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99화>
***
이돈(李惇).
그에게는 부왕이 봉해주신 견성군(甄城君)이라는 아름다운 군호가 있었지만, 세인들은 그를 견성군(犬性君)이라 불렀다.
개 견(犬)자에 성품 성(性).
하는 짓거리들 마다 원체 개같은 성격이라 견성군이었다.
최근의 일을 따져본다면 3년 전에는 위조문서를 작성했다.
2년 전에는 파계승들을 불러 모아 스스로 설법을 퍼뜨리고 다녀 논란이 됐었고, 마찬가지로 2년 전에는 민가를 강탈해 조정의 화두에 오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큰 벌을 받지 않은 건, 종친이란 탓이 컸다.
서슬 퍼런 시국일수록 종친을 벌 하라는 말은 금기에 가까우니까.
다만 말 안 듣는 개는 원래 매가 약인데, 매질을 안 하면 제 잘못을 뉘우치지 못 하는 법.
그건 왕자군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크흠. 이리오너라.”
솟을대문 앞에 선 견성군을 대신해, 그의 종 준해(浚海)가 소리쳤다.
“뉘시오?”
곧이어 중년인 한 명이 나왔다. 그는 준해를 위아래로 훑다가, 그 뒤에 오만한 자세로 서있는 견성군을 보고 급히 예를 갖췄다.
“이집 주인장은 출타 중이신가?”
“어··· 예. 공교롭게도 한식경 전 쯤, 나가셨습니다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견성군은 금방 신색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대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럼 안에서 기다리지.”
“예? 하오나······.”
“어허. 이분이 뉘신줄 알고 앞길을 막는 것이냐!”
준해의 호통에 중년인은 화들짝 놀라 길을 비켜섰다.
견성군은 흐뭇히 미소 띄운 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쇤네는 가우내합니다요.”
“성이 가 씨(氏)냐?”
가우내는 할 말을 잃었다.
“하하. 농이다. 정색하기는.”
“송구합니다요.”
“그래, 주인장은 언제쯤 돌아오시는고?”
가우내는 사랑방을 자꾸 흘겼다.
“그건 쇤네도 잘······.”
“내 이 집 된장맛이 일품이라 들었다. 해서 노복들을 보내도 되겠다만 그건 또 예의가 아니니 직접 걸음했다. 장독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쇠, 쇤네가 안내하겠습니다요.”
가우내가 앞장서 견성군과 준해의 안내를 도왔다.
잠시 후.
견성군은 사랑채를 지나쳐, 안채 뒤편에 도착했다.
장독이 즐비해있었다.
“내 조금 퍼가도 되겠지?”
“예?”
“왜, 안 되는 것이냐?”
“그건 아니온데······.”
“어서 퍼라.”
준해에게 말하자, 준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가져온 작은 단지에 된장을 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견성군 대감 아니십니까?”
이 집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집주인은 탕건을 쓰고 있었다.
외출 때 탕건을 쓰진 않을 테니, 출타 중이라는 가우내의 말과는 다르게 집에 있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집에 계셨소?”
가우내를 흘기며 말하자, 이 집 주인 전(前) 사헌부 장령 김숙정(金淑貞)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잠시 책을 좀 읽고 있었습니다만.”
“허.”
“어찌 그러십니까?”
“이놈이 아주 몹쓸 종자로다.”
“대감?”
“아, 글쎄! 내 장령의 집을 찾아서 주인께서 계시냐 했더니 대감의 종놈이 출타 중이라 거짓을 고하지 않았겠소이까!”
화들짝 놀란 김숙정이 가우내를 흘겼다.
“사실이냐?”
“소, 송구합니다요······.”
고개를 떨구는 가우내.
왜 그랬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개 견자가 붙어 견성군이라 불리는 이돈이 제 주인에게 해코지를 할까 출타 중이라 아뢨을 터였다.
“내 오늘 이놈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줘야겠소. 장령은 멍석이랑 몽둥이좀 가져오시오.”
“대감··· 송구하오나 이 일자무식에 미천한 종놈이 뭘 알고서 거짓을 고했겠습니까? 그저 제 주인이 책을 읽고 있으니 혹 방해가 될까 선의로 거짓을 아뢴 것 같습니다. 절 봐서라도 용서를 하시고··· 이놈아, 퍼뜩 사죄드리지 못 하겠느냐!”
숙정의 호통에 가우내가 넙쭉 엎드렸다.
그 모습을 마뜩찮은 듯 바라보던 견성군이 피식거렸다.
“선의?”
“···”
“장령이 그 따위로 종놈들을 감싸고 도니, 이 하찮은 종놈이 주인을 믿고 왕자군을 만만히 보는 것 아닌가! 준해, 네 녀석은 뭣하느냐! 어서 몽둥이를 가져오거라!”
“예!”
