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200화>
***
쓱- 쓰윽-!
견성군의 상투가 잘려나갔다.
적어도 이 자리에는 상투가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더 놀람이 컸다.
종친들은 종친들대로.
당사자인 견성군은 견성군대로.
그러거나 말거나.
임금은 잘라낸 상투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종친들이 호가호위하니 이 어찌 난세가 아니냔 말이다.”
“···”
“견성군.”
“에! 예! 전하!”
흡사 망국의 신하라도 된 듯 황망해하던 견성군은 임금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부복부터 했다.
“네놈은 도대체 부왕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은 것이냐?”
“···어, 어인 말씀이시온지······.”
“우리 부왕은 성군이셨다. 성군이시고 또 성군이셔서 자식들을 대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꿀꺽.
“지금 네놈 꼴을 보아라. 네놈이 하는 짓거리가 부왕께 침을 뱉고 다니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이냐?”
“저, 전하······.”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임금의 눈과 귀가 도처에 깔렸거늘 네놈이 날 기만하지 않고서 어찌 그런 망동을 일삼을 수 있단 말인가?”
견성군의 표정이 사색에 질려갔다.
그런 견성군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 융은 자세를 낮춰 견성군과 시선을 마주했다.
감히 임금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던지, 아니면 찔리는 게 있었던지 눈을 회피하던 견성군에 융은 그의 머리채를 쥐어잡은 채,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전 사헌부 장령 김숙정.”
“흡!”
“그 집 종 가우내.”
“저, 전하.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전하!”
“네놈이 패죽였다지?”
웅성웅성.
종친들의 수군거림이 점점 커져갔다.
아무리 종친이라도 사람을 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집안 노비를 해하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그건··· 그건 전하······.”
“그런데도 네놈은 관에 신고하지 않고 김숙정에게 입단속을 시켰다지? 오죽하면 김숙정이 기방에서 기생들에게 하소연하다 내 귀에까지 들어왔을까?”
“···”
“사람의 목숨은 오직 재천(在天)이다. 하늘만 사람의 생사를 가를 수 있어서 감히 임금인 나조차 사람을 해하는 일은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하는데 네놈이 사람의 목숨을 해하고도 고작 짐승 취급하며 들판에 내다 버리라 했다하니 너는 날 욕보인 것이 아니라 부왕을 욕보인 것이다. 감히 나의 부왕을!”
“이, 입이 열 개라도··· 여,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사옵니다, 전하. 시, 신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내 정사에 힘쓰느라 가정을 돌보지 못 하였으니 수신제가(修身齊家)가 웬 말이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가 어인 말이냐. 오히려 수신제가 못 하였으니 태평성대란 말이 우습게 되었다.”
“···”
“8년 전에도 네놈은 용서를 빌었다. 6년 전에도 마찬가지였고 3년 전 문서를 위조했을 때도, 2년 전에 불씨들을 불러모아 설법을 하고 다녔을 때도 용서해달라 했다. 그래서 내 용서해주었다. 네놈이 패악을 일삼을지언정 사람을 해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네놈을 어찌 용서하랴.”
라고 말한 융이 손을 내뻗었다.
금군 하나가 잽싸게 튀어나오더니 그에게 뒷간에서 막 건져온 듯 한 간시궐(똥막대기)을 건네주었다.
“이게 뭔 줄 아느냐?”
“가, 간시궐이옵니다.”
“네놈 하는 짓이 개만도 못 하고, 네놈 성격이 똥만도 못 하니 내 임금 이전에 네놈의 형으로서 네놈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려는 것이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융은 간시궐을 무지막지하게 휘둘러댔다.
막대기에 묻은 똥가루들이 휘날려도, 그래서 곤룡포를 더렵허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퍽퍽!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헉헉!”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자리한 종친들을 갑작스런 임금의 광기 어린 행동에 감히 입을 열지 못 했고, 견성군은······.
“이놈이 지금 혼절한 것이냐, 어쩐 것이냐?”
“혼절하신 듯 하옵니다.”
···혼절을 했다.
“퉤! 상선은 들어라.”
“하문하시옵소서.”
“이놈은 왕실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다닌 광견이다. 우리 집안에 미친개는 나 하나로 족하니 선원록(왕실 족보)에서 이놈 이름을 제하라. 또한 그 재산은 모조리 적몰하고, 뉘우침이 전혀 없었으니 어디 제주나 해남 같은 산간벽지로 귀양보내라.”
