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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으로 살어리랏다-194화 (194/365)

<대군으로 살어리랏다 194화>

***

진성의 도움(?)으로, 임금이 말을 번복한다는 것에 대해선 한시름 놨지만 원래 임금의 정무를 만기라고들 표현한다.

적금만기··· 아니, 할 일이 만가지나 된다고 해서 만기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융의 일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었다.

그는 방금 편전에서의 횡설수설하던 모습과 어딘가 나사 빠진 듯(?) 허둥거리던 모습 대신 근엄한 평소의 그로 돌아와있었다.

“용서를 구했다지.”

밑도끝도 없는 질문에 대답한 것은 짜고치는 고스톱판의 파트너 진성대군이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어찌나 애절하고 간절하게 용서를 구했던지··· 글쎄, 수문군들은 태수가 스러져간 역적들 보다 더한 충신이 아니냐고까지 했다고 하옵니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인데다 태수의 잘못은 대군이 아는 것보다 훨씬 크니 비호치 말라.”

“네, 전하.”

“태수는 고개를 들어라.”

무라모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융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흘 밤낮 동안 용서를 구했다는 자가 이리도 멀쩡하단 말이냐?”

“아, 아니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불러 계신다 하여 속히 목욕재계한 터라······.”

진짜로 급히 목욕까지 했던 무라모리는, 사흘밤낮간 했던 석고대죄가 부정될까 허둥거리며 저간의 사정을 아뢨다.

마뜩찮은 표정으로 태수를 흘긴 융.

“내 너를 완전히 용서한 것이 아니다. 너의 죄목이 수십, 수백가지나 되거늘 내 어찌 너를 용서하겠는고? 다만 그럼에도 내 너를 부른 것은 여기 대군이 네가 진실되게 죄를 청하고 있고, 용서를 구하고 있다기에, 그저 그 정성이 갸륵하여 부른 것이다.”

“성은이 참으로 망극하옵고, 그 은혜가 실로 거룩하여 신으로서는 감히······.”

“어디서 못 된 것만 배워와서 교언영색(아첨)하려 드는 것이냐! 묻겠다. 네 죄가 무엇이냐.”

융의 호통에 멈칫했던 무라모리는 죄가 무어냐는 질문에 눈을 치켜 뜨며 진성대군을 바라봤다.

과연 용한(?) 분이셨다.

광화문에서 여전히 석고대죄하던 자신을 찾아온 대군은 전하께서 불러 계신다면서, 필시 본인의 죄목을 본인 스스로 떠벌리게 할 것이라 하셨었다.

갑자기 질문을 받으면 말이 안 나올 테니 미리 준비를 하라는 말도 했었고 말이다.

과연 저 말을 미리 듣지 않고, 준비를 안 했더라면 낭패를 볼 뻔 했다.

“신의 죄는······.”

무라모리는 닥치는대로 죄를 열거했다.

죄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것도 일단 열거했다.

다행히 조선왕··· 아니, 전하께서는 흡족해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잘 뉘우치고 있었다니 다행이구나. 하지만 그런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나의 노여움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천만번 윤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하지만 관용을 베푸는 것은 군자의 도리라 하였고, 덕으로서 사람을 교화하는 것은 임금의 도리라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상선. 상선 밖에 있더냐.”

“불러 계시옵니까, 전하.”

“내 며칠 전, 예조판서 신수영에게 주문사(변란과 관계된 외교로 중국에 가던 사신)의 일과 황제께 올릴 대마도 토벌에 대한 표문(마음에 품은 생각을 적은 글)에 관해 속히 일을 매듭 지으라 했었는데, 어디까지 진행 됐다더냐?”

“주문사 인선은 모두 끝이 났사옵고 표문만 남았다고 하옵니다.”

고개를 끄덕거린 융은 무라모리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거만하면서도 진득한 눈길이 ‘봤지?’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꿀꺽.

“그 일은 잠시 보류하라 전하라.”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태수.”

“에, 예.”