잠시 후.
준해가 마당 쓸던 빗자루의 머리 부분을 툭 쪼갠 채, 가져왔다.
후웅-!
훙!
몇차례 막대를 휘둘러 본 견성군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가우내를 흠씬 두들겨팼다.
“대, 대감··· 그러다 사람 잡습니다.”
퍽!
“사람은 누가 사람인가!”
김숙정의 손길을 뿌리친 견성군은 무자비하게 몽둥이질을 이어나갔다.
몽둥이질이 끝난 건, 가우내가 축 늘어졌을 무렵이었다.
“죽은 것이냐?”
가우내가 축 늘어질 때 까지 몽둥이질을 이어가던 견성군은, 가우내가 반응이 없자 몽둥이를 내던지고 준해에게 물었다.
준해가 가우내의 명줄을 확인했다.
“죽은 듯 합니다.”
“허. 몽둥이질 몇 번 했기로서니 뒤져? 장령.”
“···”
갑작스런 노복의 죽음에 얼이 나가 있던 숙정은 몇 번의 부름에도 반응을 하지 못 하다, 견성군이 따귀를 걷어 올리자 정신을 차렸다.
“귀신이라도 봤소? 부르면 반응을 해야지.”
“···예.”
퉤!
더럽다는 듯 침을 내뱉은 견성군은 늘어진 가우내를 흘겼다.
“재수없게 장령의 종놈이 뒤져버렸으니 이게 누구 책임이오?”
“그야······.”
“내 책임이라 말하려는 것인가?”
“···”
“종놈 팔자 박복한 건 팔도 사람 모르는 이가 없소. 좋은 게 좋은 거라 했으니, 내가 왔다는 건 함구하고 어디 갖다 버리시오.”
“···”
“어찌 말이 없소?”
“그,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어찌······.”
“기르던 개가 죽었다고 관에 신고하는 거 봤소?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마시오. 가자.”
견성군은 된장을 마저 챙긴 채, 숙정의 집을 빠져나갔다.
***
며칠 후.
숙정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은 견성군은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입궐을 했다.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이었다.
뜸하시던 주상전하께서 종친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베푸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경회루.
“다들 잔을 듭시다.”
임금의 말을 거역할 사람이 요즘 같은 시국에 누가 있을까?
그건 견(犬)성군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쭉 들이키십시다. 쭉!”
시정잡배들도 안 하는 거배(擧杯)였지만 누구의 명인가.
견성군을 포함한 종친들은 독주를 단번에 목구멍 너머로 털어넣었다.
“다들 잘 지냈소들?”
“전하의 덕이 일월 같사옵고 인(仁)은 군자의 것과 같으시니 잘 지냈사옵니다.”
“지금 전하께서 저희들을 불러 위무하시니 어찌 잘 지내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성은이 참으로 망극한 일이옵고······.”
“요즘 같이 태평한 세월이 언제 또 있었겠사옵니까. 참으로 종묘사직의 복이고 신민의 복이니 신들 역시 신민의 한 사람으로 잘 지냈나이다.”
잘 지냈냐는 안부 인사 한 번에, 여러 말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아첨이라 해도 듣기 거북하진 않았다.
흐뭇히 웃던 임금은 견성군을 살짝 흘겼다. 그러고는 조용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여러분이 보기에 지금 세상이 어떤 것 같소?”
당혹스러움은 잠시였다.
임금과 눈이 마주쳤던 견성군이 앞장서 아뢨다.
“우리나라에 성군이 얼마 없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 일어나는 여러 징조를 본다면 어찌 전하께서 성군이 아니시겠사옵니까? 덕은 해와 달 같으시니 성군의 정치란 무엇이겠사옵니까? 백성이 평안한 정치이옵니다. 지금은 백성이 평안하고 세월이 태평하니 참으로 편한 세상이옵고 만세에 이르도록 누리고 싶은 세월이옵나이다.”
긁적긁적.
“그런가?”
“그러하옵니다. 옛말에 예악이 일어난 나라는 반드시 흥한다고 하였는데 전하께서 제예청까지 설치하시어 천하에 풍동을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천년에 한 벌 날까 말까한 성군의 정치이옵고, 만년에 한 번 날까 말까한 태평성대이옵니다.”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이었다.
그가 피식거릴 즈음.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의 아첨(?)이 이어졌다.
“예. 지금 세월은 만세에 이르도록 누리고 싶은 세월이니 천지사물 역시 함께 기뻐하고, 신민들 역시 이와 같사옵니다. 부디 천세복록(千歲福祿)하시옵고 장구히 나라를 다스려 그 복록을 저희 신민들도 오래 누릴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래, 무산군.”
“예, 전하.”
“한 잔 받으라. 내 요즘 너와 다른 종친들에게 적적했는데 혹 네 마음이 서운하진 않았더냐?”