“우리나라 율법에 팔의(법전에 의거해 처벌받지 않는 계층)가 있사온데 견성군은 의친에 해당하옵니다.”
견성군이 어쨌뜬 팔의에 해당하니 조정대신들과 상의를 거쳐 형벌을 정해야 명분이 선단 말이었다.
“이놈 꼴을 보면 대신들의 평의(의논)를 듣지 않아도 알 만 하다. 툭하면 삼사에서 이놈을 죄주라는 말이 나왔으니, 내 지금 이놈을 벌준다면 오히려 반기면 반겼지, 마다할 중신들이 어디 있겠나.”
“자손과 가족들은 어찌 하오리까?”
“아비 잘못 둔 죄 밖에 더 있겠는가. 더욱이 이놈은 평소 행실도 고약하여 제 가족들에게도 손찌검했고, 군부인에게까지 폭언을 일삼았다고 하니 군부인은 이혼시키되, 작호는 박탈치 말고 종친으로 우대하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살 떨리는 명을 토해낸 융은 씩씩거리며 자리에 착석했다.
그러는 사이.
금군들이 혼절한 견성군을 질질 끌고 나갔다.
“후. 내 우리 종친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으니 참으로 민망하다.”
“···아, 아니옵니다······.”
“나라에서 종친을 우대하고 죄를 저질러도 용서했던 까닭은 왕실이 나라의 근간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성군처럼 패악함이 사람을 해할 지경에 이른다면 종친이 무슨 말인가? 여러분도 모두 유념하라.”
“여, 여부가 있겠나이까.”
“그런 의미에서 내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하문하시옵소서.”
“종친이란 무엇인가?”
“조, 종친 말이옵니까?”
“그래, 종친.”
“···”
“설마 견성군처럼 패악을 부려도 되는 자리라 생각하지는 않을 테고··· 우리 숙부님처럼 놀고 먹는 자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테고··· 기탄없이 말들 해보아라.”
“···”
“어찌 대답들이 없단 말인가? 정말 패악을 부려도 되는 자리라 생각한단 말인가?”
방금 전까지 견성군이 복날 개 쳐맞듯 맞았다.
그것도 똥막대기로.
어지간히 간이 크지 않고서는 입도 뻥긋 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허. 무산군.”
“에? 예! 전하!”
“무산군이 말해보아라, 종친이란 무엇이냐?”
“조, 종친은··· 배, 백성에게 보, 본이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종친이 아니온지요···?”
무산군의 말에 다른 이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임금이 정한 정답이 저것인진 몰라도, 일단 그럴싸한 답변인 건 맞았다.
하지만.
“틀렸다.”
“예?”
백성에게 본이 되는 것.
이게 어찌 틀렸단 말인가?
백번이고 천번이고 맞는 말이었다.
한데 틀렸다니······.
“쯧쯧. 이리 한심하니 견성군 같은 미친개가 잊을만하면 집안에서 튀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
융은 술을 벌컥 들이켰다.
“종친이라 함은 무엇이냐. 나라가 위급하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것이 종친이요, 나라의 형편이 어렵다면 제 곳간을 털어서라도 나라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종친이요, 임금의 말에 복종하여 임금을 보좌하는 것이 바로 종친이다. 내 말에 그름이 있는가?”
“아, 아니옵니다. 저, 전하의 말씀이 천번만번 지당하시옵니다.”
“그걸 알면서도 다들 가만히 있는단 말인가?”
“···?”
“내 지금 백성이 평안한 정치를 꾀하기 위해 삼남에 치수를 벌이려 한다.”
“배, 백성을 위해 치수를 하심은 천번이고 만번이고 온당하신 일이옵지요. 온당한 일이온데······.”
그걸 왜 지금 뜬금없게 언급하십니까?
무산군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무산군을 일별한 융은 종친들을 일일이 돌아보며 말했다.
“나라가 위급한 것이 외침이 있을 때만 위급한 것이더냐?”
설마······.
설마.
설마!
“종친으로서 모범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무릇 종친으로서 이름을 남기기 어려우니 이름을 남긴다면 어찌 남겨야 하겠는가.”
융은 제안대군을 흘겼다.
“역적으로 이름이 남겨져야 하겠는가.”
