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군으로 살어리랏다-195화 (195/365)
  •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95화>

    ***

    “대군공 합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사옵니다. 감사하옵니다.”

    대마도주가 조건을 승낙한대도,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꼴도 보기 싫다며 썩 꺼지라는 형님의 축객령에 나는 도주를 데리고 편전에 나왔다.

    썩 꺼지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전쟁은 막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친절한 도주는 연신 고개를 조아려댔다.

    생명의 은인 취급 하는 걸 보면 양심에 찔리기도 한다만······.

    툭, 까놓고 말하자고.

    이 사람 부하들 때문에 죽은 조선인이 어디 한, 둘이야?

    노략질한 게 원데이, 투데이냐고.

    찔릴 거 전혀 없다.

    애써 자기합리화를 한 나는 도주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쪼록 오해가 잘 풀려서 다행입니다.”

    “대감의 덕이니 큰 은혜를 입었사옵니다.”

    “아뇨, 무슨 은혜까지야······.”

    “일이 잘 매듭 지어져서 말입니다만, 정말로 전하께선 전쟁을 일으키실 참이었사옵니까?”

    형님 말이 딱이다.

    이 교활한 새끼, 마지막까지 떠보는 거 봐라.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려다가도, 가책이 확 가신다.

    “직접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건 기밀이라 다른 높은 분들도 모르는 건데······.”

    나는 일부러 주변 눈치를 살피며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도주가 몸을 살짝 기울였다.

    “하삼도 일대에 징발령을 내리시려고 했습니다. 특히 경상수영에는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전시에 돌입하라는 명을 막··· 진짜 막, 내리시려던 참이었죠.”

    도주의 표정이 사색에 질려간다.

    “그래도 뭐, 오해가 풀렸으니 다행인 거죠. 아니었으면, 어휴. 태수랑 전쟁터에서 만날 뻔 하지 않았습니까.”

    “예, 과연 전하께서도 대단하신 분입니다. 인군이란 말을 듣긴 했는데, 제가 이런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세사미두를 그대로 유지해주시는 걸 물론이고, 안 그래도 우리 섬사람들의 체류 문제는 골칫거리중 하나였는데 그것도 해결을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감조관이나 안핵사는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만······.”

    “왜요?”

    “말이 감조관이지, 수령을 파견하는 일 같이 느껴지는지라······.”

    “에이, 말을 곡해하시면 쓰나요. 대마도 수령은 도주입니다. 감조관은 그저 도주의 막하에서 도주께서 혹 수상한 짓을 하지는 않나··· 뭐, 그런 감시만 하는 거구요. 수상한 짓만 안 하시면 전혀 기분 나빠하실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내가 도주였어도 감조관이 섬내에 있으면 좌불안석일 것 같긴 하다.

    “그리고 안핵사도 걱정마십쇼. 제가 내려가던지, 안처직이 내려 갈 테니까요.”

    라고 말은 하지만 안처직이 내려갈 가능성이 99.5%다.

    “안처직이요?”

    “예. 저랑 친한 분이니 만약 제가 안핵사로 내려가면, 설렁설렁 대마도 풍광이나 구경하다 오는 거고··· 안처직이가 내려가도 저랑 친분이 있는 분이니 제가 살짝 귀띔해드리겠습니다. 적당히, 아주 적당히 구색만 갖춰서 봉명하라고.”

    “저, 전하를 기만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형님께 기만이란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인지, 지레 겁부터 먹는 것 같다.

    “전하랑 저랑 동복(同腹)만 아니지, 우애가 엄청 깊습니다. 오죽하면 왕언(王言)이 승정원이 아니라 진성대군에게서 나온다는 말도 있겠습니까?”

    “아··· 과연 대군공 합하께서는 대단하신 분이시옵니다.”

    “자자. 감조관 문제도 그렇고, 특히 안핵사 문제는 더, 더, 더 걱정하지 마십쇼.”

    “예. 하면 저는 대감만 믿겠사옵니다.”

    “예예. 살펴가십쇼, 저는 또 할 일이 있어서.”

    멀어져가는 도주를 바라보며 난 생각에 잠겼다.

    아니, 철학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사람은 원래 멍청한 걸까, 아니면 겁에 질리면 멍청해지는 걸까?

    하긴 뭐, 무리도 아니겠다.

    어떻게 보면 이번 대마도 건은 일종의 치킨 게임이었으니까.