“너와 너의 선조는 거짓으로 나와 선왕을 기만한 세월이 90년이 되었다. 지금은 네가 이리 내 앞에 무릎 꿇고 죄를 바라고 있다지만, 어디 무릎 꿇고 죄를 청한 게 너 뿐이겠더냐?”

“···”

“너의 선조들도 잘못이 있으면 응당 사신을 보내와 사죄를 했으나 지금 보아라. 그게 지켜졌느냐 이 말이다.”

“소, 송구하옵니다.”

“너희 대마도는 일찍이 우리 선왕들에게 앞다투어 달려와서 대마도에 마땅한 읍명(邑名)을 내려주시면 그에 따라 관작도 받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대마주(對馬州)가 된 것이고, 네놈이 태수라 불리는 것이다. 아니 그러하냐?”

“실로 가당한 말씀이시옵니다.”

“한데 대관절 어느 나라의 신하가 군주를 기만하길 너처럼 행한단 말인고?”

“···”

“내 이미 네가 상경을 청했을 때부터, 대내전(오우치)의 일 때문이라 여겼었다.”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심경인 무라모리는 눈만 질끈 감았다.

“그래서 네가 과연 무슨 말을 하는지 찬찬히 지켜본 것인데, 감히 숙배를 위해 찾아왔다고만 하니 내 어찌 노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과, 과연 그러하겠사옵니다, 전하.”

“또한, 너는 왜구와 관계된 일은 본인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들을 어찌 통제하겠냐며 겁박했다. 이게 과연 입조를 해서 할 소리란 말인가. 일본국의 국왕(쇼군)과 태수들도 우리 선왕을 폐하(陛下)라 불렀다. 이것이 어찌 된 영문이겠더냐?”

“시, 신이 미욱하여······.”

“그 나라 임금을 존경한다는 차원에서 폐하라 부른 것이다. 그런데 감히 존경을 나타내지는 못할망정, 겁박까지 했으니 이런 역적 놈이 천하에 또 있을꼬.”

“···”

“내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군사를 일으켜 직접 갑옷을 차려입고서 무례한 네놈의 소굴을 불살라버리고 싶다만 네 우리나라의 예법에 어둡고, 또한 섬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일을 그르친 것이라 너그러이 생각하겠도다.”

용서하겠다는 말이었다.

“가, 감사하옵니다, 성은이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네 이미 이처럼 왕을 능멸한 바가 있고, 면전에서 아무렇지 않게 겁박까지 했으니 이것은 네놈이 교활하다는 증좌다. 교활한 사람은 본시 내쳐서 조정에 하루라도 있게 하면 안 되는 것이 도리지만, 너의 섬과 우리 조정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리 할 수 없음이다.”

“···”

“교활한 네놈이 지금 내가 용서했다고 하여 장차 또 교활한 짓을 아니 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어찌 하면 좋겠더냐?”

“어, 어찌 하시면 좋으시겠사옵니까?”

“가만보자······.”

“···”

“말했듯 네놈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 종자이니 언제라도 빈틈이 보인다면 칼을 거꾸로 쥘 놈이다. 역률을 살펴보면 이런 자는 목을 쳐버리는 것이 전례다만, 그럴 수가 없으니 내 대마도에 감조관(監造官)을 보내면 조금 안심할 수 있겠는데······.”

감조관.

무라모리가 조선말을 배우긴 했어도, 감조관이란 말까지 알아먹는 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성대군을 바라봤다.

“감찰할 관리를 보낸다는 뜻입니다.”

감찰할 관리!

무라모리는 눈을 부릅 떴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았다. 이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아예 대마도를 조선의 속령으로 편입시키겠다는······.

‘하지만 굳이 조선에서 그럴 필요가······.’

생각해보면 그랬다.

조선이 대마도를 속령으로 완전히 편입시킨다고 해서 이로울 건 전혀 없었다.

예전에 가신들과 논했을 때처럼, 대마도는 박토가 대부분이다.

농사 지을 수 있는 땅은 한정돼 있어서, 조선에 편입되면 오히려 조선 입장에서는 매해 구휼미를 베풀어야 하니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는 것이다.

