성의 말이 참으로 타당하다.”
부역에 동원 된 이들이 본인들이 먹을 밥을 가져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부역이 고된 면도 있었다.
진성대군은 부역에 백성들을 동원하더라도 밥은 먹여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다.
당연히 그러자면 재물이 필요했고.
“종친의 패악도 잡고, 치수에 사용할 재물도 얻었으니 이는 일석이조다.”
“···속히 금군을 증군시켜야 하겠사옵니다.”
“왜, 역모라도 일어날까 두려운 것인가?”
“···”
“걱정말라. 내 지난 번에는 정치를 어지럽게 해서 박원종이 난을 일으켜도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다만 지금 그같은 난리가 일어난다면 어찌 백성들의 호응을 얻겠으며, 백성들이 가만 있겠는가? 경도 늘 말하지 않았던가. 군왕의 호령은 사민(四民)에서 나오니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 하는 것은 곧 하늘을 저버린 것이라.”
“···그랬었지요.”
“좌우지간, 걱정 안 해도 된다. 지금 추대 할 사람이라고는 진성대군과 제안대군 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제안대군은 박원종의 난에 연루돼서 강등 되지 않았던가.”
이번 종친들을 부른 연회에 제안대군도 부르긴 했지만 법제상 제안대군은 서인(일반인)에 불과했다. 위리안치 되면서 군호가 회수되고 서인으로 강등 된 탓이다.
박원종과 같은 무리가 또 다시 들고 일어나도 제안대군은 추대 할 수가 없다.
남은 건 진성대군인데, 진성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역적질에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했다면 진작에 했을 거다.
그럴 기회도 많았으니까.
“왜, 자만하는 것 같은가?”
“송구하옵니다.”
“자만이 아니다. 이런 일로 종친들 중에 역적이 나온다면 그는 원래 역적이 될 팔자였던 것이다. 내 채찍질을 하든 말든 말이지. 오히려 잘 된 일이다.”
“···”
“사람들은 날 폭군으로 봐야 한다. 툭 하면 광기에 휩싸여서 사람들을 족치고, 예법 같은 것에는 얽매이지도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언사에 신중함도 없고··· 그래야 그들이 겁을 먹고 따를 것이다.”
“견성군은 괜찮겠사옵니까?”
“안 괜찮을 건 무엇인가?”
“아무래도 홍 소용(성종의 후궁이자 견성군의 어머니)이 걸립니다.”
“홍 씨?”
“예. 그래도 선왕께서 가장 총애한 분인데······.”
“그 부분도 걱정말라. 홍 씨는 비록 지금은 자수궁(별궁)에서 칩거하면서 지내고 있다만 궁궐밥을 수십년 먹은 여인이다. 함부로 발톱을 드러내지도 않을 것이거니와 명분이 없음은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하면 다행인 일입지요.”
“그나저나 임금을 책망하려 찾은 건 아닐 테고··· 어찌 좌의정 씩이나 되는 분이 귀한 걸음을 하셨는가?”
임금의 농담에 황망함을 금치 못 하던 사홍은 허둥거리며 부복했다.
“어, 어찌······.”
“농이다, 농. 그래, 어찌 알현을 청했는고?”
“큰 일은 아니옵니다만··· 연변(延边)에서 일이 터진 듯 하옵니다.”
“연변이라면··· 죄인들이 새로 이주해서 터를 닦는 곳 말이냐?”
“예. 보(堡)를 쌓던 중에 큰 비가 와서 잠시 공사를 중단했었는데, 비가 그치고 공사를 재개하다가 갑자기 무너져내렸다고 하옵니다.”
“사상자는?”
“연변에 배치 된 별충위와 의흥위 군사들 12명이 부상을 당했사옵고 죄인들은 31명이 부상을, 2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옵니다.”
“흐음. 그나마 군사가 상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그러하옵니다. 어찌 하오리까?”
“경의 생각은 어떤가?”
“비록 죄인들이라곤 하나 사람이 상했으니 가벼운 일이 아니옵니다.”
“사민경차관 홍해성과 연변보 권관 김공석(金公奭)을 파직하란 소리인가?”
연변으로 이주가 시작되면서, 조정에서는 연변에 보를 설치 했었다.
아직 터를 완전히 닦진 않았지만, 지휘관으로는 종9품 별충위 별장(別將)으로 있던 김공석을 권관에 제수해 파견했었다.
다만 이 둘을, 고작 죄인 둘이 공사 중에 죽었다고 파직하기란 융의 입장에선 께름칙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니옵고 다만 대책은 논해야 않을는지 해서······.”
“이 죄인 놈들은 하나같이 귀찮은 종자들이로다. 이주를 윤허했으면 알아서 할 것이지, 이런 사달을 일으켜서··· 쯧쯧.”
“···”
“패초를 보내도록 할 것이니 경도 준비하라.”
“예, 전하.”
할 말을 마친 사홍이 조심스레 뒷걸음질 치며 침소를 빠져나갔다.
***
하나만 묻겠다.