    우린 우리대로 전쟁이란 패를 내걸고 직진했고, 도주는 숙배란 패로 직진한 것 뿐이다. 먼저 핸들을 튼 건 도주인 셈이고.

    그나저나.

    ‘끝났다고 생각하려나?’

    그럼 정말 멍청한 건데.

    “으차!”

    거액의 판돈이 오간 도박장에서 긴장 하고 있던터라, 도박장에 나오자마자 온몸이 찌부등하다.

    기지개를 킨 나는 빈청으로 향했다.

    ***

    정북진.

    “설마 금부에서 나온 건 아니겠지요?”

    박질이의 말에 유홍은 표정을 굳혔다.

    오히려 금부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더 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북진 만호 민천동이 갑자기 정북진의 주민 모두를 진성에 불러모았다.

    정북진은 특수성을 띠는 곳이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백성 취급을 못 받는다. 그래서 진성에 들어갈 수 있는 건, 특별히 만호께 아뢸 말이 있을 때라거나 오랑캐가 침입을 했을 때.

    딱 이 두 경우에만 해당했다.

    그마저도 전자는 역적의 자손들이라 단체로 성에 들이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며, 개개인의 출입만 허락했었다.

    그럼 후자냐.

    그것도 아니었다.

    외적의 침입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외적이 강을 도하했다는 첩보가 입수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북진 주민들을 불러모았다.

    박질이의 말처럼 금부에서 나온 게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금부에서는 그를 압송해 갈 터였다.

    어쩌면 죄인을 압송하는 데에 드는 경비 조차 아깝다며 진성에서 목을 쳐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게 더 타당하겠다.

    그게 아니면 애써 주민들을 불러 모을 리가 없으니까.

    이 자리에서 자신의 목을 치고, 불러 모은 주민들에게는 ‘저 꼴을 톡톡히 봐라!’ 호통치겠지.

    “금부에서 나왔다면 마땅히 오라를 받으면 될 일.”

    죽음은 진즉에 각오했다.

    애당초 민천동에게 상언을 전했을 때, 죽을 각오는 했다는 말이다.

    그런 각오도 없이 상언을 전했을 리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그의 상언이 올라간 그새 여섯 사람이 더 아사했다는 점이었다.

    개중에는 갓난 아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리 편하자고 올린 상언도 아닌데······.”

    “괜찮다.”

    유홍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주민들 사이로 만호 민천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게 있다면, 생판 모르는 얼굴의 관리도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금부도사겠지.

    심장이 쿵쾅쿵쾅, 거세게 뛸 즈음.

    만호를 대신해, 예의 생면부지의 관리가 앞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주민들을 쓰윽- 훑었다.

    “너희는 참으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종자들이로다.”

    “···”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을 역적질을 했는데도 우리 덕 있는 전하께선 그 죄를 전가사변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이제는 감히 청이랍시고 괴언을 올릴 수 있단 말이냐.”

    예의 관리가 ‘괴언’을 언급하자 주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유홍에게 향했다.

    “염치가 없고 사람으로서 의리가 없는 버러지 같은 년놈들이니 이 같은 은혜를 당연히 모르겠다마는, 조정의 공론은 괴언을 올려 조정을 분란케 한 너희를 모조리 끌고와 그 목을 쳐버리라는 것이 바로 공론이었다. 너희 같은 년놈들이야 언제 또 의리를 배반할지 모르니 살려둔다 한들 장차 나라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본관 또한 그 의견이 참으로 지당하다 생각하는데······.”

    “···”

    “우리 전하께서는 과연 인군이시다. 인군이시고 성군이시고 감히 너희 같은 역적 놈들을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도량을 가지셨다. 공론이 괴언을 올려 조정에 분란을 야기한 너희의 목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치라 함에 있자,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지금 오죽하면 저 정북진의 죄인들이 나에게까지 이런 청을 하였겠는가? 경들은 더 이상 왈가왈부 말라. 저들 역시 죄인이기 전에 나의 백성이다.’ 하시었다.”

    관리의 말에 진성이 시끌벅쩍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관리는 쯧쯧,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여기 군사들에게 칼을 뽑게해 너희의 목을 모조리 쳐버리고 싶다만, 우리 전하의 마음씨가 이처럼 곱고 지극하시니 신하된 자가 어찌 참람한 짓을 벌이겠느냐. 전하께서는 과연 인자하시다. 인자하시고 그 은혜가 또한 거룩하시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본관을 사민경차관(徙民敬差官)에 제수하시고, 너희의 청을 가납하시어 연변으로의 이주를 윤허하셨겠느냐?”