‘정말로 내가 의심되셔서 하신 소린가.’

긴가민가하던 그때.

쾅!

“이놈이 또 눈알을 굴리면서 흉계를 꾸미려 드느냐!”

털썩!

“아, 아니옵니다. 신은 무, 무슨 말씀이신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내 지금 관용을 베푸려 함인데 네가 자꾸 못된 기질을 보이면 용서코자 하는 마음이 싹 가신다. 네 너에게 용서를 강요한 적 없다. 또한, 이 조건을 수락하라 강요한 적도 없다.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 어찌 강요하겠더냐. 다만, 네놈 섬은 쑥대밭이 되겠지.”

전날의 기억이 떠오른 무라모리는 히끅, 딸국질을 했다.

“아,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백번이고 천번이고 이해가 되옵니다.”

“그럼 다음.”

또 있어?

뒷통수 한 대 얻어 맞았다는 듯 동공이 흔들리던 무라모리를 일별한 융이 말을 이어나갔다.

“본시 대마도는 왜구의 소굴이라, 우리 선왕들이 늘 경계하던 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 대에 와서도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로 존재하고 있으니, 너는 부정하겠지만 너의 수하들이 왜구인 까닭이다.”

“···”

“내 이를 막고자 감조관을 파견하려는 것이다만, 감조관을 보내는 것은 미래의 노략질을 방지코자 함인데 과거에 죄지은 자들은 어찌 징벌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너는 신유년(1501년)의 일을 떠올려 보아라.”

무라모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녹도를 침범한 왜구에, 조선 조정에서 죄인들을 압송하라는 명을 내렸고, 무라모리는 왜구 대신 죄지은 자들을 간추려 보냈었다.

그리고 조선 조정에서는 수고했다며 물품까지 내려줬다.

한데 그게 어쨌다는 건지?

“어허, 네놈이 끝까지 시치미를 뗄 참이냐. 내 너희의 모습이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 일부러 못 본척 넘어갔던 것인데, 그때 네놈이 보내온 왜구들이 가왜(假倭)가 아니었더냐!”

“그, 그것이······.”

“내 지금 그걸 책 잡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말했듯 죄지은 왜구들이 아직도 섬에 산재해있을 테니 그들을 벌해야겠다. 그곳에 안핵사를 파견하여 죄지은 왜구를 잡아들이게 할 것이니 그리알라.”

“···”

“그 다음으로.”

“···”

“네놈들이 잡아간 내 백성들이 듣기로 수백이 된다 들었다. 개중에는 일본국에 팔아 넘긴 자도 있을 테지만, 또 일부는 섬에 가둬두고 영구히 노비로 삼고 있을 테니 그 수가 최소 수백인 것이다. 안핵사로 하여금 이들을 모두 쇄환케 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냐, 막돼먹은 왕 새끼야!

빼액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지난 사흘간의 석고대죄가 물거품이 된다.

“또, 지금 계해년(1443년)에 너희 선조와 우리 조정에서 맺었던 약조를 떠올려본다면 포에 머무르는 기간은 20일인데 지금 그 약조를 지키는 왜인은 하나도 없다. 우리 조정에서 묵인한 까닭도 있지만 너희가 간사하게 추방을 하려하면 노략질을 운운하며 겁박한데다, 수령에게 뇌물을 바치면서 약조를 어겼으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20일은커녕 200일은 머물러도 책 잡는 일이 없다.”

“송구하옵니다, 신이 돌아가는대로······.”

“아니, 그걸 탓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차피 지켜지지 않는 약조이니 지금 내 대에 너와 약조를 한들 50년, 100년 뒤에 지켜지겠더냐. 문인(통행증)을 받은 자에 한해서는 체류 기간을 정하지 않겠다.”

이전까지 있었던 게 채찍질이라면 이건 당근이었다.