데자뷔(deja vu) 아려나?
처음 본 건데도 이미 본 적이 있다는 어떤 이상한 느낌적인 느낌을 받는 느낌에 대한 용어.
사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데자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데자뷔냐고?
일전에··· 후.
말하려니까, 한숨만 푹푹 나오는데······.
금석리에서 사람들이 수확한 벼를 타작할 때 느꼈던 문화충격 있잖아?
변변한 탈곡도구도 없이 벤치에 볏단을 내리쳐서 타작했던··· 뭐랄까, 원시적인 방법에 대한 회의감? 민망함?
뭐, 아무튼.
그 기분을 지금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기분을 애써 부정했다.
사람에게 직감이란 게 있다지만, 그래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게 직감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부정했다.
아닐 거다.
아니겠지.
설마.
“···그래서 역부로 동원된 죄인 둘이 죽었다는데, 죄인들이 상한 일은 가당한 일은 아니어도 부당하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군사가 상한 건 좌시 할 수 없다. 이에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해보이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함경도와 평안도의 군민들을 일개 보 쌓는 일에 역부로 동원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 하니 이는 우선적으로 배제해야 할 것이옵니다.”
“내 생각도 우상과 같다. 따지고 보면 연변보는 죄인들을 지키기 위한 성인데 죄인들 지키고자 멀쩡한 두 도의 군민들을 고생시킬 순 없지.”
형님과 대신들 사이에 이런저런 의견이 오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입하나 뻥긋하지 못 했다.
왜인지는 다들 알 거라 믿는다······.
내가 입을 연 건, 비하의 의미 없이 순수하게 대신들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질 즈음이었다.
“저기··· 전하.”
“오, 도제조.”
“본질과는 다른 말씀입니다만··· 그 혹시 연변보를 쌓는 일은 어찌 하는 것이옵니까?”
“축성을 어찌 하냐고 묻는 것이냐?”
형님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으셨다.
설마··· 하는 기색이 있으신 걸 보니 내가 축성법을 몰라 여쭌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다.
“예.”
호쾌할 만큼 단호하게 긍정하자, 주변 대신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날 무시해서가 아니라··· 뭐랄까, 날 믿어도 되나, 하는 생각 때문에 나온 반사적인 표정들 같다.
도감이긴 해도 병무도감은 병조보다 상위 기관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런 기관의 도제조로 있는 내가 축성법도 몰라서 다른 곳도 아닌 편전에서 하문하는 게 못 미더울 수 밖에 없었을 테지.
“아··· 그러니까, 말이다.”
다만 형님은 친절히 축성법을 설명해주셨다.
연변보는 그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한 번 뚫리면 피해가 막심하므로 석성으로 증수하도록 지시를 했다고 한다.
건축물의 받침이 될 기단은 직사각형의 커다란 돌을 주변에서 공수해오거나, 강변 근처 석재가 많이 나는 고을에 배를 띄워 보내 공수해와서 구축하고, 그 위로 중간 크기의 돌들을 엇물려서 쌓아올리고, 사이에 난 공간은 흙으로 메꾸는 방식이란다.
“···변변한 도구 없이요?”
“도구?”
반문하는 형님에서 데자뷔를 본 것이 맞다는 데 대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수원화성은 어떻게 지었는데요?”
“수원··· 화성? 경들은 수원화성을 아는가?”
“모, 모르옵니다, 전하.”
“수원화성은 어인 말이냐?”
태종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
아, 정조때 지어진 걸로 알고 있으니 아직 한참 남았겠다.
“그럼 혹시 거중기나··· 그, 녹로(轆轤)는요?”
“거중기는 모르겠고 녹로는 있다.”
“있는데 왜······.”
왜 안 쓰는지 모르겠다.
거중기는 이미 미취학 아동들도 아는 것들이고, 녹로는 거중기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수원화성으로 체험학습 갔다가 알게 된 것이다.
“녹로는 도자기 만들 때 쓰는 물레가 아니냐?”
아, 내가 아는 그 녹로랑 이 녹로랑 다른 모양이다.
“아··· 예.”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중기랑 녹로가 없다니, 또 한 번 문화충격이다.
그럼 여태까지 수작업으로 성을 지었다는 거 아닌가.
그러니 부역에 동원된 역부들만 죽어나지······.
“그건 어찌 묻는 것이냐?”
호기심 가득한 형님과, 어딘가 끈적거리기 까지 한 대신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에··· 그러니까요, 이게 축성 도구인데.”
“그런데?”
말문이 막혀버렸다.
공자를 아는 사람에게 논어를 설명하고, 맹자를 아는 사람에게 대학을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공자를 모르는 사람에게 논어를 설명하고, 맹자를 아는 사람에게 대학을 설명하는 건 정리가 돼있지 않고서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거중기와 녹로도 같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저 잠깐만 나갔다 들어와도 되겠사옵니까?”
“그, 그러거라.”
편전을 뛰쳐나간 나는 궐내각사의 하나인 승정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