“어찌 그런 말씀을··· 서운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사옵니까? 천하의 사람들이 전하께오서 평안한 정치를 위해 노력하심을 아온데 종친의 한 사람으로 서운함을 가지면 그게 사람이겠사옵니까?”
곧이어 무산군이 무릎 걸음으로 융에게 다가갔다.
융은 그 잔에 술이 넘실거리도록 어사주를 내려주었다.
어사주를 받은 무산군이 다시 무릎 걸음으로 본인 자리로 돌아갔다.
“견성군과 봉안군, 무산군, 이 세 왕자들은 이리 평하는데 다른 분들은 어찌 말씀들이 없소.”
···라고 말한 융은 제안대군을 직시했다.
원래라면 목이 잘려도 백만번 잘렸어야 할 운명의 제안대군.
실제로 사사 직전까지 갔었다.
왕인 입장에서 정통을 따져 무엇하겠냐만, 제안대군의 정통성은 그 못지 않았다.
예종대왕의 적장자 아니시던가.
정치적으로 본다면 사사 시키는 게 맞았다.
다만 너무도 어리석어 역적들에게 추대됐고, 그 과정에서도 어리석어서 왕 하기 싫다며 방방거린 게 제안대군인데 벌한다면 찝찝함만 남을 거라는 진성대군의 말에 특별히 그를 용서해주기로 했었다.
죄는 위리안치와 재산 적몰로 대신한 채.
그러다 석 달 전쯤, 위리안치에 풀려났다.
죽다 살아난 제안대군이었으니 아무리 아둔한 제안대군이라 해도 임금의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 할 수 밖에 없었다.
털썩!
“시, 신은··· 신은 원체 무식한지라 어떤 말씀을 드려서 전하의 귀를 즐겁게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사오나··· 그, 신이 본다면은··· 아!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聖人)이시옵니다. 또한 성군이시고··· 에, 그리고··· 만세에 다시 없는 군자시옵니다. 그러니 어찌 태평성대가 아니겠사옵니까?”
바들바들.
한없이 떨어대는 제안대군.
확실히 살려두길 잘 했다.
비록 그 죄는 역적질에 있다지만 그때 목을 쳤다면 진성의 말처럼 마음 한켠에 찝찝함과 팔푼이를 죽였다는 죄책감만 남았을 것이다.
죽어서 선왕들을 뵐 면목도 없었을 테고.
“숙부께서 그리 말씀해주니 내 불철주야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꿀꺽!
“서, 성은이··· 그, 성은이 너무도 망극하여 모,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우리 숙부께서도 지금의 세월이 태평성대라는데 다른 분들은 난세로 보시는 모양입니다.”
“어, 어찌 신들이 그리 생각하겠사옵니까?”
“그, 그러하옵니다. 전하께서 검소하고 부지런하심은 천하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옵니다. 학문에 힘쓰시고··· 군왕이 자제해야 할으, 음탕함도 없으시옵고, 안일함도 없으시니··· 그, 과연 주문왕(周文王)의 정치가 이러했겠사옵니까. 지금 천하의 신민들이 태평무사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전하의 덕이옵고, 전하의 업이시니 역대 성군들도 이루지 못 한 왕업이옵니다. 서, 선왕의 시절이 맹춘(초봄)이었다면 전하의 시절은 꽃바람 가득한 봄의 절기에 해당하니 어, 어찌 복록을 누리는 신이 신민 된 자로 절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안양군(安陽君) 이항이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절을 올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다른 종친들 역시 함께 절을 올렸다.
흐뭇히 절을 받던(?) 융은 별안간 표정을 굳혔다.
“여러분들께서 지금이 태평성대라 하니 내 참으로 듣기는 좋소만······.”
힐끗.
“내가 보기에 지금은 난세요.”
“···”
꿀꺽!
종친들이 긴장을 하건 말건.
한차례 술을 들이킨 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견성군에게 다가갔다. 견성군은 화들짝 놀라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고만 있었다.
그때.
융은 견성군의 사모(관모)를 집어던지고는 그 상투를 부여잡았다.
“저, 전하······.”
“자, 그럼 어찌 난세냐.”
라고 물은 융이 손을 뻗자, 상선이 후다닥 달려와 과도를 쥐어주었다.
과도 쥔 융은 견성군의 상투를 무자비하게 잘라냈다.
임금으로서는 감히 해서도 안 되는 짓이었지만, 더욱이 그 주체가 종친이라면 더더욱 해서 안 되는 짓이었다.
하물며 견성군은 선왕의 자제, 그러니까 배는 다를지언정 융과는 형제나 다름이 없었다.
부왕에게 불효하는 짓이니 후세의 평을 생각하면 감히, 감히 벌일 수 없는 일을 임금은 아무렇지 않게 벌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