힐끗.
이번에는 질질 끌려나간 견성군의 자리였다.
“아니면 패악질 일삼은 자로 남겨져야 하겠는가?”
“···”
“그것도 아니면 나라에 봉헌한 바가 커서 나라에 공을 세운 자라는, 아주 아름다운 수식이 붙은 채 이름을 남겨야 하겠는가?”
답은 정해졌다.
종친들은 답만 하면 됐다.
답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하, 하오나 신들은 일전에도······.”
봉안군이 두 눈 질끈 감고 말했다.
방금 전, 견성군이 쳐맞았건 아니건.
그래서 족보에서 그 이름이 썰려나갔건 말건.
할 말은 해야 했다.
봉안군 뿐만 아니라 다른 종친들 모두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재산 일부를 헌납한 적이 있었다.
그때 종친들에게 뜯어간 현물만 백미로 따진다면 30만석이 넘을 터였다.
그런데 또?
“아하. 봉안군의 말은 전에 본을 보였으면 오늘은 본을 아니 보여도 된다는 말이구나.”
털썩.
“아, 아니옵니다. 신은 그런 뜻이 아니옵고······.”
넙쭉 엎드린 봉안군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융은 상을 뒤집었다.
우당탕탕!
날아오른 음식들이 종친들의 관복을 덮었다.
비상한 음식들에 관복이 더럽혀졌지만, 종친들로서는 감히 닦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임금의 살떨리는 엄포가 곧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지금껏 온갖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너희를 비호하고, 종친으로서 우대했기 때문이거늘 일전에 정성을 보였다고 마다한다면 이것이 어찌 군신의 의리고 가족의 도리란 말이냐! 무산군!”
“에! 예, 저, 전하!”
“네가 일전에 정성을 보였다고 마다한 것이니 나는 네가 일전에 지은 죄는 용서하되, 앞으로 티끌만한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벌해도 되는 것이냐?”
꿀꺽.
“···”
“그리하면 되는 것이냐 물었다!”
“주, 죽여주시옵소서!”
“종친은 괜히 종친이 아니다. 백성에게 본이 되는 자리가 바로 종친이고, 행동거지와 말을 함에 있어 본이 되는 것이 바로 종친이다. 너희가 나서지 않는다면 사족이 어찌 나서겠으며, 너희가 따르지 않으니 내 호령에 어찌 명분이 선단 말이냐?”
“···”
“진성대군은 일전에도 군비로 백미를 헌납했고, 이번에 모병을 한다 했을 때도 3만석을 쾌척했고, 또 이번에 치수를 한다니 5만석을 쾌척하겠다 하였는데, 진성대군은 뭐가 되는 것이냐? 진성대군은 세간에서 소위 말하는 호구라 그리 많은 돈을 나라에 헌납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야!”
“아, 아니옵니다, 전하. 시, 신들이 어찌··· 무, 무산군의 말은 괘념치 마시옵소서. 신은 당장에라도 나라에 위급이 닥친다면 재산 전부를 헌납할 것이옵니다.”
“신 또한 마찬가지이옵니다. 노, 노여움을 푸소서.”
이곳저곳에서 흔쾌히 쾌척하겠다는 말이 들려오자, 융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렇지, 종친이라 함은 응당 그래야지. 내 여러분을 과소평가했으니 이건 벌주라 생각하고 마시겠소이다.”
융은 앞에 있는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무종실록(武宗實錄) 1506년 11월 23일 기사》
···하므로 사신은 논한다.
상께서 경회루에서 종친을 인견하시며 하신 말씀을 종친들은 금과옥조처럼 삼아야 한다. 사족들도 금과옥조처럼 따라야 한다.
생각건대 종친과 사족은 어찌 종친이며 사족인가?
이는 또 하나의 신분이고 계급이다.
옛 삼한의 일을 떠올려본다면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에는 왕족과 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나라를 수호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종친은 종친으로서의 위엄을 전연 찾아 볼 수 없고, 지방의 사족들은 경전으로서 백성을 계도하고,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치의 도구로 삼아버렸다.
지금의 세태가 사신은 참으로 비참하고 통탄스러웠는데 우리 임금께서 지금 종친들을 꾸짖었으니 이처럼 통쾌하고 장쾌한 적이 언제 있었으랴.
사족들이 임금의 호령을 받들지 않는다면 역적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