“단, 세금을 내게 해야겠다. 너희는 모두 상인으로서 삼포에 들어오는 것이니, 농군들에게 매기는 세금처럼 할당 할 수가 없으므로 어찌 매길지 고민을 좀 해봐야겠으나, 체류기간을 정하진 않되 100일을 머무른 자는 백미 2두를 납세케 하고, 200일은 머무르는 자는 4두를 납세케 하는 식으로 하면 어떤가?”

50일에 1두씩이란 소리였다.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겨본 무라모리.

그다지 손해는 아니었다.

아니, 손해 정도가 아니라 그가 삼포에 보내는 섬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성은에 가까웠다.

전하의 말씀처럼 체류기간은 20일이지만, 그걸 지키는 사람은 없다.

수령들에게 뇌물로 바치고, 유지들에게 뇌물로 바쳐 간신히 체류 기간을 연장하는 것이다.

그 뇌물은 천문학적인 수준이었다. 오히려 수령에게 뇌물을 바치면서도 언제 쫓겨날까 노심초사하는 것보단, 조정에 체류 기간을 인정 받는 셈이니 이게 더 나을 터였다.

“신이 어찌 전하의 말씀을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세, 세견선(무역선)은 어찌하올지.”

“누가 들으면 너희들이 세견선을 50척으로 제한하는 약조를 지켰던 것처럼 말하는구나.”

“···”

“세견선 역시 그 수를 제한하진 않겠다. 다만 선박에 대중소의 등급을 매기고, 입항할 때 대선에는 백미 10두를, 중선에는 7두를, 소선에는 3두를 내게 해야겠다.”

이것까지도 결국 따지고 보면 이득이었다.

“알겠사옵니다.”

“세사미두(대마도주에게 내리던 곡식)는 지금이 200석이니, 앞으로도 200석을 내리도록 할 것이고··· 흠. 진성아 또 뭐가 있겠더냐?”

지금까지 병풍처럼 서있던 진성이 융의 부름에 한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생각해보면 대마도는 조선의 신하를 자처하니, 전하의 신민입니다.”

“그렇지.”

“신민 된 자들은 군역과 부역의 의무가 있는데, 대마도에 부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건 너무한 처사라 생각되옵고 다만 군역을 지게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군역을?”

“예. 뭐, 정말로 섬사람들 호구를 모두 파악해서, 남정들을 군적에 등재 시키라는 것은 아니옵고, 일단 신하를 자처하고 있으니 우리 조선에 변란이 날 경우 군사를 얼마간 내어준다 정도면 좋겠습니다.”

“흐음. 그거 괜찮도다. 도주 괜찮겠느냐?”

“어, 얼마를 말씀하시온지······.”

“왜구들이 보통 칼을 잘 쓰니, 인정하긴 싫어도 왜구 한 사람이 우리나라 오합지졸 열 사람 몫을 해낸다. 삼백이면 삼천의 군사를 얻는 효과가 있을 테니 삼백은 어떠한가?”

또 한 번 눈알을 굴리며 주판알을 튕기던 무라모리.

‘어차피 변란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니······.’

셈을 마친 무라모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사송선(조공선)말인데. 이건 제한해야겠다. 네놈이 올해만 9차례 사송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는데, 사송선에 되려 실려보낸 물품들이 그 곱절의 값어치를 할 것이다.”

“···”

“사송선 파견은 연간 5차례로 제한할 터이니 그리 알라. 아, 또 네놈들은 입항할 때 칼을 차고 오는 버릇이 있던데 이 때문에 삼포 주변의 백성들이 불안해 한다 들었다. 도검 착용은 금하겠다.”

“···예.”

“그리고 너는 앞으로 1년에 한번씩 상경하여 숙배하라.”

“1, 1년에 한번씩 말이옵니까?”

“그래야 네놈이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 아닌지 알 것이 아니냐. 네 병이 들거나 사정이 있어서 올라오지 못 한다면 너에게 아들이 있으니, 아들을 보내도 좋다.”

“그리하겠사옵니다.”

“이만하면 내 너의 방자함과 무례를 용서할 수 있겠다. 따르겠느냐?”

“성은이 망극한 일이옵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무라모리에 융은 진성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진성대군 역시 마주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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