    뒤늦게 자신을 사민경차관이라 밝힌 관리의 말에 모두들 충격에 빠졌지만, 무엇보다 유홍의 충격이 더 컸다.

    금부로 압송돼도 할 말이 없는 상언이 가납됐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로써 너희는 또 한차례 성은을 입은 것이니 죽어서도 임금의 은혜를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사민경차관의 말에 죄인들이 일제히 절을 올렸다.

    유홍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 후 얼마지나지 않아 대대적인 이주가 시작됐다.

    한꺼번에 노인과 아이들까지 데리고 갈 순 없었으므로, 아이와 여자, 노인들은 정북진에 남고 일단은 장정들로 하여금 이주가 시작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주가 시작 될 즈음.

    연변을 수비할 군사들로 선발 된, 별충위와 의흥위에 예차(예비군)로 있던 정예군 210명도 연변으로 북진했다.

    ***

    “대감! 석평이 형이랑, 경덕이 형 일 안 하고 놀아요!”

    개똥이의 외침에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마침 개똥이 말처럼 늘어지게 앉아 있는 경덕이와 석평이가 보였다.

    “이 자식들! 얼른 손 안 보태냐?”

    “스승님. 인간적으로 너무 힘드옵니다······.”

    그나마 덜 싸가지인 석평이의 불만에 이어 싸가지 바가지인 경덕이의 불만이 이어졌다.

    “스승님께서도 쉬엄쉬엄하라지 않으셨습니까.”

    “쉬엄쉬엄하랬지, 누가 퍼질러 놀랬냐! 얼른 안 일어나?”

    낫을 든 채 후다닥 경덕이를 쫓아가자, 경덕이와 석평이가 재빨리 몸을 일으킨다.

    “가면 되잖습니까, 가면.”

    “너 요새 많이 기어오른다?”

    “···”

    “도와준다고 말이나 하지 말던가. 이것도 인마. 다 경험이야. 어? 왜 농사가 그 뭐냐. 있잖아, 그거? 옛날 성인들이 왜 농사를 다 그거라고 했겠어, 다 이게 너희 같은 씹선비들한테는 필요하니까, 그런 말씀을 하신 거야. 지금 너네가 허구헛날 책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어질 말이 생각이 안 나, 말을 흐리자 마침 논 너머 농로에 세월 좋게 소등에 올라 탄 채 신선 놀음에 빠진 이름 모를 씹선비 하나가 보였다.

    웬 소냐고 묻는다면 여기선 진퉁 씹선비들은 말보다 소를 선호한다.

    그래야 더 고상하다나 뭐라나.

    “저 봐, 저. 저 씹선비 좀 봐라. 고상한 척 온갖 유세 다 떨고 있는데 저 씹선비가 뭘 알겠냐? 경전이나 외워대겠지. 너네도 저 씹선비처럼 경전이나 외는 샌님 되고 싶어?”

    “···”

    석평이는 말이 없었다.

    반면.

    “···이 제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농사랑 스승님이 가르치시는 지식들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사옵니다.”

    “뱁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오. 얼른 일이나 해, 이 자식아.”

    경덕이가 툴툴거리며 석평이와 일하러가자, 이번에는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대감.”

    날 부르는 장본인에 나는 석평이와 경덕이 때와는 달리 최소한의 예를 갖췄다.

    “예.”

    “저도 꼭 해야 하나요. 저는 전하께오서 전지도 하사하셨던터라 이런 건 할 필요가 없사온데······.”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조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조선인에서 유추했을지 모르겠지만, 이 의외의 복병은 안남왕자 여형이다.

    형님께는 우리집 근처에 있는 북촌에 저택을 하사 받았는데 아무래도 우리집과 가깝다 보니 놀러오는 일이 잦았다.

    정확히 말하면 놀러온다기 보다는 틈틈이 조선의 예법이라던가 풍습을 가르치면서 조선에 동화시키는 귀화 교육(?)을 받는 거지만.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

    일손 딸리는 김에 잘 됐다 싶어서··· 는 아니고, 선진 농법(?)의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 겸사겸사 데려왔다.

    지금이 수확철이라 일손이 좀 딸리기도 하고··· 는 아니고 역시 선진 농법의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예. 알겠습니다.”

    군말없이 낫을 드는 여형에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경덕이도 여형 왕자 반만 따라가면 좋을 텐데.

    자, 그럼 나는 좀 쉬어야겠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